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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1화 (1/774)

1화. 서(序)

“헉헉!”

힘들다.

속이 뒤집힌 지는 오래고, 폐가 찢어질 것 같았다. 가장 심하게 혹사당한 팔다리는 숫제 부평초처럼 흐느적거렸다.

회초리처럼 가볍게 들리던 장도(長刀)조차 지금은 수백 근 철괴나 다름없었다.

마구잡이로 날뛰는 호흡이나마 가라앉기를 기다리는데, 순간 가슴 안쪽에서 확 치고 올라오는 무언가.

“우웨에엑!!”

빌어먹을, 아침에 선짓국을 먹었던가.

눈앞이 핑 돌았다. 순간적으로 피를 너무 많이 쏟아서인지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움직여라, 움직여!’

그는 혀를 깨물었다. 소름 돋는 통증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파악!

다시금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한 그의 양옆으로 풍경이 빠르게 바뀌었다.

‘조금만 더 가면…….’

이 숲만 벗어나면 그가 비밀리에 마련해 둔 안가(安家)가 있다.

그곳에 온갖 희귀한 영약과 약재들을 보관해 두었으니, 무사히 도착할 수만 있다면 수명이 다된 지금의 몸뚱이에 능히 생기(生氣)를 틔울 수 있을 것이다.

그때였다.

‘억?!’

휘영청 뜬 달빛을 가리며 누군가가 뛰어내렸다.

‘제기랄. 빌어먹게도 훌륭한 은신술(隱身術)이로군.’

기척도 없이 나타나 대뜸 휘두르는 시커먼 검이 번개처럼 어깨를 노려 왔다.

천하진(千霞津)의 눈이 흔들렸다.

‘사군(死君)!’

때를 기다리다 절묘한 시기에 공격해 오는 중원 남부 최강의 암살자.

천하진은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촤아아악!

그대로 쓰러지는 복면인의 가슴엔 어느새 깊은 도상(刀傷)이 새겨져 있었다.

천하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암살자를 일격에 죽였다. 평소라면 눈길이라도 한번 줬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감상을 곱씹기엔 상황이 지나치게 안 좋았다.

파바바박!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흡!’

어느 순간 멈춰 선 천하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야밤의 숲.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는다. 어둠을 꿰뚫어 보는 눈은 누구 못지않았지만, 아름드리나무가 빽빽했다.

‘…….’

들끓던 호흡이 딱 멎었다. 극도로 위기에 몰리자 오히려 신체가 차분해진 것이다.

천하진은 숨을 길게 내쉬며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나와.”

담담한 한마디를 내뱉자, 저 멀리 전방에서 감탄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단한데?”

저벅저벅.

기척을 감출 이유가 없다는 듯 온전히 스스로를 드러내며 다가오는 여자.

지이이이잉.

그녀가 걸어오는 길 좌우로 굵은 나무들이 모조리 기울어지는 듯한 환각이 보일 정도로 대단한 기도였다.

천하진의 얼굴이 구겨진 종이처럼 일그러졌다.

세상에 보기 싫은 사람이 참 많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보기 싫은 사람 중 하나가 나타난 것이다.

“비요왕(飛妖王).”

여인이 싱긋 웃었다.

“영광이네, 날 기억해 주고. 얼추 오륙 년 전에 봤던가?”

이제 서른이 갓 넘어 보이는 외모에 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절세미인이었지만, 천하진은 그녀의 외모에 속지 않았다.

겉으론 벌레 한 마리 못 죽일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론 하루라도 살인을 저지르지 않으면 불면증에 시달린다는 정신 나간 살인마가 저 여자다.

스륵.

그녀에게 도를 겨누는 천하진의 모습에 비요왕이 피식 웃었다.

“싸우려고?”

“우리가 또 얌전히 목 내미는 취미는 없지.”

“그냥 쉽게 가지? 어차피 몇 합 버티지도 못할 것 같은데.”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거 아니겠어?”

“딱 봐도 아는 걸 굳이 대봐야 직성이 풀려?”

“좋겠어, 아는 것 많아서. 나도 육십쯤 먹으면 너처럼 유식해지나?”

비요왕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겉으론 삼십 대로 보이는 그녀의 실제 나이는 무려 육십이 넘었다. 주안술(駐顔術)로 젊었을 적 미모를 유지하는 것이다.

당연히 나이 얘기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비요왕이 코웃음을 쳤다.

“죽으려면 뭔 짓을 못 하겠어.”

“빌면 살려는 줄 거고?”

“적어도 죽기 전에 네 갈비를 뜯지 않는 아량 정도는 베풀어 줄 수 있지.”

이런 잔인한 년.

천하진의 눈에 핏발이 섰다.

“됐으니까 들어오려면 후딱 들어와, 이년아.”

“오? 정말 무슨 비책이라도 있는 것 같네?”

“주둥이만 나불댈 줄 아는 육십 먹은 할매 따위 뭐가 무섭다고.”

비요왕은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거친 말을 쏟아 내는 천하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안 좋아.’

천하진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비요왕은 천하십대고수 중 하나다. 끝없이 펼쳐진 중원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이면 그냥 괴물이라고 봐야 한다.

물론 천하진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살왕(殺王)이라 불리며 십대고수 중 일인으로 꼽혔으니까.

문제는 그의 무공이 정면 승부보다는 암살에 특화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수일 동안 이어진 추격전으로 몸 상태가 최악이었다.

누가 봐도 결과가 분명한 싸움이었다.

물론, 그가 지금까지 위기를 헤쳐 올 수 있도록 만들어 준 한 수를 쓰면 달라지겠지만.

위이이잉.

천하진의 장도에 시퍼런 기운이 어리자, 비요왕의 눈에도 이채가 서렸다.

칼에서 뿜어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당장 숨이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몸으로 저만한 기운을 뽑아내다니, 과연 십대고수 중 일인이라 불릴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놀란 것은 천하진의 저력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이었구나.”

“뭐?”

“네가 의천맹(義天盟)에서 작정하고 키운 살수였다는 것이.”

“……!”

천하진의 얼굴이 굳어졌다.

비요왕이 미소를 지었다.

“역시, 철혈성(鐵血城)에서 내게 의뢰를 한 이유가 있었군.”

의천맹이 철저히 정도(正道)를 추구한다면 철혈성은 정사의 경계에 있는 패도(覇道)를 지향했다.

그런 철혈성이 비요왕에게 직접 의뢰를 한 이유.

“너의 진기에는 역겨운 정기(正氣)와 선기(仙氣)가 배어 있어. 구대문파(九大門派)의 것이 확실해.”

바로 비요왕이 과거 사파의 영웅이라 불리던 사신(邪神)의 절학을 이어받았기 때문이었다.

삼십여 년 전부터 대외적인 활동을 금하고 있는 천마신교(天魔神敎)의 마공(魔功)을 제외하면

정파 무공을 가장 민감하고 정확하게 탐지해 낼 수 있는 것이 그녀의 무공이었다.

“그걸 안다고 뭐가 달라지나?”

“달라지지.”

비요왕의 눈이 사이하게 빛났다.

“많은 것들이 달라질 수 있지.”

천하진은 그것이 무엇이냐 묻지 않았다.

살짝 호흡을 고르며, 그가 말했다.

“사군(死君)과 적살루(積殺樓)를 포섭한 것도 철혈성이었군.”

비요왕이 빙긋 웃었다.

“맞아. 그리고 사흘 동안 네가 몰살시킨 철왕팔세(鐵王八勢)의 정예들도 전부 철혈성 소속이었지.”

“…….”

“정말 대단해. 아무리 생포를 목적으로 했지만 어떻게 그 많은 고수를 죽일 수 있었는지 궁금했어.”

비요왕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철왕팔세는 당금 철혈성을 지탱하는 여덟 세력이었다.

비록 개개의 수는 적지만 하나하나가 절정고수로 이뤄진 조직이었다. 단신으로 그중 이백이나 되는 수를 죽이고 도주한 것이다.

심지어 하루 전엔 그 경지가 십대고수에 육박한다는 천지쌍괴(天地雙怪)마저 반 각 만에 도살해 버렸다.

체력이나 내공의 문제는 물론 내외상까지 입은 몸임을 감안하면 정말 무시무시한 위업이었다.

살왕이 아니라 사신(死神)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

“확실히 구파의 무공을 배운 거야. 그것도 비기(秘技)를.”

천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부인해도 믿지 않을 것이고, 그게 사실이기도 했다.

가만히 비요왕을 노려보던 천하진이 문득 피식 웃었다.

“대화보다 피 뿌리길 좋아하는 네년이 왜 주절주절 말이 많았는지 알겠군.”

“뭔데? 맞춰 봐.”

“철혈성에서 날 생포하려는 이유의 연장이겠지. 내게서 구파의 무공과 의천맹에 대한 기밀 정보를 원하는 거였어.”

비요왕이 미소를 지었다.

“똑똑하군.”

아주 멍청하지 않은 다음에야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사실.

그러나 사흘 동안 잠도 못 자며 칼질을 해 온 천하진이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몸으로 저리 냉정하게 상황을 관조할 수 있는 능력은 아무나 보여 줄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천하진의 통찰력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물론 넌 거기서 끝낼 생각이 없겠지?”

“뭐?”

“구파의 무공과 기밀 사항, 철혈성의 의뢰를 외면하고 네가 몽땅 털어 갈 생각 아니냐?”

비요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천하진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하여튼, 강호에는 왜 이리 의리 없는 것들이 많은지.”

의천맹은 정의라는 가면을 쓰고 뒤에서 자신과 같은 살수를 양성했다.

그것도 그냥 양성한 게 아니라, 서로를 죽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지옥에 던져 놓았다. 그때 천하진의 나이는 고작 열셋이었다.

의천맹이 그토록 독하게 살수를 양성한 이유는 오직 하나.

강호삼세(江湖三勢) 중 나머지 둘인 철혈성과 천마신교의 수장들을 죽이기 위함이었다. 그로써 온전히 의천맹의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천하진은 의천맹의 바람에 따라 아주 강력하게 성장했다.

비요왕이 입맛을 다셨다.

“너, 눈치 하나는 엄청 빠르구나.”

“칭찬 고마워.”

왠지 모르게 달관한 듯한 표정이다.

비요왕은 좋은 말로 그를 달랬다.

“다른 거 필요 없어. 의천맹의 기밀 문서도 좋지만 독야청청하는 내가 알아서 뭐 하겠어. 다만…….”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구파의 무공. 그것만 내게 주면 널 살려 주지.”

“이미 다 죽어 가는 몸이시다. 별로 매력적인 거래가 아니라고.”

“혈고(血蠱) 때문에 그래?”

천하진의 눈이 커졌다.

“혈고를 아나?”

비요왕이 콧방귀를 뀌었다.

“난 사신(邪神)의 절학을 이었어. 사술이학(邪術異學)은 물론 온갖 독물에도 조예가 깊지.”

“……그렇군.”

“그리고 내 사공(邪功)이라면 네 몸에 깃든 혈고도 없애 줄 수 있어.”

혈고.

지나치게 강해진 천하진을 제어하기 위해 의천맹이 쓴 최악의 수단이었다. 혈고가 몸에서 잠복하는 한, 그는 절대 의천맹을 배신할 수 없다.

그렇다. 혈고가 있는 한.

천하진이 피식 웃었다.

비요왕이 움찔했다.

“왜 웃지?”

“이봐, 비요 할매.”

“…….”

“댁 설마 내가 철혈성에 쫓기고 있는 줄 알았어?”

“뭐?”

천하진이 장난스럽게 장도를 까딱였다.

“아까부터 자꾸 사흘, 사흘 그러기에 뭔가 싶었네. 그렇지. 사흘 동안은 철혈성에게‘만’ 쫓기긴 했지.”

“그럼?”

“오늘로 칠 주야다. 의천맹에 쫓기고 있었던 거야, 난.”

넌더리가 난다는 듯 이를 갈며 내뱉는 천하진의 말에 비요왕은 섬뜩함을 느꼈다.

그렇다면 의천맹의 병력을 뿌리친 몸으로 그만한 고수들을 몽땅 죽였다는 뜻인가?

“왜 의천맹에서……? 너, 설마 혈고를 해독했나?”

천하진은 침묵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는 칠 일 전, 혈고를 해독했다.

의천맹 측에선 즉시 그것을 알아챘다.

다른 고독(蠱毒)처럼, 혈고 역시 암컷과 수컷으로 나뉘어서 한쪽이 죽으면 다른 한쪽도 무사치 못하기 때문이다.

‘젠장.’

이가 갈렸다.

의천맹이란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삼십 년을 은인자중했다.

혈고를 해독하는 법은 이미 오 년 전에 알았다. 하지만 당시에는 혹시라도 그들의 천라지망에 갇히면 빠져나갈 자신이 없었다.

오 년 동안 피땀 흘려 수련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나흘 만에 의천맹의 천라지망을 돌파했다.

설마 이 난장판에 철혈성까지 끼어들 줄이야.

‘빌어먹을 인생에, 빌어먹을 세상이다.’

처음엔 한탄이 나왔다.

시간이 흐르자 삶을 포기할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금은?

사아아아아아악.

비요왕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장도를 꽉 쥐며 눈을 감은 천하진에게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천하제일살수이자 구대문파의 비밀 전인인 살왕(殺王)의 살기였다.

천하진이 눈을 떴다.

번쩍!

이글거리는 안광에 폭발적인 분노가 맺혔다.

“구파의 무공? 날 살려 준다고? 지랄하네. 네년의 사갈 같은 독심을 모를 줄 알아?”

비요왕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붙으면 분명 자신이 이길 것이다. 하지만 이 엄청난 기백 앞에서 순간 몸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삼십 년을 남들 손에 명줄 잡혀 살았다. 이젠 내 인생에게 미안해질 정도야.”

우우우우웅!

장도에서 타오르는 빛이 강해지더니, 나중엔 칼날마저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말하지. 비켜, 이 무대에서 얌전히 빠져라.”

“…….”

“그럼 적어도 그 더러운 목숨이나마 건질 수 있을 거다.”

비요왕의 얼굴이 단번에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다 죽어 가는 놈이 어디서 허세를!”

천하진이 으르렁거렸다.

“이 멍청한 년아! 내가 문제가 아니야! 철혈성 놈들 때문에 뿌리쳤던 의천맹 병력까지 다시 따라붙었다고!”

“뭐, 뭐?!”

“그리고 대가리가 있으면 생각이란 걸 좀 해! 철혈성이라고 네 탐욕을 모르겠냐! 토사구팽할 게 뻔하잖아!”

비요왕의 눈이 흔들렸다.

드높은 무공과 오만함 탓인지 상대가 아무리 대단한 단체라도 자신이 토사구팽당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한 듯했다.

“비켜! 각자 살길 찾아 가자고!”

“…….”

“안 비키면 다 죽…….”

“걱정하지 마.”

비요왕이 씨익 웃었다.

그녀가 서서히 손을 들어 올리자 잘 다듬은 손톱이 쭉쭉 길어지며 붉게 변했다.

“나는 너 같은 머저리가 아니거든. 그리고 날 모욕한 놈을 살려 둔 적도 없어.”

화아아악!

비요왕의 몸에서 짙은 사기(邪氣)가 방출되었다.

살기보다 훨씬 더 독특한 기운. 그 사기를 느낀 고수들이 저 머나먼 곳에서부터 확 몰려들기 시작했다.

“안 알려 줄 거지? 네 눈깔이 그래 뵈네.”

번쩍!

숨 막히는 사기 너머로 광포한 살기까지 흘러나왔다.

“그럼 죽어, 이 쓸모없는 새끼야.”

천하진이 씨익 웃었다.

분노, 슬픔, 자포자기, 절망 등등 온갖 감정이 버무려진 웃음이었다.

“내 쓸모는 내가 증명해, 이년아.”

파아아앙!

천하진이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비요왕 역시 그를 향해 마주 달렸다.

두 남녀의 칼과 손톱이 정면에서 부딪쳤다.

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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