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탈출의 이유 (1)
“이상, 마존회의(魔尊會議)에 대한 보고를 마치옵니다.”
묵묵히 고개를 숙이는 무담.
쪼르르르.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액체는 투명했다.
농농하게 퍼지는 주향(酒香)이 상큼하면서도 묵직했다. 이 역시 꽤나 독한 술임이 분명했다.
여전히 화려한 잔은 병의 술이 절반이나 비워지고 나서야 다 찰 정도로 큼직했다.
이천상은 천천히 술을 마셨다.
향을 음미하는 듯하면서도 한 번을 쉬지 않는다. 천천히, 천천히 느릿하게 잔을 비우는 모습에서 진한 야성미와 알 수 없는 고결함이 풍겼다.
이윽고 잔을 비운 이천상이 무심하게 말했다.
“이번 물건은 나쁘지 않군.”
검남춘처럼 죽엽청(竹葉靑) 역시 남부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술이다.
산서성(山西省)의 행화촌(杏花村)에서 만드는 분주(汾酒)를 바탕으로 여러 약재를 써서 만든 약주(藥酒)가 바로 죽엽청이었다.
상쾌한 향과 고급스러운 단맛으로 약주 중에서도 인기가 많아, 산지가 아닌 곳에서는 부르는 게 값이었다.
천마신교가 터를 잡은 십만대산은 중원 최남단이었다. 북부인 산서성에서 술을 공수해 오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술을 공수해 온 마인들의 노고를 간결하게 치하한 이천상이 무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서도 용케 알았는지 무담이 조심스레 서류를 건넸다.
이천상이 한옆의 인장(印章)을 들어 서류에 찍었다.
“호법원은?”
앞뒤를 생략한 질문에도 무담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무척 넉넉해졌습니다. 휘하 호법들이 안정적으로 힘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다행이군.”
“교주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이천상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들이 힘을 낼 수 있다면 그 또한 내 기쁨이지.”
무담의 얼굴에 감격에 드리워졌다. 빈말이라도 감동적인 발언이었다.
“교주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목숨을 걸고 지켜 나가겠나이다.”
“그렇게 하게.”
나름 훈훈하다면 훈훈한 대화였지만 무담을 바라보는 이천상의 눈은 여전히 무심하기만 했다.
그의 눈은, 표정은 언제나 그러했다. 존재감은 차치하고서라도, 그와 대면해서 당황하지 않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쪼르르르.
다시 잔을 채운 이천상이 지나가듯 물었다.
“셋째는?”
무담이 즉각 대답했다.
“위험한 순간들을 몇 번이고 마주했다 하옵니다.”
“살아는 있는 모양이군.”
스승이 제자를 두고 할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팔 개월 동안 이천상은 서량에 대해 질문 한번 한 적 없었다. 무담 역시 이천상이 원하지 않았기에 삼공자에 대한 보고를 미뤄 둔 채였다.
“보고하게.”
“예.”
무려 팔 개월 만에 하는 보고다. 무담은 최대한 자세히 내용을 전달했다.
그렇게 보고가 얼마나 이어졌을까.
한 대목에서 이천상의 눈이 빛났다.
“잠깐.”
“예, 교주님. 하문하시옵소서.”
“방금 뭐라고 했지?”
“예?”
“성성(猩猩) 떼와 싸우다 부상을 당한 놈이 사흘 만에 녹촉(鹿蜀)과 마주하고도 살아남았다?”
“그렇……습니다.”
무담은 의아했다.
물론 녹촉의 무지막지한 흉포함은 잘 알고 있다. 어지간한 절정고수도 셋 이상 모이지 않으면 상대하기 어려운 놈이니까.
하지만 도주하는 것 정도야 크게 어렵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녹촉은 무척 강했지만 서량 역시 혼자가 아니었다.
근래 눈에 띄게 강해진 마동필이 옆에서 도왔다면 딱히 불가능한 일도 아닐 텐데?
“재미있군.”
이천상의 눈에 은근한 흥미가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본 무담은 깜짝 놀랐다.
언제나 무심함을 유지하는 얼굴. 수십 년간 그를 모셔 왔던 무담조차 그의 표정을 보며 유추 정도만 할 뿐 확신을 해 본 적은 없었다.
지금은 다르다.
이천상은 마치 평범한 사람처럼 감정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었다.
“여룡(驪龍)을 익혔다면 녹촉의 괴성(怪聲)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 터인데.”
이천상이 말하는 여룡은 곧 십대마공 중 하나인 여룡이산공(驪龍移山功)을 뜻함이었다.
주화입마에 들기 전, 삼공자 서량이 연성하고 있었던 최상승 마공.
이천상이 무담을 바라보았다.
“세 권은 무엇이었나?”
“예?”
“자네가 셋째에게 건네준 마공 비급이 세 권인 걸로 알고 있네.”
“……!”
무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혈화와 포천, 그리고 적봉(赤鳳)이옵니다.”
이천상이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생각에 잠긴 듯 가라앉은 얼굴임에도 두 눈에 떠오른 흥미는 사라지지 않았다.
“혈화는 날카롭고 포천은 무겁지. 둘 다 어울리지 않아. 그나마 적봉이 나은데 그놈이 안목이 있다면 적봉 또한 익히지 않았을 것이고.”
마공의 수준이 낮아서가 아니라 신체와 어울리지 않는 마공이기 때문이다.
극마지경(極魔之境)에 이르러 모든 마공에 통달했다면 모를까, 지금 셋째의 몸으론 적봉을 다루기 힘들다. 한 번 주화입마를 겪은 몸에 적봉은 오히려 독(毒)이 된다.
무담이 오체투지했다.
“교주님의 허락도 없이 비고(秘庫)를 열었나이다. 죽여 주시옵소서.”
“자네에겐 비고를 열 수 있는 권한이 있어.”
“하나 소신은…….”
“선택에 따른 책임만 질 수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하든 개인의 자유지.”
이천상의 표정이 다시 무심해졌다.
“선택에 후회가 없나?”
“……그렇습니다.”
“책임질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나도 자네의 선택을 존중하네.”
무담은 대답 없이 더욱 고개를 조아렸다.
이천상은 다시금 잔을 채워 단번에 비우곤,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길 일각 여.
“넷째를 부르게.”
무담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삼공자에 대한 얘기를 하는 와중에 왜 갑자기 사공자를 부르시는 거지?
하지만 의문은 의문일 뿐이다.
무담이 고개를 숙였다.
“명을 받듭니다.”
천천히 일어나 물러나려는 그때, 이천상이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대호법.”
“예, 교주님.”
“어른 싸움보다 애들 싸움이 더 무서운 이유가 뭔 줄 아나?”
이천상은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늘 교주님의 여러 모습을 본다고 생각하며, 무담이 고개를 저었다.
“소신은 모르겠사옵니다.”
“애들은 어디가 끝인지를 모른다네. 그래서 무섭지. 상처뿐인 영광도 영광이라 생각하니까.”
이천상의 눈이 깊어졌다.
“한계 없는 무지(無知)로 무장한 싸움에서 적정선이 어딘지를 깨닫게 되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아이는 어른이 되지.”
* * *
“후우, 죽겠구만.”
투덜거리며 집무실로 들어온 이군성(李君聲)의 얼굴은 무척이나 피로해 보였다.
목 뒤를 힘주어 주무르던 그에게 기양(奇壤)이 찻잔을 내밀었다.
“벽라춘(碧羅春)입니다. 간만에 우려 보았는데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고맙네.”
“아닙니다.”
이군성이 심술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땠나, 사흘간의 휴식은?”
“선배가 워낙 고생하셨으니 드릴 말씀이 없군요.”
머리를 긁적이는 기양의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꾸밈없이 솔직한 태도에 이군성이 피식 웃었다.
“장난도 못 치겠군.”
“오죽 죄송했어야지요.”
“죄송하면 앉아서 말동무나 해 주게.”
“다시 나가십니까?”
“한 시진쯤 후에 다시 나가야지.”
기양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이번엔 제가 갈 테니 선배는 좀 쉬십시오. 원주님께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됐네. 호위가 바뀌면 호위 대상이 불편해해.”
“그래도…….”
“나중에 나 힘들 때 한 번 교대해 주게. 자네도 저번 달에 고생 많았잖은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기양은 알고 있었다. 호법원 최고 선임이자 일 조장인 이군성은 절대 자기 일을 남에게 미루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원내 호법들은 이군성을 좋아했다. 맺고 끊는 게 명확하면서도 항상 아랫사람을 챙겨 주니까.
“그럼 잠깐 눈이라도 붙이십시오. 깨워 드리겠습니다.”
“자고 나면 무기력해질 것 같네. 어차피 이번이 마지막이야. 차라리 자네와 사담이나 나누는 게 낫겠어.”
“정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그렇게 마주 앉아 차를 홀짝이던 중, 기양이 물었다.
“그나저나 마검가(魔劍家)의 가주께서는 어인 일로 방문하셨답니까?”
이군성이 고개를 저었다.
“정확한 건 나도 모르네.”
“그렇습니까.”
“워낙 거물이지 않나. 본교 윗분들께 따로 할 얘기가 있는 모양이지.”
마검가는 마도칠가의 하나로, 일곱 가문 중에서도 가장 강한 세력을 구축한 명문가였다.
신교에 대한 충성도 뛰어났고, 휘하 검사들 역시 교내 마인들에 비할 만큼 실력이 좋았다. 신교 역시 그런 마검가를 일곱 가문 중 가장 신뢰했다.
“뭐…… 얼핏 들은 소문은 있긴 하다만.”
“소문이요?”
잠시 침음한 이군성이 머리를 긁적였다.
“말 그대로 소문이라 확실한 건 아닐세. 믿을 만한 소식통에게서 나온 거라 나름 신빙성은 있다고 보네만.”
“어떤?”
“마검가에서도 인재를 하나 들이고 싶은 모양이야.”
기양의 눈이 흔들렸다.
신교에 인재를 들이겠다는 말은 한 가지 경우를 의미했다.
“교주님의 제자를……?”
이군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했듯 정확한 정보는 아닐세. 다만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 제자분들 중 두 분이 칠가 소속 아닌가. 칠가의 수좌라는 마검가 측에서 신경을 안 쓸 순 없었겠지.”
“하지만…… 지금도 많은데 교주님께서 또 제자를 들이시겠습니까? 한두 분도 아니고, 일곱 분이나 되는데요.”
“그거야 알 수 없지. 오직 교주님께서 판단하실 일이야.”
“그렇긴 합니다만…… 아!”
문득 생각났다는 듯 기양이 작은 탄성과 함께 입을 열었다.
“만약 마검가 측에서 제자를 보내려는 게 맞고, 교주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신다면…….”
“음?”
“……어쩌면 일곱이란 수가 유지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삼공자님 말입니다.”
이군성의 눈이 깊어졌다.
그제야 기양의 말이 뜻하는 바를 깨달은 것이다.
“위험한 발언일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
“아시잖습니까? 고죽림은 위험합니다.”
“아네. 그래서 삼 조장을 보내지 않았나. 삼 조장은 우리 중 가장 고죽림에 정통한 사람일세.”
“삼 조장의 실력도 알고 경험이 충분하다는 것도 압니다만, 그래도 불안합니다.”
마동필의 재능은 굉장했다. 서른이 조금 넘은 나이로 이 조장 기양의 다음 서열인 삼 조장이 된 것 자체가 그의 강함을 증명했다.
눈치가 대단히 빠르진 않았지만 누구보다도 우직했고, 본인에게 주어진 임무는 어떻게든 완수해 내는 독기도 있었다. 말 그대로 호법 쪽으로는 난놈이었다.
하지만 고죽림은 실력과 경험이란 글자 뒤에 ‘따위’라는 표현을 붙여도 될 만큼 위험한 지역이었다.
오죽하면 일 년에 두 번, 신교의 최고 수뇌부들만 몇몇 골라서 영죽을 채취하러 보내겠나.
“결정적으로 삼공자께서 언제 나오실지도 모릅니다. 교주님께서 허락해 주지 않으신다면 어쩌면 평생 그곳에 사셔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군성이 한숨을 쉬었다.
기양은 삼공자에 대해 얘기하고 있지만, 그가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은 마동필이었다. 그는 당대 호법원에서 첫손에 꼽히는 인재였으니까.
“게다가 삼공자님은 몸이…….”
“그만.”
“…….”
“이 얘기는 그만하도록 하세. 이러다 누가 듣기라도 하면 경을 칠 걸세.”
기양이 뜨끔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걱정되어서 한 말이지만, 분명 과했음을 자신도 모르지 않았다.
이군성이 의자에 등을 깊이 묻었다.
“삼 조장을 보낸 것은 원주님이었어. 원주님께서 얼마나 삼 조장을 아끼는지는 자네도 알지 않나.”
“……예.”
“괜찮을 걸세. 그냥 그렇게 생각하자고.”
기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고민하고 걱정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그나저나, 자네 조 부조장이 이번에 혼인을 한다고?”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기양은 그걸 알면서도 맞장구쳐 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는 평범한 일상에 관한 것으로 이어졌다. 조원들에 관한 얘기, 강호의 동태에 관한 얘기 등등 할 얘기는 많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임무 중 마주쳤던 아리따운 여인에 대해 이군성이 침을 튀겨 가며 얘기를 하던 와중이었다.
“일 조장님.”
문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삼 조장, 삼 조장이 일 조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순간 벌떡 몸을 일으키는 두 사람의 표정은 놀라움으로 가득했다.
“어서 들라 하게!”
“예!”
오랜만에 동생처럼 아끼는 후배인 그를 볼 생각에 이군성과 기양의 얼굴에 반가움이 묻어 나왔다.
잠시 후.
“조장님, 삼 조장입니다.”
“어서 들어오게!”
드르륵.
천천히 문이 열리고, 그곳에서 한 사내가 들어왔다.
만면에 웃음꽃을 피우던 두 사람의 얼굴은, 마동필을 보자마자 그대로 딱딱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