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8. 아리온의 과거
근위기사의 안내를 받으며 네 사람은 어전회의실을 빠져나와 응접실을 거쳐, 황성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황제와의 대면은 끝이 났다. 예상했던대로 황제는 형식 상의 만남에 필요한 존재일 뿐, 나머지는 모두 테스타노가 주관했다.
그래서 샤크론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네오시오 3세는 엄연히 거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제국의 황제다. 그런데 테스타노의 말에 지나치게 싶을 정도로 흔들린다는 것은 충분히 수상쩍게 여길 수 있는 문제였다.
이를 통해 샤크론은 테스타노의 지배 하에 황제도 놓여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테스타노가 쉽게 실권을 장악하고, 이런 인사조치들을 벌일 수가 없을 터였다.
“패커스, 아리온, 샤크론! 나는 이만 먼저 가 볼게. 아무래도 빨리 아버님께 가서 이 사실을 말씀드려야 겠어!”
“카트라 같이 가! 아리온, 샤크론. 먼저 가 볼게!”
황성을 나오기가 무섭게 카트라와 패커스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두 가문 모두 기사 가문이긴 하지만, 카다르 기사단 출신의 기사는 없었다. 그런 만큼, 한시라도 이 소식을 전달하고 싶은 그들의 마음은 강렬했다.
그래서 샤크론과 아리온은 할 말이 있음에도 그들을 말리지 않았다. 전체적인 성향을 따진다면 역시 샤크론은 아리온과 가까웠다.
“근위검사라… 기사의 로망에 한 걸음 다가서게 됐다. 그렇지?”
해가 지고,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앉은 밤길을 걸어가며 아리온이 물었다. 여느 때와 같이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담담해 보였다.
“그래. 수도에 온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이런 자리에 오르게 된 건지… 운이 좋았던 걸까?”
“샤크론, 네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이야. 다른 건 없어. 덕분에 이 아리온도 그 빛을 좀 보게 됐고.”
“그렇게 생각해?”
“그렇지 않으면 반년도 채 되지 않아, 정규기사에서 근위검사가 된 과정을 어떻게 설명할래? 그것도 오러를 펑펑 뿜어내는 소드 마스터로서 말이야.”
“아리온도 참….”
샤크론의 나이로 근위검사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 이것은 충분히 화제가 될 만한 거리였다.
아직 공식적인 발표가 되지 않아 사람들이 모르고 있지만, 나중에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면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게 될 터였다. 그렇게 되면, 샤크론의 과거나 배경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 사람이 생겨날 것이고, 뜻하지 않은 관심을 받을 지도 몰랐다.
샤크론은 그게 걱정이지 다른 건 걱정스럽지 않았다. 일단 테스타노는 자신을 믿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속마음이 어찌 되었건 간에 당장에 큰 문제는 없는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일이 전개 될지, 무슨 일이 터질지는 아무도 알지 못해. 우리의 힘 따위로는 테스타노를 상대조차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무엇을 하는지는 알아낼 수 있겠지. 그러면 놈의 계획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어.”
“하지만 그건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잖아?”
“어쩔 수 없지. 테스타노를 능가하는 힘을 가질 때까지는 그렇게 지낼 수밖에.”
“결국 근본적으로 해결할 만한 방책은 아직 없는 거구나.”
“그렇지… 혹여 테스타노를 능가하는 마검사가 나온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아리온이 말끝을 흐리는 것으로 아쉬움을 표현했다. 샤크론도 그런 아리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리온, 그런데 왜 아리온은 이 일에 동참하게 된 거지? 테스타노와 어떤 연관이 있길래… 제로스 대장님에게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단순히 이런 위험한 일에 동참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
“아… 내가 샤크론에게 옛날 이야기를 하지 않았었나? 하긴… 그러고 보니 서로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지. 비밀이 없어야 한다고 말했던 게 나였는데 말이야.”
“얘기하기 힘든 과거라면 하지 않아도 괜찮아. 강요하지는 않을게.”
“강요하지 않아도 말하려던 참이었어. 어디 앉을 만한 곳 없나? 그래, 저기가 좋겠다.”
아리온이 오른손을 들어 통나무를 가리켰다. 장작을 패고 남은 밑동인 듯 했다. 앉기 좋게 두 밑동은 매끈매끈하게 잘려져 나가있었다.
[툭]
몸을 단단하게 감싼 체인 메일의 매듭을 풀어 낸 샤크론은 밑동에 묻은 먼지를 간단하게 털고는, 자리에 앉았다. 이어서 아리온도 앉았다.
“음….”
“내가 테스타노에게 원한을 품게 된 건… 바로 200년,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였어.”
“200년이라면 ‘학살의 날’이 있었던 때잖아?”
샤크론은 자연스럽게 그 날을 떠올렸다. 흑마법사들이 떼죽음을 맞이해야 했었던 죽음의 날, 그 날은 200년의 어느 날이었었다.
“그래. 그 학살의 날 이후로 나는 앙심을 품게 되었지. 이 일을 계획하고 꾸민 모든 놈들의 목을 하나씩 날려버리겠다고. 물론 누군지는 알 수 없었어. 오로지 믿을 것은 우리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가전검법 하나뿐이었지.”
이야기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아리온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아리온의 새로운 모습이었다. 샤크론은 당황하여 아리온에게 물었다.
“그 날과 아리온과도 관계가 있어?”
“아리온과‘도’라니? 그렇다면 샤크론도…?”
“아, 아니. 우리 케네스 가문이 그 일과 관계가 있을 리 없지.”
말실수를 할 뻔한 샤크론은 태연한 척 표정을 지으며, 아리온에게 좀 더 다가갔다. 대체 아리온에게는 무슨 과거가 숨겨져 있던 것일까?
“내가 부모님의 죽음을 알게 되었던 건 바로 그 날이 있은 후로 일주일이 지나서였어. 할아버지를 따라 검술 수련을 하고 있는데, 어떤 병사들이 찾아왔지. 그리고는 내 앞에 피가 철철 흘러내리는 부모님의 목을 던져 놓았었어.”
“부모님의 목을….”
“이마에는 죄명인지 뭔지 꼬리표가 붙어 있었지. ‘흑마법사 연합 관련 인물.’. 그게 끝이었어. 병사들은 연좌법이 적용되어서, 일가족이 몰살당하지 않는 것도 감지덕지라고 말해댔지. 피 묻은 부모님의 목에 침을 뱉어가면서.”
아리온은 잊지 못할 그 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리온의 아버지 매카트니 슈바르츠는 기사였다. 전 왕실 근위기사로 활동했으며, 나이가 들자 지방으로 내려와 후진을 양성했었다.
그러던 도중, 두 사람을 알게 되어 친하게 지내기 시작했었는데 그게 바로 흑마법사 연합의 맹주 부부였다.
매카트니는 흑마법사들에 대한 선입견이 없었다. 매카트니는 근위기사 시절, 여러 번 흑마법사들을 만나보면서 그들은 절대 저주받은 존재가 아님을 알았다.
물론 괴팍한 흑마법사나 마왕에게 혼을 빼앗겨버린 자들은 광기에 가득 찬 횡포를 부리지만, 대부분의 흑마법사는 일반 마법사와 다른 게 없었다. 다만, 마족과의 계약에 의해 어둠의 힘을 얻는 다는 것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 매카트니는 맹주 부부와 친하게 지냈다. 맹주 부부 역시, 매카트니의 예상대로 어렵게 사는 백성들을 도우며 선행을 베풀었다.
트롤의 생명력을 빼앗아다가, 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불어넣어 주기도 했다. 그리고 집이 없어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해, 마물들을 소환해 집을 짓게 만들기도 했다.
이쯤 되자, 매카트니는 흑마법사들의 전격적인 후원자가 되어 물심양면으로 그들을 도왔다. 매카트니가 본 흑마법사 연합의 마법사들은 백성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악으로 오염시키는 마기를 대신 제거해주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가 유독 수도와의 연락망이 없어 정보에 눈이 어두운 게 문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전 대륙적인 흑마법사 토벌이 일어났고, 때마침 베토스를 방문하던 아리온의 부부는 기사들의 칼날에 목숨을 잃었다. 게다가 몇몇 사람들의 밀고로 인해, 그들의 목은 육체와 절단되어 가족들에게 돌려보내지는 능욕까지 당해야 했다.
그 때, 부모님의 목을 받아 든 할아버지는 외쳤었다.
“아리온. 테스타노가 바로 네 부모의 원수다. 놈은 기어코 일을 벌이고 말았어. 아리온… 약해져서는 안 된다. 강해져야 한다. 그리고 꼭 이 원수를 되 갚아야만 한다. 시간이 더 흐르면, 세상은 놈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될 거야.”
그 말과 함께, 아리온의 할아버지는 잘려나간 자신의 왼 팔을 보여주었다. 슈바르츠 가문의 목숨을 보장하는 대가로 테스타노에게 잘라 넘겼던 팔이었다. 20년 전 까지만 해도 슈바르츠 가문은 로슈 가문과 함께, 카다르 5대 가문으로 불렸던 곳이었다.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흐흑.”
그 때 아리온은 다짐했다. 부모를 이 지경으로 만들고, 가문의 풍파를 몰고 온 테스타노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할아버지는 그 이후로 돌아가시는 날까지 아리온에게 가전 검법을 전수했다. 다행히도 좌수검법이 아닌 우수검법이었기 때문에 별 무리 없이 아리온에게 전수해 줄 수 있었다.
때로는 심한 훈련에 팔이 빠지기도 하고, 보고싶은 부모님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아리온은 견뎌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그 날, 모든 짐을 싸서는 수도로 올라왔다. 할아버지의 유언인 ‘수도로 가서 제로스를 만나라.’라는 말만 듣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여관 점원, 용병단 하수인을 전전한지 10여 년. 우연히 슈타인을 만나게 되어, 시험을 치르고 기사단에 입단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거기서 인연이 더 닿아, 제로스까지 만나게 되었다.
제로스는 늘 제국의 감시를 받았던 아리온의 할아버지와 다르게, 테스타노의 관심거리 밖에서 그의 행보를 관찰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혹시… 자네가 아리온 슈바르츠 맞나? 매카트니 슈바르츠의 아들 말이야.”
제로스를 만난 건 단청 안에서였다. 슈타인과 제로스간의 친밀함이 각별했기 때문에, 거의 매일에 가깝게 제로스가 단청을 찾아오곤 했었다.
그러다 보니 아리온은 제로스와 자주 눈을 마주치게 되었고, 제로스는 아리온의 얼굴을 보면서 매카트니를 떠올렸다.
마침 예전에 매카트니가 수도를 떠날 때 말해주었던 말이 떠오른 아리온에게 먼저 말을 걸게 되었다.
‘제로스. 만약 내가 죽거나, 혹은 아리온을 부탁해야 할 일이 생기면 잘 좀 부탁하네. 자네에게 아리온이 의지하는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야. 다만, 슈바르츠 가문의 자손으로서 제국에 대한 충성만은 잊지 말라고 전해줘.’
“맞습니다만?”
아리온이 답했다.
“매카트니… 그래, 이젠 죽고 없는 친구. 오늘 중으로 잠시 시간을 내서 경비대를 찾아오도록 하게. 아마 자네 할아버지가 날 찾으라고 했을 거야.”
“그렇습니다.”
그게 아리온과 제로스가 가까워지게 된 계기였다. 그 인연이 지속되어 지금까지 왔고, 이렇게 샤크론과 아리온은 근위검사의 직을 하사받게 되었다. 아리온으로서는 샤크론이 너무 고맙고 감사한 존재였다.
“샤크론, 고마워. 너 덕분에 조금은 나의 꿈에 가까워진 것 같아. 물론 부모님의 복수도 중요하지만… 가문의 명예를 내가 일으켜 세우는 것도 중요해. 그래서 난 너에게 너무 감사할 수밖에 없어. 정말 어떻게 이 고마움을 대신해야 할까?”
“고맙긴 뭘… 그런 과거가 있었구나.”
“이제부터는 항상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될 거야. 오크 굴에 들어갔으면 오크의 행세를 해야지, 인간의 행세를 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테스타노는 그렇게 만만한 놈이 아니라는 것, 너도 잘 알잖아.”
“물론이지.”
샤크론이 미소를 지었다. 아리온의 말대로 테스타노의 소굴 속에 들어간 이상,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될 것이다.
언제 종속충이 자신을 노려들지 모르고, 그에게 정신을 빼앗길지 모른다. 한시한시에 신중함을 기하지 않으면, 영락없이 당하게 될 터였다.
“날 좋다… 유난히도 별이 많은 밤인 것 같네.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날 밤도 이랬었는데….”
하늘을 바라보며 또 다시 눈물을 보이는 아리온을 보고 샤크론은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자신은 부모님이 죽는 그 광경을 목격하지는 않았으니 충격은 덜했다. 하지만 아리온은 부모님을, 그것도 온전하게 보전되지 못한 부모님의 목을 보았다. 200년, 어렸던 아리온에게 그것은 분명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해할 수 있었다. 늘 강해 보였던 아리온이 왜 눈물을 흘리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의 근원은 단 하나… 저주받은 흑마법사 테스타노 뿐이라는 것을.
Chapter 2
일주일이 지나갔다.
그 기간 동안, 샤크론은 마지막으로 안토니오를 찾아 그가 아는 모든 것을 전해 들었다. 대부분의 내용이 교단에 관련 된 것이라 거의 흘려듣다시피 했지만, 생각보다 쓸만한 알맹이들도 꽤 많았다.
아리온은 일주일 내내 제로스와 있었다. 제로스가 거의 아버지나 다름없을뿐더러, 아리온에게 있어 가전검법을 그나마 제대로 평가해줄 수 있는 사람은 그 뿐이었다.
그래서 아리온은 일주일동안 자신이 익혀왔던 검술과 가전검법을 사용해보고, 제로스에게 평가를 듣기로 했다. 덕분에 제로스는 매일 하던 6시간 경비근무도 잠시 쉬게 되었다.
패커스와 카트라는 여전했다. 가족은 물론이고 일가 친척까지 전부 초대해서 자축하는 행사를 벌였다. 남들이 보면 웬 호들갑이냐고 하겠지만, 두 가문에서 카다르 기사단의 단원이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일주일을 알차게 보낸 네 사람은 마지막 이별을 고하기 위해, 출발에 앞서 슈타인 기사단 단청 앞에 모였다.
“당분간은 보기가 힘들어지겠지? 카트라 형님께서 훌쩍 성장해 돌아오실 테니, 그 때 샤크론 너는 뼈도 못 추릴 줄 알아라.”
“이 패커스도 마찬가지야. 예전처럼 어이없게 머리 얻어맞고 쓰러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래, 잘 가. 가는 길을 달라도 언젠가 다시 뭉칠 날이 오겠지. 또 카다르 기사단의 단청과 황성이 그리 멀리있는 것도 아니니까, 자주는 아니더라도 만날 수는 있을거야.”
“제발 카다르 기사단 가서는 방구 좀 끼지 마라. 부탁한다.”
“뭐라고?”
서로는 각자 농담 반, 진담 반 섞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생이별을 하는 것도 아니고, 한데 뭉쳐있었던 동료들이 저마다의 길을 찾아 잠시 흩어지는 것뿐이다. 샤크론은 물론이고, 모든 동료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잘 가도록 하게. 잠시 몸을 담았던 기사단이라고 해서 잊어버리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렇겠습니까? 다른 사람은 잊어도 단장님은 잊지 않을 겁니다.”
“맞습니다, 단장님!”
슈타인이 네 사람의 어깨를 툭툭 쳐주며, 아쉬움에 찬 이야기를 꺼냈다. 나름대로 젊은 피의 등장이라 관심 있게 지켜봤었는데, 너무 일찍 기사단을 떠나는 것 같아서였다.
물론 기사로서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면 놓아주는 게 능사이겠지만, 아쉬운 마음은 쉽게 달래기가 어려웠다.
“그래. 다시는 우리 기사단으로 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있네. 내 기대를 저버리게 되면, 그 즉시 오러를 날려버릴 테니까.”
“예, 단장님!”
심술궂고 때로는 무서워보이기도 했지만, 역시 기사는 기사였다. 슈타인은 진정으로 네 사람의 밝은 미래를 기원해주고 있었다. 진정으로.
“패커스, 가자! 오늘부터 카다르 기사단 새내기가 되는 거다!”
“가자! 아리온, 샤크론. 연락 잊지 말고, 또 만나자!”
[다그닥 다그닥]
미리 준비해두었던 말을 타고, 두 사람이 먼저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간단한 경갑주 무장, 등에 꽂은 두 개의 검은 그들의 치솟는 열정을 분출하듯, 햇빛을 받아내며 반짝반짝 빛났다.
경쾌한 말의 움직임은 대로를 따라 계속해서 이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패커스와 카트라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갔군.”
아리온이 쓸쓸한 미소를 흘렸다. 두 사람 모두 좋은 곳으로 간 것이지만 알지 못할 아쉬움이 흘렀다. 정이 든 것일까, 아니면 무언가 불안한 것일까.
“황실 근위사령부라면 녀석들이 간 것과 정확히 반대로 가야 하지?”
샤크론이 물었다. 샤크론이 알기로 카다르 기사단청은 패커스가 간 왼쪽 길로 가야 나오는 곳이었고, 근위사령부는 오른쪽 길로 가야 나오는 곳이었다.
“그렇지. 가자, 검은 챙겼지?”
“기사가 가는 길에 검이 따르지 않을 수 없는 법! 당연하지. 근위사령부라… 대체 어떤 사람들이 있는 곳일까?”
“글쎄, 모든 건 직접 부딪쳐봐야 아는 거잖아.”
“맞는 말이야. 어서 가자.”
샤크론과 아리온은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말을 타지는 않았다.
근위검사나 기사들은 절대 말을 타지 않는 관습이 있기 때문이다. 제국 기사협회에서 근위검사나 기사를 정의하길 ‘수도의 근방에서 주둔하는 기사로서 목적은 황제의 안전 확보이다.’ 혹은 ‘말을 타고 가지 않아도 될 만큼의 거리까지를 지켜내는 수도의 호위기사.’라고 했다.
그래서 근위검사나 근위기사들은 절대 말을 타지 않는다. 그들이 말을 타는 경우는 장거리를 이동할 경우일 뿐이다. 그 이외의 경우에 말을 타는 것은 엄청 경망스러운 행동으로 평가 된다.
그런 이유로 두 사람 역시 말을 타지 않았다. 괜히 시간을 단축한답시고 타다가 걸리기라도 하면, 사령부는커녕 평생 근위검사가 될 수 있는 자격조차 박탈당하게 될 터였다.
[척. 철컹. 척. 철컹. 척.]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근위사령부 앞까지 오게 되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걸어온 것 같았는데, 꽤 많은 거리를 왔던 모양이었다.
역시 제국의 근위검사와 기사를 관리하는 사령부의 앞이라 그런지, 계속해서 사령부의 앞을 순찰하는 기사들이 많았다.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들리는 플레이트 메일의 육중한 쇳소리, 군화의 발소리는 언제 들어도 힘이 넘치는 소리였다.
샤크론과 아리온은 바둑판처럼 대리석으로 조각 된 평탄한 광장을 지나, 분수대를 거쳐 사령부의 철문 앞에 다가섰다. 그러자 경비병 두 명이 나와서 그를 제지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용건을 말씀하십시오.”
경비병은 존대를 붙였다. 경갑주의 오른쪽에 새겨진 슈타인 기사단의 문양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정규기사가 경비병보다 높은 취급을 받기 때문에, 경비병은 알아서 존대를 썼을 것이다.
“오늘부로 제국의 C급 근위검사로 임명 된 샤크론 케네스, 아리온 슈바르츠입니다. 테스타노 대공작 전하께서 근위사령부를 방문하면 될 것이라 하셔서 왔습니다.”
“그렇습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보고를 올리고 나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경비병 중 하나가 멀찍이 보이는 사령부 건물의 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내부의 구조가 어떤 지는 알 수 없었으나, 보고를 하기 위해 달려간 것임은 분명했다.
“C급이면 어느 정도의 자리를 맡게 되는 거지?”
경비병이 보고하러 간 틈을 타, 샤크론이 아리온에게 물었다. C급은 다섯 개의 등급 중에 네 번째의 등급에 해당하는 계열이었다.
“C급이면 유동성이 많은 그룹이라고 할 수 있어. C급이 다섯 등급 중에서 가장 많은데, 전쟁에 투입되기도 하는 유일한 등급이지. 일반적으로 C급의 근위검사는 귀빈의 정식 호위나, 근위사령부 같은 주요 건물들의 내부 방어를 맡는 경우가 많아.”
“경비병처럼 경비를 서는 건가?”
“그건 아니고, 비상시에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나가야 할 의무가 있다는 거지. 평상시에는 각 부속 건물에 마련 된 서관에서 책을 읽는다던가, 광장에서 수련을 해.
그리고 매일 두 시간 씩, 각 계열의 검사와 기사를 담당하는 소드 마스터가 검술 훈련을 시키지. 이건 의무라서 빠지면 안 될뿐더러, 소드 마스터의 가르침을 받는 만큼 근위검사들에게는 근위기사로 발돋움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평가받아.”
“그렇구나. 경비병처럼 경비만 서는 줄 알고….”
“카다르 기사단이 중요한 인재들을 그렇게 썩힐 리가 없잖아?”
샤크론은 아직도 모르는 것 투성이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으로 수도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아리온에 비하면, 샤크론은 거의 무지에 가까웠다.
“다시 한 번 확인하겠습니다. 슈타인 기사단에서 오신 아리온 슈바르츠, 샤크론 케네스.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샤크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C급의 근위검사로 발령받으신 것이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아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드 마스터께서 먼저 보자십니다. 지금 근위대장께서는 업무중이시라 조금 기다리셔야 될 듯 하니, 우선 절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차피 서두를 것은 없었다. 소드 마스터나 근위대장 모두 한 번은 만나봐야 할 사람들이다. 샤크론과 아리온은 경비병을 따라 소드 마스터를 만나보기로 했다.
경비병은 샤크론과 아리온을 수련장으로 안내했다. 개인실에서 업무를 보는 행정적 성향의 근위대장과 달리, 소드 마스터는 철저하게 검술만 수련하는 기사였다. 그들이 사령부의 업무에 신경을 쓸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나저나 대단하십니다. 본의 아니게 나이를 보게 되었는데, 두 분 모두 꽤 젊으시더군요. 능력 있으신 분들 같습니다.”
“과한 칭찬입니다. 그냥 운이 좋았던 것이지요.”
샤크론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옆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아리온의 시선은 당연히 무시했다.
“운이어도 그게 어딥니까? 어쨌든 부럽기만 합니다!”
“하하하. 이 녀석 이름을 알아두면 나중에 쓸모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유는 말할 수 없지만, 녀석이 꽤 거물이거든요.”
아리온이 농담을 던지자, 경비병이 말없이 웃었다. 경비병과 근위검사는 하늘과 땅 차이다. 경비병 인생으로는 평생 노력해봤자, S급 경비병이 되는 게 고작이다. 근위검사와는 살아가는 인생 자체부터가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아리온의 농담이 멀게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말씀은 고맙지만, 근위검사 분들께서 일개 경비병의 이름을 알아봤자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고요. 어쨌든 말씀은 감사히 듣겠습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지위가 다르다고, 계급이 다르다고, 생각이 다르다고 차별받는 건 없어야 합니다. 모두 매드노스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난, 동일한 존재들입니다. 거리감을 두지 마세요.”
“경비병을 벌레 취급도 안하는 다른 근위검사와는 다른 분들이군요… 아,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안 되지. 이러다가 모가지 당하면 큰일 난다.”
무심코 자신의 마음을 내뱉었던 경비병이 재빨리 입을 틀어막았다. 상관 혹은 상위 계층에 대한 모독성 발언은 제국의 엄격한 처벌을 받는다. 그런 만큼 말은 신중히 할 필요가 있었다.
“어쨌거나 어려워하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데, 반말까지는 아니더라도 친하게 지내자구요. 제국의 규정 상, 경비병이 근위검사에게 반말을 할 수는 없으니까요!”
“가, 감사합니다.”
경비병은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의 표시를 했다. 경비병으로서 근위검사와 가까이 지낸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이었던가. 경비병은 두 사람을 보며, 뭔가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실례지만 이름이 어떻게 되죠?”
샤크론이 방긋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라파엘 피니치입니다.”
“피니치 가문이라면… 경비병 가문으로 유명한 곳이 아닙니까?”
샤크론이 베토스에서의 기억을 되살리며 그에게 물었다. 샤크론이 살던 베토스의 경비병 중에 50%가 피니치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예, 수도의 경비병도 10% 이상이 피니치라는 성을 쓴답니다. 덕분에 조금만 노력해서 알아보면, 경비병 중에 친척을 만나볼 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렇군요.”
“자, 다 왔습니다. 마침 소드 마스터께서 저기 계시는 군요.”
라파엘이 손을 들어, 수련장의 정중앙에서 오러를 내뿜고 있는 사내를 가리켰다. 멀리서 본 그의 모습은 진정한 소드 마스터의 자태를 뽐내 듯, 현란하면서도 절제 된 검술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까지는 잘 보이지 않는 거리라서 샤크론은 조금씩 그를 향해 다가갔다. 눈을 찡그리고 시야를 집중하니 서서히 그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렴풋 하긴 했지만, 어디서 많이 본 안면 같았다.
“샤크론… 익숙한 기분이 들지 않아? 흔한 얼굴을 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나도… 어디… 조금 더 다가가 볼… 앗!”
샤크론은 발걸음을 좀 더 앞으로 옮기다가,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소드 마스터를 보고 놀라 넘어졌다.
그것은 아리온도 다를 바 없어, 두 사람은 거의 동시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한 자리에 넘어졌다. 근위검사의 신고식 치고는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었다.
“아리온, 샤크론! 일어나!”
“대, 대장님이 어, 어떻게 여기 계십니까?”
익숙한 얼굴의 정체는 제로스였다. C급 근위검사를 담당하게 될 소드 마스터가 제로스 일 줄은 예상도 못했었다. 게다가 그가 소드 마스터인지도 몰랐던 두 사람이었다.
“대장이라니! 이젠 근위검사의 지도를 담당하게 될, 검술교관이라고 불러야 할 거야. 라파엘, 수고 했으니 돌아가봐도 좋아.”
“예, 교관님. 그럼 저는 이만.”
라파엘이 인사를 올리고 물러가자, 제로스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두 사람을 일으켰다.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두 사람의 얼굴표정은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정말 예상도 못했습니다. 소드 마스터 이신 줄은 몰랐단 말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먼저 화를 낸 건 아리온이었다. 나름대로 제로스의 치부(?)는 다 안다고 생각했던 그였다. 그런데 정작 소드 마스터인 줄은 몰랐다니! 자신을 속인 제로스가 미울 뿐이었다.
분명히 삼일 전, 아리온이 제로스에게 곧 근위검사가 된다고 말했을 때, ‘자주는 아니더라도 날 잊지 말아라.’라고 하지 않았던가.
“진정한 소드 마스터는 쉽게 자신의 힘을 내비치지 않는 법이야. 어쨌거나 잘된 줄만 알아! 내가 너희들을 담당하게 된 것은 모래밭에서 바늘을 주운 것만큼이나 행운이니까.”
“대장, 아니 교관님. 그런데 어떻게 이 자리에 오르신 겁니까?”
샤크론은 연결되지 않는 상황의 고리가 의문스러웠다. 경비대장이었던 그를 하루아침에 검술교관으로 만든 것은 황제 혹은 테스타노일 것이다.
하지만 황제가 개인의 주체적인 의사를 하지 못한다고 가정했을 때, 이 일은 테스타노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분명하다. 테스타노는 왜, 제로스를 검술 교관으로 임명했을까.
“황제 폐하로부터 발령장이 왔어. 경비대장의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길 것이니, C급 근위검사들의 검술교관을 맡으라고 하더군.”
“황제 폐하로부터요?”
“황제 폐하가 아닌 이상, 마음대로 직위를 바꿀 수는 없거든. 하지만 제국의 관례 상, 임기가 끝나지 않은 관리를 이적시키는 경우는 없어. 이건 황제 폐하가 아닌, 테스타노의 명령이야.”
조심스럽게 말하는 제로스의 두 눈에서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샤크론이 생각하는 것처럼, 제로스도 이번 인사조치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는 듯 했다.
“그렇다면….”
“자세한 것은 휴게실로 가서 이야기하도록 하자. 어차피 방금 2시간의 훈련이 끝났으니, 내가 필요한 일은 없을 거야. 자, 따라오도록 해.”
제로스를 따라 들어간 휴게실 안은 매우 넓고 화려했다. 왼쪽 벽에 일렬로 배치 된 벽장에는 10년 산 티르와인(티르를 숙성시킨 와인)에서부터, 최근 100골드를 호가하고 있는 217년 산 카다르와인까지 진열되어 있었다.
217년 산은 제국 건국 당시 담궈진 와인으로 제국을 통틀어 2000병 밖에 존재하지 않는 와인이었다.
“이야, 대단하군요. 경비대 휴게실에는 가장 오래 숙성 된 게, 3년 산 와인이었지 않습니까?”
경비대 휴게실에서 치료를 받은 경험이 있는 샤크론은 셀 수 없을만큼 놓여있는 와인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술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술 생각이 나는 것은 아니었으나, 형형색색의 와인을 보고 있자니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던 것이다.
“경비대에 대한 제국의 술 대접은 그다지 좋지 않아. 물론 식단에 있어서는 고단백질의 음식이 지원되지만, 술같이 기강을 해이하게 만들 수 있는 음료수는 지원이 극히 드물지. 정말 크게 전쟁에서 승리하지 않는 이상, 경비대원들이 직접 술을 사 먹을 수밖에.”
“교관님에게 술은 둘도 없는 친구이지 않습니까? 하하.”
아리온이 10년 산 티르와인의 병을 만지작거리며 제로스에게 물었다. 제로스의 엄청난 주량을 알고 있는 아리온은 ‘휴게실은 제로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천국’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휴게실이 난 너무 마음에 들어. 자, 대충 휴게실 자랑은 이정도만 하고, 여기 앉아봐. 이번 일에 대해서 이야기도 하고, 앞으로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 지도 알려줘야 하니까.”
“예.”
제로스의 안내를 따라 두 사람은 아프란나무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았다. 이윽고 제로스도 맞은편에 앉았다.
“우선 근위검사로서의 생활에 대해 간략하게 말해주지. 어제 올라 온 장부를 보니까, 아리온과 샤크론은 귀빈의 호위가 ‘주요 임무’라고 적혀있더군. 한마디로 제국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귀빈들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호위기사가 되어야 한다는 거지.”
“예전에 제가 오크족의 외교관을 호위했던 것처럼 말입니까?”
샤크론이 물었다.
“그렇지. 정확하게 규정짓자면 후작 가문 이상의 귀족은 모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건 경비대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가요?”
“제국의 법이 그런 걸 어떡하겠나? 하지만 걱정하지는 않아도 돼. 어차피 귀빈이라 불리는 작자들은 근위검사들보다, 용병대 하나를 통째로 고용하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
“근위검사가 죽게 되면, 유족 보상금의 2할을 지불해야 하는 관례 때문인가요?”
근위검사에 대해 잘 아는 아리온이 물었다. 그러자 제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맞아. 그래서 죽어도 별 탈 없는 용병대를 선호하는 편이야. 지금 제국이 보유한 근위검사들 중에서 호위의 임무를 맡는 경우는, 1년에 평균 두 번에서 세 번에 불과해. 그것도 보름 이하의 단기간으로.”
“그럼 별 문제는 없겠군요.”
“그렇지.”
제로스의 말은 사실이었다.
귀빈 호위 도중에 근위검사가 죽을 경우, 제국에서는 유가족에게 보상금의 명목으로 돈을 지불하게 된다. 굳이 따지자면 보상금의 개념보다는 퇴직금의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죽음으로서 검사의 자리를 떠나는 것을 퇴직으로 보는 것이다.
그 중에서 2할의 보상금은 호위를 부탁한 쪽에서 부담을 해야 한다. 일종의 생명수당으로 죽은 자에 대한 애도의 표시였다. 처음에는 호위 의뢰자로서의 도리로서 행하는 것처럼 여겨졌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하나의 관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이런 일이 발생하면, 유가족은 많은 보상금을 요구했다. 그래서 그 만큼의 부담이 의뢰자에게 늘어났고, 결국 그들은 싼값에 많은 수를 고용할 수 있는 용병대를 선호하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현재의 근위검사들은 자신에게 ‘호위기사’의 보직이 주어지는 경우를 최고의 행운으로 여기고 있는 실정이었다. 반면에 ‘몬스터 사냥’이나 ‘전쟁 지원’등의 보직을 받은 근위검사들은 최악의 불운으로 여기곤 했다.
“어쨌든 보직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왜 제로스 대장님이 교관의 자리에 임명되었냐는 것인데….”
“황제 폐하 단독의 명령이 아닌 것은 확실해. 대대적인 인사조치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나 혼자만 이렇게 된 것이니까. 물론 이 자리가 로슈 사건으로 공석이 된 자리이긴 하지만, 나 말고도 소드 마스터는 많거든.”
“테스타노의 짓이겠지요.”
“그런데 왜 테스타노가 이런 일을 벌였는지 짐작할 수가 없어. 테스타노는 내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알아. 그런데 왜 자신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자리로 나를 데려왔을까?”
제로스나 샤크론이나 그것이 가장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테스타노의 입장에서 제로스를 가까이 두는 건, 생선의 가시를 목에다가 끼워 넣는 격이다. 도움이 될 것이 전혀 없었다.
“우리 두 사람과 교관님의 연관성을 알고, 한꺼번에 감시하려는 것은 아닐까요?”
“흠… 일리가 있는 말인 것 같군. 충분히 가능성은 있어. 하지만 그렇게 생각했다면, 일찌감치 죽여 버리는 게 테스타노에게 더 이득이지 않을까?”
“글쎄요… 종잡을 수가 없군요.”
“무서운 놈이야. 하지만 이렇게 서로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그것만한 인연도 없겠지. 별다른 보직의 업무가 없는 이상, 수련장에서 사는 게 어때? 근위대장에게는 내가 이야기하도록 할 테니.”
근위대장이 검술교관보다 훨씬 지위가 높긴 했지만, 근위대장은 소드 마스터가 아닌 엑스퍼트에 불과한 반면, 검술교관은 전원이 소드 마스터였다.
그래서 지위 상으로는 근위대장이 높지만, 실제로는 근위대장이 소드 마스터들의 요구나 부탁을 들어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교관의 자리를 포기하고, 근위대장의 자질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교관님만 괜찮으시다면, 문제없습니다. 저희야 좋지요!”
아리온이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외쳤다. 이에 질세라 샤크론도 추임새를 넣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 한번 배워볼까요?”
“그래, 좋지!”
[다그닥 다그닥]
그 때였다. 어지간해서는 수련장 안으로 말이 들어오는 일이 없는데, 한 마리의 말이 휴게실을 향해 분주하게 달려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탁]
문 밖에서 들리는 한 사람의 착지음. 이윽고 문이 열리며 병사 하나가 들어왔다.
“제, 제로스 교관님! 그, 급보입니다! 바, 반란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테스타노 대공작 각하께서 근위사령부의 임시폐쇄를 명령하셨습니다. 사령부 안으로 반군이 접근하는 것을 막으라는 명령입니다!”
“뭐라고, 반란?”
“원로회의에 있었던 자들이 일으킨 반란 같습니다. 게다가 북쪽에서 천 여 명의 반군이 몰려내려오고 있는데, 아직 확실하게 파악 되지는 않은 상태입니다!”
“아니, 근위사령부에서는 무엇을 했길래 반란의 조짐조차 포착하지 못했단 말인가?”
“지방에서 일어난 봉기가 아닙니다! 수도의 기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전했습니다!”
“뭐?”
순간 휴게실 내에 적막이 흘렀다.
아무리 카다르 제국이 안팎으로 썩어들어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황제를 상대로 기사들이 반란을 일으키다니. 어디까지 제로스의 생각 속에서, 기사들은 황제를 향한 충성으로 뭉친 존재들이었다. 원로회의 소속의 기사들이기는 하지만, 이해관계에 휘둘리지는 않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기대는 이 보고로 무참하게 깨져버렸다.
“어쨌든 저는 명령을 전했습니다. 또 다른 곳으로 가봐야 합니다. 그럼, 이만.”
병사는 오른손을 내뻗는 것으로 예를 대신한 후, 말에 올라 어디론가 또 사라졌다.
정말이지 평화롭고 한산하던 분위기가 뒤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병사가 철문을 지나 나가기가 무섭게, 근위사령부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어디에선가는 함성소리도 들려오는 듯 했다.
“교관님, 어떻게 된 일일까요?”
샤크론은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느닷없이 반란이라니, 수도의 기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원로회의 소속의 기사들은 수도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 그들은 원로회의 귀족들의 직속으로 있으면서 수련이나 훈련 등은 기사단에서 하는 거야. 하지만 믿을 수가 없어. 그래도 기사도를 걷는다고 자부했던 자들이 황제에게 반기를 들다니….”
“그렇다면 지체할 것 없이 검을 빼들어야 겠군요. 반군이 황제 폐하의 목숨을 노리는 것이라면, 응당 근위검사로서 처단해야 할 것입니다.”
아리온이 말했다. 샤크론은 잠시 멈칫 하는 듯 했지만, 아리온의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지금은 어디까지나 황제를 위한 근위검사로서의 샤크론이다.
“이 기회에 반군이 테스타노까지 죽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샤크론은 무심코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제로스가 무엇인가 깨달은 듯,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아! 설마 테스타노가 이것을 노린 것은 아니겠지. 설마, 그럴 리가 없겠지….”
“무, 무슨?”
또 한번의 적막이 감돌았다. 샤크론은 자신의 눈에 비친 제로스의 표정에서 짙게 깔린 어둠을 발견할 수 있었다.
< 1권 끝 >
* 리메가 끝났습니다. 빨리 올리고 싶은 마음에 줄 띄기도 안해버렸네요. 양해바랍니다.
내일 새벽부터 2권의 연재가 시작됩니다.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마지막 흑마법사 1권>
계약 출판사 : 환상 미디어
출간 예정일 : 1월 말 또는 2월 초
[1권 목차]
1. 프롤로그
2. 나의 길
3. 검술 시합
4. 갑작스런 의뢰
5. 샤크론의 진면목
6. 슈타인 기사단의 전지훈련
7. 제국에 드리우는 먹구름
8. 아리온의 과거
[2권 예고]
드러나기 시작하는 테스타노의 음모.
그리고 샤크론을 다시 찾아온 젠카.
블랙 드래곤 보로미스.
대륙은 점점 카오스의 늪에 빠져들고, 샤크론의 운명의 바퀴에 가속이 붙기 시작한다.
1권이 끝날때까지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부터는 2권입니다!
그럼 내일 뵙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