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교주 대면 (4)
주르륵.
이마를 타고 내려온 땀이 눈가를 적셨다.
우우우우우웅!!
이명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냥 눈빛 한번 변했을 뿐인데 훈훈했던 봄바람이 겨울의 삭풍으로 돌변한 듯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실망이군.”
툭, 던지듯 내뱉은 이천상이 자신의 잔을 채웠다.
천하진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래? 아니 그냥 외출만 좀 하겠다잖아? 그리고 사람이 말을 하면 제발 끊지 말고 들어라!
머릿속을 뱅뱅 맴도는 말들은 하나같이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천하진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교주님.”
이천상은 그를 쳐다도 보지 않고 그저 천천히 잔을 비웠다가 다시 따르기를 반복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
“오해라?”
여전히 무심한 목소리. 도대체 이 양반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파악이 안 된다.
‘미치겠네! 표정을 읽을 수가 없잖아!’
그걸 떠나 저렇게 말을 딱딱 끊어 대니 입도 쉽게 못 열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정작 판을 깐 건 자신인데 땀만 한 바가지 쏟다 돌아갈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천하진은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고민을 거듭했다.
어떻게 하지? 엄청나게 화난 것 같진 않지만 그렇다고 즐거워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하긴, 기쁨에 겨울 만한 말은 하나도 없었지.
찰나지간 미친 듯이 통밥을 굴리던 천하진은 어느 순간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었다.
‘……젠장.’
시발, 모르겠다.
이제는 정공법밖에 답이 없다. 빙빙 돌려서 말하는 걸 독사보다도 싫어하는 양반이 분명하다.
심지어 자기 생각이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 같다.
오냐! 나 여기랑 연 끊고 싶다! 당신 생각이 맞긴 맞아! 인정해!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시원하게 질러나 보는 거다!’
인생 한 번 살지 두 번…… 살지 세 번 사냐?!
어차피 한 번 뒈졌던 몸이시다. 또 한 번 죽는다고 아쉬울 것도, 겁날 것도 없다.
“교주님!”
우렁찬 시작.
천하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는……!”
그때였다.
우웅!
‘……!!’
그의 몸이 쩌저적 굳어졌다.
이천상의 표정은 이전과 다를 바 없이 무심했다. 딱히 내력을 방출하거나 존재감을 발산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천상천하 유일무이한 마신(魔神)의 안광을 들여다본 천하진은 뼈마디가 얼어붙는 감각을 맛보았다.
무간지옥의 불길을 담은 눈동자.
절대자의 안광은 그 자체만으로도 위엄이요, 협박이며 공포였다.
쓸데없는 언행으로 자신을 증명하지 않아도 스스로 완성된 자가 거기에 있었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이치를 농락하고 하늘마저 불태울 당대 최강의 마신이
아직 사람의 탈을 벗지 못한 사신(死神)을 단숨에 집어삼키려는 순간.
“……아, 딱히 연을 끊으려고 하는 건 아니고요.”
이천상의 눈이 빛났다.
“허면?”
천하진이 떠듬떠듬 말했다.
“바깥바람이나 좀 쐬려고요.”
“…….”
“제가 그…… 몸이 나은 지 얼마 안 되지 않았습니까. 와중에 무공도 상실했고요.”
“해서?”
“이래저래 좀 복잡스럽다, 이겁니다. 이게 참 저도 마음을 다잡으려고 했는데요. 그게 영 쉽지가 않더라고요.”
“…….”
“그, 그래서 외출이나 좀 해 볼까 해서…… 그 부탁을 드리려고 왔습니다. 네, 그렇죠. 그겁니다.”
“…….”
“제가 언감생심 어찌 본교와 연을 끊으려 들겠습니까, 푸하핫! 저 천…… 서량! 어디 안 갑니다! 암요.”
이천상의 눈이 가느다랗게 뜨였다.
참새처럼 조잘대는 제자를 바라보는 눈빛에 의외라는 감정이 깃들었다.
“그런가.”
“예예, 그렇습니다.”
“허면 고작 외출 허가나 받아 보겠답시고 날 보자 한 것이냐?”
……아?
‘이, 이런 젠장.’
천하진은 본인의 단순함을 저주했다.
생각해 보면 진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만마지존이라는 천마신교의 교주와 대면하자고 한 이유가 다른 것도 아니고 ‘고작’ 외출 허가에 불과하다니?
누가 들어도 기가 찰 수밖에 없다. 최소한 외출 허가라는 이유보다는 중요한 사유를 들고 왔어야 했다.
이러니 연을 끊네, 마네 하는 소리를 했지. 절연 정도면 대(大) 천마신교의 교주를 만나자고 한 이유로 충분할 테니까.
‘나한테는 외출 자체가 중요한 사유라고!’
근데 상대도 그걸 중요하다고 생각할까?
“……오랜만에 사부님 존안도 뵙고 싶었고요.”
이천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처음으로 보인 표정 변화였지만 천하진은 쉴 새 없이 조잘대느라 그걸 인지할 겨를이 없었다.
“이 지경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제자 된 도리라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
받은 은혜의 백분지 일도 갚지 못했는데 인사도 제때 못 드리는 것 같아서 참 마음의 짐이…….”
이왕 내친걸음이다. 천하진은 최대한 상대의 감성을 자극하려 노력했다.
빚진 돈은 갚을 수 있어도 빚진 마음은 못 갚는다고 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사제지간 역시 혈육처럼 천륜(天倫)으로 맺어진 관계 아니겠나.
이 돌덩이 같은 양반에게 감정이란 게 있는진 모르겠지만, 제자가 사부 보고 싶어서 왔다는데 설마 화라도 내겠어?
푸스스스.
이천상의 손에 들린 잔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표정은 여전히 무심했지만 활활 타오르는 그의 안광이 그의 뒤틀린 심사를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왜 화를 내?!’
사아악!
무거워진 공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제자의 도리라 했느냐?”
“예?”
“도리를 안다면 그따위 몸뚱이를 하고 내 앞에 나타나면 안 되었다.”
천하진이 입을 쩍 벌렸다.
주화입마에 들었다 기사회생한 제자가 인사차 왔다는데 도리를 모른다고?
뭐야? 내가 이상한 거야? 아니, 나 정말 몰라서 그래. 이게 왜 도리를 모르는 거람? 누가 좀 가르쳐 줘 봐!
이천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쿠웅!
앉아 있을 때도 무시무시했지만 일어나니 정말이지 태산처럼 거대했다.
등을 돌린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사흘 후, 사람을 보내겠다.”
“……?”
사흘? 사람?
“돌아가라.”
돌아가라니? 거처로 가라고?!
천하진은 어안이 벙벙했다.
잠깐만요! 그럼 내 요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외출은? 그냥 내 멋대로 확 나가 버려도 되는 거야? 진짜로 그렇게 할까?
“저…….”
이천상이 천하진을 힐끔거렸다.
울컥!
말 없는 눈짓에 왠지 모르게 화가 났다.
이 양반이 보자 보자 하니까 아까부터 제 알아들을 소리만 해 대잖아?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라는 게 없는 거냐? 대화의 본질이란 것에 대해 알기는 아는 거냐고! 엉?!
나, 이래 봬도 천하십대고수로 꼽혔던 초고수라 이거야!
천하진은 분연히 일어났다.
그리고 공손하게 허리를 접었다.
“나중에 뵐게요.”
일단 돌아가자.
* * *
“부르셨습니까, 교주님.”
“음.”
태사의에 앉아 무담의 인사를 받은 이천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벅저벅.
고작 걷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긴장케 한다.
천하십대고수에 비해 모자람이 없다는 무담조차 이천상이 다가오자 솜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쪼르르.
어느새 창가 옆으로 이동한 이천상이 여러 술병 중 하나를 따서 잔을 채웠다.
무담은 여전히 오체투지를 고수한 채였다.
“이리 오게.”
“예.”
자리에서 일어난 무담이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이천상에게 다가갔다.
이천상이 잔을 내밀었다.
“한잔하지.”
“황공하옵니다.”
공손히 잔을 받은 무담은 고개를 돌려 잔을 비우곤, 곧바로 세 걸음 물러난 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상대에 대한 극도의 공경이 없다면 나오기 힘든 태도다. 인간의 몸에 현신한 신(神)을 대하는 대호법의 자세는 그러했다.
이천상이 담담하게 물었다.
“셋째에게 그간 무슨 일이 있었지?”
무담의 얼굴에 의아함이 담겼다. 그간 이천상이 제자들에 대해 묻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궁금했지만 호기심은 가슴에 묻는 것이 신을 모시는 자의 도리.
“거처에서 몸을 회복시켰습니다.”
“단순히 그게 전부인가?”
“……예.”
“그렇군.”
짤막한 대답에 담긴 무심함은 여전했다.
하지만 이천상을 수십 년간 모셔온 무담은 알 수 있었다. 지금의 교주님은 평소와 조금 다르다는 것을.
감히 추측하는 것조차 불경한 일이지만 굳이 떠올려 보자면…….
‘흥미?’
누구에게? 설마 삼공자에게?
내심 고개를 갸웃거리던 무담은, 잠시 후 나오는 이천상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제법이더군.”
“……?”
“이무기인 줄 알고 주웠는데 알고 보니 독사였어. 그래서 실망했었지.”
“예?”
“오늘 다시 보니 주둥이에 여의주를 물고 있더군.”
무담의 눈이 흔들렸다.
이천상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대단히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천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을 것 같은 표정이 변한 것만으로도 놀라웠다.
이천상은 판마정 때를 떠올렸다.
셋째가 보여 준 그 신비롭고 놀라운 광경을.
‘마에서는 멀어진 대신, 죽음(死)을 ‘이해’하고 있었어.’
판마정.
마(魔)를 판별(判)하는 정자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곳에 둘러쳐진 진법은 상고(上古)의 절진을 매 세대 발전시킨 것으로, 교주의 마기(魔氣)로 유지되는 최상위 공부였다.
마를 판별하다.
마는 곧 교주가 데려오는 대상이며, 그것을 판별하는 것은 교주와 진법이다.
교주의 마기로 유지되는 진법이니 판마정의 주인은 교주일 수밖에 없었다.
판마정은 진 안으로 들어오는 자의 마음을 형상화한다.
현 상태는 물론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까지 전부 보여 주는 것도 모자라, 무의식의 영역까지 일부 드러낸다.
만약 대상이 되는 사람이 교주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교주의 마음에 한 줄기 살기라도 일어난다면?
그때는 교주의 의지에 따라 판마정이란 마진(魔陣)이 대상을 공격한다. 진정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즉시 참혹하게 파괴하는 것이다.
사람의 속내를 알아보기 위한 최고의 방법이다. 하지만 판마정을 무한정 열어 놓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판마정의 개진(開陣) 방법, 시간, 이후 다시 열 수 있는 기간은 오로지 교주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고죽림(孤竹林)은 잘 관리되고 있나?”
“예? 아, 예! 이틀에 한 번씩 호법원(護法院)의 인원들을 차출하여 관리하고 있습니다.”
“사상자는?”
“한 달 평균 다섯 명의 사상자가 나옵니다만, 다행히 최근 넉 달 동안 사망자는 없습니다.”
“애들을 잘 키웠군.”
이천상이 잔을 비우곤 무담에게 내밀자 무담이 조심스레 그의 잔을 채웠다.
하지만 여전히 이천상은 잔을 내민 채였다.
“같이하지.”
“예?”
이천상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무담은 황송하다는 듯 본인의 잔을 채운 뒤,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찡!
잔과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무척이나 청아했다.
한 사람은 시원하게, 한 사람은 공손히 잔을 비웠다.
“그간 고생했다고 주는 선물일세.”
“아,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무담의 얼굴이 격정으로 물들었다. 설마하니 교주님께서 건배까지 제안해 주실 줄은 몰랐던 것이다.
천상의 감로주도, 경국지색의 유혹도 이보다 감미롭진 않을 것이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잊지 못할 선물이었다.
그가 교주의 선물에 취해 있을 때.
“잠시 애들을 물리지.”
“……예?”
잔을 놓은 이천상이 태사의로 올라가 앉았다.
“셋째를 고죽원으로 보낼 걸세.”
무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고죽원으로…… 말씀이신지요?”
고죽원이 신교에서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아는 그였다.
그리고 그 중요도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위험하다는 것도.
이천상이 턱을 괴었다.
무심하기만 한 얼굴 위에 떠오른 흥미를 읽은 건 무담의 착각이었을까?
“바람 쐬기에 알맞은 장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