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탈출의 이유 (4)
“다녀오셨습니까.”
“차 좀 내오지.”
“아, 예.”
잠시 후, 홍위문(紅偉紋) 앞에 굴송차가 놓였다. 정신적으로 피로할 때 그는 술이 아닌 굴송차를 마셨다.
홍위문을 보는 신회(申灰)는 상당히 놀란 상태였다.
‘많이 심각하신가?’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는 홍위문의 얼굴이 지금은 상당히 굳어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차가 다 식을 때쯤이 되어서야 홍위문이 찻잔을 들었다.
“신회.”
“예, 공자님.”
“고죽림이 어떤 곳인지 말했었지?”
“예. 본교가 대산에 터를 잡기 전부터 있었던 마림(魔林)이고, 기괴한 영물들이 살고 있다 하셨습니다. 또, 그곳에서 자라는 영죽을 채취해 본교의 영약으로 만든다는 말씀도 하셨지요.”
“그래. 고죽림은 바로 그런 곳이지.”
홍위문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입가에는 어느샌가 미소가 떠올라 있었지만, 두 눈은 여전히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교내에서 가장 파고들기가 어려운 곳이 어딘 줄 알아?”
너무 광범위한 질문이다. 게다가 고죽림 얘기 도중 뜬금없이 나올 질문도 아니었다.
“고죽림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고죽림은 제외야. 그곳은 수뇌부들도 사부님의 허가가 없으면 들어갈 수 없어. 내 질문은 물리적으로 들어갈 수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의 눈을 심을 수 있느냐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군사부(軍師府) 아니겠습니까. 총군사의 조직 장악력이 워낙 대단해서 마존분들도 감히 건드릴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틀렸어. 군사부는 은근히 파고들기가 쉬운 조직이야.”
“예?”
“총군사는 희대의 천재다. 오히려 세작을 역이용해 교내 권력 다툼의 흐름을 파악해 낼 사람이지. 그래서 파고들기 어렵진 않아. 다만 모두가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이다. 내 움직임이 들킬 게 뻔하니까.”
“……하면?”
“호법원.”
부글부글.
홍위문이 쥔 찻잔에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차게 식었던 굴송차가 다시 끓고 있는 것이다.
“호법원은 완전히 동떨어진 조직이다. 오로지 교주님과 교를 수호하기 위해 존재하지. 권력에 따라 조직의 향방을 결정하는 다른 집단들과는 아예 달라.”
“……!”
“당연히 교내에서 가장 충성심이 높은 마인들로만 구성되지. 그래서 누구도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아.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지. 그들을 흔들어 보겠다는 건 교주님의 권위를 흔들어 보겠다는 것과 같은 의미니까.”
“그렇……군요.”
“그래서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쓰지 못했어. 그게 내 불찰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차를 한 모금 마신 홍위문.
그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사라졌다.
“그놈이 살아 있었어.”
“……예?”
“서량, 그놈이 아직 살아 있다.”
신회의 얼굴이 굳어졌다.
“팔 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말입니까?”
“경험 많고 실력 좋은 자를 딸려 보냈다고 하더군. 호법원 조장이라던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고죽림으로 들어가기 전, 삼공자의 몸 상태는 무척이나 좋아져 있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무공을 익히지 않은 양민 수준이다. 고작 그런 수준의 몸으로 마존급 인사들도 긴장해야 할 만큼 위험한 지역에서 팔 개월 동안 살아남았다고? 이게 말이 되는가?
“한 달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석 달이라도 그러려니 하겠어. 하지만 팔 개월 동안 그 몸뚱이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건 말이 안 돼.”
그리 말하는 홍위문도 정작 고죽림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이번 세대, 고죽림에 발을 들여 본 사람은 호법들을 제외하곤 최고위 인사 몇몇뿐이었다.
하지만 짐작할 수 있는 위험도라는 게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사부님, 교주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었다.
- 마의 극에 도달한 자(極魔)가 아니라면 누구도 석 달을 버티기 힘들 것이다.
사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사부의 말은 그만큼의 무게와 신뢰가 있었다.
당연히 서량은 극마지경에 이르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는 어찌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을까?
홍위문은 조금 전, 사부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 셋째가 잘 버티고 있는 모양이구나.
- ……!
- 조만간 불러들일 생각이다.
- …….
- 지금은 막내를 공략하고 있다 했더냐?
- ……예.
- 알았다.
사부와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정말로 그 대화가 전부였다.
홍위문은 사부가 왜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해 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어서 불렀는지, 혹은 그 짧은 대화에서 뭔가를 알아챘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언제나 그러셨지.’
천외천(天外天)의 마신(魔神). 인간의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존재.
‘그저 군림할 뿐 다스리진 않는 분.’
제자들끼리 서로 창칼을 겨누고 있음에도 일절 관여치 않으신다. 차기 대권을 거머쥐려면 이 정도는 이겨 내야 한다는 의미인지, 혹은 다른 의도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사부가 보는 세상은 과연 어떤 세상일까? 신(神)에게 있어 이 세상은 그리도 무가치한 것일까?
만약, 사부가 볼 수 있는 것을 나 또한 볼 수 있게 된다면.
‘그 영역까지 날아오를 수 있다면……!’
찻잔을 내려다보던 홍위문이 입을 열었다.
“신회.”
“예, 공자님.”
“놈의 거처에 애들 좀 깔아 놓지.”
신회의 눈이 빛났다.
홍위문이 차를 홀짝였다. 무거운 향 때문에 입이 텁텁했지만 머리는 한결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주화입마도, 독도, 마림도 놈을 죽이지 못했어. 난 그걸로 충분할 줄 알았지 뭔가?”
“……직접 손을 쓰실 생각입니까?”
“직접? 그럴 순 없지. 난 이 싸움이 개싸움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 하지만 뭐…….”
“…….”
“원한에 의한 살인을 굳이 막고 싶지도 않아.”
신회의 눈이 커졌다.
“그렇다면 모으라 하셨던 애들이……?”
“우린 칼만 쥐여 줄 뿐이야. 그걸 휘두를지 말지는 전적으로 놈들 마음이지.”
홍위문이 활짝 웃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한 미소에 신회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부님께서 우릴 다루는 방식 아니겠어? 지옥에 던져 놓고 알아서들 해 보라는 식 말이야. 난 그게 참 괜찮다고 생각해.”
* * *
“공자님!”
“또 왜, 인마.”
“일단 진정하시지요. 조금 더 신중해지실 필요가 있습니다.”
“신중은 염병. 대가리 굴리다가 때 놓치는 거 이젠 지겹다 못해 끔찍하다.”
“그래도 너무 급하십니다! 아직 림 내 심층부 인근에 어떤 귀물이 있는지도 모르시지 않습니까?”
“알면 뭐 달라지는 거라도 있냐?”
마동필은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서량이 제탁초와 찻잎을 품에 넣으며 말했다.
“거기에 어떤 위협이 있든 시간이 없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아. 그리고 난 그곳의 영죽을 포기할 생각도 없지. 그럼 시간 낭비할 것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제가 호법원주님께 가겠습니다. 가서 여쭙겠습니다. 이 안에 어떤 귀물이 있는지, 어떻게 대비를 해야 하는지 알아 오겠습니다. 최소한의 정보라도 있어야…….”
“다시 말하지만 알아도 달라질 거 없어.”
스르릉.
서량이 칼을 뽑았다.
마동필이 제탁초, 찻잎과 함께 가져온 환도(還刀)였다. 미세한 곡선을 그린 날렵한 환도는 도신(刀身)의 길이만 삼 척에 달했다.
그가 도배에 손가락을 튕겼다.
티이잉.
청아한 울림. 지금까지 써 왔던 병장기들과는 달리 보도(寶刀)라 불릴 만한 칼이었다.
“교주님은 왜 수뇌부들만 추려서 영죽을 얻으러 보냈을까? 대비가 가능했다면 휘하 마인들을 준비시켜 보내면 될 텐데.”
“…….”
“보안 때문에? 그럴 리가 없지.”
“……그만큼 강하지 않으면 누굴 보내도 의미가 없다는 말씀이신지요?”
“응.”
“그럼 더더욱 안 되지 않습니까!”
팔 개월간 가까워졌지만 그래도 항상 선을 지켰던 그가 이리 격렬하게 반응한 적은 처음이었다.
“공자님께서는 몹시 강해지셨습니다. 하지만 아직 원로원(元老院)의 마존급에는 미치지 못……!”
말을 하면서 마동필은 아차 했다. 자칫 자신의 말이 공자님께 무례하게 들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량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맞아. 원로원의 구대마존(九大魔尊), 신교 최강자들에 비할 순 없지.”
“……공자님.”
“하지만 내겐 그들에게 없는 게 있지.”
“예?”
꾸욱.
요대를 고쳐 매며, 서량은 생각했다.
‘암영공(暗影功), 암신유체(暗神幽體).’
지금껏 그는 고죽림에서 단 한 번도 은신술(隱身術)을 펼쳐 본 적이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었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량에게 이곳은 전쟁터가 아니라 수련장이었다. 가능했다 한들 은신술을 써 가며 위협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다르다.
고죽림의 심층부는 미지의 영역이다.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대략 석 달.
고죽림은 더 이상 수련장이 아니다.
공략해야 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한 바를 이루어야 할 생사의 싸움터가 된 것이다.
‘제탁초를 흡입하면 유지 시간은 반 각. 고죽림의 크기로 봤을 때, 심층부로 들어가기에 반 각이면 충분하고도 남아.’
살수지왕이라 불리던 그였다. 은신술 역시 당대 정점에 올랐었다.
다만 암영기를 마공으로 변화시켰기에 기존의 방법으론 암신유체를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제탁초가 필요했다. 마기를 어느 정도 죽여 놔야 암신유체를 발현시킬 수 있으니까.
그만큼 내력 소모가 심해지겠지만 단순 탈취와 도주라면 충분하다.
‘암신유체라면 십대고수급이라도 속일 수 있다. 설령 들켜도 도주하는 데엔 문제없어.’
만약, 혹시라도 도주조차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서량의 눈이 빛났다.
‘그땐 난장판을 만드는 수밖에.’
마동필이 서둘러 말했다.
“저는 공자님께 어떤 방도가 있으신지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 납득할 만한 방도겠지요.”
“물론이지. 나도 죽고 싶진 않아.”
털썩.
마동필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공자님, 감히 목숨을 내놓고 말씀드립니다.”
“무섭게 왜 이래?”
“영죽을 포기하시는 것은 어떠신지요?”
“…….”
“고죽림의 특성 덕분이라 해도 공자님께선 불가해할 만큼 빠르게 성장하셨습니다. 굳이 심층부의 영죽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근시일 내 두각을…….”
“동필아.”
“예, 공자님.”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난 위험을 즐기는 성격이 아냐. 필요하지 않았다면 굳이 목숨 걸고 그곳에 들어갈 생각은 안 했겠지.”
“…….”
“걱정 마라. 지난 팔 개월간 위험했던 적이 그리 많았어도 지금 이렇게 살아 있잖아?”
마동필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어떤 말을 해도 공자님께서 마음을 바꾸지 않으실 거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 마동필을 내려다보는 서량의 얼굴에 언뜻 한기가 어렸다.
어차피 얻으려 했지만, 영죽을 반드시 얻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그래서 이틀 동안 제탁초와 찻잎의 효능을 급하게 파헤쳤다.
‘고죽림에서 나가면 또 날 노리겠지.’
그 홍여린이란 계집이 사공자의 여동생이란 걸 마동필에게 들었다. 고죽림에서 나간다면 그 빌어먹을 홍씨 남매들이 가만히 있진 않을 것이다.
문제는 거기서 끝이냐는 것.
‘단순한 원한의 문제일까? 어쩌면…….’
어쩌면 제자들끼리 암중 혈투를 벌이는 중일 수도 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차기 대권을 위해 경쟁자를 제거하려는 속셈이란 게 가장 유력하지만, 그마저도 확신할 순 없다.
물론 제자들끼리의 혈투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서량은 자신의 예상이 맞을 거라 여겼다.
만약 원한 어린 살해 시도였다면 초감각이 그 명백한 살의(殺意)를 놓쳤을 리 없으니까. 그것도 무려 석 달이란 시간 동안.
‘아예 건드릴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강해져야 한다. 그것도 근시일 내로.’
자유를 찾기 위해 짧게는 일 년, 길게는 몇 년 동안 신교에서 썩을 각오는 했다. 교주에게 그만한 격을 보여 주지 않으면 어차피 내보내 주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하루하루 불편하게 썩을 생각은 없었다.
만약 격의 차이를 실감하고도 날 건드린다면…….
‘그땐 사형제고 뭐고 제대로 깽판 놓는 수밖에.’
서량이 배를 팡팡 때렸다.
“기다리고 있어. 후딱 갔다 올게.”
“그럴 수 없습니다, 공자님.”
“명령이야.”
“죄송합니다만 따를 수 없는 명입니다. 정히 홀로 가시려거든, 제 목을 베고 가십시오.”
서량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심층부 입구까지만이야. 그 안으로는 들어오지 마. 절대 허락 못 해.”
“…….”
“대답은?”
“……명을 받듭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이 고죽림의 심층부를 향해 내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
서량이 입을 쩍 벌렸다. 바위 같던 마동필의 얼굴에도 흔치 않은 놀라움이 새겨졌다.
심층부까지 가는 길, 마지막 파수꾼이라 생각했던 녹촉의 영역에 들어선 두 사람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
사아아악.
좌우로 수많은 귀물이 죽어 있었다. 허연 김과 함께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그리고 심층부로 들어가는 길목 입구. 대나무들이 만들어 준 그 길목에서 습한 바람이 불어왔다.
휘이이잉.
“……얼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