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탈출의 이유 (3)
“꺼억! 잘 먹었다.”
“남은 양이 많군요. 육포로 만들까요?”
“그래.”
“이만 쉬시지요.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어, 그럴까? 부탁 좀 할게.”
솥을 들은 마동필은 힐끔 서량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일어난 서량이 마당 끝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더 커지셨다.’
원래도 키는 컸지만 주화입마의 여파로 왜소하다는 인상을 주던 서량.
과거의 그 서량은 더 이상 없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잘 연마된 몸, 흔들림이라곤 일절 없는 걸음걸이가 그야말로 무인의 표본과 같았다.
실제로 키도 조금 더 자라셨다. 고죽림 생활 초기만 해도 자신과 거의 비슷했거늘, 지금은 고개를 살짝 들어서 봐야 했으니까.
다른 사람보다 늦게 크는 사람도 있다지만 체구가 워낙 달라진 탓인지 배는 놀라웠다.
“공자님, 상처는 어떻게…….”
“괜찮아. 이 정도면 기공으로 충분해.”
“알겠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었지만 마동필은 일단 주변을 정리했다.
마당 끝으로 간 서량이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확실히 공기 하난 끝내준다!”
미치도록 위험한 곳이긴 하지만 말이야.
공기도 좋고 배도 부르다. 결정적으로 예전에 한 방 먹었던 녹촉이란 놈도 때려잡았다.
알찬 하루였다.
“팔이 좀 쓰리긴 하지만.”
서량이 왼팔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녹촉의 뒷발질을 막아 냈던 팔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아.’
웃으며 팔을 보던 서량은 문득 자신의 몸을 훑어보았다.
‘나쁘지 않구만.’
팔 개월이 지난 지금, 그의 몸은 거의 완벽에 가까워졌다.
적당히 부풀어 오른 흉근과 차돌처럼 압축된 복근, 유연하게 잘 빠진 팔다리가 무척이나 보기 좋았다. 갈비뼈가 다 드러날 정도로 말랐던 몸이라곤 생각할 수가 없었다.
‘확실히 신기한 곳이란 말이지.’
과다하게 농축된 영기는 영죽을 만들고 귀물을 탄생시킨 것으로도 모자라 이곳에서 사는 사람의 몸까지 바꿔 버렸다.
물론 그만한 노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죽림에 들어온 이후 그는 하루에 두 시진 이상 수면을 취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팔 개월 만에 얻을 수 있는 신체는 아니지만.
“그래서 위험해.”
과유불급이라고 했다. 이곳의 대나무와 귀물들은 환경에 완벽히 적응했지만, 사람은 그럴 수 없다.
이 기세로 가다간 석 달을 넘기지 못하고 몸에 이상이 올 것이다.
‘그 전에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고 가야지.’
서량이 가부좌를 틀었다.
눈을 감고 내부를 관조하니 박동하는 단전이 느껴졌다.
팔 개월 전에는 감히 상상도 못 했던 힘이다. 들끓는 내공이 당장이라도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것 같았다.
‘와라.’
주인의 부름.
강력한 의지가 실린 혼의 외침에 단전이 호응했다.
우우우웅!
부풀어 오르던 단전이 쾅! 소리를 내며 전신 혈도로 진기를 쏘아 보냈다.
푸스스스스.
연기처럼 흘러나오는 뜨거운 힘의 여파.
사악하진 않았지만 흉악했고, 불안하진 않았으나 불길했다. 파편만으로도 영역 내의 모든 이들을 공황 상태에 빠트릴 만큼 독한 기운이었다.
마기(魔氣).
그가 그렇게도 꺼림칙해하던 마기가 전신에서 피어올랐다.
사아아악!
양어깨와 등 뒤로 희미한 아지랑이가 어른거렸다. 녹촉과의 전투에서 입은 내상이 치료되고 있는 것이다.
영기의 농도가 짙다지만 그걸 감안해도 지나치게 빠른 속도였다.
서량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씁쓸해 보이기도, 흡족해 보이기도 한 미소였다.
‘갈수록 깊어지는군.’
마기의 질이 한층 깊어졌다.
이것은 영기와는 관계없었다. 순전히 그의 깨달음이 여느 고수들과 차원이 달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앞으로도 마기는 하루하루 질적 향상을 이룰 것이다.
‘마공이면 어떠랴. 이만한 무공은 천하 어디서도 익히지 못해. 운이 좋다고 생각해야지.’
암영진마공(暗影眞魔功).
그가 직접 암영기와 진마공을 합친 무공이었다.
소림(少林) 무공의 장점을 진하게 이어받은 암영기는 놀랍게도 마공과 합쳐지면서도 불가적 요소를 버리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십대마공보다도 마학(魔學)의 수준이 높았다.
절대로 섞이지 않을 것 같은 항마기(降魔氣)와 순마기(順魔氣)의 합작.
그 결과물은 상상 이상이었다.
우두두둑! 우두둑!
전신의 근육이 출렁이고, 뼈마디 어긋나는 소리가 살벌하게 들려왔다.
조금씩 재조립되는 근골. 운공을 할 때마다 몸이 무공과 어울리는 방향으로 미세하게 바뀌어 간다. 불가 무공의 웅혼함과 마도 무공의 폭발력을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신체(神體)로 나아가는 것이다.
번쩍!
서량이 눈을 떴다.
“하아.”
저도 모르게 내쉬는 숨에 열락의 쾌감이 묻어났다.
그때, 한옆에서 마동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끝나셨습니까.”
“어.”
그새 마당을 정리하고 호법을 섰다. 운공 중에도 살기를 느끼면 즉각 중단할 수 있건만, 그래도 불안했던 모양이다.
마동필이 조용히 서량을 불렀다.
“공자님.”
“또 뭔 잔소리를 하려고 분위기 잡고 계셔?”
“홀로 위험 지역에 들어가지 않겠다 약조하지 않으셨습니까.”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어쩌겠냐. 시간이 부족한걸.”
“시간이요?”
“아, 모르고 있었나?”
“어떤……?”
“여긴 이제 위험해. 정확히는, 조만간 위험해질 거야.”
“무슨 말씀이신지요?”
서량이 자신이 느낀 바를 설명하자 마동필의 안색이 대번에 굳었다.
“길어야 석 달이란 말씀이신지요?”
“그래.”
“어떻게 그럴 수가?”
“균형이 무너진 곳이니 당연하지.”
균형? 이건 또 무슨 말이지?
서량이 자신의 왼팔을 가리켰다.
“봐라. 녹촉한테 당한 팔이 벌써 이만큼 치료됐지? 아마 내일 아침이면 전부 나을 거야.”
“다행입…….”
“이게 정상이라고 생각하냐?”
“아…… 확실히 정상은 아닙니다만.”
“피부가 찢어지면 몸은 상처를 낫게 하지. 하지만 치료의 속도가 극도로 빨라지면 어떻게 되겠냐? 다 나았는데도 끊임없이 낫게 하면 어떻게 되겠어?”
“…….”
서량이 손가락을 쫙 폈다.
“터지는 거야.”
“……!”
“고죽림의 환경이 그래. 일정한 수준까지 성장하기엔 좋지만, 정체기를 맞는 순간 곧바로 독이 된다.”
“그렇다면…….”
“맞아. 석 달, 짧게 잡으면 두 달 안에 고죽림의 심층부로 들어가야 해.”
“그렇군요.”
“이제 두어 놈만 더 잡으면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심층부까지의 길이 열려. 본교의 수뇌부들이 캐러 가는 최고의 영죽들이 거기에 있다.”
서량이 씨익 웃었다.
“난 그걸 얻어야겠어.”
마동필이 한숨을 쉬었다.
“공자님, 제가 교주님을 알현하고 오겠습니다.”
“갑자기?”
“석 달 안에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큰일이 난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렇지.”
“하지만 교주님께서 하명하지 않으시면 공자님께선 이곳에서 계속 머무셔야 하는…….”
서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나 없는 데서 교주님하고 만난 적 있냐?”
“……예?”
“교주님이 언제 그런 말을 하셨대?”
마동필의 표정이 얼떨떨해졌다.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공자님을 여기로 보내셨으니, 교주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거처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는…….”
“푸핫! 너 설마 내가 교주님 때문에 여기서 팔 개월 동안 죽치고 있는 줄 알았어?”
“아, 아니었습니까?”
스르륵.
서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큰 키에 다부진 체격. 연마된 육체만 보면 여느 절정고수에 비해도 손색이 없었다.
“교주님은 나더러 고죽림에 가라고만 했지, 돌아올 시기를 정해 주신 적은 없어.”
“……!”
“나도 무공을 익히고 나서 깨달은 사실인데, 교주님은 내 요청을 들어주신 거다. 다만 그게 교외 지역이 아닌 고죽림이었을 뿐이지.”
“그, 그런 해석은…….”
“바람 쐬기에 적당한 곳이 아니라고? 뭐, 그렇긴 하지. 어쨌든 그 덕분에 강해졌잖아?”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힘을 얻고 난 이후부터, 아니 현실을 인정하고 난 이후부터 생긴 여유였다.
“난 내가 얻을 수 있는 걸 싹 쓸어 담고 갈 생각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버틴 거야. 내게도 도움이 되니까.”
“……그러셨군요.”
대답은 했지만 마동필은 아직도 혼란스러워하는 모양새였다. 신교의, 아니 마도의 절대자의 의도를 해석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교내 마인 대다수가 그러할 것이다.
“그건 그렇고 부탁한 건 어떻게 됐냐?”
“아,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마동필이 방 안에서 약봉 다섯 첩과 찻잎, 그리고 검은 천에 돌돌 쌓인 길쭉한 병장기를 가져왔다.
서량의 눈이 반짝였다.
“제탁초(制濁草)를 다섯 첩이나 가져왔어?”
“예. 개인 실험용으로 보급받은 게 있다고 합니다.”
서량은 나직이 감탄했다.
“역시 대단하네. 돈이 얼마나 많으면 제탁초를 일개 의원한테까지 보급하냐?”
“운남지부(雲南支部)에서 매달 약초를 보내옵니다. 운남의 애뇌산(哀牢山)에 이런 약초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몇몇 약초는 재배에도 성공해서 물량이 넉넉하다고 합니다.”
“아!”
애뇌산에 가 본 적은 없지만 산세가 대륙에서 손꼽힐 만큼 험하고 온갖 독물과 맹수, 기화요초가 판을 친단 소린 들었다.
“한데 제탁초는 어찌……?”
“그런 게 있단다. 굴송차는 이건가?”
“예.”
“좋아. 수고했어.”
서량이 약봉지와 찻잎을 품에 넣었다. 희희낙락한 기색이 역력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제탁초 이거 또 공수해 올 수 있냐?”
“아무도 모르게 동기를 통하는 방법이라면, 솔직히 확답은 드릴 수 없습니다.”
“쩝. 그래?”
“예. 이번 달은 이 약초로 전강탕이란 탕약의 배합률을 공부한다고 합니다. 탕약의 주재료인지라 다시 구하려면 두어 달은 더 기다려야…….”
“잠깐.”
서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뭐라고 했지? 전강탕?”
“아, 예. 분명 그리 들었습니다.”
“제탁초가 전강탕에 들어간다고?”
“그렇습니다.”
서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전강탕이라면 이 몸으로 깨어난 후, 석 달 동안 지독하게 마셔 댔던 탕약 아닌가?
“제탁초가 전강탕의 주재료라고 했어? 확실해?”
“분명 그리 들었습니다만…….”
말이 안 되는데?
제탁초는 이름처럼 탁기를 제거하는 약초다. 다만 양기(陽氣)까지 억제하기 때문에 멋모르고 장복하거나 과복용했다간 내공의 고수라도 몸이 상한다.
아무리 가공 과정을 거쳐도 약력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 법.
그런 풀을 주화입마의 여파로 다 죽어 가는 환자에게 먹였다고? 심지어 거드는 정도가 아니라 주재료란다.
마기흔(魔氣痕)까지 덕지덕지 남은 몸이었던 걸 생각하면 더 이상하다.
제탁초는 약력이 너무 강해서 마기도 공격한다. 마기가 왕성하면 몰라도, 피폐해진 몸에 쓰면 치명적이다.
“그럴 리가 없는데? 의술을 조금만 알아도 그리 처방을 내릴 수가 없는데?”
점점 커지는 의혹에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긴 서량은 문득 또 하나의 처방을 떠올렸다.
“동필아.”
“예, 공자님.”
“너 금정침(錦晶針)이라고 아냐?”
혹시나 싶어 물어봤는데 뜻밖에도 마동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알아? 뭔데?”
“정확히는 침의 이름이라기보다 침술(針術)이라고 봐야 합니다. 지나치게 풀어진 근육을 약간만 긴장시켜 신체의 균형을 맞추는 침술입니다.”
“그걸 어떻게 알지?”
“임무를 나가기 전, 운공으로 풀어진 몸에 몇 번 시술해 보았습니다. 어려운 시술도 아니고요. 제 기억에 꽤 괜찮았습…….”
순간 마동필은 말을 잇지 못했다.
무표정해진 공자님의 얼굴 위로 둥둥 뜬 두 눈이 특유의 차가운 흉기(凶氣)를 품었다.
‘극도로 허해진 몸에 전강탕을 올리고, 굳을 대로 굳은 몸에 금정침을 박아?’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교주의 제자에게?
‘설마하니 의원 놈이 독자적으로 벌인 일은 아닐 테고.’
적어도 최고위 수뇌부나 비슷한 제자급은 되어야…….
‘제자?’
순간 그의 머리에 홍여린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과 같은 제자의 동생이라는 것도.
“……이 새끼들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