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흑마법사-47화 (47/166)

# 007. 제국에 드리우는 먹구름

시간이 한 3분 쯤 흘렀을까. 세실이 꽃무늬가 화사하게 그려진 다섯의 찻잔에 녹색빛의 물을 담아, 받침을 대고 가져왔다. 멀리서 걸어오는 데도 강렬하게 느껴지는 향기로 보아, 특등급의 검증을 받은 티르인 듯 했다.

“나으리, 티르를 가져 왔습니다.”

“청년들 앞에 먼저 네 잔씩 놓도록 하고, 내 앞에 놓도록 해. 그리고 물러가도 좋다.”

세실은 테스타노가 시키는 대로 찻잔을 순서대로 놓고는 방금전과 마찬가지로 돌아나갔다. 세실이 나가고, 안이 조용해지자 테스타노가 손으로 차를 마시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자, 티르 한 잔씩 하도록 하지.”

가장 먼저 티르를 들이킨 건, 패커스였다. 패커스는 때마침 갈증이 났었던 모양인지, 뜨거운 티르를 아무렇지도 않게 꿀꺽 삼켰다.

이어서 카트라도 티르를 마셨고, 아리온도 들이켰다. 아리온이라면 이 상황을 의심해 볼만 했지만, 티르까지 의심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패커스와 카트라는 마시드 산에서의 일과 테스타노의 관련성을 의심하지 않는 듯, 티르를 마시길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샤크론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 잔을 들지 않았다.

‘이게 단순한 티르일까? 만약 종속충의 활동성을 증가시키는 어떠한 약물이 포함되어 있다면? 이걸 마셨을 때, 종속충에 감염된 사람들만 반응을 보이는데, 우리는 그렇지 않다면?’

샤크론은 테스타노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아니, 순수한 그의 배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있음에도 이렇게 태연한 것은 테스타노가 그만큼 만만치 않은 사람임을 의미하는 게 분명하다.

상인들이 물건을 팔기 위해 온갖 선전과 함께 장점을 부각시켜 제품의 단점을 숨기는 것처럼, 테스타노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샤크론이 찻잔을 들고는 입에다 가져다 댔다. 그와 동시에 눈을 감고 간지러운 듯한 표정을 짓다가, 기침을 크게 하며 그 반동으로 찻잔을 엎어버렸다.

“에, 엣취! 아앗, 죄송합니다. 가, 감기가 든 것 같아… 죄송합니다.”

티르를 마시려던 샤크론이 기침과 함께 찻잔을 엎자, 테스타노가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의 속마음까지 짐작해볼 수는 없었지만, 이 상황 자체를 황당해 하는 듯 했다.

“괜찮아. 기사가 감기라니… 그 자질이 의심스럽군. 하하하. 에르치오 파네스는 평생 병 한번 걸려보지 않았다는 일화로 유명하지.”

테스타노가 손을 이리저리 저으며 괜찮다는 표시를 했다. 샤크론은 그의 눈빛에서 무언가 아쉬워하는 표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분명 티르 속에는 무엇인가가 들어있다. 분명하다.

“죄송합니다.”

“괜찮아. 그나저나 오랜만에 나의 별실에 젊은 피들이 왔으니 궁금했던 사실들을 물어봐야 겠군. 괜찮겠지?”

“물론입니다, 대공작 각하.”

패커스가 고개를 조아렸다.

“먼저 패커스에게 질문하지. 자네는 제국력 200년에 있었던 흑마법사 토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흑마법사 토벌. 카다르 제국의 크나큰 성과이자, 지금의 테스타노를 있게 만들었다는 역사적인 사건. 더불어 그를 흑마법사 타도의 선구자, 민중의 구원자로 만든 사건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패커스는 자신 있는 표정으로 답했다.

“제국의 옳은 결정이었으며, 대공작 각하의 혜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흑마법사는 제국 건국 이래로 반 사회적인 행동을 벌이며 치안과 질서를 어지럽혀 왔습니다. 그런 그들을 없애는 데 투입 된 군인과 기사들의 피는 값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좋아. 그렇다면 카트라에게 묻지. 자네는 흑마법사에 대해 어떻게 정의하고 있나?”

“저주받은 존재. 어둠의 힘을 끌어들여 싸우는 비열함의 인격체.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존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샤크론은 테스타노의 마음이 뜨끔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테스타노는 전혀 표정의 변화 없이, 되려 웃음까지 지으며 답해주었다.

“그렇지. 흑마법사들은 죽어 마땅한 존재들이야. 그들은 세상의 악을 좀 먹고 사는 존재니까.”

테스타노의 말은 의외였다. 아니나 다를까, 아리온과 샤크론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반응은 똑같았다. 눈 뜨고 거짓말을 저렇게 할 수 있는 것일까?

자신이 테스타노였다면 카트라 같은 기사 하나를 처리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좋아, 그렇다면 이번에는 샤크론에게 묻지. 흑마법사 연합을 이끌었던 맹주 두 사람에 대해 잘 알지?”

‘아!’

순간 머리를 스쳐가는 두 사람의 얼굴, 어머니 카렌과 아버지 메르헨의 모습이 떠올랐다. 테스타노에 의해 목숨을 잃어야만 했던 두 분이었다.

“예, 압니다. 기록상으로도 남아있는 이름이 아닙니까?”

샤크론은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여기서 감정에 치우쳐 답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테스타노에게 자신은 일개 기사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지. 저주받은 오르네스 가문의 자식이 맹주였지. 아, 내가 물어볼 논점은 그들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이야.”

샤크론은 관점을 자신의 위치에서 테스타노의 위치로 바꾸었다. 이왕 자신의 진심을 숨길 거라면, 철저하게 테스타노의 입장이 되어주는 게 나았다.

점점 쌓여가는 증오와 원망은 언젠가 갚아주면 된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샤크론은 생각했다.

“제국에 반하는 존재는 사라져야 마땅합니다. 대공작 각하께서 내리신 결정은 옳은 것이었고, 그들의 죽음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래? 아리온도 그러한가?”

아리온 역시 샤크론과 비슷한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런지, 대답도 비슷했다.

“제국에 위협이 된다면, 사라져야 함이 마땅하지요.”

“하하하. 모두들 생각이 비슷하군. 잡담은 이정도로만 할까? 이걸로 네 사람의 평가는 끝이 난 것 같은데. 통보는 내가 나중에 따로 하도록 하지. 아마 근위검사들이 와서 인도를 할 거야. 그러면 그들을 따라서 황성으로 오면 돼.”

“예, 대공작 각하.”

“수고들 많았네. 돌아가도 좋아.”

“그럼, 대공작 각하께 인사를 드리고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네 사람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기사의 의식을 취하고는 일어섰다. 그러자 테스타노가 더할나위 없이 온화한 표정으로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래. 다음에 폐하께서 하문하실 때 지장 없도록, 자신의 진로를 정하도록 하게.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미리 조처해둘 테니.”

“그럼….”

인사를 올린 네 사람은 왔던 길을 되돌아 별실 밖으로 나섰다.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들어오기 전에 보았던 라칸은 그 때의 자세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안녕히 가십시오.”

별실을 찾아왔던 샤크론 일행이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별실에는 또 다른 손님들이 찾아왔다. 경비를 서고 있는 라칸이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설 정도의 힘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모두 다 하나같이 검은 로브의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다소 온화한 분위기의 테스타노와 다르게 그들의 표정에는 냉소만이 가득했다.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고, 어느새 열 명이 되었다. 제각각 이질적인 어둠의 기운을 뿜어내면서도 공통의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모두 테스타노와 관련한 인물들인 듯 했다.

“교단의 이름으로 뭉친 형제들이여, 반갑다.”

열 명이 모이기로 한 사람의 전부인지, 다섯이 양쪽으로 늘어서 자신만의 자리에 정렬하자 테스타노가 말을 꺼냈다. 샤크론 일행과 나누었던 대화와는 다르게, 서두는 ‘교단’의 언급으로 진행되었다.

“어둠의 아들들(Sons of Darkness)이 아버님을 뵈옵니다. 교단의 이름으로 모든 것은 하나가 될 지어다.”

열 명의 사내들이 양손을 45도의 각도로 치켜들고는 외쳤다. 일종의 의식인 것처럼, 그들은 손을 든 상태로 약 5초간 서서 예의를 표했다.

“반갑다. 오늘 이렇게 너희들을 부른 건, 그 동안 고생해왔던 너희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또 다른 임무를 부여하기 위해서다.”

“말씀만 하십시오. 교단의 이름으로 모든 것은 하나가 될 지어다.”

역시 똑같은 의식이 반복되었다.

“너희들 덕분에 나의 계획은 조금씩 성공을 향해 다가서고 있다. 특히 나를 향한 교단의 사랑은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고, 덕분에 나는 교단의 힘으로 많은 일들을 벌이고 있다. 게다가 점점 커져가는 교단의 교세가 난 너무 행복하기만 하다.”

“아버님이 계시기에 교단은 쓰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들은 아버님을 향해 영원한 신념으로 성전에 참여할 것을 다짐합니다. 교단의 이름으로 모든 것은 하나가 될 지어다.”

“고맙다. 곧 너희들에게 나의 힘으로 많은 것을 부여할 것이다. 나는 받은 만큼 돌려줄 것이며, 교단의 신도들에게 영원한 행복을 선사할 것이다. 얼마 남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성공은 눈앞으로 다가온다!”

“와아아아!”

“너희들에게 내릴 임무는 바로 이것이다.”

말이 끝남과 함께, 테스타노가 마침 뒤에 놓여져 있던 거대한 두루마리의 매듭을 풀었다. 그러자 휘리릭 하는 소리와 함께 두루마리가 풀리며, 카다르 제국의 전체지도가 드러났다.

“무엇입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라. 너희들이 그토록 증오하는 흑마법사 연합의 녀석들이 이곳에 다시금 모여들고 있으니까. 이번에 확실하게 교단의 힘을 보여주자. 물론 맛보기 정도가 되겠지만 말이지.”

테스타노의 두 눈이 강렬하게 빛났다.

Chapter 2

“테스타노의 횡포를 이렇게 두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만약을 위해서 ‘저주받은 자들’과 손을 잡아 온 것도 지금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까? 지금이 기회란 말입니다!”

테스타노의 별실에서 회의가 진행되고 있을 무렵, 흑마법사 연합 맹주가 살았던 베토스에서 120km 남짓, 남서쪽으로 떨어진 도시 ‘파고라’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봉기하자며 외치고 있는 이 사람. 로슈 다음의 이인자로 불렸던, 원로회의의 회원 페트라스였다. 그는 카다르 기사단 소속의 기사 300 여명을 직속으로 두고 있을 만큼, 막강한 세력을 보유한 귀족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 구속력은 작용하고 있어, 직위를 모두 내어놓고 파고라에 내려 와있지만, 자신이 명령만 내리면 기사들이 일제히 움직일 터였다.

“얼마 전, 모든 전력이 집계되었습니다. 현재 ‘반 테스타노 연합’에 가담한 귀족가문 열 다섯의 총 전력입니다. 먼저 카다르 기사단의 단원 75%가 그들의 직속이며, 기타 기사단의 경우에도 30% 이상의 수가 직속입니다.”

“오오! 그러면 그렇지….”

“만약 우리가 봉기하게 될 경우, 동원할 수 있는 총 전력은 중급 엑스퍼트 이상의 기사 2004명, 3서클 이상 5서클 이하의 마법사가 247명입니다. 반면 이렇게 될 경우, 테스타노는 자신의 지지기반이라 할 수 있는 페르네스 기사단의 기사 300명 정도만 지휘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마법사단은 아직 테스타노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 없을겁니다. 이미 우리 연합 소속의 수뇌들이 마법사단의 지도부들에게 손을 써 놓았습니다.”

“정말인가?”

“황실 근위기사들까지 연결이 되어 있어, 놈의 일거수일투족 감시도 가능합니다. 봉기를 시작하자마자, 테스타노는 최소한 다섯 이상의 소드 마스터와 백 명이 넘는 근위기사들의 공격을 받게 될 겁니다.”

자신있게 내용을 말하고 있는 이 사내는 ‘반 테스타노 연합’의 작전참모이자, 원로에서 가장 어린 49세의 ‘메르핀 타슈르’였다.

타슈르 가문은 카다르 제국에서 가장 머리가 좋기로 소문 난 지략의 가문으로서, 전쟁참모나 행정의 주요직에 많은 점유율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주받은 자들’의 경우는?”

“수도의 북쪽의 지하도에 숨어있는 그들의 규모는 총 1000명 정도로 추정됩니다. 우리가 봉기하기 전에, 그들이 먼저 황궁을 기습할 것입니다. 대상으로는 네오시오 3세와 테스타노로 결정됐습니다.”

“아, 아니. 황제까지도?”

“이미 그는 테스타노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렸습니다. 저주받은 자들의 손을 빌어 처치하고, 우리의 입맛에 맞는 황제를 세우는 게 낫습니다. 그리고 제국의 백성들에게 저주받은 자들의 등장을 공식 선포하고, 놈들까지 쓸어버리면 우리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사람이 번다.’이런 뜻이군? 혜안이야, 명안이야!”

페트라스가 메르핀의 말을 듣고, 쾌재에 가까운 환호성을 질렀다. 저주받은 자들의 힘이라면, 그리고 마법사단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테스타노라면 아무리 9서클의 마법사라고 해도 목숨을 부지할 수는 없을 터였다.

게다가 그들의 힘으로 황제까지 죽여 버린다면, 꼭두각시 황제를 세워볼 수도 있음이다. 어차피 네오시오 3세가 자신들을 버린 것인만큼, 아쉬워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정리하겠습니다. 다른 분들도 확실하게 알아두셔야, 신속한 움직임이 가능할 것입니다. 만약을 대비해 우리가 머물 이 곳에는 경비병 오 백이 주둔하게 될 것입니다. 우선 봉기의 신호가 터지는 즉시, 테스타노와 그의 추종자는 2000명 이상의 기사와 200명 이상의 마법사들에게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북쪽에서는 수도를 향해 1000명의 저주받은 자들이 들이닥칠 것이며, 예정대로 북쪽의 경비병은 길을 터줄 것입니다. 남쪽의 경비대는 제로스가 맡고 있기 때문에, 협조가 없을 것입니다만, 그렇다고 테스타노의 편으로 개입하는 일도 없을 겁니다.

테스타노가 음지에서 마군(魔軍)을 양성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이런 일련의 움직임은 동원의 시간조차 주지 않고 놈의 목을 날려버릴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좋아. 좋아! 테스타노의 목숨도 얼마 남지 않았군!”

“와아아아!”

회의실에 모인 원로회의의 회원들은 모두 승리의 확신에 가득 차, 소리를 내질렀다. 테스타노가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200이 넘는 마법사라면 9서클의 마법사의 움직임을 충분히 차단할 수 있다. 한 두사람이 만들어내는 대마법진은 효력이 없지만, 실력있는 엘리트 200명이 만들어내는 마법진이라면 테스타노라고 해도 별 수 없다.

그들은 승리를 확신했다. 그것은 당연했다. 감히 자신들을 건드린 테스타노는 절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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