소설리스트

마스터 셰프-174화 (174/219)

<-- 174 회: 6-13 -->

방갈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조미정과 다시 만난 지훈은 인근의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민소매 티에 짧은 반바지를 입은 조미정은 풍만한 볼륨감과 함께 시원시원한 각선미를 드러냈는데, 태국인들은 물론이고 웨스턴 남자들까지도 그녀를 정신없이 바라봤다.

"미정 씨, 제일 먼저 어디로 갈까요?"

"빠이 캐넌을 갔다가 중국인 마을과 고산족 마을 그리고 폭포 몇 곳을 둘러보고 싶어요."

"온천은 안 가고요?"

"거긴 내일 오전에 가요."

"오토바이는 여기서도 빌려주는 것 같은데 갑시다."

식당 인근에서 오토바이를 렌트한 지훈은 미정을 태우고 빠이 캐넌을 찾았다.

빠이 캐넌은 빗물에 흙이 쓸려 간 작은 동산을 말했는데, 규모는 작아서 아기자기했지만 침식에 의해서 절벽처럼 깎여 나간 곳이 많아서 충분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특히 동산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그 광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 압권이었다.

"사장님, 어떠세요?"

"기대 이상인데요. 처음에는 규모가 작아서 솔직히 실망했는데 오히려 모든 게 한눈에 들어오니 절로 탄성이 터져 나오는데요."

"여기 온 게 잘한 일 같죠?"

"지금까지는요."

"가요. 다른 곳은 더 좋을 거예요."

지훈이 좋아하는 모습에 덩달아서 기분이 좋아진 미정은 오토바이 뒷좌석을 차지하고는 지훈의 허리를 살포시 감은 채 고개를 그의 등에 기댔다.

오토바이 엔진 소리와 바람소리 때문에 희미하기는 했지만 지훈의 심장박동 소리와 체온을 느낄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그리고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점괘에 나온 것처럼 자신과 지훈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묘한 기대감이 들었다.

"여기가 중국인 마을인가 봐요."

"사람들이 실제로 사는 마을은 아니고 관광지로 조성한 인위적인 마을 같은데요."

"그러게요."

태국의 북부에 자리한 산골에는 중국인들이 개척한 마을이 곳곳에 있는데, 이들은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쫓겨 온 사람들이었다. 즉, 태국 북부에 사는 중국인들은 장개석의 국민당을 지탱했던 국민당군으로, 모택동의 홍군과 싸우다가 여기까지 밀려온 자들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시대가 변한 탓인지 국민당군의 후손들이 중국인 단체 관광객을 상대로 인민해방군의 군복을 팔고 있는 것이 너무도 아이러니했다.

"미정 씨, 20세기 후반까지 인민해방군과 싸우다가 죽어 간, 이 사람들의 선조들이 이 광경을 보면 뭐라고 할까요?"

"이해는 하겠지만 씁쓸해하지 않을까요?"

"그러겠죠. 그런데 이 모습만 봐도 중국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떤 점에서요?"

"결국 사상이 자본에 무너지고 말았잖아요? 그리고 그 말은 그만큼 중국의 경제력과 영향력이 커졌다는 의미이고.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중국에 진출해야죠."

"사장님은 엉뚱한 곳에서 우리 사업과 연관시키네요?"

"내가 엉뚱한가요? 하지만 나는 지금처럼 나날이 영향력을 키우는 중국의 현실을 접할 때면 더 늦기 전에 중국 진출을 결정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장쉬엔이라는 좋은 파트너가 있으니 중국 진출은 성공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야죠. 그리고 고마워요."

"뭐가요?"

"미정 씨가 조 회장님을 협박한 통에 자금을 끌어올 수 있었다면서요?"

"할아버지가 얘기했어요?"

"네."

"내가 절대 얘기하지 말라고 했는데……."

"미정 씨, 반드시 성공해서 은혜를 갚을게요."

"은혜라니요? 저는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어서 투자를 한 거예요. 대신 성공하면 제 몫은 챙길 거예요."

"물론입니다. 미정 씨가 섭섭하지 않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도 더 열심히 일해야겠네요."

"이런! 여행까지 와서 또다시 일 얘기를 하고 말았네요. 제 잘못입니다."

"그건 그만큼 열정이 있다는 뜻이죠. 저는 사장님의 이런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요."

중국인 마을을 둘러보면서 지훈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미정은 자신과 지훈이 더 가까워졌음을 느끼고 빠이에 온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러나 아직은 지훈의 마음을 차지한 것은 아니기에 애교를 부려 가며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행동했다.

"사장님, 잠깐만요."

"왜요?"

"입가에 뭐가 묻었어요. 아마 조금 전에 군것질하면서 그때 묻었나 봐요."

"제가 닦을게요."

"가만히 있어 보세요."

손수건을 꺼내서 지훈의 입가를 깔끔하게 닦아 낸 미정은 파리에 있는 수아에 대해서 물었다.

"그분과 떨어진 시간이 꽤나 오래된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그래서 늘 보고 싶죠."

"그분은 언제 한국으로 돌아오세요?"

"빠르면 2년 후에 돌아올 거예요."

"그분은 요리를 더 배우기 위해서 파리에 남아 있는 건가요?"

"그런 셈이죠."

"제가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그분은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럴 수 있지만 나는 서로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어서 그렇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장님은 그렇다고 해도 그분 마음에 변화가 있을 수도 있잖아요? 특히 외국에 혼자 있다 보면 외로울 때도 많고, 그러다 보면 뜻하지 않은 인연이 생길 수도 있잖아요?"

"수아는 나보다 더 굳건한 믿음을 갖고 있기에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걸요."

"사람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너무 방심하고 있는 것 아니에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인데 그걸 모르겠습니까?"

가온누리에 입사해서 지훈과 함께한 시간이 제법 되었기에 미정도 수아와 지훈의 관계는 상세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수아에 대한 지훈의 마음이 이 정도로 굳건한 줄은 몰랐기에 초조함과 동시에 질투가 느껴졌다. 그리고 지훈의 가슴속에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 너무도 빈약하다는 생각에 괜히 화가 나 계속해서 지훈의 신경을 건드는 얘기를 했다.

하지만 그 어떤 얘기를 해도 지훈의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고, 그럴수록 미정은 크나큰 절망감을 맛보았다.

'아! 나는 정말로 안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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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마을을 나온 지훈은 조미정을 태우고 예정대로 몽족 마을과 전망대 그리고 몇 개의 폭포를 돌았다.

하지만 지훈의 마음이 일편단심임을 확인한 미정은 더 이상 흥이 나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마음이 너무나 아파서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펑펑 울고 싶었기에, 계속해서 시무룩했다.

"미정 씨, 어딘 아픈가요?"

"아니요."

"배고파요?"

"괜찮아요."

"왜 그렇게 힘이 없어요? 아까까지는 안 그랬잖아요?"

"피곤하네요."

"아! 그러면 숙소로 돌아갈까요?"

"그래요."

아까와는 달리 미정의 힘없는 모습이 걱정된 지훈은 그녀가 염려스러워서 이것저것 질문했다.

그러나 염려가 담긴 지훈의 질문을 받을 때마다 미정의 가슴은 더욱 미어졌다.

"미정 씨, 저녁 안 먹을래요?"

"생각 없는데 혼자 다녀오세요."

"파타이라는 볶음 국수를 사 가지고 올까요? 맛있다면서 그것 좋아했잖아요?"

"피곤해서 먼저 잘게요."

"식사는 하고 자요."

"저는 괜찮으니까 혼자 드시고 오세요."

방 안에 들어서기 무섭게 침대에 쓰러진 미정은 자신을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지훈에게 괜찮다는 말을 하고는 이불을 덮어썼다.

의외의 상황에 당황해서 한참을 침대맡에 앉아 있던 지훈은 미정이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몰라서 답답해하다가 먹을거리를 사 오겠다며 나갔다.

"크흐흐~흑!"

훌쩍훌쩍!

방안에 혼자 남은 미정은 그때서야 참아 왔던 눈물을 쏟아 내며 하염없이 울었다.

"몇 년째 자신을 버린 사람이 뭐가 좋다고? 고작 몇 년 먼저 만난 게 무슨 대수라고, 왜 그런 사람을 계속해서 가슴에 품고 있는데?"

빈 허공을 향해서 가슴속의 말을 토해 냈지만 돌아오는 것은 공허함과 더욱 뚜렷해진 상처 그리고 눈물뿐이었다.

"쳇! 날 놓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줄 거야."

자리에 있지도 않은 지훈을 향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은 미정은 축축하게 젖은 베개를 반대로 돌리고는 욕실에 들어가서 세수를 했다.

찬물을 뒤집어써서인지 살짝 부어올랐던 두 눈도 가라앉고 머리도 시원해진 것이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이지훈, 네가 얼마나 잘났기에 날 아프게 해."

다시 한 번 지훈을 향해서 원망의 말을 내뱉은 미정은 방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계속 울 것 같은 생각에 밖으로 나갔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계속 방 안에 있으면 결국에는 자신의 마음을 들킬 것 같았고, 그렇게 되면 지훈과 불편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도망치듯 방갈로를 빠져나갔다.

하지만 막상 갈 곳이 없었다. 게다가 다정하게 걷는 커플과 마주할 때면 억지로 눌러놓은 가슴속의 상처가 다시 따끔거렸다.

'술이나 한잔해야겠다.'

어느새 해가 진 빠이의 다운타운은 차량의 통행이 통제된 가운데 좌우로 노점상이 들어섰고, 많은 행인들이 오가며 북적거리는 것이 마치 축제의 현장 같았다.

그러나 그런 북적거림이 오히려 거북스러운 미정은 더 이상 걷고 싶지 않아서 한적해 보이는 바로 들어갔다.

재즈 음악을 틀어 놓은 바 안에는 몇 개의 테이블이 있기는 했지만 바닥에 거적을 깔아서 앉을 수 있게 해 놓은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한가운데에는 모닥불을 피울 수 있게 아궁이를 만들어 놓은 것도 특이했다.

"안녕하세요. 혼자 오셨나요?"

"저쪽에 앉아도 되나요?"

"그럼요, 앉으세요."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직원의 안내로 거적이 깔린 곳에 주저앉은 미정은 맥주를 홀짝였고, 그러는 사이 몇 명의 웨스턴이 들어와서 주위에 앉았다.

"안녕, 혼자 왔니?"

"지금은 그런 셈이야."

"누가 오기로 했어?"

"그건 아냐."

"무슨 안 좋은 일 있어? 얼굴이 어두워 보여."

"오늘은 아주 슬픈 날이야."

"저런! 한잔 마시고 잊어버려."

처음 미정에게 말을 건 말총머리의 남자는 이탈리아에서 온 바지오였다.

빠이에서 세 달을 머물고 있다는 바지오는 이곳의 터줏대감이었는지 바의 직원들을 다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들어오는 모든 손님들과 인사를 했고, 그들에게 미정을 소개시켰다. 그러다 보니 미정의 주위에는 어느새 여덟 명의 웨스턴과 두 명의 태국 남자가 몰려 있었다.

"미정, 마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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