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시랑지역(豺狼之域) (1)
번쩍!
이천상이 눈을 떴다.
털썩.
그의 어깨와 다리를 주무르던 여인들이 신음을 흘리며 쓰러졌다. 순간적으로 뿜어져 나온 이천상의 마기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음.”
알 수 없는 눈으로 허공을 주시하던 이천상.
잠시 후.
“신교불패 만마앙복. 신교의 대호법이 교주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대호법.”
“예, 교주님.”
“내가 폐관에 들었을 때, 호법들 중 고죽림의 심층부로 들어간 자가 있었나?”
무담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런 일은 없었사옵니다.”
이천상의 눈이 깊어졌다.
그리 중요한 일이 있었다면 무담이 진즉 보고했을 것이다. 게다가 호법들 정도의 실력이라면 심층부는커녕 중간 지역까지 들어가기도 벅찼을 터.
‘하면?’
굳은 얼굴의 이천상을 보는 무담의 의아함은 짙어져만 갔다.
반 각이 지나서야 이천상은 침묵을 걷어 냈다.
“셋째에게 삼 조장을 딸려 보냈다 했던가.”
“그렇사옵니다.”
“제법 괜찮은 아이라고 들었는데.”
“예. 나이는 어리지만 호법원 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수이옵니다. 재능도 있고 경험도 출중하며 우직한 면이 있어 삼공자를 보필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을 거라 판단하였사옵니다.”
“그런가.”
“예, 교주님.”
호법원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수.
충분히 대단하다지만 이천상에겐 고만고만한 놈들 중 하나일 뿐이다.
‘팔 개월…… 기연을 얻었다 한들 성장에는 한계가 있을 터. 하면 셋째가?’
무심하기만 한 이천상의 얼굴에 얼핏 흥미가 일었다.
“오늘이 며칠이던가?”
“보름 하루 전이옵니다.”
“하루 전이라…….”
“…….”
“알겠네. 그만 물러가시게.”
“예에.”
무담이 사라지자 이천상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대단히 희미한 웃음이었지만, 그런 이천상의 얼굴을 봤다면 무담은 또다시 놀랐을 것이다.
“욕심에 눈이 멀어 죽음으로 나아가는가.”
스르륵.
이천상이 눈을 감았다. 동시에 여인들이 정신을 차렸다.
느닷없이 기절했다 정신을 차리면 당황할 법도 할 텐데 그녀들에겐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도리어 익숙하다는 듯 이천상에게 인사를 올리곤 다시 어깨와 다리를 주물렀다.
이천상의 얼굴에 어느새 미소가 사라졌다.
‘아니면 천운이 닿아 태산의 능선 자락을 달려 나갈 텐가.’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지는 무(武), 그리고 마(魔).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인간의 탈을 벗어 나가는 이천상에게 셋째 서량의 행동은 조그마한 즐거움을 주고 있었다.
* * *
“이런 시바! 이게 도대체 뭔 일이야?!”
마동필은 서량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 역시 놀라기는 매한가지였으니까.
서량이 재빨리 한 귀물의 시체를 살폈다.
호랑이의 줄무늬를 지닌 웅장한 마체(馬體). 새하얀 머리와 시뻘건 꼬리가 기괴했다.
녹촉이었다. 얼마 전, 서량이 치열한 사투 끝에 죽였던 녹촉이 피를 토하고 죽어 있었다.
‘상흔이 없다?’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부(蒼芙), 주(鴸), 성성(猩猩)…….’
처음 보는 귀물의 시체도 있었다.
표범인데 몸은 하얗다. 이마에 기이한 무늬가 있는데 필설로 어떻다 형용하기 어려웠다. 송곳니가 엄청나게 길어서 아래턱 밑까지 삐죽 내려와 있었다.
마동필이 신음했다.
“맹극(孟極)?!”
“너 이 자식 알아?”
“예, 공자님. 저도 듣기만 했지 실제로 본 적은 없습니다. 선배들도 마주한 적 없다고 했는데…… 이렇게 볼 줄은…….”
문득 무슨 생각이 났는지 마동필이 주변을 서성였다.
“왜 그래?”
“맹극은 어지간해선 고죽림의 중심부를 떠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생김새와는 달리 혼자 있기를 즐기는 순한 성격이라고 하였지요.”
“그래서?”
“그래도 맹극은 고죽림의 상위 서열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의 귀물을 제외하곤 가장 영기가 강하고 까다로운 귀물이라고 하였지요.”
“하나의 귀물?”
“예. 그 귀물의 이름은…….”
순간 마동필의 몸이 멈추었다.
심층부의 입구 옆, 수분이 전부 빨려서 쩍쩍 갈라진 대나무가 있었다. 그리고 그 말라비틀어진 대나무 밑에 몸이 두 개로 갈라진 붉은색 뱀 한 마리가 있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크기. 죽어서 생기가 없는데도 눈이 마치 사람의 그것처럼 영롱하다.
“……비유(肥遺).”
“비유? 저 쌍대가리 이름이 비유야?”
“그렇습니다. 물론 맹극처럼 본 적은 없습니다.”
“저게 고죽림 최고 귀물이라고? 저 작은 게?”
“듣기로는 그렇습니다.”
“아무리 봐도 그렇게 강해 보이진 않는데? 독사처럼 보이지도 않고. 근데 저 대나무는 왜 말라비틀…….”
순간 서량의 얼굴이 멍해졌다.
마동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자님?”
“…….”
“왜 그러시는지요? 혹 어디 편찮으신 구석이라도…….”
“가뭄.”
“예?”
“비유는 몸이 두 개인 뱀이야. 저 뱀이 나타나면 나라에 큰 가뭄이 들지. 그래서 홍수가 난 지역의 어느 마을에선 비유를 그린 그림을 땅에 묻는다고 했어. 물이 빨리 마르고 빠지기를 고대하는 거지.”
“……?”
서량이 탄식했다.
“미친, 어쩐지 뭔 이름들이 이렇게 괴상망측한가 싶었더니만.”
“무슨 말씀이신지…….”
“산해경(山海經).
“……?!”
“이놈들 죄다 산해경에 나오는 상상 속의 괴물들이잖아.”
마동필의 눈이 흔들렸다.
“산해경이라면 작자 미상의 그 신화집……?”
“작자 미상은 맞지만 신화집은…… 그래, 어떻게 보면 신화집이긴 하지. 정확히는 지리서(地理書)라고 볼 수 있지만 뭐, 말도 안 되는 설명만 한가득이니까. 거의 어린아이의 상상으로 갈겨 놓은 낙서에 가깝지.”
“저도 들어만 봤지 실제로는…….”
“나도 그래. 예전에 한 번 본 적은 있는데 허황된 잡서라서 몇 번 넘기곤 포기해 버렸어.”
애초에 천마신교의 마인들은 산해경 같은 책을 접하기도 힘들거니와 접해서도 안 된다.
그들에겐 신(神)이 있고 경전이 있다. 산해경 같은 요사스러운 잡서는 신심(信心)을 해치고 교리(敎理)를 해한다. 그리고 그건 다른 종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아예 허무맹랑한 얘기만 있는 건 아니야. 실제 역사와 일치하는 몇 가지 기록과 고대 문자까지 적혀 있으니까. 그 유명한 서왕모(西王母)와 곤륜산(崑崙山)도 산해경에 나오지.”
“……그렇습니까.”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설령 산해경이 진짜더라도 이 조그마한 대숲에 온갖 요괴들이 다 모여 있는 건 말이 안 되는…….”
순간 서량이 눈을 부릅떴다.
후우웅.
훅 하고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철컹.
엄지로 살짝 칼을 빼 든 서량이 긴장 어린 눈으로 심층부의 길목을 주시했다.
마동필이 갸웃거렸다.
“공자…….”
“쉿.”
갑자기 왜 이러실까?
마동필이 서량을 따라 심층부의 길목을 바라보았다.
‘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지만 별다른 위화감을 받진 못했다.
다시 서량에게 고개를 돌린 순간…….
찌릿!
‘흡!’
마동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렸다. 비틀거리며 두어 걸음 물러난 건 덤이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뭐, 뭐야?!’
갑자기 머리가 핑 돌고 오금에 힘이 빠졌다. 전신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고 심장이 마구 뛰었다.
주먹을 몇 번이나 쥐고 펴길 반복한 그가 천천히 고개를 올렸다.
‘……!!’
마동필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걸 과연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서량의 얼굴은 분명 무표정했다. 하지만 도저히 무표정한 것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투명한 악귀 가면을 쓴 것 같았다. 부릅뜨지도, 가늘게 뜨지도 않은 눈은 지금껏 그가 보아 왔던 어떤 안광보다도 살벌했다.
살왕으로서의 과거는 버렸지만, 사신으로서의 정체성은 버리지 않은 서량의 본모습이었다.
극도의 긴장에 얼어 버리지 않고, 오히려 반사적으로 상대를 죽이고자 살심을 부채질하는 짐승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동필아.”
“……예, 공자님.”
“여기 있어.”
저벅저벅.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 서량이 뚜벅뚜벅 심층부로 걸어갔다.
마동필은 그를 잡고 싶었다. 자신도 함께 들어가야 한다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이전과 달리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서량의 말이 지독한 각인이 되어 그의 언행을 통제했다.
푸스스스.
서량이 밟은 자리마다 부스러진 댓잎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한 걸음, 한 걸음에 강력한 마기가 담겼다. 무의식적으로 배출되는 마기만으로도 공기가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치이이익!
마림의 심층부에서 불어오는 서늘하고 건조한 바람과 서량이 만들어 내는 뜨겁고 습한 바람이 부딪치며 첨예한 긴장감을 조성했다.
서량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도대체 저기에 뭐가 있는 거야?’
알 수 없다. 그에 대한 정보가 없다.
‘이 바람에 섞인 무시무시한 기(氣)는 또 뭐지?’
엄청나다. 한 번도 접해 본 적 없는 기다.
‘그리고 이 위화감은?’
지독하다. 의천맹과 철혈성의 천라지망 속에서도 느껴 본 적 없는 불길함이었다.
‘이건 마치…….’
서량의 눈이 번쩍였다.
‘그래. 그때와 비슷해.’
처음 이천상을 만났던 그때.
천하십대고수마저 내려다보는 마신(魔神)의 위용을 접하곤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와 같은 경지에 대해 어떠한 정보도, 지식도 없었다.
일말의 기운도 풍기지 않았으나 압도적인 기도를 자아내는 자. 당연히 그러한 기도 역시 접해 본 적 없었다.
더하여 이천상이 풍기는 위화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순간적으로 ‘죽음’을 떠올리게 할 만큼 압도적인 기운.
그럼에도 그는 이천상에게 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스스로 선택해 그를 불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저 깊은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 엄청난 기(氣)가 섞였지만 어떠한 의도도 엿보이지 않는다.
이천상처럼 위험하지만, 이천상과 조우했을 때처럼 그가 얻어야 할 보물이 그곳에 있다. 서량은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위이이잉!!
초감각이 경종을 울려 댔다. 불길함과 기대감을 동시에 심어 주는 심안(心眼)이 세상을 바라보았다.
사아아아악!
심층부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진해지는 압박감에 피부가 따끔거렸다.
서량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안 돼. 버티기 힘들다.’
우우우우웅.
본능적으로 암영진마공을 운용했다. 무의식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더욱 농밀해졌다.
하지만.
쿠웅!
‘큭!’
서량의 걸음이 멈추었다.
주르륵.
그의 입가에 한 줄기 핏물이 흘러내렸다. 강한 마기를 피웠으나 그 반탄력으로 내상을 입은 것이다.
‘빌어먹을! 도대체 얼마나 기가 강하면 지금의 마기로도 감당이 안 되냐?!’
이러다가 접근도 못 하고 폭사하겠다.
‘어쩔 수 없다. 지금 바로 쓸 수밖에.’
서량은 품에서 제탁초를 꺼내고는, 한 봉을 그대로 입에 털어 넣었다.
부글부글.
엄청난 속도로 퍼지는 약력.
서량의 눈이 번쩍였다.
스르르르르.
거세게 뿜어져 나오던 마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휘이이잉.
불어오는 바람이 서량의 몸을 그대로 통과하는 듯했다.
순식간에 펼쳐지는 암영공의 암신유체.
당대 살수의 정점에 올랐다는 살왕이 자랑하는 최고의 은신술이 펼쳐진 것이다.
서량이 눈을 감았다.
사라라락.
댓잎들이 서량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분명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는데도 통과해 버린 것 같은 착각이 인다. 눈으로 봐도 보이지 않고, 기감으로도 느껴지지 않으며, 소리도 들리지 않고 냄새도 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유령이 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가자.’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세 걸음.
‘좋아. 압박감이 흐려졌어.’
열 걸음, 스무 걸음, 그리고 서른 걸음.
‘이대로 가면…….’
순간 발에 뭔가가 걸렸다.
“헙!”
그대로 엎어질 뻔했지만 겨우 중심을 잡았다. 돌부리 같은 것에 걸려 쓰러질 뻔하다니 살수지왕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서량이 저도 모르게 욕설을 뱉었다.
“이런 시부랄! 도대체 뭐…….”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 이 앙큼한 녀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