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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 왜 그랬어요?"
"뭐가요?"
"그때 일을 왜 말하지 못하게 했냐고요?"
"저분들이 어르신을 만나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당연히 돈을 구하러 왔겠죠."
"맞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일을 미정 씨가 얘기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러니까 당연히 얘기해야죠."
"아까 그분들 눈빛을 봤습니까?"
"봤죠. 아주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것이 쌤통이던데요."
"그랬죠. 그런데 저는 그분들의 눈빛에서 깊은 체념과 낙담의 빛도 읽었습니다."
"그게 어때서요?"
지훈도 문형석 부부를 처음 봤을 때는 미정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의 일을 거론하며 면박을 주려고 했다.
하지만 낙담과 체념 그리고 안타까움이 뒤죽박죽된 부부의 눈빛을 보는 순간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건 다른 시간대에서 지훈의 눈빛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미각을 잃은 상태에서 그 사실을 숨기고 발버둥 치다가 결국 셰프의 길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화장실 세면대를 붙잡고 펑펑 울었던 자신의 눈빛이 꼭 그랬었다.
그들 부부의 눈빛에서 그때의 자신을 발견한 순간,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졌다.
"저도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와 미정 씨가 그때의 일을 얘기하면 저분들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아픔을 안겨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런 사람들은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리죠."
"아까의 그 눈빛이라면 그분들도 이미 많은 것을 느끼고 뉘우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공개된 동영상으로 큰 곤혹을 치르고 있는 만큼 충분히 당한 것 아닐까요?"
"뭐 그렇게까지 얘기하시니 할 말은 없네요. 알았어요. 그때의 일은 뻥긋도 안 할게요. 됐죠?"
"고맙습니다."
지훈이 미정의 입단속을 하고 있을 무렵 의아함이 담긴 조진산의 시선과 마주한 문형석은 차마 당시의 일을 얘기하지 못하고 사죄를 하고 있었다.
"제가 손녀님과 그 일행분에게 큰 도움을 받았음에도 오히려 실수와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도움을 받았는데도 실수와 무례를 저질렀다고?"
"죄송합니다. 회장님의 손녀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으니 이제는 염치가 없어서라도 일어나야겠습니다."
"여……여보, 여기서 그냥 가면 회사는 어떡해요?"
"여보, 미안하오. 나는 요 근래 일을 떠올리면 내가 천벌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소."
"하지만 그래도 회사는 살려야지요."
"회사를 살리기 위한 노력은 계속할 거요. 아무렴 내가 이대로 주저앉을 것 같소? 그리고 설령 주저앉는다 해도 반드시 다시 일으켜 세우겠소. 생각해 보니 그동안은 우리가 힘들었던 과거를 까맣게 잊고 악귀처럼 살았던 것 같소."
"아~!"
"갑시다. 회장님, 바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문 사장, 그냥 가겠다는 것이오?"
"아까 회장님의 손녀, 그 일행과 마주한 순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걸 깨달은 순간 제가 그동안 얼마나 이기적으로 행동했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일을 자신이 숨긴다고 해도 조진산의 손녀가 얘기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때의 일을 조진산이 알게 되면 그가 자금을 빌려줄 리가 없었다. 즉, 어떤 수를 쓴다고 해도 조진산에게 자금을 빌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옥죄고 있던 욕심과 미련에서 벗어났다.
"회장님, 건강하십시오."
"회장님, 가 보겠습니다."
욕심과 미련을 훨훨 털고 방을 빠져나온 문형석 부부는 거실에 있던 지훈과 미정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너무 늦었지만 사죄를 하고 싶군요."
"준호의 일이라면 이미 잊어버렸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아닙니다. 큰 도움을 받았음에도 고마워하기는커녕 그런 짓을 저지른 제가 나쁜 놈입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그때는 정말 고마웠습니다. 큰 신세를 졌습니다."
"그때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어요?"
"맞습니다. 죄송합니다."
"아시는 것 같으니 더 이상의 얘기는 안 하죠.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그때의 일은 얘기 안 하기로 했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
그때의 일을 사과하며 머리를 조아리는 문형석 부부의 모습에서 진정성이 묻어 나오자 내심 못마땅해하던 미정도 남아 있던 묵은 감정을 털고 그들 부부의 사과를 받아 줬다. 그리고 그들 부부가 걱정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그때의 일은 언급 안 하겠다는 얘기를 했다.
"끝까지 마음을 써 주어서 정말 고맙습니다. 하지만 굳이 숨기실 필요는 없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많이 늦은 감이 있지만 오늘에서야 우리 부부가 뭘 잊고 살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 언제고 인연이 닿는다면 또 뵙겠습니다."
"언제 시간 나시거든 가온누리로 오십시오. 제가 두 분에게 식사를 대접하겠습니다."
"그래요. 가온누리로 오세요. 우리 사장님의 요리 실력은 세계 최고예요."
이전과는 너무도 다른 문형석 부부의 모습에 지훈은 그 두 사람을 가온누리로 초대했다. 그런데 미정을 통해서 지훈이 가온누리의 사장임을 알게 된 문형석은 더더욱 미안해하며 아무 말 없이 현관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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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년보다 빨리 시작된 여름은 10월 초순까지 이어지더니 온 산이 물들기 시작한 10월 하순이 되어서야 기온이 떨어졌다.
많은 공을 들이며 거의 세 달 가까이 중국과 태국 진출을 준비한 지훈은 중국과 태국에 각각 여덟 명의 셰프와 두 명의 직원을 선발대로 파견하기로 했다.
남들보다 한 달 빨리 중국과 태국으로 넘어갈 선발대는 그곳에서 언어 연수를 계속하면서 현지 셰프들에게 한식의 기본을 비롯해서 가온누리의 요리를 가르칠 예정이었다.
아울러 서비스 부분에서 선발된 두 명의 직원들도 서비스와 관련한 교육을 시키기로 했다.
그런데 태국으로 가는 선발대에는 하마가 끼어 있었고 중국으로 가는 선발대에는 유준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준상아, 잘해라."
"형님도 잘하세요."
"난 걱정 마라."
"형님, 큰소리를 치는 것이 태국어를 많이 배우셨나 보네요?"
"태국어가 쉽기는 쉬운지 나 같은 돌머리도 배워지더라."
"다행이네요. 참! 틈나는 대로 현지의 음식을 많이 드세요. 그리고 현지의 한국 식당도 많이 가 보시고요."
"그래야지."
7월에 현지답사를 갔던 지훈은 우리의 맛을 지키되 현지의 맛을 적극 수용해야만 가온누리의 해외 진출이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을 자주했다. 그래서 현지 셰프들에 대한 교육 외에도 태국인과 중국인의 입맛에 맞는 맛을 찾으라는 숙제를 선발대에게 안겨 줬다.
"형님, 목포는 언제 내려가세요?"
"내일 밤에 내려갔다가 이틀을 지내고 올라올 거야."
"그러면 오늘이 마지막 밤이네요."
"아무래도 한동안은 만나기가 어렵겠지."
"일도 끝났는데 한잔해야죠?"
"해야지. 오늘은 내가 쏜다."
"또 가게에서 마시자고요?"
"여기보다 안주가 더 맛있는 술집 있으면 거기 가고. 그리고 내실에서 마시면 바로 잘 수 있어서 좋잖아."
"쳇! 알았어요. 그냥 여기서 마시죠. 하지만 태국에 가면 그때는 제대로 쏴야 합니다."
"태국에 오려고?"
"휴가 때 태국이나 가려고요. 어차피 한국 와 봐야 갈 곳도 없는데 형님도 보고, 간 김에 태국 요리도 맛보고 좋잖아요."
"좋아! 태국에 오면 그때는 내가 제대로 쏜다."
"그때 가서 다른 소리하면 안 됩니다."
"알았어."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가온누리가 점점 커지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중국과 태국으로 뿔뿔이 흩어지면 지금처럼 함께할 수가 없는 만큼 아쉬움이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하마나 준상처럼 외국으로 떠나는 직원들은 떠나기에 앞서 그동안 정을 나눠 왔던 동료들과 이별의 아쉬움을 달래며 술잔을 기울였다.
잠시 후, 소주 몇 병과 안주를 챙겨서 내실로 올라간 하마와 준상은 둘만의 조촐한 술자리를 갖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틀어 놓은 TV에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탤런트 이영화를 내세운 두레의 광고가 나온 것은 그때였다.
"형님, 두레의 광고가 계속 나오네요."
"그러게. 매장도 벌써 여러 개 오픈했다고 하더라."
"하나는 우리 매장과 동일한 상권에 있다면서요?"
"그렇다고 하더라. 하지만 아무리 광고를 요란하게 해도 우리에게는 안 될 거야. 일단 맛이 떨어지잖아?"
"그건 그렇지만 이영화 씨가 모델로 나오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하던데요."
"그래 봐야 그것들이 우리 맛을 어떻게 따라오겠어?"
"맛은 우리보다 못하겠지만 가격도 우리보다 저렴하고 뷔페 코너를 만들어서 반응도 좋다고 하더라고요."
"뷔페 코너가 있다고?"
"네. 저도 인터넷에서 봤는데 후식까지 포함해서 대략 서른다섯 가지의 요리가 뷔페로 제공된다고 하더라고요."
"메인 메뉴는 따로 있고?"
"당연하죠. 게다가 메인 메뉴의 종류도 우리보다 훨씬 더 다양하다고 하더라고요."
"흥! 뷔페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많은 종류의 요리를 매일 하려면 정성을 쏟기가 어려울걸."
"그렇기는 하겠지만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하다 보니까 거길 가 본 고객들의 만족도는 높은 것 같더라고요."
TJ그룹의 모태는 식품이다. 막말로 가장 먼저 설립된 TJ식품이 크게 성공할 수 있었기에 TJ는 오늘날의 그룹을 일굴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이재철은 TJ식품을 더욱 크게 성공시키면 이재만이 차지하고 있는 후계자의 자리를 되찾아올 수도 있다 여기고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울러 참담한 실패를 맛봤던 뚜랑주르에서의 교훈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한식당임에도 유명한 외국계 프랜차이즈처럼 뷔페 코너를 운영해 구색까지 갖춘 상태에서 대장금의 이영화를 내세워 바람몰이를 하고 있었다.
"거기 가격이 얼만데?"
"성인을 기준으로 뷔페까지 이용하면 대략 2만 7천 원 정도라고 하더라고요."
"2만 7천 원이면 우리하고 별 차이 없네."
가온누리는 일인당 대략 3만 5천 원 정도 나오는 만큼 두레와 비교하면 그리 큰 차이는 아니었기에 하마는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뷔페가 있어서 배불리 먹을 수가 있죠."
"하지만 식당의 기본은 맛이야."
"아! 그리고 거기는 회원에 가입하면 20퍼센트 가격 할인을 받고 통신사와 카드사의 포인트도 사용할 수 있어요. 그래서 젊은 층은 대략 2만 원에 이용한다고 하더라고요."
"극장처럼 포인트를 사용할 수 있다고? 그건 좋다."
2만 7천 원 일 때는 별 차이 없었지만 2만 원이라고 하는 순간 가격 차이가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정도의 가격이면 대학생을 비롯한 젊은 층도 큰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 두레가 지방에도 여러 곳에 오픈하네요."
"대기업이라 자금은 두둑하니까 마음만 먹으면 금방 확장할 수 있겠지."
"엥! 두레가 중국에도 진출하는 것 같은데요?"
"그러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동안 TV에서는 두레의 광고가 또 나왔다. 그런데 이번에 나온 광고는 아까와는 내용이 달라서 곧 오픈하게 되는 지방 매장과 중국 매장을 홍보하는 내용이 중심이었다.
"같은 한식을 표방하는 이상 중국에서는 저것들하고 피 터지게 싸워야 할 것 같은데요?"
"아무리 대기업이라지만 이제 막 생겨난 업체가 해외 진출을 하다니 너무 성급한 것 아닐까?"
"자기들도 무슨 계산이 있으니까 가는 거겠죠."
"아무튼 중국 가면 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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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제법 쌀쌀해졌나 싶더니 어느새 12월 중순이 되었다.
준비가 먼저 끝난 태국에 열개의 매장을 오픈한 지훈은 베북경과 상해 매장의 오픈에 맞춰서 중국으로 넘어갔다.
같은 시각, 이틀 전에 중국에 입국한 이재철은 유상혁과 전철민을 만나고 있었다.
"두 사람, 고생이 많소."
"노력한 만큼 성과가 있어서 기쁘게 일하고 있습니다."
"성과가 있다면 이번 일도 잘되었다는 뜻이오?"
"그렇습니다. 광저우와 곤명의 번화가에 괜찮은 자리를 물색해서 계약을 끝냈습니다."
"이번에도 입지 조건은 괜찮소?"
"물론입니다. 두 곳 모두 핵심 상권에 자리하고 있어서 고객들의 접근성이 아주 용이합니다."
"전무님, 광저우 같은 경우는 중공업 단지가 몰려 있어서 소득 수준이 괜찮고 인구도 7백만에 달하는 만큼 매장을 몇 개 더 오픈해도 괜찮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