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인외마경(人外魔境) 고죽림(孤竹林) (3)
“마공 비급?”
“……예.”
무담이 고개를 천천히 모로 기울였다.
갑자기? 왜? 비급들을 보고 뭔가 자극이라도 얻으려는 걸까?
마동필이 짧게 읍한 뒤, 마저 말을 이었다.
“서 공자님의 명패가 호법원에 보관되어 있다기에 일단 그것부터 찾아서…….”
순간 무담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서 공자님?”
마동필은 아차 했다.
“실은…….”
그는 서량과의 대화를 무담에게 고했다.
무담이 눈살을 찌푸렸다.
“공자님께서 직접 그리 요구하셨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
모르겠다. 도무지 삼공자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다.
‘정말 정신에 해를 입기라도 하신 겐가.’
입마에서 깨어난 이후, 삼공자가 보이는 모습들은 하나같이 이질적이었다.
교주님의 말씀을 듣곤 혹시나 해서 시녀인 앵화에게 이것저것 물어본 적 있었다.
그때 앵화의 말 중 의미심장한 것들만 추리자면…….
- 이전의 삼공자님과는 많이 다른 모습을 보여 주셔서…….
- 말투나 행동들에서 조금 혼란스러워하시는 모습들이…….
- 아뇨! 그게 난폭하시다는 뜻이 아니라…… 그저 어쩔 줄 몰라 하신다는…….
그리고 지금 마동필의 보고까지.
‘정말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 같군.’
그가 아는 삼공자는 재능은 있지만 지나치게 오만하고 탐욕스러웠다. 당연히 본인보다 아래라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라는 게 있을 리 없었다.
말 그대로 폭군. 거슬리면 죽이고 이유 따윈 없어도 죽인다. 삼공자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입마에서 깨어난 뒤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잠시 고민을 거듭했던 무담이 품에서 황금빛 열쇠를 꺼내 들었다.
“받아라.”
“……!”
마동필의 눈이 흔들렸다.
“원주님, 그것은…….”
“알다시피 대여 기간은 사흘이다. 다른 비급들과 섞어서 서너 권 가져가도록.”
“……알겠습니다. 출고 허가서를 작성해 주십시오.”
무담은 곧장 허가서를 작성하고 직인을 찍은 뒤 그에게 건넸다.
“무슨 일이 있으면 곧바로 내게 연락하도록 하라.”
“예!”
“아, 그리고 공자님께 고죽림에 대해 설명은 드렸나?”
“아직입니다. 오늘 드리려 합니다.”
무담이 눈살을 찌푸렸다.
“고죽림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잘 알지 않나. 거처 부근은 안전하다지만 그곳도 완벽하진 않다.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만 되도록 빨리 설명드리도록 하라.”
“예.”
“이만 가 보도록.”
한차례 허리를 깊이 숙인 마동필이 사라졌다.
창가로 걸어간 무담의 얼굴은 제법 어두웠다.
‘교주님께선 대체 삼공자의 무엇을 보고 고죽림에 보내셨을까.’
고죽림.
천마신교가 십만대산에 자리를 잡기 이전부터 있었던 마림(魔林)이다.
초대천마(初代天魔)라는 절대강자가 있었을 뿐, 세력은 크지 않았던 신교를 단시간에 거대 문파로 성장할 수 있게 해 준 선물이자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헤아릴 수 없는 마인들의 목숨을 날려 버린 원흉이기도 했다.
연(緣)이 닿는 자에겐 최고의 선물을 줄 것이나, 연이 닿지 못한 이는 죽음의 구렁텅이로 끌고 간다.
이것이 지금껏 고죽림에 거처를 둔 이들 중 멀쩡히 걸어 나온 사람이 손에 꼽히는 이유였다.
“판마정에 고죽림까지. 삼공자님은 벌써 두 번이나 교주님의 시험대에 올랐군.”
판마정에선 합격점을 받았다.
고죽림에선 과연 어떻게 될까? 탈락하면 죽고 합격하면 살아남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삼공자의 운명은 어느 곳을 선택할까?
* * *
“하나, 둘, 셋, 넷…… 열일곱.”
“…….”
“열일고옵?!”
마동필이 읍했다.
“가장 좋은 것들만 추려 왔기에 권수가 많지는 않사옵니다.”
서량은 기가 차는 걸 느꼈다.
이게 많지 않다니? 많아도 너무 많은 게 아니고?
‘뭐, 상관없나.’
참고할 수 있는 서적이 많다는 건 그에게도 좋은 일이다. 마공(魔功)이란 체계에 대해서 제대로 파헤칠 수 있다는 뜻이니까.
물끄러미 비급들을 응시하던 서량의 표정이 불현듯 찝찝해졌다.
‘빌어먹을! 이젠 하다 하다 마공까지 익혀야 하나.’
속으로 툴툴거리던 그는 문득 드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편견을 가지지 말자. 마공을 신공(神功)의 아래라고 생각하는 순간 본질을 꿰뚫어 보기 어려워진다.’
맑고 투명하게 직시하자. 마공이란 새로운 체계를 공부한다고 생각하자.
……일단은 말이지.
‘게다가 교주도 마공을 익혔잖냐.’
마교주에 대한 소문이야 워낙 무성했지만, 결국 천하제일인은 정파 무림 쪽에 있을 거라 생각했다.
대단한 착각이었다. 적어도 서량이 본 마교주는 정파 무림의 어떤 초고수들과도 격을 달리하는 강자 중의 강자였다.
‘단순히 재능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경지가 아니야. 마공 중에도 그만큼 고차원적인 무공이 있다는 것이겠지.’
올바른 생각이었다.
‘그리고 뭐, 정 아니다 싶으면 다 토해 내면 그만이고.’
나한텐 무애공이 있잖아? 회복력 하나는 천하의 누구보다도 자신 있다.
생각을 정리한 서량이 곧바로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그때, 마동필이 말했다.
“서 공자님. 미리 말씀드릴 것이 있사옵니다.”
“어, 말해.”
“열일곱 권의 책 중 세 권은 사흘 뒤 반납해야 합니다. 시간이 없으시다면 그 세 권부터 읽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서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 권? 사흘?”
“그렇습니다.”
“그럼 다른 것들은?”
“공식적으로는 보름이지만 모두 필사본이라 한 달 후에 입고하셔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도대체 그 세 권의 비급들은 뭔데 사흘 뒤에 입고하란 거지?”
역시 공자님께선 기억에 이상이 오신 게 분명해.
마동필이 조심스럽게 세 권의 책자를 골랐다.
서량의 눈이 반짝였다.
‘오호?’
이건 딱 봐도 필사본이 아닌데?
“이 세 가지는 본교의 십대마공(十大魔功)입니다.”
십대마공.
천마신교에서도 고르고 고른 정상급 마공들로 그중 하나만 대성해도 천하를 오시(傲視)할 수 있다는 일대절학들이었다.
“아시다시피 대공자님, 이공자님 그리고 삼공자님에게까지 허가되었습니다.”
“그으래?”
“혹, 기억이 안 나시는지요?”
잠시 마동필의 눈치를 보던 서량이 냉큼 양 엄지를 들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안 나. 내가 괜히 비급들이 필요하다고 했겠어?”
역시…….
마동필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맺혔다.
과거의 삼공자님이 얼마나 난폭했는지는 온 마교에 잘 알려져 있다. 마동필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막상 기억을 잃었다 하니 인간적인 연민이 들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얼마나 답답할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물론, 그 안타까움은 아주 잠깐에 불과했다.
‘어쩌면 자업자득일지도.’
마동필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생각 자체가 불경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어쨌든, 사흘이라 이거지? 그럼 뭐, 이것들부터 읽어 보면 되겠네. 알았다.”
“아, 그리고…….”
말을 이으려던 마동필이 주춤했다.
어느새 서량은 십대마공 중 하나, 혈화마공(血禍魔功)을 읽고 있었다.
뭐라 말을 걸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몰두한 듯 눈알이 돌아가는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입술을 달싹이며 잠시 망설이던 마동필은 결국 길게 한숨을 쉬었다.
‘별수 없지.’
고죽림이 어떤 곳인지 설명드리려 했지만 이번에도 실패다. 다른 것도 아니고 사흘 안에 독파해야 할 최고급 비급 중 하나를 읽고 계신다. 집중을 깨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낌새도 보이지 않고 설치도 잘해 놓았으니.’
‘놈들’이 격렬하게 움직이는 시기는 보름 뒤에나 찾아온다.
게다가 이곳은 고죽림에서 가장 안전한 지역이었다. 어지간해선 ‘놈들’이 찾아오는 곳도 아니고, 나타나 봤자 크게 위험한 놈들도 아니니까.
꾸욱.
허리춤의 검을 움켜쥔 마동필의 얼굴에 결연한 빛이 감돌았다.
‘그래도 긴장하자.’
그가 조심스레 방을 나섰다. 서량에게 방해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응?”
서량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야?”
누군가가 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는데?
괜히 목 뒤를 주물러 본 서량이 다시 책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이 마공이란 놈들, 하나 같이 흉악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심오한 면이 있다.
예상외의 흥미를 느낀 서량이 다시 혈화마공에 빠져들었을 때.
번쩍!
창가 너머, 우거진 대숲에서 한 쌍의 푸른 안광이 번뜩였다.
* * *
사흘이 지났다.
“다 읽으셨는지요?”
“어어, 가져가.”
마동필은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량은 십대마공 세 권만 읽은 게 아니었다. 그 외에 열 권이 넘는 마공 서적들을 모조리 독파한 것 같았다.
“이걸…… 다 읽으셨습니까?”
“어.”
“…….”
“왜?”
“아, 아닙니다.”
정말 이걸 다 읽었다고?
단순한 독서로도 독파할 수 있을지 의심되는 양이다.
심지어 읽기만 했을 리가 없다. 각 마공의 특성들을 읽고 분해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테니까.
사흘 만에 서너 권만 남기고 거기까지 끝냈다고? 그게 가능한가?
얼이 빠진 듯한 그를 힐끗 본 서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 해? 가져가.”
“아, 예!”
“그리고 올 때 쓸 만한 병장기들 좀 추려서 가져와 봐.”
“어떤 병장기 말씀이신지요?”
“종류는 상관없어. 검이든 도든 창이든 가리지 말고 쓸 만하다 싶으면 일단 가져와.”
“알겠습니다.”
어차피 이곳에서 살려면 나름의 준비가 필요하다. 마동필은 서둘러 세 권의 서적을 들고 고죽림을 나섰다.
고죽림의 입구까지 나온 마동필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힐끔 뒤를 바라보았다.
‘별일 없으시겠지.’
그동안도 별일은 없었다. 적어도 거처에 계시는 한, 문제가 생길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마동필이 고죽림을 나서고…….
“끄으응!”
서량이 침상에 벌러덩 누웠다.
피로가 묻어 나오는 얼굴. 하지만 평소의 그와는 달리 무척이나 진지한 표정이었다.
“마공이라…… 이거 보통이 아닌데?”
그는 마공이란 것에 대해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었다.
과거 그가 익힌 암영기 역시 알려지지만 않았을 뿐 무림에서 손꼽히는 절기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 암영기란 무공 자체가 구파일방의 비기들을 떼어서 만든 무공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의 비기보다 더 강한 건 아니었지만, 심오함과 정순함만큼은 당대 최고였다.
마공은 달랐다.
마공은 정순함보다 파격을 중시했다. 안정보다는 출력에 중점을 두었고 방어보다는 공격을, 유연함보다는 올곧은 강함을 추구했다.
그리고 그것은, 살수의 살법과도 통하는 면이 있었다.
“십대마공이라…….”
서량이 천천히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확실히 엄청난 무공들이긴 했어.”
그 자체만으로도 최상급의 무리(武理)였다. 여러 마공을 접하는 것만으로 서량의 깨달음은 살왕이었던 시절보다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었다.
문제는.
“굳이 익힐 필요가 없어.”
그는 조금 전까지 자신이 읽고 있던 비급을 들어 올렸다.
‘진마공(眞魔功)이라?’
마동필이 오해한 게 하나 있다.
서량은 서너 권만 남기고 전부 독파한 게 아니었다. 그는 이미 모든 서적을 독파하고 개중 마음에 끌린 진마공이란 비급을 반나절째 되풀이해 읽고 있었다.
‘이거라면…… 괜찮을 것 같긴 한데…….’
단순 수준만 생각하면 십대마공을 따라갈 수 없는 마공.
하지만 그는 마공 그 자체만 익힐 생각이 없었다.
가만히 비급을 응시하던 서량이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아, 몰라! 일단 정신 좀 깨자.”
벌떡 일어나 침상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그가 무애공을 운용했다.
우우우우웅.
순식간에 방 안의 공기가 맑아지며 서량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역시 꿀꿀할 땐 무애공이 최고…….’
순간 그의 눈이 번쩍였다.
‘……?’
스르륵.
청각에는 잡히지 않았으나 본능적인 감각으로 느낀 미세한 발소리가 있었다.
서서히 가부좌를 푼 그가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번쩍!
한 쌍의 푸른 안광을 빛내는 ‘무언가.’
서량의 입이 쩍 벌어졌다.
“뭐, 뭐야?”
파아아앙!
안광의 주인이 창가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