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흑마법사-58화 (58/166)

# 002. 나이블로의 소드

“난 근위대장 로네스다.”

먼저 자신을 소개한 것은 로네스였다. 자세는 언제든지 검을 뽑을 자세였지만, 목소리만큼은 부드러웠다.

“20년 전 모습 그대로군. 기억하지, 피를 뒤집어쓰고 울부짖던 젊은 기사의 모습을. 난 흑마법사 연합의 2대 맹주 발데스다. 너무 서두가 길었나?”

“피를 흘리고 싶지 않다. 방향을 돌려라. 조용히 물러간다면 내가 책임을 지는 한이 있더라도, 당장의 안전은 보장 할 테니까.”

“나도 그러고 싶지만, 테스타노의 죽음을 확인하기 전 까지는 절대 그럴 수 없어. 우린 이미 일어섰고, 모든 것이 노출되고 말았지. 당신 따위의 힘으로 테스타노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어림없지.”

발데스의 대답은 냉소적이었다. 로네스는 말로서 그를 돌리기 어렵다고 느꼈다. 발데스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던 것이다.

테스타노가 가장 싫어하는 존재가 흑마법사라는 것은 이미 제국의 백성들에게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번에 그들이 물러간다고 해도, 흑마법사 잔당의 침공 소식은 어떤 경로로든 백성들에게 전달 될 터였다.

그렇게 되면, 테스타노가 하지 않으려 해도 백성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흑마법사의 타도를 외칠 것이었다. 수도를 위협할 수 있는 저주받은 자들을 누가 내버려두려 하겠는가.

“어떻게 하길 원하는가? 어차피 당신이 하는 말은 나에게 밖에 들리지 않으니, 솔직하게 말해 봐라.”

“당신의 입장을 고려한다면, 난 싸울 수밖에 없겠지.”

“왜지?”

무언가 맞지 않는 듯 했다. 자신의 입장을 고려해주는데, 왜 싸워야 하는 건가? 로네스는 싸우고 싶지 않았다.

“당신이 그냥 길을 내주게 된다면, 당신은 반드시 죽어. 테스타노는 흑마법사와 어떻게든 연관이 되는 사람들을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슈바르츠 가문의 예가 있지 않았던가?”

“그 이야기는….”

“어떻게든 한 쪽은 죽어야 된다는 것이겠지.”

“젠장….”

수많은 근위군들이 죽어나갈 생각을 하니 로네스는 머리가 아파왔다. 근위군은 물론이고 흑마법사들도 수 많은 피를 대지에 뿌려야 할 것이다.

흑마법사들과의 전투에서 그들이 악하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꼈던 로네스였다. 흑마법사들이 살았던 도시의 민중들은 제발 흑마법사들을 죽이지 말라고 애원하면서, 자신의 다리를 붙잡고는 했었다.

어떤 흑마법사는 검에 온 몸이 난도질당하는 중에도 쓰러진 민중들에게 힐링을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또, 부녀자들을 겁탈하려는 기사들을 향해 달려들고는 자폭하는 흑마법사들도 있었다.

그런 모든 장면들을 목격했던 로네스. 그는 원하지 않는 전쟁을 치르고 싶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테스타노 같지 않다는 것을 안 것으로도 충분해. 피할 수 없다면, 후회 없는 한판을 벌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훗.”

침울한 표정에 잠긴 로네스를 향해 가볍게 웃음을 날린 발데스는 발걸음을 돌렸다. 애꿎은 자들이 목숨을 잃어야 하는 지금이 너무나 안타까웠지만, 테스타노 처단이라는 대의를 위해 그는 잠시 인정을 버리기로 했다.

발데스가 웃으며 돌아서자, 트루카스는 일이 잘 해결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르지 않았는데도 달려나가서는 발데스에게 물었다.

“발데스, 원만하게 잘 해결되었습니까?”

“정해진 절차대로 해결되었지. 예상했던 대로야.”

“그렇다면 휴전입니까?”

“아니, 가장 후환이 남지 않을 방법. 어느 한 쪽이 사라지는 거지.”

트루카스가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가장 피하고 싶었던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트루카스는 발데스가 그런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는 예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이건 양쪽 모두 손해입니다. 테스타노는 근위군이나 우리 어느 한쪽이라도 무너지길 바라고 있습니다. 차라리 그를 설득해서 테스타노를 몰아내는 게 옳습니다!”

“트루카스, 테스타노의 과거를 보건대 과연 그것이 안전하디고 생각하나? 놈은 정신계 마법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줄 아는 악귀야. 과연 근위군 중에 소위 ‘테스타노의 개’가 되어있지 않은 자가 있을까?”

“테스타노의 개라면….”

“테스타노의 주특기. 종속충, 마인드 컨트롤, 티르 같은 음료나 음식을 이용한 정신마법 발동. 놈은 그런 방식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지배 하에 놓았을거야.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 근위군과 손을 잡는 건, 양쪽 모두 자멸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하지만 이건 우리도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할 만큼 심각한 전투가 될 겁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지. 다른 방도가 있나?”

“마음을 굳히신 겁니까?”

트루카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는 연합의 맹주였다. 그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는 트루카스라고 해도 없었다. 절대 복종, 그것은 연합의 규칙이자 도리였다.

“물론. 휴… 한바탕 피를 뒤집어쓰겠군. 죽기 전에 전 맹주님의 아드님이나 뵈었으면 좋겠는데….”

“죽기 전에 라니요. 우린 죽지 않습니다.”

“세상에 무적은 없어. 자, 근위군과의 전투를 준비해야겠지. 트루카스는 마법사를 세 부류로 나누어 적을 상대하도록 해. 먼저 나를 엄호해 줄 마법사, 그리고 개개인의 공격을 펼칠 마법사, 마지막으로 대마법진을 형성할 마법사. 이렇게 말이야.”

“알겠습니다. 우리에게 기사가 없는 만큼, 마법진 형성에 많은 마법사들을 투입하겠습니다. 근접전은 위험하니까요.”

“엄호마법으로는 매직 미사일이 적당할 것 같군. 내 갑옷에 새겨진 마법진이 바람 계열의 마법과 친한 것이라서 말이야.”

“예, 발데스.”

“그럼… 기다려 보실까.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로네스가 오른손을 들고는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그러자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이곳저곳으로 흩어지며 진형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샤크론과 아리온의 경우 배속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교육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제로스의 안내를 따라 마법사들이 많이 배치 된, 최후방의 부대로 이동했다.

“결국에는 싸울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왔어. 참 안타까운 일이다. 비록 흑마법사를 옹호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이것은 남 좋은 일만 하는 꼴이야. 승리해도 그것은 승리한 것이 아니야. 뼈저린 미래가 남을 뿐이지.”

“어쩔 수 없지요. 막을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애꿎은 흑마법사들이 또 죽어나가겠지….”

샤크론은 너무 안타까웠다. 로네스와 발데스가 적절한 합의점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결과는 암울하게도 전면전이었던 것이다. 잘못된 가치관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흑마법사들. 샤크론은 이런 부조리한 제국의 현실이 아쉬울 뿐이었다.

“제국의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되지만, 제국은 그가 나타나고 나서부터 걷잡을 수 없이 기울었어. 백성들은 사라지는 흑마법사들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가장 힘 있는 조력자를 잃은 셈이니까. 휴…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하는 건, 보는 눈이 많아서 좋지 않을 듯 하군. 샤크론, 아리온. 결정은 두 사람 스스로가 하는 것이야. 다른 사람에 의해 고통스럽게 죽기 전에 자신이 먼저 목숨을 끊어주든, 아니면 방관하든 그것은 자네들의 몫이니까.” “…….”

만감이 교차했다. 흑마법사의 후손으로서 복수하고자 일어났던 샤크론, 하지만 지금은 흑마법사를 처단하려 하는 제국의 근위검사로서 위치해있다.

이게 얼마나 큰 모순이란 말인가! 스스로 모순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선택한 것이 잘못이란 말인가? 아니면 올바른 결정인가?

도무지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상념을 깨우려는 듯, 로네스가 외쳤다.

“저주받은 자들을 모두 죽여라! 황제 폐하를 해하려는 자는 어느 누구라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죽여라. 씨를 남겨놓아서는 절대 안 된다!”

“제국의 미래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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