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인외마경(人外魔境) 고죽림(孤竹林) (2)
이틀이 지났다.
“공자님.”
“…….”
“물을 떠 왔습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역시나 없었다.
마동필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뭔가 충격이라도 받으신 겐가.’
이틀 전, 고죽림 내의 거처로 들어오신 삼공자님께선 식음을 전폐하고 침상에 앉아 멀거니 창가만 바라보셨다. 잠이라도 주무셨으면 좋겠는데 밤새도록 뜬눈이었다.
그렇다고 넋을 놓고 멍하니 앉아 계시기만 한 건 아니었다.
진지한 얼굴로 무언가를 궁구하시는 듯한데, 그게 뭔지 지켜보는 입장에선 알 수가 없었다.
‘몸이 상하실 텐데.’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억지로 존체에 손을 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결국 말 거는 것을 포기한 마동필이 몸을 돌릴 때였다.
“음? 아침이네?”
깜짝 놀란 마동필이 천하진을 바라보았다.
천하진은 세수하듯 양손으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마동필이 냅다 무릎을 꿇었다.
“사색이 끝나셨는지요?”
“어? 뭐, 그렇지. 벌써 날이 샌 줄은 몰랐지만.”
“날이 샌 정도가 아닙니다, 공자님. 이틀이 지났사옵니다.”
“이틀?!”
“예.”
“어쩐지 시바, 뱃가죽이 푹 꺼졌다 했네.”
“송구하옵니다.”
“너희는 맨날 뭐가 그렇게 송구하냐…….”
이틀 동안 잠도 안 자고 물도 못 마신 그의 얼굴은 병자 뺨칠 만큼 수척해져 있었다.
“물 있어?”
“예!”
마동필이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바가지를 건넸다.
천하진은 바가지에 담긴 물을 그대로 입에 쏟았다.
“꿀꺽꿀꺽! 꾸르륵!”
꿀꺽이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물이 그의 입 안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헉!’
마동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설마 저 많은 냉수를 호걸들 술잔 비우듯 들이켜실 줄은 몰랐다. 피폐해진 몸으로 냉수를 한 바가지나 비웠으니 속이 적잖이 뒤집힐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꺼억! 시원타.”
“고, 공자님!”
“왜.”
“……괜찮으십니까?”
천하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그나저나 여기 물맛 좋네. 한 바가지만 더 부탁해도 되겠냐.”
“무, 물론입니다.”
“이번에는 좀만 데워 주라. 옥수수 뽀개질 것 같다.”
“명을 받듭니다!”
그가 화살처럼 튀어 나가자마자 천하진은 침상 위로 벌러덩 누워 버렸다.
“음, 그래. 이제 좀 생각이 정리가 되네.”
편안해진 몸과 달리 그의 얼굴은 무섭도록 굳어 있었다.
“나 못 나가네.”
당장은, 이란 말이 빠지긴 했지만…… 뭐 어쨌든.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던 그가 피식 웃었다.
“기를 쓰고 악을 써도 못 나가.”
일이 이쯤 되니 하릴없이 웃음만 나왔다.
그 당연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이틀이나 소모한 스스로가 놀라울 지경이었다. 깨어났을 때부터로 치자면 무려 백 일이 넘은 시간 아닌가.
이제 더는 흔들리지 않는다. 쓸데없는 생각으로 시간 낭비도 않는다.
그럴 시간이 없었다.
‘군사부? 마신궁? 다 의미 없었다. 처음부터 가능한 일이 아니었어.’
자신이 왜 필요 이상으로 불안해했는지, 왜 당장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을 깨달았다.
꿈? 아니다.
마교에 대한 편견? 더더욱 아니다.
이 몸이 천마신교의 삼공자라는 걸 알자마자 즉각 도주해야 한다고 생각한 진짜 이유.
“……불편했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 불편함을 자아내는 것은 공기 중에 흐르고 있는 미묘한 불길함이었다.
‘깨닫는 게 너무 늦었어.’
살왕으로 불리던 시절 그는 초감각이란 선물을 얻었다.
딱히 얻으려고 해서 얻은 건 아니었다. 매 순간 죽음의 위협을 겪다 보니 저절로 터득하게 된, 말하자면 선천적인 재능과 후천적인 환경이 어우러져 개화한 능력이었다.
그리고 그 초감각을 증폭시키는 천라육통식(天羅六通式)이란 무공을 창안해 암살계의 전설이 되었다.
‘초감각은 무공이 아니다. 교주와 만났을 때 느꼈었던 것처럼, 이건 내 영혼에 새겨진 감각이야.’
천하진이 씁쓸하게 웃었다.
‘언제부터 무공이라 착각하고 있었지?’
그걸 착각하지 않았다면 더욱 쉽게 상황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었을 텐데.
“아니, 어쩌면 더 혼란스러웠을 수도 있었으려나. 젠장! 이거 도움이 되는 능력이야, 안 되는 능력이야?”
강호인이 접하는 죽음과 살수가 접하는 죽음은 다르다.
강호인은 창칼을 들고 싸우지만, 살수는 ‘순간’이라는 시간과 싸우기 때문이다.
단 한 번의 완벽한 순간을 위해 살수는 인내하고 집중한다. 사흘이 됐든 열흘이 됐든 오로지 그것만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을 얼마나 제대로 포착하는지, 어느 정도의 집중을 유지할 수 있는지가 암살자로서의 재능을 판가름한다.
천하진은 천재였다. 적어도 암살에 있어선 천하제일이란 말이 무색할 만한 천재였다.
의천맹은 그런 천재를 제대로 관리도 안 한 주제에 매 순간 죽음의 늪에 던져두었다. 심할 때는 하루에 세 번이나 암살행을 하러 나간 적도 있었다.
역사 이래 누구보다도 많은 목표물을 제거한 살수.
역사 이래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죽음’과 접해 온 살수.
천하진의 초감각은, 그의 인생 역경을 생각하면 실로 얻어 마땅한 능력이었다.
그리고 지금.
스스로가 누구인지 제대로 깨닫지 못했던 천하진이 살왕으로서의 정체성을 완벽하게 되찾았다.
“어찌 되었든 여기서 나가는 게 맞아. 하지만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지.”
본질 직시, 상황 이해.
“그렇다면 난 당분간 마교의 삼공자 서량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
현실 인정, 이후 설계.
“삼공자로서의 욕망, 그리고 내 미래를 위한 욕망 중 겹치는 것은?”
교차 검증, 그리고…….
“강해져야겠군.”
결론 도출.
천하진의 눈이 빛났다.
“강해져야 해. 다른 무엇보다도 강해지는 게 우선이다.”
약자는 도태되는 세상.
그리고 천마신교는 강자존을 앞세워 무림의 다른 어느 세력보다도 그 약육강식의 법칙을 철저하게 지키는 집단이었다.
도태되어 쫓겨나기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방법 따윈 애초에 고려 사항이 아니니만큼, 그가 서량으로서 이곳에서 살아가려면 반드시 강해져야 했다.
천하진의 미래를 봐도 마찬가지였다. 강호에서 떠날 생각은 있지만, 무공까지 포기하고 싶진 않다.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는 게 세상일이라지 않나. 안전한 삶을 위해서라도 무공은 필요했다.
결국, 죽으나 사나 그가 걸어야 할 길은 오로지 하나.
무(武)였다.
‘더 이상 잔머리 따위는 쓰지 않아. 내 발로, 내 능력으로 당당하게 나간다.’
그가 결심을 단단히 굳힌 그때, 문이 열리고 마동필이 들어왔다.
“공자님, 물을 떠 왔습니다.”
“고마워.”
적당히 미지근하게 데워진 물을 그대로 비워 낸 천하진이 말했다.
“마 씨.”
“예, 공자님.”
“앞으로 날 부를 때 서 공자라고 불러 줘.”
“……예?”
스윽.
천하진이 말없이 마동필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마동필은 전신에 소름이 쫙 돋는 걸 느꼈다.
자신을 보는 삼공자의 눈빛이 극도로 투명했다. 사람인 듯, 귀신인 듯 모호한 안광이 섬뜩한 공포를 자아냈다.
마동필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명을 받듭니다, 서 공자님.”
천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난 서량이다.’
이곳에서 나가기 전까지, 스스로의 삶에 당당해지기 전까지는 오롯이 서량이란 이름으로 살아갈 것이다.
“배고프다. 밥 먹자.”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반 시진 후, 지나친 음수량과 과식으로 속이 뒤집힌 천하진은 폭풍 같은 설사와 함께 탈진했다.
* * *
당당하게 내 능력으로 나가겠다는 다짐은 시간이 지날수록 굳건해졌다.
고죽림으로 들어온 지 닷새째 되던 날.
“됐다!”
천하진, 아니 서량은 외마디 외침과 함께 주먹을 불끈 쥐었다.
“몸이 완전히 나았어.”
더할 곳, 뺄 곳 없이 완벽하게 정상이 되었다.
약간의 내상도 남지 않았고 전신 근육에선 활력이 넘쳤다. 너덜거렸던 혈도들도 뽀송뽀송하게 나았으며 오장육부의 기능은 제 나이 이상으로 건강하고 활발해졌다.
무애공의 성장 역시 고무적이었다.
‘사단공!’
무애공이 사단공을 돌파했다. 덕분에 체내의 탁기를 뽑아내는 작업이 몇 배나 빨라졌고, 정화진결의 청정 능력도 훨씬 강해졌다.
‘이제야!’
서량의 얼굴에 뿌듯함이 번졌다.
‘이제야 제대로 된 기반이 잡혔어.’
지금부터가 진정한 무도(武道)의 시작이다. 재능 넘치는 몸에 살왕으로 살며 얻었던 깨달음을 때려 박으면 굳이 영약이 없어도 단시간 내에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우우웅!!
서량이 눈을 감았다.
몸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기이한 울림.
눈을 뜨지 않아도 세상이 보였다. 정확히는 보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새들의 지저귐, 날벌레들의 날갯짓 소리, 하다못해 꿈틀거리는 지렁이의 몸부림까지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천라육통식(天羅六通式).
본인의 초감각을 극대화하여 심안(心眼)을 여는 공부였다. 내공이 일천한 지금은 고작 반의반 각도 운용하기 힘들지만, 쓸 수 있다는 게 어딘가?
“좋아! 어디 한 번 날아 볼까!”
무애공, 천라육통식, 그리고 암영기(暗影氣).
기타 살법(殺法)과 외가 무공들에 대한 지식도 충만했지만, 저 세 가지 무공이야말로 살왕의 전설을 만들어 준 근본 무공들이라 할 수 있었다.
무애공도, 천라육통식도 쓸 수 있겠다, 이제 구파일방의 비전들을 긁어모아 만든 암영기만 익히면 금세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꿈과 희망에 부풀어 희희낙락 암영기의 구결을 외기 시작한 서량.
잠시 후.
“잠깐.”
서량의 눈이 툭 불거졌다.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봉착한 것이다.
“암영기……를 익혀도 되는 건가?”
여기 천마신교잖아.
그리고 난 천…… 아니, 삼공자 서량이잖아.
서량이 원래 알고 있던 마공이 있을 거잖아. 아마도 교주가 직접 가르쳐 준 마공을 몸에 붙이고 있었을 테잖아.
근데 난 그게 뭔지 모르겠네?
‘이, 이런 시바!’
넌 도대체 뭐가 이렇게 어설프냐!
한차례 머리를 싸쥔 서량이 빽 소리를 질렀다.
“마 씨! 마 씨이이!”
잠시 후, 대숲 어딘가에서 마동필이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뭔 작업을 하고 있었는지 소매까지 둘둘 걷어붙인 몸은 꽤 지저분해져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서 공자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하문하시옵소서.”
“교주님의 제자, 그러니까 나랑 사형제들 중에서 말이야.”
“예.”
서량이 침을 꿀꺽 삼켰다.
“마공을 익히지 않은 놈도 있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마동필의 미간에 작게 주름이 잡혔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모두 교주님께서 직접 하사한 강력한 마공들을 연성하고 계시지요.”
“…….”
“서 공자님께옵서도 입마에 드시기 전까지 익히신 마공이 있지 않으십니까?”
“그, 아, 알지! 암, 알고 있지!”
“예에.”
“…….”
“…….”
“혹시 말이야.”
“하문하시옵소서.”
“만약에, 아주 만약에 말이지.”
서량이 긴장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교주님의 제자가 마공이 아닌 다른 무공을 익히면 어떻게 되지?”
“……예?”
어지간해서는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마동필이다. 방금의 질문에 그가 얼마나 얼이 빠졌는지 알 수 있었다.
“저는 서 공자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송구하옵니다.”
“그냥 문자 그대로야! 마공을 안 익히면 어떻게 되는 거야?”
“그, 그것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부분이었다. 마인인데 마공을 익히지 않는다고? 그걸 마인이라 부를 수 있나?
마동필이 떠듬떠듬 말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싶습니다만…….”
서량은 완전히 절망했다. 마동필의 반응을 보니, 그런 놈들은 마인이라 불릴 자격도 없는 개자식으로 여기는 게 분명했다.
그래, 솔직히 거기까지도 상관은 없다. 차라리 그래서 쫓겨난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문제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공자, 공녀님들께서 마공을 익히시지 않는다면 교주님께서 상당히 불쾌해하실 것이라 감히 예상을…… 해 봅니다.”
“…….”
“송구하옵니다.”
서량이 고개를 푹 숙였다.
마동필은 당황했다. 공자님께서 왜 또 이러시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마 씨.”
“예, 서 공자님.”
“삼공자 권한으로 대여할 수 있는 마공 비급 좀 싹 구해다 줘.”
서량이 고개를 들었다.
입을 열려던 마동필은 흠칫 놀랐다.
웃는 듯, 우는 듯 기괴한 표정의 서량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빨리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