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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6화 (6/774)

6화. 교주 대면 (1)

사람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하면 순간적으로 사고가 마비되기 마련이다.

그건 홍여린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모욕은 어떻게든 넘겼으나, 설마 이런 초강수를 둘 줄은 상상도 못 한 것이다.

그녀가 눈을 부릅뜨고 천하진을 바라보았다.

담담한 표정이다. 눈은 자신을 향하고 있지만, 그 너머의 무언가를 보는 듯한 결연함이 느껴졌다.

‘서, 설마 정말로?’

그때, 호위대장이 고개를 숙였다.

“마신궁(魔神宮)에 기별을 넣겠습니다. 다만 입궁 허가령이 떨어질 때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는…….”

“상관없소.”

“알겠습니다. 허가가 떨어지는 대로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절도 있게 예를 갖춘 호위대장이 총총걸음으로 물러났다.

홍여린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진심이다!’

사실 되물어 볼 필요도 없다.

마신궁에 거짓으로 입궁을 요청할 만큼 간 큰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교내 수뇌부들끼리 온갖 더러운 정쟁(政爭)을 벌이면서도 절대 건드리지 않는 성역이 마신궁이다.

마신궁.

욕계(欲界)를 다스리는 천마(天魔) 파순(波旬)의 현신인 교주의 거처이자 그 자체로 신성시되는 거대 신전(神殿).

이 미친 작자는 정말로 저 각서를 갖고 마신궁, 즉 교주전에 갈 생각인 것이다.

“삼공자!”

천하진은 대답 없이 침상에 걸터앉아 팔짱을 끼었다. 애초에 그녀에게 흥미도 없었지만, 이젠 정말 알 바 아니었다.

홍여린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안절부절못했다.

일대일 싸움을 국지전으로 만든 건 자신이었지만, 전면전으로 키운 것은 삼공자다.

그리고 그녀는 이 전면전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지금 같이 죽자는 건가요?”

천하진이 피식 웃었다.

“난 수지 맞는 장사 아니면 안 해.”

“뭐라고요?”

“너랑 같이 죽으면 나만 손핸데 왜 같이 죽느냔 말이다. 네 목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홍여린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당신, 교주님께 무슨 소리를 들으시려고 그러는 거죠?”

“문제라도?”

“나와 거래를 했다는 걸 교주님께서 아시면 당신도 무사치 못해요!”

“어쩌라고?”

“뭐요?!”

“쯧쯧.”

천하진이 검지를 좌우로 까딱거렸다.

“더 이상 입 아프게 주절대는 거 싫으니까 딱 말해 주지. 네 말이 맞아. 이 사달이 난 걸 알면 나도 혼깨나 나겠지.

어차피 무공도 상실한 놈이라 쫓아낼지도 모르고.”

“…….”

“나야 그렇지만 넌 어떨까?”

홍여린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너희 가문 대단한 거야 세상 사람들 다 알지만, 그것도 통할 데가 따로 있지. 나야 심하면 퇴출이지만 넌 까딱하면 옥살이야.

딸내미 잘못 둔 죄로 적사가까지 탈탈 털릴 건 당연하고.”

웃기지 마!

홍여린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심 이미 상대의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다.

자신이 오늘 보인 언행이 알려지면 삼공자 역시 못난 놈 취급을 받겠지만, 그녀는 마도 무림에서 매장이 될 것이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적사가 역시 교주의 눈 밖에 날 것이다.

‘도대체가?!’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알던 삼공자는 절대로 이런 막무가내식 악수(惡手)를 두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 역시 강하게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삼공자가 악수를 두지 않을 거라 확신한 이유.

“당신…… 당신은 대권을 거머쥐고 싶지 않은 건가요?”

바로 자신과 비견될 만한 그의 야망.

그는 차기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평판까지 깎아 가며 상대를 짓눌러 버리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을 거라 확신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천하진의 답변은 가관이었다.

“어.”

“뭐, 뭐라고요?!”

앞서 받은 모든 충격을 다 합쳐도 지금보다 당황스럽진 않을 것이다.

“나를 어떻게 봤는지 모르겠다만 그거야 옛날 일이지. 난 지금 대권에 관심이 없어.”

“왜?!”

“거 어지간히 멍청한 년일세. 되겠냐, 후계자가? 이 몸뚱이로?”

천하진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너도 그걸 아니까 여기 온 거 아냐?”

“……!”

“가망이 없다는 건 알면서 왜 내 욕망은 이전과 같을 거라고 확신했지?”

순간 홍여린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렇다. 그녀는 더 이상 삼공자를 자신이 탈 만한 적토마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병든 말이지만 한때는 하루에 천 리를 주파했던 명마였다.

그 명마가 궁지에 몰렸을 때 어떤 발악을 할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봤어야 했다.

이미 고삐를 쥐고 있다는 자만, 상대보다 우위에 서 있다는 확신.

결정적으로 자신은 절대로 해를 입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자신감이 그녀를 궁지로 몰고 간 것이다.

“꼴 보기 싫으니까 그만 나가라.”

천하진은 눈까지 감아 버렸다. 마음을 다스리니 여유를 되찾은 것이다.

반면 홍여린은 전혀 여유로울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감에 심장이 거세게 두근거렸다. 이마에는 송골송골 식은땀까지 배어났고, 안색은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안 돼! 일이 이렇게 진행되어서는 안 돼!’

상대는 진심이었고, 진심일 수밖에 없다. 이미 호위대장은 마신궁으로 연통을 넣으러 가 버린 상황이었다.

그녀는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렸다. 이 상황을 최대한 좋게 풀기 위해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하지만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그때, 천하진이 눈을 떴다.

“뭐 하냐?”

“…….”

“호위무사들 불러서 내쫓아 버릴까? 나가, 얼른.”

홍여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답이 없다고?

아니다. 있다. 하지만 그 답안지에 적힌 내용은 너무나도 치욕스럽고 굴욕적이었다.

죽었으면 죽었지 절대로 택하기 싫은 답.

“내가…… 어떻게 하면 되죠?”

천하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뭔 소리야?”

홍여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왔지만, 그마저도 인식하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그 얘기를 교주님께 안 드릴 거냐고요.”

“나가라니까 이게 미친 소리 하고 자빠졌네. 저 떡대들 데리고 빨랑 사라져, 이년아.”

적나라한 욕설에 절로 주먹이 쥐어진다. 하지만 이전처럼 금액을 올리겠다는 소리는 할 수 없었다.

전세 역전.

거래를 갖고 삼공자를 압박했던 그녀는, 이제 그녀 스스로 거래를 없던 일로 만들어야 할 상황에 처한 것이다.

그간의 비밀스러운 거래를 전부 없던 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스럭.

홍여린이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

두 장의 계약서. 서로의 수결이 찍힌 진본이었다.

계약서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이 잔뜩 충혈되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상대를 압박할 수 있는 최고의 패처럼 보였는데, 이젠 자신의 목을 내리칠 칼로 보였다.

찌이이익!

천하진의 눈이 빛났다.

홍여린이 계약서를 반으로, 그리고 또 반으로 찢었다. 그리곤 옆에 놓인 촛불에 가져다 댔다.

화르륵.

불에 타들어 가는 두 장의 계약서.

만이천 냥이라는 거금이 그대로 재로 화하는 순간이었다.

홍여린이 말했다.

“각서는 당신에게 있지만 정작 계약서가 사라져 버렸으니 물증 역시 없는 셈이네요.”

은은하게 떨리는 목소리에 짙은 패배감과 일말의 안도가 담겨 있었다.

천하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긴 한데, 그게 의미가 있으려나?”

“……?”

“너 지금 마도 무림 최고의 권력자를 너무 쉽게 보는 거 아냐?

대(大) 천마신교의 교주님이 물증이 있고 없고를 따져 가면서 사람을 다룰 분인가?”

“……!”

“그분이 죄인이라고 지목하면, 물증이 있든 없든 넌 그냥 죄인이 되는 거야.”

부르르.

홍여린의 손이 떨렸다.

천하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중요한 건 계약서나 각서 쪼가리가 아니라 내가 교주님께 무슨 말씀을 드리느냐지.

네가 거짓 소문으로 여론을 조장하려 했던 것처럼 말이야.”

“…….”

“너는 되는데 왜 난 안 될 거라고 생각해? 너 진짜 세상 쉽게 사는구나?”

천하진이 손을 휘휘 저었다.

“더 말하기도 귀찮다. 가, 인마.”

“나는…….”

“얘는 어째 한 번에 말을 듣는 법이 없어. 좀 꺼지라고! 난 할 말 없다고.”

홍여린의 표정은 이제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최후의 수를 쓸 수밖에 없다.

손에 쥔 패를 스스로 내던져 박살 내는 것보다 더 치욕스러운 것.

머리 한구석에 숨어는 있지만 무의식적으로 무시하고 배제했던, 이 사태를 해결키 위한 진짜 답안지.

그것은 바로 굴복이었다.

‘굴복? 고개를 숙이라고?’

고작 이런 놈의 주둥이가 무서워서 고개까지 숙여야 한단 말이야? 이 내가?

‘절대!’

절대로 그럴 수 없다. 그것은 홍여린이라는 한 인간의 자존심 문제였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앞으로의 인생은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다. 나아가 가문의 명성에도 먹칠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가문의 힘을 등에 업고 언제나 성공의 열매만 취해 봤던 홍여린이 최초로 맞이한 한계.

그 한계란 이름의 벽은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고, 넓었으며 단단했다.

‘이익!’

진정 굴복해야 하는가? 정말 이 말 같지도 않은 사태 때문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건가?

천하진이 앵화를 보며 외쳤다.

“에이, 귀찮아. 앵화야! 호위무사들 불러라! 이 잡것들이 아주 그냥 질질 끌려 나가 봐야…….”

“……해요.”

“잉?”

풀썩.

홍여린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 하지만 그 떨림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소녀가…….”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오만 감정이 담긴 투명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소녀가 감히 신교의 존귀한 분께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바라옵건대,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간곡히 청하옵니다.”

천하진이 시린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홍여린의 몸에 이는 떨림은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그녀가 지금 이 상황을 얼마나 분해하는지 알 수 있었다.

“…….”

짙은 침묵이 깔렸다.

기나긴 침묵 속에서 홍여린의 거칠어진 호흡 소리만 들려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화르르륵!

무언가 불에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사이의 채무 관계는 이걸로 끝이다.”

“…….”

“나가.”

홍여린은 대답 없이 일어났다. 고개를 푹 숙인 탓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홍여린과 두 명의 수행무사들이 사라졌다.

“후우! 진짜 꿉꿉한 동네야.”

홍여린과의 거래는 교주에게 고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란 심정이었다. 하지만 굳이 따져 보면 안 하는 게 안전하긴 하다.

천하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군.”

어차피 홍여린은 신경 쓸 가치가 없는 날벌레에 불과하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교주와의 대담이었다.

그가 자신을 만나 주지 않으면?

그럼 어쩔 수 없다. 몸을 완벽하게 정비한 후, 교외 지역으로 빠져나갈 방도를 다시 고민해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교주가 자신을 만나 준다면?

입마에서 깨어난 자신을 석 달 동안이나 부르지 않은 냉혹한 스승이 제자의 입궁을 허락해 준다면?

‘정공법으로 가야겠지.’

그로부터 반나절.

문밖에서 호위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자님, 마신궁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어떻게 됐소?”

“허가령이 떨어졌습니다. 마차를 준비했으니 입궁 준비를 하시지요.”

천하진이 천천히 일어났다.

미소를 짓는 그 얼굴에 은은한 긴장감이 엿보였다.

“가 볼까.”

어느새 그의 머리에 홍여린과의 일은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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