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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8화 (8/774)

8화. 교주 대면 (3)

경치가 좋고 아늑한 곳을 빗대 선경(仙境), 혹은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고들 한다. 신선들이 사는 세상처럼 아름답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곳은 진짜 선경인 게 분명했다.

짹짹짹.

작고 예쁜 새들이 나무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사박사박.

털에 반지르르하게 윤기가 도는 사슴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을 텐데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졸졸졸.

한쪽에선 시냇물이 흘렀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개었다.

꽃잎들이 바람을 타고 저들끼리 춤을 추었다. 훈훈하게 불어오는 바람에는 봄 내음이 그득했고 한옆에는 기화요초가 만발했다.

‘헐…….’

이게 뭐야?

분명 지금은 겨울이다. 지역이 지역인지라 북부보다는 따뜻하겠지만 기본적으로 몹시 추울 때였다.

그런데 여긴 봄이네?

‘뭐야? 내가 지금 꿈을 꾸나?’

천하진은 멍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볼을 양쪽으로 쭉 당겼다.

아프다.

‘꿈이 아닌데?’

순간 천하진의 눈이 번뜩였다.

‘환상진(幻想陣)?!’

사람의 오감을 속여 환시(幻視), 환청(幻聽)을 유발하는 진법(陣法)을 환상진이라 한다.

계절이 겨울이니 지금 이 광경은 말이 안 된다. 심지어 건물 바깥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나.

그렇다면 분명 이곳은 환상진이 깔린 구역일 것이다.

그런데…….

‘뭐 이렇게 진짜 같은 진법이 다 있다냐?’

살수질을 하려면 진법에도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어야 한다.

더욱이 살수지왕 소리를 들으려면 진법에 대해 거의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

그런 천하진조차도 긴가민가할 정도로 이곳의 환상진은 수준이 높았다.

속단할 순 없지만 가히 강호 정상급 진법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햐, 여하간 좋긴 좋다.’

강호에서 은퇴하고 이런 곳에 큰 집을 지어서 살고 싶었다. 상상 속에서 꿈꿔 왔던 이상적인 집터가 딱 이랬다.

그가 입을 헤 벌리고 주변을 둘러볼 때였다.

“이리로.”

헉, 깜짝이야!

천하진은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

그의 시야에 큼직한 정자가 잡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정자였다. 저렇게 크고 고풍스러운 정자가 있었다면 몰랐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곳에, 곤룡포를 입은 남자가 등을 돌린 채 앉아 있었다.

꾸욱.

손가락이 절로 오그라들어 주먹이 쥐어졌다.

잠시 남자의 등을 바라보던 천하진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고도 조심스러운 보행.

그러자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스르륵.

그가 걸음을 내디딘 자리에서 풀들이 정강이까지 자라났다가 발을 떼자 곧바로 시들해지더니 바스러졌다.

다시 한 발을 디디면 또 다른 풀들이 올라왔고, 발을 떼면 시들시들 죽어 갔다.

한 걸음에 생명이 담기고, 두 걸음에 죽음이 스며든다. 하지만 정작 남자의 등을 보며 걷는 천하진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걸어가는 천하진.

고개를 숙여 입에 잔을 가져다 대던 남자의 눈이 번뜩였다.

‘생사(生死)?’

천천히 잔을 내려놓은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절벽 끝이었던 그의 세상을 조금씩 침범하는 평화로운 선경의 정취.

‘……재미있군.’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움찔!

어느새 정자의 맞은편 계단까지 도착한 천하진의 발이 덜컥 멈추었다.

뭔가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낀 것이다.

‘응?’

천하진은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았다.

세상은 이전과 같았다. 기화요초가 만발하고 사슴과 새들이 평화롭게 노닐고 있었다.

‘분명히 뭔가 요상한 기분을 느꼈는데?’

움찔!

순간 정체 모를 날카로운 통증이 등골을 타고 목 뒤까지 쭉 뻗어 올라왔다.

‘…….’

천하진은 움찔 놀라 목을 주물렀다.

마치 벌에 쏘인 것 같았다. 그 뾰족한 통증 덕에 정신이 확 들었다.

‘뭐랄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몽롱하기만 했던 그의 두 눈에 강한 빛이 어렸다.

‘여기, 위험하구만.’

심신(心身)은 결국 하나다.

단 하루도 마음 편한 적이 없었지만, 살면서 한 번도 누려 보지 못한 호강은 석 달 동안 그의 심신을 유연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평생 연마되어 온 살왕의 본능은 고작 석 달 만에 사라질 것은 아니었다.

지금껏 수도 없이 부르짖었던 본능의 외침이 처음 접하는 환경 속에서 다시 깨어났다.

그리고 알려 주었다. 이곳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 깊이 ‘이해’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천하진은 이제야 비로소 이곳이 진짜 위험한 곳임을 확실히 인지할 수 있었다.

얼마나 위험한 곳이냐고?

‘혼(魂)에 새겨진 육감마저 억누를 만큼!’

그가 계단에 한 발을 올렸다.

두근.

심장이 뛰었다.

두근두근.

서서히 들리는 시선이 하늘 위의 세상을 조금씩, 조금씩 열었다.

스륵.

마침내 정자로 올라온 천하진.

“앉거라.”

우우우웅.

기다렸다는 듯 치고 들어오는 착 깔린 목소리가 실로 압권이다. 천하진의 목젖이 꿀꺽 삼키는 침을 따라 출렁였다.

그의 시야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남자는 한쪽 팔을 짚고 비스듬히 앉아 나른한 움직임으로 술을 따르고 있었다.

쪼르르.

서서히 채워지는 잔.

하지만 천하진은 잔이 아닌, 남자 자체에 시선을 빼앗겼다.

‘크다!’

그야말로 장대한 체격이다.

얼핏 보아도 거의 칠 척에 달하는 체구에 좌우로 떡 벌어진 어깨는 산악을 연상케 했다.

손도 무척이나 커서 제법 굵은 술병이 손가락에 남김없이 휘어 감겼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대충 걸친 곤룡포 안에 받쳐 입은 내의는 가슴이 온통 드러나 보일 정도로

흐트러진 채였다.

터질 듯 굴강하면서도 매끈한 흉근과 상복근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반쯤 드러난 얼굴은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서리가 내리지 않은 풍성한 머리와 주름살 하나 없는 피부. 하지만 젊다는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무척이나 나른하고 퇴폐적인 분위기.

그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혈기 넘치는 젊음으론 결코 자아낼 수 없는 관록과 여유였다.

‘마교주!’

드디어 만나는 당대 천마신교의 주인.

역사상 아홉 번째로 천마의 신명을 받은 구대천마(九大天魔) 이천상(李天像)과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 * *

“삼공자께선 들어가셨는가?”

“그렇습니다.”

중년 사내, 신교의 대호법 무담(無潭)이 복잡한 눈으로 문을 응시했다.

말이 없는 무담.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의 옆에 시립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마음에 걸리는 문제라도 있으신지요?”

“…….”

“…….”

“…….”

“죄송합니다. 소인이 실언을 하였습니다.”

무담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교주님 치세 이래, 판마정에 교주님 이외의 타인이 들어간 적은 단 두 번뿐이다.”

담담한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긴장과 우려가 담겨 있었다.

“한 번은 이십오 년 전, 교주님께서 첫 제자를 받으셨을 때다.”

사내의 눈이 반짝였다.

“첫 제자 분…… 말씀입니까?”

“그렇다.”

“하면 대공자께서?”

“그렇지 않다. 대공자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이십 년 전 교주님의 제자가 되었다.”

“지금의 대공자가 있기 전 또 다른 제자가 있었다는 말씀이신지요?”

“그렇다. 그리고 네가 알지 못하는 그림자 속의 제자는 이곳 판마정에서 죽었다.”

“……!”

“마치 짐승들에게 뜯어 먹힌 것처럼 전신이 갈가리 찢겨 죽었지.”

사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교주님께서……?”

“교주님께서 그를 죽일 생각이셨다면 굳이 이곳으로 데려오지도 않으셨겠지.”

맞는 말이다. 그래서 더더욱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판마정이란 곳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사내는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교주님께서 애용하는 개인 정자가 있다는 사실만 알 뿐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에 들어간 또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총군사다.”

“……!”

“본교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지고한 권력자.

본교에서 유일하게 무공이 아닌 머리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남자. 그가 두 번째로 판마정에 들어간 사람이다.”

“그분은…….”

“그래. 당당히 걸어 나왔지.”

무담의 눈이 깊어졌다.

“오늘부로 판마정이 세 번째 열렸다. 삼공자는 과연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까?”

* * *

가득 차오르는 긴장감이 오금에 힘을 빼고 복부와 등허리를 두들겼다.

앉으라는 한 마디 이후, 이천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느릿한 동작으로 잔을 채우고 비우길 반복할 뿐이었다.

끼익. 끼익.

천하진은 가볍게 심호흡을 하며 다시 한 걸음, 한 걸음 걸었다.

그렇게 술상까지 다섯 걸음 정도 남았을 때.

“교주님을 뵙습니다.”

이천상의 눈이 빛났다.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네는 천하진. 그런 그에게서 은근한 정중함이 배어났다.

‘…….’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이천상이 한옆에 놓아두었던 잔을 맞은편으로 옮겼다.

쪼르르.

“받아라.”

허리를 편 천하진이 자리에 앉아 잔을 들었다.

찰랑이는 술. 독하면서도 고급스러운 향이 그의 머리를 아찔하게 했다.

잠시 눈을 감고 주향을 음미하던 천하진은 그대로 잔을 비웠다.

‘크으, 조오타!’

허구한 날 싸구려 백주만 퍼마시다가 이런 술을 마시니 손발 끝이 찌르르 울리는 기분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감탄사가 나올 뻔한 것을 참고 조심스레 잔을 놓은 그는 자세를 바로 하고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

다르구나.

작은 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이천상의 존재감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아무런 기세를 발하지 않는데도 태산 같은 위엄이 전해진다.

가벼운 손짓 하나, 짧은 숨소리 한 번에도 사람을 짓누르는 압박감이 짙게 배어났다.

‘마도대종사, 만마의 제왕이란 말이 무색하다.’

무공보단 정치에 능했지만 의천맹주 그 늙은이도 천하십대고수에 꼽힌 실력자였다.

철혈성주는 본 적이 없지만 아마 비슷한 수준일 것이다. 자신은 그런 둘보다 한 수 정도 아래라 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은 다르다.

십대고수라는 틀 안에 갇힐 이유가 없는 천하제일의 무신(武神)이 여기에 있다.

마인들이 신으로 떠받드는 것이 일견 수긍이 될 만큼, 아예 다른 차원에서 노니는 반선(半仙)의 강자였다.

감탄 이전에 의문이 들었다.

‘이렇게나 강하면서 왜 강호에 나서질 않았지?’

마도천하(魔道天下)에 흥미가 없었던 걸까?

천하진이 내심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날 보자 했다고?”

툭 던지듯 날아온 말에는 어떠한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실로 무심함의 극치였다.

“아, 예.”

“이유는?”

거 무지하게 싸늘하네.

그래도 나름 사제지간 아냐? 이쪽 동네 사제지간은 원래 이렇게 살벌한가?

왠지 무안해진 기분에 천하진은 괜히 헛기침을 두어 번 뱉었다. 어쨌든 이 양반, 말 돌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굳이 주절주절 변명하지 말고 솔직하게 가자.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부탁이라?”

의외였던 걸까. 이천상의 눈이 다시 한번 이채를 발했다.

“어떤 부탁을 말함이냐.”

줄어들지 않는 긴장감에 천하진이 침을 삼켰다. 막상 말하려고 하니까 좀 떨리긴 한다.

그래도 뭐, 자유를 찾으려면 그만한 판돈은 걸어야 하니까.

“커허험! 그…… 제가 말입니다.”

“…….”

“…….”

“…….”

“교를 나가도 될까요……?”

그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이천상은 말없이 천하진을 바라보았다.

천하진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에라이, 병신아! 좀 당당하게 말해라, 당당하게! 잠깐 외출 좀 하겠습니다! 바깥바람 좀 쐬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될 거 아냐?

교를 나가도 될까요? 이게 웬 앞뒤 다 잘라먹은 부탁이냐?!

‘……빌어먹을, 너무 살벌하잖아!’

무엇보다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고작 그 한마디를 내뱉는 데 등이 온통 축축해졌을 정도로.

‘어쨌든 말은 했어.’

허락해 주겠지?

그래, 허락해 줄 거야.

뭐 사고를 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외출이잖아? 몸도 이 지경이 됐는데 제자 부탁 하나 못 들어주겠어, 설마?

내친김에 보란 듯이 눈을 깔고 처연한 표정까지 지어 보였다. 긴장한 몸도 축 이완시켜 분위기 조성에 힘썼다.

자존심이 좀 상하긴 했지만 일단 여기서 나가면 살벌한 마교 인생도 끝이었다.

인간 천하진의 진정한 새 인생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걸 위해선 교주 앞에서 깨춤도 출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물끄러미 천하진을 응시하던 이천상이 잔을 들었다.

“따르라.”

“아, 옙.”

천하진이 공손하게 그의 잔을 채웠다.

느릿하게 잔을 비운 이천상이 입을 열었다.

“교를 나가고 싶다?”

“그렇습니다.”

“본교와 연을 끊겠다는 것이냐?”

천하진이 눈을 끔뻑였다.

어…… 그럴 예정이긴 한데. 내가 당신한테 한 말은 그냥 교를 나가겠단 말이었는데?

아! 생각해 보니 이게 오해의 소지가 있구나?

천하진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었냐면…….”

“내 제자라는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느냐?”

“예? 아, 아뇨! 그런 말이 아니라…….”

“허면 몸이 그 지경이 되었다고 벌써 포기한 겐가?”

“그게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놈이었던가?”

사아아아악.

이천상의 눈이 깊게, 한없이 깊게 가라앉았다.

천하진의 목젖이 위아래로 사정없이 오르내렸다.

‘……시바.’

좆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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