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웃기 어려운 날벼락 (4)
“잠깐!”
여인의 외침에 앵화가 멈칫했다.
천하진이 귀를 후볐다.
“목청도 좋네.”
벌떡 일어난 여인의 얼굴이 극도로 싸늘해졌다.
“이게 무슨 짓이죠?”
“뭐가?”
“무슨 짓이냐고요!”
“뭔 짓을 했는지는 봐서 알 거 아냐, 이 강도 년아.”
“이봐요, 삼공자!”
“야, 그리고 내가 진짜 몰라서 묻는 건데.”
천하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혹시 나처럼 교주님 제자라도 되냐?”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말이었지만 당사자로선 비꼬는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여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도저히 표정 관리가 되질 않는다.
“아니지? 그래, 그럴 것 같더라고. 근데 따박따박 협박을 하질 않나, 면전에 대고 소리를 지르질 않나.”
“이보세요.”
“혹시 나보다 높은 신분인가?”
천하진이 앵화에게 고개를 돌렸다.
“앵화야, 저 여자가 나보다 윗사람이야?”
“그, 그렇지 않습니다.”
“아! 그렇지. 넌 알 수도 있겠네. 누구냐, 저 여자?”
앵화가 힐끔힐끔 무사들의 눈치를 보았다.
천하진이 눈을 부릅떴다.
“인마, 왜 이 떡대들 눈치를 보는 거야? 빨랑 대답해 봐.”
“네, 넵!”
앵화가 짧고 간단하게 설명했다.
여인의 이름은 홍여린(紅麗璘).
현재 신교 내전의 환희원(歡喜院) 소속으로 일하고 있는 마인으로 마도칠가 중 적사가(赤蛇家)의 여식이다.
나이는 어리지만 후기지수라 불릴 만큼 강하며, 일 처리가 훌륭해 마도 무림의 동량으로 인정받는 여걸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호, 그래? 나랑 같은 제자의 여동생이라고?”
“그, 그렇습니다.”
“왜 그렇게 짖어 대는가 싶었더니만 믿을 만한 뒷배가 있었던 거네.”
여인, 홍여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믿을 만한 뒷배라니? 지금 삼공자는 자신과 오라비의 살벌한 관계를 알면서도 모욕을 하고 있었다.
천하진이 손을 휘휘 저었다. 정말이지 귀찮음과 나른함이 한도 끝도 없이 묻어 나오는 손짓이었다.
“모양새가 좀 이상하게는 됐지만, 뭐 좋아. 같은 제자의 혈육이라니 이해는 해 주마. 나도 일 커지는 건 바라지 않아.”
“…….”
“나가. 그리고 다시는 찾아오지 마. 알았어?”
어차피 다시 찾아와도 난 없겠지만.
천하진이 음흉하게 웃었다. 드디어 이곳에서 탈출할 생각을 하니 목덜미가 후끈해졌다.
‘이……!’
홍여린의 볼이 사정없이 떨렸다. 지금까지 받은 모욕만 해도 참기 어렵건만, 이젠 대놓고 비웃기까지 한다.
“……좋아요.”
어느새 그녀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졌다.
분노가 극에 이르자 도리어 차분해진 얼굴 가득 찬바람이 일었다.
“삼공자가 그렇게 나와 주니까 차라리 잘됐지 싶네요.”
“어, 잘 가.”
“가기 전에 이거 하나만 처리해 주고 가요.”
“뭐 또.”
그녀가 품에서 고급스러운 종이 두 장을 꺼내 들었다.
“우리 두 사람의 수결(手決)이 찍힌 계약서예요.”
계약서?
“기억하죠? 둘 중 먼저 계약을 파기하는 경우, 혹은 파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성할 경우 그에 대한 위약금을 세 배로 잡은 거.”
“음?”
“그간 삼공자에게 투자한 영약을 자금으로 환산하면 금자로 일천 냥에 육박해요.
그 외에 잡다한 금전 지원까지 합치면 이천 냥이 조금 넘는데, 그간의 정을 봐서 우수리는 떼죠.”
“……?!”
“금자로 육천 냥. 지금 당장 지급하세요. 정 어려우시면 언제까지 갚겠다 각서라도 쓰시고요. 그럼 얌전히 사라져 드리죠.”
영약? 금전 지원?
아니, 교주의 제자면서 같은 후보의 혈육에게 영약과 금전을 지원받았어? 이게 무슨 파란만장한 개소리람?
‘이런 얘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천하진이 앵화를 바라보았다.
앵화는 얼어붙은 얼굴로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허! 육천 냥? 육천 냐앙?!’
금 육천 냥.
은자로 환산하면 육만 냥이다. 은자 육만 냥이면 어지간한 대문파 일 년 예산에 맞먹는 무지막지한 금액이었다.
그런 거금을 지금 당장 내놓으라고? 그게 안 되면 각서를 써?
참 나!
“그러지 뭐. 각서 쓰자.”
“……네?”
“지금 당장 지급 못 할 거면 각서 쓰라며? 앵화야! 지필묵 좀 준비해 봐라.”
대수로울 것 없다는 식으로 나오니 오히려 당황한 건 홍여린이었다.
“가, 각서를 쓴다고요? 정말로?”
“쓰라며, 이년아.”
말투에 퉁명스러움이 잔뜩 묻어 나왔다. 홍여린은 얼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각서를 쓰겠다고?’
각서라는 건 결코 함부로 써선 안 된다. 특히나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더더욱 신중해야 한다.
약속을 이행하는가의 여부가 문제가 아니라 각서를 썼다는 사실 자체가 논란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막말로 홍여린이 삼공자와 모종의 각서를 썼다는 얘기만 돌아도 대중의 시선은 삼공자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다.
대중의 시선은 양날의 검과 같은 법.
그 시선에 호기심만 담기면 상관없지만, 의심으로 발전하는 순간 대상자는 보이지 않는 창살에 갇히게 된다.
삼공자씩이나 되는 사람에게 그 창살은 엄청난 압박이 될 텐데?
‘진심인가?’
서량은 대단히 똑똑하진 않지만 그래도 정세를 알고 흐름을 읽을 줄은 아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각서 따위도 쓰지 않을 줄 알았다. 그래서 홍여린도 선택지로 올려놓은 것이다.
상대를 압박하여 우위에 설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니까.
그런데 쓴단다. 그것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정말 쓰겠다는 건가요?”
“귀는 파고 다니냐?”
“진짜로 쓰겠다는 거죠?”
“대신 파 줘?”
콧잔등이 제멋대로 파르르 떨려 왔다.
천하진은 내심 코웃음을 쳤다.
‘까짓것 못 쓸 것도 없지.’
강호 경험만 삼십 년이 넘는다. 이 깜찍한 강도 계집애의 얄팍한 계략 따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어차피 여기서 벗어나면 각서고 뭐고 공중분해 되는 거다. 그는 철저한 개인주의자일 뿐, 명성이나 권력에는 하등의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이 몸의 원주인인 놈은 쓸데없이 잔혹해서 걸핏하면 아랫사람을 쳐 죽였단다. 이따위 놈의 체면 따위 알 바 아니다.
“공자님, 지필묵을 준비했습니다.”
“어, 수고했다.”
천하진이 먹을 갈며 물었다.
“어떻게, 얼추 서너 달 뒤까지 갚는다고 적으면 되는 거야?”
“…….”
“왜 대답이 없어? 너무 길어? 그래도 금 육천 냥인데 그 정도 시간은 주는 게 상도의에 맞지 않나 싶은데.”
사람 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 서너 달이란 시간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한 최소한의 보험이었다.
홍여린의 안색이 몇 번이고 변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좋아요. 쓰세요.”
“그려.”
천하진이 흥얼대며 붓을 놀려 댔다.
혼란스러운 얼굴로 각서를 내려다보던 홍여린이 문득 눈을 번뜩였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각서 쓰잖아.”
“…….”
“말 걸지 마. 바빠.”
홍여린은 어이가 없었다.
“필체 그거 좀 바꾼다고 효력이 없는 줄 아시나 보죠?”
필체? 아!
‘그렇구만.’
자신의 필체와 서량이란 놈의 필체가 같을 리 없다.
하지만 그게 뭔 상관이람?
“어차피 수결도 찍을 거 아냐. 사소한 걸로 꼬투리 잡지 마라.”
“…….”
“어디 보자, 마침 춘절이 넉 달 뒤니까 올해 말까지 지급하겠다고 적는다? 그럼 됐지?”
“아니요.”
“석 달로 해? 그럼 그러든가.”
“석 달 뒤든 넉 달 뒤든 상관없어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염병,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시원하게 질러. 찔끔찔끔 간 보는 것도 아니고 뭐 하자는 거야, 아까부터?”
상대에 대한 배려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짜증 가득한 어투에 홍여린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진정해. 여기서 화를 내면 지는 거야.
“액수를 정정해야겠어요.”
“더 싸게 해 주게? 그럼 고맙지.”
“만 냥으로 올려야겠네요.”
붓이 뚝 멈추었다.
“만 냥?”
“네, 만 냥이요.”
“새끼라도 치나? 육천 냥이 왜 갑자기 만 냥이 됐어?”
“정신적 피해 보상도 받아야겠거든요.”
천하진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건 또 어인 개소리십니까.”
“만천 냥.”
“뭐?”
“계약의 완전한 파기는 수금이 완료되었을 때예요. 그때까지는 계약자로서 품위를 지켜야지요.”
“품위고 나발이고, 아무리 그래도 말 몇 마디에 오천 냥을 올려?”
“올려야죠.”
홍여린의 눈에 어느새 완연한 살의가 깃들어 있었다.
“저에 대한 모욕은 적사가에 대한 모욕.
삼공자는 신교의 지파인 적사가의 여식을 강도 취급한 것도 모자라 면전에다 욕설을 내뱉었어요.
그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이 받은 모욕을 가문에 대한 모욕으로 돌려놓았다.
즉, 개인의 문제가 아닌 세력 간의 문제로 부풀림으로써 두 사람의 비밀스러운 계약서에 창칼을 그려 놓겠다는 의미였다.
이제부터는 돈의 문제도,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거래도 아니다.
자존심 싸움이 된 것이다.
“어떻게 되겠냐고?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이런저런 일이 많겠지만, 앞으로 삼공자가 불필요한 고민을 하게 될 것만은 확실하죠.
피 냄새가 돌면 배고픈 들개들이 꼬이는 법이니까.”
“모욕하는 걸 본 사람이라도 있나?”
“있죠. 저 두 사람.”
자신이 데려온 수행 무사들을 뜻하는 것이다.
홍여린은 한술 더 떴다.
“혹은, 본가의 모든 사람이 봤을 수도 있고요.”
“정신 나간 소리 하고 자빠졌네.”
“만이천 냥으로 올리겠어요. 그리고 제 말을 흘려듣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본가가 작정하면 소문을 부풀리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거든요.”
“거짓을 진실로 만들 능력이 되신다?”
“정확히는 진실에 힘을 실어 주는 정도죠. 약간의 거짓말이 가미될 순 있지만, 그거야 뭐 우리 마음이고요.”
홍여린이 미소를 지었다.
눈빛에 살기가 감돌고 있었지만, 표정엔 개운함이 묻어 나왔다.
“그게 싫으면 만이천 냥으로 바꾸고 수결을 찍어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더 이상의 에누리는 없습니다.”
“…….”
“뭐 하나요? 어서 찍지 않고. 나갈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엄청 바빠 보이던데.”
천하진이 묵묵히 홍여린을 노려보았다.
홍여린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쓸모도 다 된 놈이 어디서 감히!’
애초에 그에게 영약과 금전을 지원한 것은 삼공자를 적토마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오라비에게 무재(武才)로도, 서열로도, 나이로도 밀리는 그녀였다.
하지만 그녀의 야심은 오라비를 한참 넘어섰다.
여인이라는 태생적인 한계와 모자란 재능으론 교주가 될 수 없으니
최소한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까진 올라가고 싶었다.
과거에는 삼공자와 정략혼을 할 생각도 있었지만 지금은 싹 가셨다.
주화입마에 빠져 달리지 못하는, 최소한의 품위조차 잃어버린 적토마는 필요치 않다.
아쉽지만 투자금을 몇 배로 불려서 또 다른 적토마를 찾는 수밖에.
의기양양해진 홍여린과 그런 그를 노려보는 천하진.
홍여린은 천하진이 당혹스러워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전혀 다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 그랬지.’
지옥 같은 마교를 탈출하자. 나만의 평화로운 삶을 이룩하자.
그의 생각은 그러했다.
하지만 방금 깨달은 게 하나 있었다. 정확히는 잊고 있었던 걸 기억해 냈다.
‘인생은 등가 교환이야.’
마교를 빠져나가는 것은 당연히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을 너무 쉽게 봤다. 조금만 애를 쓰면, 조금만 노력하면 손쉽게 탈출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틀렸다. 그것은 낙관적인 관망에 불과했다.
‘그래선 안 되었다.’
서너 달의 보험? 어떻게든 되겠지?
이곳은 무림에서도 가장 살벌하다고 정평이 난 마도 무림의 총본산이다.
한없이 긴장하고 조심해도 모자랄 판에 상황을 너무 가볍게 봤다.
‘결정적으로, 난 아직 무림에서 살고 있어.’
그리고 무림은 목숨을 걸지 않으면 결코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는 동네다.
슥슥슥.
천하진이 각서에 적힌 금액을 만이천 냥으로 고쳤다.
홍여린이 피식 웃었다.
“주세요.”
“안 줘.”
“……뭐라고요?”
천하진이 종이를 살살 말렸다.
홍여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봐요, 삼공자.”
“앵화야.”
“네! 공자님!”
“나가서 호위대장 불러와.”
앵화는 대답도, 반문도 하지 않고 서둘러 나갔다. 이 질식할 듯한 분위기에 잔뜩 긴장한 것이다.
잠시 후, 호위대장이 들어왔다.
“신교불패, 만마앙복. 삼공자님을 뵙습니다. 어인 일로 소인을 찾으셨는지요?”
“마차 하나 준비해 놓으시오. 갈 곳이 있소.”
“삼공자님, 외람된 말씀이오나 현재 공자님의 몸은…….”
“교주전으로 갈 것이오.”
“……예?!”
“마차 준비하고, 교주전에 기별을 넣으시오. 셋째가 사부님을 뵙겠다고 알리시오.”
순간 방 안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엄마 아빠 부른다고? 잘됐네. 난 부모님 안 계시니까 사부님이라도 부를게. 어차피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잖냐.”
석 달이면 정말 지겹도록 참았다.
이젠 더 이상 간만 보지 않는다. 이곳, 이 마교란 지옥의 심장부로 들어가 모든 것을 걸고 담판을 지을 것이다.
이젠 홍여린에게 짜증도 나지 않는다.
오히려 고마웠다. 이 강도 년 덕분에 이곳이 얼마나 살벌한 곳인지 완벽하게 깨달았으니까.
내 자유를 찾으려면 그만큼의 판돈은 걸어 줘야지.
이곳에서 가장 힘 있는 사람 앞에서 나의 권리를 되찾아 오겠어.
“뭐 해? 적사가에도 연통 넣어. 누구 목청이 더 큰지는 교주전에서 따져 보자고.”
홍여린의 얼굴이 극도로 창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