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시랑지역(豺狼之域) (2)
살짝 파여 들어간 땅.
그곳에 한 마리의 여우가 엎드려 자고 있었다.
‘웬 여우가……?’
순간 서량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어느새 도를 쥔 그의 눈은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다. 암신유체를 유지하느라 살기가 일진 않았으나, 새카만 눈동자 위로 칼날 같은 예기가 번득였다.
‘설마 귀물?’
당연히 귀물일 것이다. 일류에 이른 내가고수(內家高手)조차 웃도는 마기로도 접근이 불가능했던 영역이다. 평범한 여우일 리는 없다.
하지만…….
‘……으음.’
긴장감으로 가득하던 서량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어렸다.
‘귀여운데?’
여우는 여운데, 새끼 여우다.
몸을 동그랗게 말곤 앞발에 턱을 괴어 자고 있는데 그 모습이 상당히 귀엽다. 여물지 못한 코와 주둥이는 깨물어 주고 싶고, 여우치고 큰 귀는 비단처럼 고왔다.
윤기 도는 황금빛 털. 풍성한 꼬리는 몸통보다도 크다.
‘워…….’
홀린다, 홀려.
보면 볼수록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눈이 핑핑 돌고 손이 간질간질한 게, 정말이지 살수의 인내심이 아니었으면 저도 모르게 껴안을 뻔했다.
‘귀물 주제에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 거냐?’
존재 자체가 호신술이다. 이 새끼 여우가 아무리 악랄한 짓을 해도 누구도 딱밤 한 대 날리지 못할 거다.
왜냐? 너무 귀여우니까.
상황도 잊고 여우를 감상하기 바쁘던 서량이 순간 주춤했다.
‘여우? 귀물?’
산해경에 나오는 여우 요물이 뭐가 있더라?
‘……모르겠는데.’
애초에 산해경 자체를 진지하게 읽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래도 들은풍월은 있다.
‘설마 구미호(九尾狐)는 아니겠지?’
청구산(靑邱山)에 산다는 꼬리 아홉 달린 여우 요괴. 굳이 산해경이 아니더라도 워낙 유명한 요물이라 번뜩 떠올랐다.
서량이 힐끔 여우의 꼬리를 보았다.
‘아닌데. 하난데.’
그리고 구미호라고 보기에는 너무 귀엽잖아. 듣기로 구미호는 그 아름다움이 하늘에 닿아서 요기(妖氣)마저 감돈다고 했다.
이 새끼 여우는 달랐다. 요기는커녕 흔한 귀물의 영기조차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멍하니 새끼 여우를 바라보던 서량이 자신의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염병, 이럴 때가 아니지.’
아쉽지만 갈 길이나 가자.
몸을 돌린 서량이 곧바로 고개를 돌려 새끼 여우를 힐끔거렸다. 가려고 하는데 자꾸 눈에 밟히는 게, 아무래도 단단히 홀린 모양이었다.
‘쳇, 갔다 와서도 자고 있으면 한번 깨워 봐야지.’
간신히 아쉬움을 접은 서량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어?”
서량은 당황했다.
“뭐야? 끝이야?”
들어온 길을 제외한 사방이 대나무로 막혔다.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굵기의 대나무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그 잠깐 사이에 심층부 끝까지 들어왔다고? 이게 말이 돼?’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좁은데? 아니면 길을 잘못 든 건가?’
한참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그가 눈을 감고 기감을 깨웠다.
우우우웅.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맞다! 이 기(氣)가 맞아! 이곳에 퍼진 영기가 가장 농밀해!’
드디어 찾았다.
‘이거 좀 허무한데.’
얼마나 무지막지한 귀물이 있는지 몰라서 제탁초에 굴송차의 찻잎까지 구해 왔다. 제탁초는 은신술을 쓰기 위함이었고, 향이 진한 굴송차의 찻잎은 후각에 민감한 귀물들을 속이기 위한 재료로 안성맞춤이기 때문이었다.
왠지 김새는걸…….
눈을 뜬 서량이 주변 대나무들을 손으로 훑었다.
‘흡!’
서량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엄청나.’
실로 무시무시한 영기였다. 지금껏 뽑아다가 정화해서 씹어 먹은 대나무들을 몽땅 모아도 이 대나무 하나에 비하기 어려울 정도.
이곳에는 그런 대나무들이 수두룩 빽빽했다.
‘만약 이 중 세 개만 정화해서 취하면…….’
저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내공만으로는 의심할 나위 없는 최강이군.’
물론 아직 그만큼 거대한 기(氣)를 받아들일 수준은 아니었다. 아니, 설령 살왕 시절의 몸이더라도 두 개를 취하기 어려울 것이다.
열망 어린 눈으로 대나무들을 쓸어 보던 서량이 한숨을 쉬었다.
‘세 개는 개뿔, 욕심부리지 말자. 하나라도 제대로 들고 갈 수 있으면 다행이지.’
굵어도 너무 굵다. 무게도 무게지만 크기 때문에 하나 이상 들고 가기가 불가능했다.
“뭐, 어쩌겠냐. 이거 하나 얻는 것만으로도 천운 아니겠어?”
이곳의 영죽이 진짜 대단한 건 영기의 양보다도 질이었다.
그야말로 순수하고 성(聖)스러움으로 가득 찬 기였다. 마기가 순정(純正)한 신기(神氣)와 상극이라지만 마공의 원재료로 이만한 영죽이 또 없을 것이다.
게다가 암영진마공은 불가 무공의 구결도 상당 부분 살아 있다. 진기도인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보통 마인이 얻는 것보다 훨씬 많은 진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서량이 씩 웃었다.
“됐다. 목적은 달성했어.”
조금…… 아주 조금…….
‘야, 이거 아쉽긴 하네.’
내공의 양이 실력의 고하를 결정짓는 건 아니다. 하지만 몸이 받아들일 준비만 된다면 내공이 많아서 나쁠 것도 없다. 특히 십대고수급의 깨달음을 가진 초고수라면 쓰임새도 무궁무진할 것이다.
게다가 영기(靈氣)는 상단전(上丹田), 즉 두뇌 능력을 개발하는 데에 엄청난 도움이 된다. 깨달음 깊은 고승들이 일 갑자 동안 연마해서 얻어 낼 법한 상단전의 신이(神異)한 능력을 단시간 내에 얻을 수도 있다.
‘과유불급, 과유불급. 하나만 가져가자. 교에서도 필요 이상 채취하지 않는다잖아.’
괜히 입맛을 쩍 다신 서량이 문득 땅을 내려다보았다.
‘응?’
땅에 볼록 튀어나온 작은 죽순이 있었다.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죽순이 이거 하나네?’
흐음…….
뽀각!
죽순을 뿌리째 뽑아 든 그가 흙을 탈탈 털어 냈다.
동시에.
번쩍!
새끼 여우의 눈이 뜨였다.
오색(五色)으로 휘황찬란한 눈빛. 서량이 보았던 귀여운 여우의 모습은 오간 데 없었다. 무척이나 신비로운, 그러나 섬뜩할 정도로 기괴한 눈빛이 거기에 있었다.
스르륵.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난 새끼 여우가 서량을 바라보았다.
번쩍번쩍!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오색의 안광이 연신 명멸했다.
평소라면 예민한 서량이 그걸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지만, 그는 죽순을 깨끗이 씻기 바빴다.
한참 죽순을 살펴보던 서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이거 뭐야?!”
영기가 엄청나게 순하다.
양은 많지 않다. 기껏해야 거처 인근에서 심심찮게 발견되는 죽순들보다 조금 더 많은 정도?
하지만 영기의 질은 심층부의 여느 대나무보다도 높고 맹물처럼 순하디순하다. 영롱하고 순수한 영기(靈氣)의 핵(核)이랄까.
‘이거 완전히 진액(津液) 그 자체 아냐?’
영약으로 치면 공청석유(空靑石乳)급이다.
듣기로 한 방울 생성되는 데 백 년이 걸린다고 했던가, 천 년이 걸린다고 했던가?
‘순해서 정화진결을 쓸 필요도 없겠어.’
오도독!
서량이 죽순을 깨물었다.
억셀 줄 알았더니 이에 닿자마자 흐물흐물해진다. 흐물거리는 조각을 씹다 보니 어느새 액화되어 목구멍으로 쑤욱 넘어갔다.
“캬! 향기도 기가 막…… 응?”
서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왜 반응이 안 와?’
꿀떡꿀떡 넘어간 액화된 죽순.
하지만 넘쳐흐르는 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좋은 보약을 먹은 것처럼 속만 좀 뜨끈해질 뿐이었다.
그나마 좀 다른 감각이라면, 뭔가 엄청나게 빨리 소화돼서 바로 피와 살이 되어 버린 것 같다고 할까? 그 외에는 정말 별다른 특이점이 없었다.
오도독! 오도도독! 아삭아삭.
몇 번이나 씹었고, 몇 번이나 넘겼다. 하지만 역시나 별 느낌은 없었다.
“그럴 줄 알았다. 진액? 지랄도 풍년일세. 전생으로 오만 운을 다 쓴 놈한테 그런 천운이 또 있으려고.”
스르릉.
서량은 죽순을 마저 베어 먹으며 칼을 뽑았다.
암신유체는 풀린 지 오래였고, 전신에서 왕성한 마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연신 시끄럽게 투덜거리는 그는 확실히 평소와 달랐다.
전혀 조심성이 없었다. 진지하게 움직여야 할 땐 누구보다도 섬세하고 집중력 좋은 사람이 지금은 너무나 부주의했다.
마치 요괴에게 홀려 버린 것처럼.
그럼에도 죽순을 뽑아 먹고 대나무를 쪼개 버릴 생각을 하는 걸 보면 그의 목적의식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알 수 있었다.
우우우웅.
그가 쥔 도에 불그죽죽한 기운이 어렸다. 암영진마공의 마기가 가시화될 정도로 집중된 것이다.
서량이 아무렇게나 칼을 휘둘렀다.
까아앙!
“……어?”
뭐야? 왜 안 잘려?
칼과 대나무를 번갈아 바라보던 그가 남은 죽순을 한입에 털어 넣고는 양손으로 칼을 쥐었다. 그러곤 다시 한번 휘둘렀다.
“흡!”
터억!
“…….”
서량의 눈이 퉁방울처럼 불거졌다.
마기를 한껏 실은 칼이 표면에만 박혔다. 어지간한 바위도 동강 내 버릴 만한 칼질이 고작 대나무 표피를 쪼개는 데 그친 것이다.
“이것 봐라? 역시 다르긴 다르다 이거냐?”
처억!
칼을 빼낸 서량이 눈을 감았다.
중단세(中段勢)로 겨눈 도.
치이이익!
어느새 칼날에 붉은빛 반투명한 기운이 어렸다. 마치 피처럼 끈적하고 칙칙하면서도 불꽃처럼 밝고 화려해 보이는, 상반된 느낌을 동시에 품은 기였다.
신검합일(身劍合一)의 경지에 올라야만 구현할 수 있는 절정의 능력.
심의축검(心意逐劍), 검기상인(劍氣傷人). 강력한 도기(刀氣)가 칼날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단월(斷月).’
번쩍!
한 줄기 붉은 광채가 허공을 갈랐다.
스르르륵.
밑동이 잘린 대나무가 서서히 기울어졌다.
쿠우웅!!
땅이 울렸다.
굵기와 길이가 남다르니 무게도 굉장할 거라 생각했지만 이건 상상 이상이었다. 들기는커녕 질질 끌고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납도(納刀)한 서량이 쓰러진 대나무 앞에 쪼그려 앉아 표면을 통통 두들겼다.
“이건 뭐 무기로 써도 되겠네. 도대체 영기가 얼마나 농축되어 있으면 한낱 대나무가 강철로 변해 버렸냐. 진짜 대단하다 대단…….”
오도독. 할짝할짝.
“응?”
뭐지? 이 친근감 넘치는 소리와 함께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은.
서량이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라?”
할짝할짝. 오도도독.
새끼 여우가 꼬리를 흔들며 그의 손가락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뿐인가. 손을 타고 주르륵 흐르는 피를 세상 행복하다는 듯 핥고 있다.
손에 가득 뱄던 죽순의 고운 향은 비릿한 피 냄새에 덮여 싹 지워진 지 오래였다.
움찔.
시선을 느꼈는지 새끼 여우가 고개를 들었다.
서량과 새끼 여우의 눈이 허공에서 불꽃을 튀기며 부딪쳤다.
잠시 후.
“으아아아!!”
「캐애앵!」
벌러덩 뒤로 넘어진 서량이 재빨리 자세를 바로 세우고 칼을 뽑았다.
다소 주책머리 없긴 했지만 발도(拔刀)와 함께 피어나는 기세는 대단했다. 섬뜩하도록 강렬해진 예기에 비해 눈에 띄게 줄어든 살기, 본능적인 대처였다.
「키이잉…….」
새끼 여우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고개를 축 내리며 뒷걸음질 치는 모습이 몹시 애처로웠다. 냅다 칼부터 뽑은 서량이 다 무안해질 정도였다.
“어? 근데 너?”
…….
“뭐야? 언제 깼어?”
여우가 대답할 수 있을 리 없다. 연신 몸을 낮추며 물러나다가 결국 완전히 엎어져선 앞발에 턱을 괴고 서량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처량하기 짝이 없는 자세다.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이 흉악한 곳에서 잠만 잘 자더니 왜 그리 저자세냐?”
살랑살랑.
큼직한 꼬리가 연신 흔들렸다.
여우도 갯과인 걸 생각하면 겁을 먹은 건 아닌 것 같다. 대충 유추해 보건대…….
‘섭섭?’
서량이 피식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스르르릉.
다시 칼을 넣은 그가 대나무를 들었다. 어쨌든, 여우에게서 살의나 짐승 특유의 원초적인 흉포함이 느껴지진 않았다. 초감각이 증명한 바이니 적어도 덤비진 않을 거라 확신했다.
하긴, 저 쪼마난 놈이 덤벼 봤자 아프기나 하겠느냐마는.
서량이 왼손을 흔들었다.
“으, 아파. 쥐똥만 한 게 턱주가리 힘 하나는 호랑이 저리 가라네.”
쿠구궁.
그가 대나무를 들었다. 질질 끌고 가야 할 것 같았는데 들다 보니 어떻게 어깨에 걸쳐지긴 했다.
대나무를 메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가던 서량.
잠시 후.
“……왜 따라와?”
서량이 멈추자 쫄래쫄래 따라오던 새끼 여우가 허벅지에 앞발을 척 올리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러곤 그 커다란 눈을 말똥거렸다.
‘…….’
귀엽긴 정말 오지게 귀엽다.
서량이 손을 저었다.
“훠이, 훠이.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거라.”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
새끼 여우는 또다시 그의 허벅지에 앞발을 얹었다. 구슬만 한 눈을 끔뻑이며 코를 씰룩이는 것이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듯했다.
서량이 볼을 긁적였다.
“뭐, 위험해 보이지도 않고. 알아서 떨어져 나가겠지.”
대수롭잖게 여긴 그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예상보다 훨씬 수월하게 끝난 영죽 채취에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벼웠다.
그리고 새끼 여우는 졸졸졸 그의 뒤를 따라갔다.
서량의 뒷모습을 보는 새끼 여우의 검은 눈동자에 언뜻 오색의 광채가 엿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