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1. 철저한 패배, 무너지는 어둠의 꿈
“달려라! 가라! 제국을 위해 흘린 피 만큼, 보상은 곱으로 받을 것이다. 테스타노가 드디어 걸려들었다!”
테스타노의 행동에 힘을 얻은 마법사들이 더더욱 주문을 외우는 데에 집중했다.
테스타노가 레노만과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성공적으로 마나의 흐름을 차단하는 마법진을 형성해냈던 것이다.
레노만의 명령에 기사들은 제각기 자세를 취하고는 언덕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모두가 체인 메일이나 아이언 메일(: 철갑주)을 걸치고, 투구와 보호 장비까지 갖춘 중무장 기사대였다. 경비병의 경갑주 따위는 한 방에 베어져나갈 터였다.
레노만은 이것이야 말로 최고의 반전이라 생각했다.
“크으으윽!”
이윽고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레노만은 혼란에 빠진 테스타노의 병사들이 죽으면서 내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그 환상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내가 원로회의 의원들을 내쫓고도 대규모 숙청을 하지 않았던 것은, 염두에 두고 있었던 배반의 세력들을 한꺼번에 몰아내기 위함이었다. 명심해라… 제국의 백성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마법사 테스타노는 본 모습은 바로 이것이었다는 것을.”
“아니?”
기세 좋게 언덕을 타고 올라오던 기사들은 테스타노의 주변에서 감돌기 시작한 강력한 마기에 주춤거렸다.
이전에는 느껴본 적이 없는 마기. 갑작스런 고통에 그들은 혼란스러워 했다. 숨이 막히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듯 하였다.
“끄으으으으으…!”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기사들이 머리를 쥐어 잡더니 여기저기서 무릎을 꿇으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전부는 아니었지만, 선두부터 시작해서 쓰러지는 기사들이 속출했다. 열에 아홉 꼴이었다.
“아, 아니 왜 마법 방해진이 먹혀들지 않는 거지…?”
주문을 외우던 마법사 하나가 의문에 가득 찬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라시엘이 절망스런 표정으로 테스타노를 바라보며 말했다.
“후후후… 흑마법사들은 자연의 마나를 쓰지 않아. 그러니 먹혀들고 자시고 할 것이 없지.”
테스타노의 말에 마법사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설마 저 인간이 흑마법사였단 말인가? 흑마법사…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학살의 날을 주도했던 자는 테스타노였는데.”
“끄으으으악!”
기사들에 이어 마법사들 역시 하나 둘 머리를 부여잡기 시작하더니, 코와 입, 그리고 귀로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며 쓰러졌다.
마치 독에 중독된 것처럼 고통스러워하면서 피를 분출하는데,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물러서지 말고 달려가라! 내가 지원하겠다. 물러서지 마라!”
보다 못한 레노만이 롱 소드에 오러의 기운을 가득 실어, 기사들의 뒤를 따랐다. 진보랏빛을 발하는 오러의 기운은 그가 평범한 소드 마스터가 아님을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종속충은 이래서 여러 가지로 쓸모가 많단 말이야. 원로회의 놈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카다르 기사단의 대부분이 종속충의 지배를 받고 있지. 그것도 본인들은 전혀 인식하지 못한 상태로 말이야.”
계속해서 테스타노가 마기를 뿜어내며 주문을 외웠다. 종속충의 활성화를 유도하는 주문인지, 주문의 속도가 빨라지자 더 많은 기사들이 여기저기서 쓰러졌다.
그들은 테스타노와 경비병들에게 검 한번 휘두르지 못했고, 맥없이 무릎을 꿇었다.
“흑마법사 하나에 모든 것이 좌지우지되는 제국이 우습지 않나? 명색이 서대륙 최고의 영토를 자랑하는 카다르 제국이 말이야.”
“테스타노, 대체 네 놈의 목적은 뭐냐!”
“죽을 놈에게 그런 대답은 사치다.”
테스타노가 고개를 돌리며 손을 휘젓자, 쓰러졌던 기사들이 되돌아서서 레노만을 향해 덮쳐왔다.
몇몇 정신력 강한 기사들은 그 통제를 벗어나 테스타노에게 달려들었지만, 액시드 포그에 의해 순식간에 산화해버리고 말았다.
“아아아아….”
“하하하하. 마법 방해? 웃기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하하하하!”
애초부터 마법 방해진은 마왕으로부터 직접 마나를 공급받는 테스타노에게 전혀 피해를 주지 못하는 마법진이었다. 그래서 그의 마법 시전은 여느 때보다 자연스러웠다. 이전의 행동은 연기였을 뿐이다.
“어서 돌아서라! 같은 기사들끼리 검을 겨누다니, 미쳤느냐?”
레노만이 종속충의 원리를 이해하고 있을 리 없었다. 아니 종속충의 존재조차 몰랐다. 신경이 둔감한 그는 테스타노가 흑마법사라는 사실 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
이미 통제의 늪에 갇혀버린 기사들은 말이 없었다. 묵묵히 그들은 레노만을 향해 일정한 보폭으로 걸어왔다.
마법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테스타노의 지배에 놓여버린 마법사들은 서로에게 갖가지 전격마법들을 시전하며 죽어갔고, 이에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갔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은 뭐지? 나 라시엘이 믿고 이끌던 마법사들의 절반 이상이 테스타노의 개였단 말인가? 제국의 기사들 역시 모두? 그랬던 건가?”
황당했다. 나름대로의 이상을 가지고 일으킨 봉기였고, 힘든 격전이 되겠지만 어떻게든 승리할 것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그런 자부를 일순간에 무너뜨리는 충격이자 공포였다.
동료 마법사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를 죽이고 있다!
“진정한 마법진은 이런 것이다. 모든 것을 소멸시킬 수 있는, 그래서 더더욱 무서운 것. 나조차 그 안에 끼어들면 살아남을 수 없는 강력한 힘의 발현을 말이다. 파괴의 원(Circle of Destruction).”
테스타노가 캐스팅을 마친 후에, 손바닥에 생겨난 붉은 불덩이를 바닥에 던졌다. 그러자 마치 기름으로 원을 부어놓은 것 마냥, 순식간에 불길이 타오르면서 드넓은 언덕을 전부 둘러싸버렸다. 천 명이 넘는 반군들을 둘러싸고도 남을 만큼 거대한, 아니 그 규모를 넘어선 초거대 마법진 이었다.
하늘에서 내려볼 수 있다면, 언덕 하나를 통째로 집어 삼킨 불기둥을 볼 수 있을 터였다.
“아아….”
이미 언데드가 되어버린 기사들의 목을 계속해서 베어 넘기며 분투하던 레노만이 탄성을 내뱉었다.
뭔가 잘 돌아가는 가 했더니만, 자신의 주변을 10m는 족히 넘는 불길이 감싸버린 것이다.
마치 파이어 월의 대단위 시전을 보는 듯 했다.
“파괴의 힘은 줄곧 불로 묘사되고는 한다. 흑마법의 힘을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난 불이라고 생각한다.”
“헛소리는 집어 쳐!”
레노만이 외쳤다.
순간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불, 불, 불. 뜨거운 열기가 가져다 줄 고통의 두려움!
“저 불은 웬만한 갑주 정도는 순식간에 녹여버릴 힘을 가진 불이다. 이미 너희들은 그 안에 갇혔고, 불길은 소용돌이를 그리며 안으로 파고들 것이다. 이 참에 한꺼번에 죽여 버리면 후환도 남지 않겠지. 나는 너희들의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 그리고 많은 것을 알고 있다.”
“테스타노, 정말 이 세상을 네 놈의 것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냐!”
레노만이 다시 외쳤다. 라시엘은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멍하니 서 있었다.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다. 북쪽에서 몰려오는 흑마법사들만 죽이고 나면, 제국의 흑마법사는 거의 뿌리가 뽑힐 것이다. 그러고 나면 교단의 힘은 더욱 강력해지겠지. 더더욱… 하하하.”
“테스타노!”
[화르르륵]
[다그닥 다그닥]
레노만의 다급한 외침 뒤로 말발굽 소리만이 들려왔다.
레노만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기사의 피를 몸에 뒤집어 써 가면서 분투했다. 그리고 오러를 이용해 불길을 갈라보려고도 애썼다. 그러나 그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마법사들은 서로 무자비한 전격마법을 펼치다가 모두 죽어 더 이상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워낙 외력에 약한 그들이다 보니, 단 한번의 일격에도 수많은 마법사들이 죽었던 것이다. 게다가 언데드 화한 기사들의 공격도 크게 일조를 했다.
상황은 암울했다. 살아남을 방법도 없고, 살아남아도 테스타노의 개들에게 영원한 추격을 받게 될 터였다. 레노만은 힘이 닿는 데까지 열심히 싸워보겠다고는 다짐했지만, 점점 약해지는 오러의 빛이 상황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었다.
“젠장….”
허탈함에 가득 찬 레노만의 탄식은 거센 불길에 묻혀 버렸다. 레노만은 다시 검을 휘둘렀다. 일단 갈 수 있는 데 까지는 가보는 것이다.
한편, 북쪽에서 남하하던 저주받은 자들은 때 아닌 복병을 만나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각에 맞춰, 황명을 전달받은 근위사령부는 근위검사과 근위기사를 이끌고 출군했다.
그들의 목적지는 저주받은 자들이 혈전을 벌이고 있는 곳, 바로 ‘피의 계곡’이었다. 흑마법사들의 마지막 발악을 잠재우기 위해 근위대가 파견되었고, 그 일행에는 샤크론과 아리온도 포함되어 있었다.
‘반지가 왜 이렇게 빛나는 거지? 이전보다 더 강하게 빛을 발하고 있어….’
샤크론은 강렬하게 빛을 발하는 반지를 바라보며 의문에 잠겼다. 지금 자신들이 향하고 있는 목적지는 ‘반군’들이 격전을 벌이고 있다는 피의 계곡. 특별히 반지가 반응할 만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반지가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일까. 샤크론은 혹시나 흑마법사의 3대 신성물이 그곳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