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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 너는 무슨 헛소리를 하냐?"
"드라마 보니까 옛날에는 나라에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그 전에 이상기후가 왔다고 하잖아요?"
"지랄하고 있네. 헛소리 말고 눈이나 치워."
한겨울도 아닌데 폭설이 쏟아지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말하기 좋아하는 준호가 장난삼아서 뭐라고 들먹였는데, 그 얘기를 듣던 지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때가 언제였더라?'
"지훈아, 왜 그래?"
"엉!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얼굴 표정이 왜 어두워?"
"그냥, 별것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괜찮다면서 동석의 걱정을 잠재운 지훈은 아무도 모르게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그 사고가 난 것이 올해였을 거야.'
지훈은 다른 시간대에서 미래를 살다 왔다. 그런 그의 기억 속에는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대형 참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4월인 것 같은데 정확히 언제였지?'
온 국민을 비탄에 빠지게 하고 우리나라를 충격에 잠기게 만든 대형 참사는 선박 침몰 사고였다.
사고가 났던 초반에는 전원 구조로 알려졌는데, 그건 명백한 오보였고 엄청난 비극의 시작이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둘씩 밝혀진 진실은 더욱 처참해서 초기 대응만 잘했어도 모든 사람이 충분히 구조될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승객을 내팽개치고 자신들의 목숨만 챙긴 비겁한 선원들과 늦장 대응에 구조를 적극적으로 안 한 해경들로 인해서 대형 참사로 이어지면서 수많은 아까운 생명들이 죽고 말았다.
'어떻게든 그 비극을 막아야 해.'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이기에 아무도 모르고 있지만 미래를 살다 온 지훈은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 간 그때의 사고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서 온 나라가 충격과 슬픔에 빠진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참사를 막겠다는 결심을 했다.
하지만 너무도 오래전 일이라 정확한 날짜가 기억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그때의 날짜를 정확히 알아낼 수 있을까?'
당시의 아픔과 충격을 간직하고 있는 지훈은 참사를 막기 위해서라도 정확한 날짜를 알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오래전의 일을 온전하게 기억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가만! 그때 선박에 탔던 고등학생들의 학교를 찾아가면 알 수 있겠구나.'
인천과 제주를 오가는 선박에는 때마침 수학여행을 가던 경기도 모 고등학교의 2학년 학생들이 단체 탑승을 했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 누구보다 억울한 희생을 당한 이들이 그들이었다.
단언하건대 그 꽃다운 아이들이 미처 피어나지 못하고 차디찬 바다에 빠지는 것을 막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그래서 지훈은 날이 풀리는 대로 문제의 학교를 찾겠다고 마음먹었다.
*2. 북조선에서 왔습네다!
몇 분 간격으로 비행기가 계속 뜨고 내리는 이곳은 오래전부터 동남아 최대의 교통 허브로 자리 잡은 싱가포르의 창이 국제공항이다.
지금 이곳에는 꽃무늬가 화려하게 프린트된 셔츠를 입은 박철웅이 선글라스를 착용한 채 입국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아버지."
"현식아."
"아버지, 현식이가 뭐예요? 앞으로는 에드워드라고 부르시라고 했잖아요."
"버릇이 되어서 잘 안 고쳐지는구나. 그나저나 여기는 후덥지근한 것이 가만히만 있어도 숨이 꽉꽉 막히는 것 같구나."
"한국은 폭설이 내렸다면서요?"
"말도 마라. 2월 말에 무슨 눈이 그리도 많이 내리는지, 온 도로가 꽁꽁 얼어붙었다."
"여기 계시면 눈을 보기가 어려울 텐데 실컷 보고 오시지 그랬어요?"
"올해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려서 몸서리나게 많이 봤다. 그나저나 내 영주권 문제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냐?"
"150만 불만 예치를 하면 어렵지 않게 영주권이 나오니까 아버지도 어렵지 않게 영주권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세무 당국의 조사를 받은 박철웅은 거의 5백억에 가까운 추징금을 납부해야 했다.
그러나 그것과 무관하게 애초부터 제삼자 명의로 빼돌린 재산도 상당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세간에 알려진 박철웅의 재산은 실제 보유한 재산의 3분의 1밖에 안 되었다.
하지만 추징금을 납부하기가 죽기보다 싫었던 박철웅은 현물 납부 방법으로 시간을 벌면서 법의 허점을 이용해 자신의 명의로 된 재산을 국외로 빼돌렸다.
물론 비밀스럽게 국외 탈출을 준비하다 보니 미처 처분하지 못한 재산도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피해는 추징금을 생각하면 상대적으로 훨씬 적었기에 가뿐하게 털어 낼 수 있었다.
"네 엄마는 어디 갔기에 이 자리에 없는 것이냐?"
"승희와 쇼핑하러 갔어요."
"그놈의 쇼핑 버릇은 여기 와서도 여전한가 보구나."
"이곳의 부유층하고 어울리려면 어느 정도의 치장은 필요한 법이라, 제가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승희는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고 그러더냐? 지금도 여전히 한국으로 들어가겠다는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냐?"
"제가 알아듣게 얘기했어요. 그리고 제가 미국에서 사업을 하겠다고 하니까 자기도 거들겠다면서 좋아하더라고요."
박현식에게는 세 살 어린 여동생이 있는데, 집안 내력인지 어릴 적부터 꼴통 짓을 많이 했다. 그래서 박승희 때문에 골치를 앓던 박철웅은 그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무섭게 미국으로 보냈는데, 사고를 치고 다니는 것은 여전했다.
하지만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점이 있었으니 오랜 미국 생활로 영어는 능숙하다는 것이다.
"그 녀석이 일을 거들겠다고? 그냥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있다가 시집이나 가라고 해."
"녀석도 다 컸는데 제 앞가림은 하겠죠. 그나저나 세종시와 지방의 부동산은 어떻게 하셨어요?"
"그것들은 변호사와 상의해서 새로 만든 법인 명의로 전환했으니 걱정할 것 없다."
"세무 당국에서 눈치채면 골치 아파지는데, 세탁은 철저히 하셨겠죠?"
"인석아, 나라고 그걸 모르겠냐?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하느라 한국을 뜨는 게 이렇게 늦어진 것 아니냐?"
그 많은 재산을 단번에 모두 정리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박철웅은 타인의 명의로 관리한 통에 세무 당국의 조사를 피할 수 있었던 재산은 어느 정도 남겨 두고 왔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에 그것들을 철저하게 세탁해서 새로 만든 법인 명의로 전환시켰고, 이제는 세무 당국에서 그 사실을 알아차린다고 해도 어찌할 방법이 없게 만들었다.
"잘하셨습니다. 가시죠."
"그러자꾸나. 그런데 영주권을 받으면 그때는 계속 싱가포르에서 지낼 수 있는 것이냐?"
"그건 아니고, 3년에 한 번씩 영주권을 갱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때는 출국을 해야 합니다."
"출국을 해야 한다고? 그러면 그러다가 한국 정부에 잡히는 것 아니냐?"
"제3국을 다녀와도 되는 만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3년 이내에 시민권을 획득할 생각입니다."
"시민권을 획득하면 국적이 싱가포르가 되는 이상, 그때는 안심해도 되겠구나."
"물론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싱가포르 국적을 얻게 되면 한국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걸리면 문제가 생길 텐데?"
"그러니 이름을 바꿔야지요. 그리고 한국의 출입국 관리소도 그 정도까지는 확인을 못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두 번 다시 한국을 가고 싶지 않다. 하지만 안심하고 미국을 다니려면 시민권을 최대한 빨리 따는 게 좋겠구나."
"싱가포르에서는 돈만 있으면 합법적으로 시민권을 딸 수 있는 만큼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민권을 획득해서 싱가포르 국적을 얻게 되면 그때는 한국 정부가 용케 박철웅을 찾아낸다고 해도 어찌할 방법이 없다.
사실 박철웅 부자가 많고 많은 나라 중에서 싱가포르를 선택한 이유도 범죄인 인도 협정이 체결되지 않은 점과 국적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주차장에 당도한 박철웅은 박현식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앞으로 자신이 살게 될 대저택으로 향했다.
"참, 현식아, 미국에서는 어떤 사업을 할 생각이냐?"
"그때 말씀드렸잖습니까?"
"또 외식업을 하겠다는 거냐?"
"배운 것이 그것인데 외식업을 해야죠."
"힘들게 그러지 말고 차분히 쉬면서 다른 공부를 해 보는 것은 어떠냐?"
"아버지, 이 나이에 무슨 공부입니까?"
"네 나이가 어때서? 그리고 그게 싫다면 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워라."
"아버지, 저는 따분해서라도 싱가포르에서는 못 삽니다."
한국의 부동산을 매각한 박철웅은 이곳의 콘도미니엄을 여러 동 구입해서 충분한 호구책을 마련했다. 그 때문에 박현식은 일을 배우라는 말을 싱가포르에서 함께 지내자는 말로 받아들였다.
"누가 이곳에서 계속 일을 하라고 했느냐? 궁극적으로는 미국으로 옮겨갈 텐데, 그곳에서 부동산 일을 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
"아버지와는 달리 저는 부동산 관리가 적성에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미국이야말로 한식 사업을 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입니다."
박철웅도 이 작은 싱가포르에 뼈를 묻을 생각은 없어서 싱가포르 국적을 획득하면 그때는 미국으로 옮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시금 외식업을 하겠다는 박현식의 결심은 너무도 확고했다.
"미국이 최적의 장소라니 난 이해가 안 가는구나."
"한식에 대한 관심이 치솟은 것은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미국 시장을 선점할 기회입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 외에도 실력 있는 요리사가 있어야 할 것 아니냐?"
"이미 몇 명을 구했습니다."
"혹시 장철우를 얘기하는 것이냐? 그자라면 내가 싫다."
"저도 그자가 마음에 안 듭니다. 하지만 그자만큼 미국 외식업을 잘 아는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비겁한 자와 다시 손을 잡겠다는 것이냐?"
"한동안은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그자를 끌어들여야만 파밀시에테에서 근무했던 많은 미국인 조리사들을 다시 불러 모을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한식을 만들지 못하잖느냐?"
"그래도 몇 년간 한국에서 지내며 보고 배운 것이 있는 만큼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담에서 일했던 몇몇 셰프도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TJ호텔과 소송에 휘말리면서 박현식과 장철우는 서로 얼굴을 붉히며 헤어졌다. 그러나 고담의 노하우가 아까운 데다 미국 시장을 선점하고 싶은 욕심에 박현식은 장철우와 다시 연락을 했고 함께하겠다는 대답을 받았다. 그래서 그 부분을 역설하며 박철웅을 설득했다.
요리 대회가 열리는 3월이 되었다.
대회 때문에 평소와는 달리 일찌감치 출발한 지훈은 화요일 저녁에 베이징에 도착했다.
같은 시각, 매장 안의 VIP 룸에는 림용순이 몇몇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었다.
"동무들, 가온누리의 맛을 직접 보니 어드래?"
"제법 괜찮은 것 같습네다."
"상차림이 오묘한 것이 제법 멋들어지게 보입네다."
"전체적으로 요리의 간이 잘된 것 같습네다."
"기래서 대회에서 이긴다는 소리야, 못 이긴다는 소리야?"
"이 정도라면 해볼 만합네다."
"김형직 동무래,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먼? 남반부 아새끼에게 우리래 질 것 같아? 내래 분명히 말하지만 대회 1위는 무조건 우리 것이야."
"고경철 동무, 내 말은 고것이 아닙네다."
"닥치라우! 비서 동지께서 친히 우리를 여기까지 데리고 오셨을 때는 일격필살의 의지로 반드시 승리하라는 뜻인 거이야. 고것을 리해하지 못해서야 어찌 공화국의 조리 영웅이라 할 수 있갔서?"
"시정하겠습네다."
"내래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총 대신 식칼을 잡고 싸우는 위대한 인민 해방 전사임을 절대 잊지 말라우, 알간?"
"내래 당의 위대한 영도와 혁명적 의지를 절대 잊지 않고 있습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