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죽림을 나서다 (1)
이천상이 판마정으로 들어서자 주변 풍경이 황량한 절벽 끝으로 변했다.
우중충한 날씨. 비는 오지 않지만 해가 뜨지도 않았다.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은 제법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황량한 정자에 앉아 분주(汾酒)를 홀짝이던 이천상의 눈이 일순 빛났다.
번쩍! 콰르르릉!
먹구름 곳곳에서 시퍼런 번개가 쳤다.
딸칵.
잔을 내려놓은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신교의 절대자의 눈에 저 살벌하기 짝이 없는 하늘은 어떻게 보일까.
“시랑(豺狼)?”
이천상이 보는 것은 하늘이 아니었다.
하늘 너머, 이 미치도록 현실 같은 환상을 뚫고 신교삼대비역(神敎三大秘域) 중 하나인 고죽림의 하늘을 더듬는다.
이천상의 얼굴에 짙은 흥미가 돌았다.
“고죽림주(孤竹林主)가 영지(靈地)를 포기했나?”
신교의 역사에서 시랑이 영지 바깥으로 나온 적은 손에 꼽는다.
애초에 시랑은 밖으로 나와선 안 될 존재였다. 고죽림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시랑의 영기 조율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소수의 몇 번이지만 시랑이 밖으로 나온 적이 있음에도 고죽림은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고로 뜻밖의 일일 뿐,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
궁금한 것은 이것이다.
‘왜?’
이천상이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이유를 모르겠군.’
삼대비역 중 판마정만이 그의 의지하에 놓여 있었다.
역대 교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당히 천마(天魔)라 불리는 경지에 오르지 않았다면 고죽림의 상황을 엿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경지에 올랐다 한들 저토록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벌어진 일을 아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가, 그리고 역대 천마들이 판마정 외의 두 비역을 엿볼 수 있었던 이유.
두근두근.
이천상이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댔다.
힘차게 박동하는 심장에 아로새겨진 유진도형(幽陣圖形)이 판마정의 진형(陣形)을 의지대로 뒤바꾸었다.
‘언제 보아도 신비롭군.’
판마정과 나머지 하나의 비역에 펼쳐진 진법은 고죽림이 형성한 진법을 토대로 만들어진 가짜였다. 그래서 틈새만 엿볼 수 있을 뿐, 전체를 낱낱이 볼 순 없는 것이다.
가슴에 손을 대고 심장 소리를 듣던 그가 다시 술병을 쥐었다.
쪼르르르.
천천히 차오르는 잔.
이천상의 얼굴이 다시 무심하게 변했다.
“셋째인가.”
셋째.
공식적으로 세 번째, 비공식적으로는 네 번째 얻은 혈기 넘쳤던 제자.
이무기인 줄 알고 받았더니, 탁한 권력에 찌들어 살모사보다도 못한 잡뱀으로 퇴화해 버린 녀석.
그러나 주화입마에 걸렸다 기적적으로 살아난 이후, 녀석의 눈은 변했다.
보다 정확히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같은 제자지만 또한 같은 제자가 아니다.
사람을 파악하는 데에 소문이나 증언 따위는 필요치 않다. 그저 그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면 그뿐이다.
‘판마정으로 부르길 잘했군.’
셋째를 판마정으로 부른 이유는 하나였다. 자신의 눈이 틀렸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셋째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녀석은 유년기의 자신과 너무나도 닮았다. 행동거지는 물론 사상, 욕망,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등등 기가 막힐 정도로 닮아 있었다.
제자 중 셋째의 변질에 유독 실망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자신을 가장 닮은 제자의 변질은 곧 그것이 자신의 수많은 미래 중 하나가 될 수도 있음을 상정하는 바. 그는 그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바랐다. 자신의 눈이 틀렸기를.
그리고 그의 조촐한 바람을, 셋째는 기가 막히게 들어주었다.
정확히는 반만 들어주었다. 그가 보았던 실망스러운 제자도 아니었지만, 자신과 닮은 과거의 제자도 아니었으니까.
‘죽음이라…….’
이천상이 잔을 비웠다.
‘저승이라도 다녀온 겐가.’
조금은 비굴한 모습도 보이고, 깜짝 놀랄 만큼 정감 있는 말들을 뱉어 대기도 했지만 결국 녀석의 본질은 이것이었다.
죽음(死).
원한다면 세상 누구라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폭발적인 살의를 가슴 깊숙한 곳에 꾹꾹 숨겨 놓고 있었다.
그런 제자를 고죽림으로 보내고 팔 개월이 지났다.
제자는 여전히 살아 있으며, 자신이 전수한 마공을 익히지도 않았다.
심지어 시랑도 영지를 떠났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시기가 너무 적절했다.
‘시랑이 셋째에게서 무언가를 보기라도 한 건지.’
쪼르르르.
다시 한번 채워지는 잔.
그 술잔을 내려다보는 이천상의 얼굴에는 믿을 수 없게도 진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순수한 기쁨의 미소. 하지만 그 미소 속에는 진득한 핏물과 철저한 파괴, 그리고 헤아리기 어려운 죽음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것이 좋은 징조였으면 좋겠군.”
시랑(豺狼).
고죽림을 만든 고대의 누군가가 본인의 상상을 현실로 구현해 낸 귀물들과 달리, 시랑은 스스로 죽고 살기를 반복한 진짜 영물(靈物)이다.
늙은 몸을 벗어던지고 다시 새끼로 돌아갈 때 주변의 온갖 생기(生氣)를 빨아들인다. 덕분에 천하에서 손꼽히는 요괴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시랑이 요괴라고 손가락질받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시랑이 나타나면 나라 안에 전쟁이 일어난다.
흡생(吸生)의 저주와 전쟁을 유발한다는 전설이, 시랑이 지상 최악의 재앙으로 취급되는 이유였다.
“……과연 본교에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까.”
* * *
“허억! 허어억!”
어느새 고죽림의 입구가 보이는 곳까지 도달한 마동필이 숨을 거칠게 내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공자님!”
촤아아악!
진한 핏물이 허공을 수놓았다.
파바바박!
전방으로 내달리고 있음에도 하늘을 나는 주들을 모조리 베어 넘기는 서량의 칼질은 그야말로 예술의 경지였다.
콰직!
발길질 한 방으로 대나무를 박살 낸 그가 쓰러지는 나무를 손으로 낚아챘다.
쩌저저적!!
악력만으로 그 굵은 대나무가 수십 갈래로 갈라졌다.
서량이 발을 크게 내디뎠다.
콰앙!
호기 넘치는 진각과 함께 댓조각들이 하늘로 솟구쳤다.
퍼버버버벅!
그 많은 댓조각은 단 하나도 빗나가지 않고 주들의 몸통을 꿰뚫었다.
주들이 비명을 지르며 땅으로 풀썩풀썩 떨어지는 것을 목격한 마동필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엄청난 암기술!’
암기술의 최고봉이라는 적엽비화(摘葉飛花)를 보는 듯했다. 어떻게 저 많은 댓조각을 하나도 낭비하지 않고 모조리 격중시켰는지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빠각!
창부의 머리가 산산이 터져 나갔다.
허공을 돌아서 채찍처럼 후려치는 선풍각(旋風脚)이었다. 몸 좀 단련한 범부들도 펼칠 수 있는 각법이지만 너무나 시기적절했고, 위력 역시 막강했다.
서량이 품에서 찻잎이 담긴 종이를 꺼내 끝을 뜯었다.
피이이이잉!
좌측으로 암기처럼 날아가는 찻잎.
그 묵직한 향이 전방 창부들의 후각을 자극했다.
당황해서 머뭇거리는 창부들.
그들 뒤로 녹촉과 성성 떼가 들이닥쳤다.
콰드드드득!
창부 십여 마리의 몸이 그대로 터져 나갔다. 녹촉의 발길질과 성성 무리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서량이 욕설을 뱉었다.
“개새끼들! 너희들은 후각이란 걸 상실했냐?!”
퍼어억!
창부의 시체를 녹촉에게 던져 움직임을 막아 보려 했지만, 기가 막힌 앞발질로 터트려 버린다.
전설상의 천마(天馬)도 시도 못 할 만행을 태연하게 저지르는 녹촉을 보며 서량은 기가 찼다.
“잔혹한 새끼 같으니! 너희가 어딜 봐서 영물이야!”
아, 귀물이라고 부르긴 하지.
“알고 있어? 니들 내가 다 한 번씩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겼던 놈들이다, 이놈들아!”
파아아악!
순간 녹촉과 녹촉 사이를 뚫고 맹극이 달려들었다. 턱 밑까지 내려온 송곳니와 날카로운 발톱이 철판이라도 뜯어낼 것처럼 강인해 보였다.
서량의 눈이 흔들렸다.
넌 잡아도 못 먹을 것 같아.
까아아앙!
‘크윽!’
앞발질 한 번에 뒤로 삼 장이나 날아가 버렸다.
전신 관절이 삐걱거리는 것 같다. 허벅지 근육이 찢어질 듯 욱신거리고 시야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호구가 찢어져서 피가 배어 나왔다.
서량은 어이가 없었다.
‘뭐가 이렇게 강해?’
본능적으로 칼을 들어 막지 않았다면 이번 일격으로 상체가 뜯겨 날아갔을 것이다.
정작 칼날에 베인 맹극의 앞발에는 피만 조금 날 뿐이다. 창졸지간이라 해도 마기가 실린 칼인데 상처는 고작 그게 전부였다.
“이 덩치 큰 고양이 새끼가!”
후욱!
마동필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거리를 벌려도 모자랄 상황에 공자님이 맹극의 품으로 뛰어든 것이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을 보며 감탄하다가 느닷없이 벌어진 상황에 깜짝 놀랐다.
“공자님!”
찌이이익!
맹극의 발톱이 훑고 지나간 서량의 등이 피로 물들었다.
서량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뼈가 다치지 않았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됐어!’
콰앙!
진각과 함께 그의 좌수가 맹극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퍼어어억!
뒤로 훨훨 날아간 맹극이 녹촉과 부딪치며 쓰러졌다.
괴력의 무공이다. 족히 이백 근은 나갈 듯한 거대한 표범이 허공을 날아 쓰러지는 광경은 가히 장관이었다.
하지만 정작 서량의 표정은 썩어 들어갔다.
“저, 저 미친놈!”
크르르릉!
전혀 문제 될 것 없다는 듯 녹촉의 몸체를 찢고 일어난 맹극.
코와 입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살벌하다. 두 눈에 떠오른 흉흉한 살기가 살부지수(殺父之讐)를 노려보는 외동딸의 한(恨)을 떠올리게 했다.
서량이 입술을 깨물었다.
‘폭산경(爆山勁)을 맞고도 멀쩡하단 말이지?’
폭산경은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의 일종으로 암경(暗勁)의 묘리를 극대화한 천하일절의 수공(手功)이었다.
진기로 내부 장기까지 보호하는 경지라면 모를까, 일격만 들어가면 무조건 죽는 즉사기(卽死技)다.
귀물이라도 장기까지 보호할 능력이 있을 리 없다. 일전에 난도질해 놨던 녹촉도 폭산경 한 방에 심맥이 다 터져서 황천길로 떠났다.
순간 서량은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젠장, 영죽 때문이야.’
급하게 마신 영죽의 영기를 아직 마기로 치환시키지 못했다. 치환되지 않은 순수한 영기가 마기의 발산력을 낮추고 농도를 옅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 당장 어떻게 할 순 없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칼이 통하지 않고 내가중수법도 통하지 않는다. 당연히 딱밤 정도로 기절하진 않을 거다.
그렇다면?
“으아아! 이건 시발 사기야!”
퍼어어엉!
서량이 마동필을 향해 달려 나갔다.
“동필아! 뛰어!”
“예, 예!”
마동필이 냅다 달렸다. 그 잠깐 새에 호흡을 되찾았는지 힘이 넘치는 신법을 구사한다.
콰르르릉!
대지가 울렸다.
맹극을 필두로 하나 남은 녹촉과 수십의 성성이 달려 나왔다. 저 먼 하늘에서는 또 다른 주가 날아왔다.
“헉헉!”
서량의 호흡도 조금씩 거칠어졌다.
오만 욕설을 섞어 가며 폭발적인 살초를 쏟아 낸 그였다. 영기 덕에 엄청나게 단련되었다지만 고작 팔 개월 동안의 수련으로 버텨 낼 만한 짓거리가 아니었다.
그런 몸으로 어느새 마동필과 나란히 달리는 걸 보면, 가히 체력과 신법만큼은 당대 최고를 논할 만하다.
서량의 눈이 빛났다.
“다 왔다!”
고죽림의 입구.
영기의 농도가 눈에 띄게 약해지는 영역이다. 대숲에서 한 자만 떨어져도 놈들은 맥을 못 출 것이다.
그때였다.
파아아악!
서량의 눈이 흔들렸다.
입구에서 가까운 좌우의 대나무들이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수분이 쪽쪽 빨려 버썩해진 대나무들은 당장에라도 부러질 듯 위태롭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제기랄!’
그가 마동필의 등에 손을 가져다 댔다.
마동필의 눈에 의아함이 어렸다.
‘공자님?’
서량의 짧게 숨을 들이켰다.
“흡!”
퍼어어어엉!
마동필의 속도가 두 배는 더 빨라졌다. 권풍을 내쏠 내공이 없어서 직접 던져 버린 것이다.
순식간에 입구를 통과해 버린 마동필.
동시에 좌우에서 대여섯 마리의 뱀들이 서량에게 뛰어들었다.
파아아아악!
이동 속도는 느렸지만 사냥 속도만큼은 맹극의 뜀박질보다 세 배는 더 빨랐다.
“공자님!”
“이판사판이다아!!”
비유들의 어금니가 당장이라도 서량의 몸통에 박힐 것 같은 절체절명의 순간.
파아아악!
서량의 몸이 회전하며 시뻘건 돌풍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