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시랑지역(豺狼之域) (3)
“구, 구해 오셨군요.”
“거럼.”
마동필의 얼굴은 볼만했다.
사아아아아.
보일 리 없는 아지랑이가 보이는 것 같고, 들릴 리 없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잘린 대나무에서 무지막지한 영기가 샘솟고 있었다. 그동안 봐 왔던 영죽과는 차원이 달랐다. 양도 양이지만 특히나 농축된 영기의 질이 남달랐다.
“정말이지 대단한 영기로군요.”
“그렇지? 야, 하도 단단해서 칼도 안 들더라. 대나무 하나 자르자고 도기까지 뽑아서 써야 했다니까.”
신검합일이라 했고 신도합일이라 했다.
병장기와 내가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니 칼이 곧 몸이고 몸이 곧 칼이다. 깨달음은 마음으로 녹아 안착하고, 마음은 곧 기(氣)이니 결과적으로 칼에 실린 기의 성질마저 달라진다.
마동필이 검지로 잘린 대나무의 단면을 천천히 훑었다.
‘……굉장한 도기다.’
소름 끼칠 정도로 매끄러운 단면이었다. 자신이 최고의 검초로 최대의 힘을 뽑아 휘두른다 한들 이런 흔적을 남길 수 있을까?
‘과연 대단하시구나.’
팔 개월 전, 범부와 비슷했던 수준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성장이다. 새삼 더 놀랄 것도 없다 생각했는데, 함께 지내면 지낼수록 하루하루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그나저나, 공자님.”
“어, 말해.”
마동필의 표정이 어색해졌다.
“저 여우는…….”
서량이 힐끔 뒤를 바라보았다.
새끼 여우가 그의 엉덩이 뒤에 앉아 꼬리를 살랑거리고 있었다. 커다란 귀와 몸통보다 크고 긴 꼬리가 묘하게 신비로웠다.
“몰라. 저 안에 있더라. 처음엔 쌕쌕 잘도 자고 있더니만 어느새 깨서는 내 왼손을 이 지경으로 만들…… 어?!”
서량이 눈을 끔뻑였다.
“뭐야? 씹힌 자국 어디 갔어?”
“예, 예?”
“아니, 저 요망한 여우 새끼가 내 왼손을 고기 붙은 뼈다귀라도 되는 것처럼 잘근잘근 씹었단 말이다. 피도 철철 났는데 왜 벌써 멀쩡해졌지? 영기가 그렇게 센가?”
“저 여우가 공자님의 존체를 건드렸단 말입니까?”
“그렇다니까.”
스르륵.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마동필이 새끼 여우를 노려보았다.
근엄하기 짝이 없는 그의 얼굴 위로 철철 넘쳐흐르는 냉기에 서량이 손사래를 쳤다.
“어디까지 진지해질 거냐? 그냥 내비 둬, 인마. 하다 하다 이젠 짐승한테까지 죄를 물으려 드네.”
“…….”
“눈알에서 힘 빼.”
고개를 숙인 마동필이 마지막으로 새끼 여우를 노려보았다. 다시 한번 존체에 손을 대면 처절한 응징을 가하겠단 의사가 두 눈 가득 뿜어져 나왔다.
벅벅벅.
새끼 여우는 그를 본 척도 하지 않았다. 뒷발로 턱을 몇 번 긁더니 슬쩍 엎드려 서량의 등만 바라보았다.
마동필의 턱에 굵은 힘줄이 불거졌다. 한낱 짐승에게 무시를 당한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뭐 해!”
“아, 예.”
마동필이 서량 옆에 쪼그려 앉았다.
몇 번이나 대나무를 살펴본 서량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안 되겠어. 들고 가기에는 거리가 좀 있으니까 여기서 바로 정화해 버리자.”
“예, 제가 호법을 서겠습니다.”
“그래.”
서량이 양손을 대나무에 올려놓은 채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우우우우웅.
암영진마공은 한 발 뒤로 물러나고, 팔 개월 동안 제대로 연마된 무애공이 그 자리를 채웠다.
사아아아아악!
순식간에 주변 공기가 청정해졌다. 풍성한 영기에 가려진 극히 미세한 탁기마저 빨아들이는 것이다.
마동필은 진중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언제 봐도 신기하구나.’
주변의 탁기를 제거하여 공기를 깨끗하게 만드는 것.
나아가 지나친 영기로 즉각 섭취하기 힘든 영죽의 농도를 알맞게 맞추는 작업.
‘단순히 독특한 무공을 알고 계신 것이 아니다. 기공에 대한 깨달음이 무척이나 높다는 뜻이야.’
그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공자님께선 저런 지식과 깨달음을 언제 얻으셨을까.’
보면 볼수록 이십 대 초반의 청년 같지가 않다. 방금도 그렇지만, 공자님에게선 수십 년을 살아온 노강호의 연륜이 종종 엿보였다.
푸스스스스.
마침내 대나무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환시가 아니라 진짜 아지랑이였다. 대나무에 쌓인 고농도의 영기 중 일부가 공기 중으로 빠져나가는 것이다.
서량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까드드득!
대나무 마디를 잡은 손에 굵은 핏줄이 드러났다.
꾸르르르륵.
대나무의 양쪽 끝이 점점 하얗게 탈색되더니, 끄트머리가 수분이 죄다 빨린 듯 쩍쩍 갈라졌다.
반면 서량이 쥔 부분의 색은 점점 어두워졌다. 불안정한 영기를 뽑아내고 마디 하나에 집약시켜 진액화하는 것이다.
푸스스스. 푸스스스스.
하얗게 말라비틀어진 양쪽 끝이 회색으로 물들더니, 이내 가루가 되어 휘날렸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어느새 마디 안에 찰랑거릴 정도의 진액이 모였다.
서량이 눈을 떴다.
“됐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무슨. 일단 너부터 마…… 엥?”
서량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어느새 가부좌를 튼 그의 다리 위로 새끼 여우가 엎드려 있었다. 옆에서 천둥이 쳐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숙면 상태였다.
“뭐야? 얘 언제 왔어?”
마동필은 당황했다.
“저, 저도 주위를 둘러보느라…… 하지만 기척을 느끼진 못했습니다.”
“허! 이거 진짜 신기한 놈일세.”
서량은 검지로 여우의 콧잔등을 슬슬 쓸어 보았다.
‘흠.’
감촉 하난 예술이네.
“공자님, 저한테 주십시오. 근처에 버리고 오겠습니다.”
“버려? 얘를?”
“어미가 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음…… 그런가. 근데 심층부에는 얘 혼자만 있었는데.”
“잠시 어딜 나갔는지도 모릅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고죽림에 평범한 생물은 없습니다. 작지만 이 녀석 역시 귀물이 분명합니다.”
“그건 그렇지.”
서량은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다리에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걸 보니 그냥 내버리기는 미안한 감이 있다.
“일단 너부터 반절 비워라. 이 녀석의 처리에 대해선 생각 좀 해 보자.”
마동필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공자님, 제가 언감생심 어찌 이 귀한 것을…….”
“팔 개월 동안 지겹지도 않냐, 그 소리?”
“이것은 다릅니다. 온전히 공자님께서 취하셔야 옳습니다.”
“마지막까지 섭섭하게 이럴래? 함께 한 정이 있는데 쌀쌀맞게 굴지 말자. 얼른 마셔.”
“…….”
“확 턱뼈 빼 버리고 쏟아붓기 전에 얼른 마셔. 나도 빨랑 마셔보고 싶단 말이다.”
“…….”
“거참 답답하네. 빨리 마셔 좀!!”
“……감사합니다, 공자님.”
천천히 절을 올리는 마동필의 얼굴에 격정이 어렸다.
아무리 함께 한 정이 있다 해도 이 귀한 영약을 나눠 주는 일은 흔치 않다. 평생을 함께한 친우와도 칼부림하게 하고, 혈육에게도 양보치 않는 귀한 보물이 바로 영약이란 것이니까.
삼공자님은 그런 영약을 정말 별거 아니라는 듯 나눠 주고 계신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네가 내 목숨 한두 번 구해 줬냐?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다 줘도 모자랄 판에 반절이나 빼앗고 있으니.”
“공자님…….”
“나 때문에 괜히 이 거지 같은 곳에서 고생이 많았어. 진심이야.”
마동필은 울컥 치미는 감정을 느꼈다.
호법, 호위무사란 외로운 직업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한 번 실수하면 그걸로 끝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끝까지 임무를 완수해도 앞으론 더 긴장하란 소리나 듣기 일쑤였다.
살면서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진심 어린 감사를, 팔 개월 남짓 모신 눈앞의 삼공자님에게서 받았다.
이런 영약 따위보다 몇 배는 더 귀하고 소중했다.
“제 임무가 끝나는 그 날까지 공자님은 제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그 어떤 위협도 제 시체를 넘기 전까지는 공자님을 넘보지 못할 겁니다.”
감사해하는 건 알겠는데 면전에서 이런 말을 들으니 좀 간질간질하다.
괜히 멋쩍어진 서량이 머리만 긁적이던 그때였다.
‘음?!’
그의 눈이 번뜩였다.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소리도, 냄새도 없었다.
하지만 영기 충만한 이곳의 공기를 뒤흔들어 대는 살의(殺意)만큼은 명확했다.
어떠한 의도도 깃들지 않은 맹목적인 살의. 원초적이라는 표현으로밖에 설명되지 않는 무지막지한 살의의 화살들이 이곳을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마동필이 피를 토하듯 외쳤다.
“설령 이 임무가 끝이 나더라도, 저는 죽는 그 순간까지 공자님의 대은(大恩)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야! 됐으니까 얼른 마셔!”
마동필이 눈을 감았다. 정말이지 삼공자님은 생색에 소질이 없으신 것 같았다.
“소신 마동필, 림을 나선 뒤에는 호법원으로 귀환할 수밖에 없으나 마음만큼은 언제나…….”
“연설 그만하고 빨랑 마시라고!”
“공자님, 저의 진심은…….”
“미친놈아! 제발 좀 마셔! 마시라고!”
터억!
마동필의 눈이 커졌다.
“어억?!”
어느새 그의 고개가 뒤로 꺾이는가 싶더니, 턱이 쑥 내려가며 활짝 열린 입에 진액이 콸콸 쏟아져 들어왔다.
“커헉! 커걱!”
“삼켜! 목젖 열심히 움직여, 새끼야!”
진액을 되는 대로 쏟아부으면서도 서량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이런 시발!”
이 새끼들 뭐가 이렇게 빨라?
하늘에선 시커먼 괴조(怪鳥), 주(鴸)가 까마귀 떼처럼 날아들었다. 그 외에 구 척이 넘는 거대한 원숭이 성성은 물론, 창부들 틈새로 녹촉도 두어 마리 보였다.
아까 보았던 맹극이란 표범도 보였다. 털빛이 워낙 밝아서 눈에 안 띌 수가 없었다. 말인 녹촉보다도 빠른 속도가 가히 압권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쩌저저적!
대나무 몇 그루가 빠른 속도로 말라 갔다. 보이지 않는 땅에서 비유 몇 마리도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지금껏 보았던 귀물들이 총출동하고 있었다. 그 외에, 저 멀리 서쪽에선 한 번도 보지 못한 괴상망측한 귀물들도 출현했다.
대충 반절쯤 넣었다 싶은 서량이 남은 진액을 한 방에 삼켜 버렸다.
한참 콜록대던 마동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게……!”
“꺼어어억! 콜록! 야! 튀어!”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그걸 내가 아냐고!!”
서량이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았다.
“동북쪽! 동북쪽이 뚫렸어! 너 여기 길 외웠어?!”
“물론입니다!”
“이런 믿음직한 새끼! 좋아, 튀자!”
즉각 신법을 펼치려던 서량이 힐끔 뒤를 바라보았다.
이 난리가 났는데도 저놈의 새끼 여우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빌어먹을!”
잠시 후.
“야! 받아!”
“예? 헉!”
“걔 다치지 않게 품에 넣고 달려! 후방은 내가 막을 테니까!”
“고, 공자님! 제가 놈들의 추격을 끊겠습니다!”
서량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지이이잉!
주먹에 불그죽죽한 마기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말 좀 들어라, 이 새끼야아아!!”
콰아아앙!
“크윽!”
마동필의 몸이 엄청난 속도로 전방을 향해 쏘아졌다. 서량이 내지른 묵직한 권풍(拳風)이 그의 몸을 밀어 내 버린 것이다.
권풍을 쏘아 내는 것 자체가 고급의 무리(武理)다. 그리고 그 권풍을 타격이 아닌 밀어 내어 던져 버리는 데에 활용하는 것은 그야말로 초상승의 무리.
마동필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공자님이 강하신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고, 공자님!”
푸화아아악!
서량이 휘두른 칼에 창부의 몸이 반으로 쪼개졌다.
마침내 선보이는 살왕의 절기, 단천삼도(斷天三刀)였다.
최고의 무공은 아니지만 신속하게 펼치기에는 이만한 무공이 없다. 지금은 실력 선보이자고 화려한 무공이나 펑펑 써 댈 때가 아닌 것이다.
화아아악!
서량의 몸에서 강력한 마기가 피어올랐다.
그가 귀물들을 향해 호기롭게 외쳤다.
“오지 마!”
퍼어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