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죽림을 나서다 (3)
“……하여, 곧 있을 파순제(波旬祭)의 예상 경비는 대략 금(金) 오만 칠천 냥으로 집계가 되었사옵니다.”
어둠으로 가득 차 있던 너른 대전이 오늘만큼은 환하게 밝았다.
드높은 태사의의 좌우로 수많은 마인이 공손하게 서 있었다. 그들이 뿜어내는 마기가 어찌나 대단한지 대전 내의 공기마저 뜨거운 듯했다.
하지만 그들이 뿜어내는 마기가 아무리 대단해도 태사의에 앉은 마신(魔神)의 존재감에 비할 순 없었다.
거대한 체구.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그의 표정은 무척이나 나른해 보였다. 한 손에는 보란 듯이 술잔을 들고 있었고, 그 옆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여인이 술병을 들고 서 있었다.
“…….”
기묘한 침묵이 일었다.
이천상이 잔을 들었다.
꿀꺽꿀꺽.
한 모금, 한 모금 천천히 잔을 비운다.
눈앞에 신교 최고수들이 서 있어도, 내성의 주요 인사들이 보고 있음에도, 외성의 책임자들이 듣고 있음에도 한 점 거리낄 것 없다는 태도.
드높은 권력과 무한한 자유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원로들의 권위를 위해서라도 적당히 할 필요가 있건만, 그에게선 전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누구 하나 토를 달지 못했다.
그때, 태사의 좌측에서 허리를 숙이고 있던 당당한 체구의 중년 사내가 허리를 폈다.
“작년보다 경비가 무려 만이천 냥이나 올랐습니다. 외전 타격대(打擊隊)들이 임무를 나갔으니 결원이 많을 터, 그럼에도 경비가 줄기는커녕 올랐다는 것이 의아합니다. 환희원주(歡喜院主)께서는 그 연유를 설명해 주십시오.”
그러자 우측 열의 여섯 번째 자리에 서 있던 여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 고개를 숙였다.
고혹적인 자태에 어울리는 굉장한 미모였다. 얼핏 서른 언저리로 보이는 성숙한 외모였지만 실제 나이가 오십에 가깝다는 환희원주 소연심(素蓮心)이었다.
“소신(小臣) 환희원주가 성신(聖神)께 아뢰옵나이다. 이번 파순제에 마검가를 주축으로 한 네 가문의 제사 참여가 확실시되었사옵니다. 칠가(七家)는 수백 년 전부터 본교를 수호하던 명문가들인바, 적당한 사례는 신교의 위엄과 아량을 보여 주기에 적합하다고 사료되옵니다.”
무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환희원주의 말씀은 일견 타당합니다. 그러나 본교의 위엄은 역사가 증명했고, 현재도 계속되고 있으며 나아가 천 년 후에도 영원할 것입니다. 또한, 제사에 참여한다면 가문의 수장들은 교주님께 육천심주(六天心酒)를 하사받게 될 것입니다.”
“…….”
“본교의 위엄과 아량은 교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것이지 돈으로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여, 예상 경비 금액을 축소하여 다시 결재 서류를 올릴 것을 명합니다.”
“소신의 생각이 짧았음을 여실히 깨달았사옵니다. 부족한 모습을 보여 송구하옵고, 명일 오시(午時) 전에 결재 서류를 새로이 올릴 것을 약조드리겠사옵니다.”
소연심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교주를 대신하여 성언(聖言)을 전파하고 신료들의 보고를 교주 대리로 결정짓는 자.
얼핏 보면 대호법의 권위가 하늘을 찌를 듯하지만, 이곳에 모인 마인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대호법은 결국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것을.
대호법 무담이 하는 말은 곧 교주가 하는 말이다. 교주와 친분이 있어서가 아닌, 교주가 원하는 말만을 하는 자리였다.
그래서 마인들은 무담을 질투하지도, 부러워하지도 않았다.
교주의 신임을 얻고 있지만 결국 그는 권력에서 가장 동떨어진 자리에 있는 사람이니까.
무담이 이천상에게로 몸을 돌렸다.
천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는 그의 모습에 공경의 기색이 넘쳤다.
“이상으로 내외(內外) 마수(魔首)들의 업무 진행 현황이었사옵니다.”
이천상이 잔을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여인이 조심스레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잔을 받으며, 이천상이 말했다.
“수고들 했네.”
대전에 모인 모든 마인들이 무릎을 꿇었다.
“군림성교(君臨聖敎), 천마불사(天魔不死)!”
무릎을 꿇은 마인들이 이어서 고개를 조아렸다.
“성신(聖神)의 축복에 감읍하옵나이다!”
교주를 제외, 신교 최고의 권력자라는 원로원주(元老院主)까지도 성심을 다해 외치는 신을 향한 경애.
천하에 여러 권력자들이 판을 치고 있지만, 이토록 막강한 권력자는 달리 없을 것이다.
“일어나게.”
처처척.
모든 마인들이 일어났다. 빨랐지만 예를 잃지 않은 동작이었다.
“…….”
침묵이 흘렀다.
다시 한번 잔을 비운 이천상이 입을 열었다.
“첫째는 아직 폐관 중인가 보군.”
무담이 고개를 숙였다.
“아직 호마삼관(護魔三館)에서 나오지 않았사옵니다.”
“그런가.”
“예, 교주님.”
이천상이 좌측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좌측 열 후방, 거대한 석상 앞에 도열한 젊은 남녀들에게로 향했다.
“둘째.”
“부르셨습니까, 교주님.”
태사의에 가장 가까이 선 청년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청년의 외양은 평범했다. 키는 꽤 컸지만 전체적으로 어디에서나 볼 법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청년에겐 누구와도 다른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입김만 불어도 화로가 식을 것 같은 극도로 차가운 분위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다시 연공(練功)에 들어갈 것이냐?”
천마신교의 이공자, 관평(關評)이 읍했다.
“이미 제 삶에 무(武)가 녹아 있습니다. 또 다른 변화의 시기를 맞이하기 전까지 폐관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꽤 당돌한 말이었다. 자리를 생각하면 무례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는 말이다.
하지만 이천상은 전혀 그를 문제 삼지 않았다.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아는 자에게 가르침은 필요치 않은 법. 뜻대로 행하라.”
“감사합니다.”
대전에 모인 마인들의 얼굴에 놀란 빛이 어렸다.
이천상은 이런 공석에 제자들을 부른 적이 없었다. 신분은 높지만 직책이 없기 때문이다.
어인 일로 제자들까지 불렀는가 싶었거늘, 이공자에게 하시는 말씀이 실로 충격적이지 않은가.
무(武)에 관해서는 야박할 정도로 칭찬을 아끼시는 분께서 저런 말씀을 하시다니. 이천상의 평소 언행을 생각하면 굉장한 칭찬이었다.
“넷째.”
“예, 교주님.”
사공자, 홍위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며칠 전과는 또 다르구나. 열성을 쏟고 있는 모양이다.”
홍위문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늦다.”
“…….”
“모두를 압도하고 싶다면 너 자신을 던지고 또 던져라. 그러고도 얻기 힘든 것이 깨달음이다.”
“…….”
“정진하도록.”
“예, 교주님.”
홍위문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러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마음에 동요가 없는 것이다.
평소 이천상이 하는 말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공자가 칭찬을 받았을 땐 다소 놀랐지만 그뿐이다. 지금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무(武)보다는 세력 확장이었던 것이다.
이천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다섯째.”
“네, 교주님.”
한 걸음 앞으로 나온 여인.
순식간에 대전 안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이공자의 차가운 분위기와 조금 다른, 모든 것에 무관심한 듯한 분위기가 눈에 띈다. 하지만 미모가 너무 뛰어나서 그 무심함마저 가려 버리는 듯했다.
화려하지만 부담스럽지 않고, 친근하지만 다가갈 수 없는 격이 느껴지는 미모. 거기에 무공으로 단련된 몸매까지.
경국지색(傾國之色)에 십전완미(十全完美)란 말을 떠올리게 하는 이 여인이 바로 오공녀(五公女)인 주서윤(周瑞贇)이었다.
이천상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찬가지로 주서윤은 무심한 표정으로 앞만 주시했다.
잠시의 침묵.
그리고 나온 이천상의 말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상당히 좋구나.”
수뇌부들의 눈이 흔들렸다.
관평의 눈이 깊어지고 홍위문의 볼이 떨려 왔다. 지금까지 이천상이 제자에게 이런 평가를 내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의 무공은 네 재능을 끌어올릴 수 있는 데에 한계가 있다. 이 회의가 끝난 후 호법원주를 따라가라. 십대마공(十大魔功) 중 하나를 골라 보도록.”
주화윤이 고개를 숙였다.
“교주님의 은혜, 각골난망이옵니다.”
“수고했다.”
그녀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누구도 받지 못한 극찬을 받았음에도 그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아예 감정이 없는 인형처럼 보이기도 했다.
훅.
대전 안의 공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이공자, 그리고 사공자를 넘어 오공녀를 평가하는 이천상.
공석에서 제자들을 평가한다는 것은 꽤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 평가가 누군가에게는 득이 될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독이 될 것이다.
물론 마신은 속세의 다툼이 어떻게 되든 개의치 않았다. 그저 스스로 원할 때 말하고, 평가하고, 판을 주시할 뿐이었다.
마치 신(神)이 지상의 인간들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여섯째는 언제 돌아오지?”
“거경가(巨鯨家)가 이번 파순제에 참가하기에, 가주와 함께 파순제에 참가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가.”
“예, 교주님.”
이천상이 마지막으로 한 소녀를 보았다.
이제 열 살이 조금 넘었을까.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여아가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본래는 환했을 것이 분명한 얼굴이 무척이나 수척해 뵈었다. 창백한 안색에 눈 밑은 거무죽죽했고, 몸도 꽤 말라서 옷이 상당히 헐렁했다.
천마신교의 칠공녀이자 이천상의 마지막 제자인 채여민(彩麗珉)이었다.
“막내.”
“네, 교주님.”
애써 힘을 내려는 목소리가 듣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관평의 얼굴에 의아함이 감돌았고 홍위문의 눈은 차갑게 빛났다.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은 주서윤뿐이었다.
“몸 관리에 소홀했던 모양이다.”
하늘 위 권좌에 앉아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자.
채여민의 상태를 알면서도 이천상은 모른 척했다.
“죄송합니다, 교주님.”
“본교는 어리다고 응석을 받아 주지 않는다. 네가 독했다면 지금과 같은 상태가 되진 않았겠지.”
꾸욱.
채여민이 소매로 가려진 주먹을 꾹 쥐었다.
서러움에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그래도 참는다. 아직 세상일은 잘 몰라도 이 자리에서 눈물을 보여선 안 된다는 건 아는 것이다.
“더욱 정진토록 하라.”
“네, 교주님.”
이천상이 옆으로 잔을 내밀었다. 그러자 여인이 잔을 채웠다. 이미 옥으로 만든 탁자 옆엔 빈 병이 세 개나 놓여 있었다.
이천상이 담담하게 말했다.
“난 너희에게 쉬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너희가 진정 차기 대권을 거머쥐고 싶다면 한계 따위에 얽매이지 말라.”
순간 대전 안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이천상의 입에서 차기 대권이란 말이 나왔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최초로 언급된 만큼, 그 말이 주는 긴장감도 남달랐다.
관평의 눈빛이 날카로워지고 홍위문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반면 주서윤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으며 채여민은 숨을 쌕쌕 몰아쉬기 바빴다.
이천상이 술을 몽땅 비워 냈다.
이전처럼 천천히 음미하지 않는다. 단번에 비우고 아무렇게나 잔을 던져 버렸다.
째애애앵!
화려한 술잔이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느닷없는 교주의 행동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이천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대전의 문을 바라보았다.
“들어오라.”
동시에 문밖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삼공자 서량이 성신의 부름을 받잡사옵니다!”
쿠구구궁!
육중한 소리와 함께 좌우로 열리는 문.
대전 중앙을 가로지르는 검붉은 융단이 서서히 비쳐드는 햇빛으로 본래의 화려한 색채를 더욱 뽐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명의 청년이 등장했다.
잡티 하나 없는 백색 무복 위, 깔끔하면서도 화려해 보이는 진청색 비단 장포를 걸쳤다. 붉은빛 요대 밑으로 자연스레 흘러내린 황금빛 수실과 바람에 따라 펄럭이는 장포 자락이 한없이 자유로워 보였다.
청년을 보는 마인들의 얼굴에 경탄이 드리워졌다.
의관을 제대로 갖춘 청년의 자태는 그야말로 신선 나라의 젊은 왕과 같았다. 마치 이천상의 그것처럼 무뚝뚝한 얼굴과 자신감 넘치는 보행은 그 자체로 존귀해 보였다.
경탄을 금치 못했던 신교의 수뇌부들은 이내 불신 어린 표정을지어 보였다. 저 수려한 외관의 청년이 주화입마에 들었다 깨어난 삼공자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푸스스스스.
그의 발밑으로 반투명한 붉은빛 연기가 치솟았다. 자연스레 피어오르는 마기가 미청년의 분위기를 완성하는 화룡점정이 되었다.
마기의 질이 얼마나 대단하면 이런 긴장감을 주는가. 얼마나 엄청난 마력을 보유했기에 의도치 않았는데도 마기가 새어 나오는가.
육 척을 훌쩍 넘기는 장신에 이목구비 뚜렷한 얼굴, 그에 어울리는 짙고 화려한 마기가 실로 압권이다.
관평이 입을 쩍 벌렸다. 홍위문의 눈에는 핏발이 섰다. 지금껏 표정 변화가 없던 주서윤도 흔들리는 시선으로 청년을 보았다.
저벅저벅.
침묵 가득한 대전에는 청년의 발소리만이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모두가 그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음에도, 정작 청년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이윽고 태사의 앞 계단에 당도한 청년이 이천상을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교주를 대하는 태도라고 보기엔 상당히 무례하다. 하지만 이천상은 개의치 않았고, 청년 역시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잠시 후, 청년이 고개를 숙였다.
“삼공자 서량이 교주님을 알현하옵니다.”
번쩍!
이천상의 눈에 은은한 마기가 피어올랐다.
청년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에 이제껏 아무도 보지 못한 감탄이 어렸다.
“훌륭하다.”
마인들이 경악했다.
이천상이 말을 이었다.
“그곳은 어떠했느냐. 바람 쐬기에 괜찮은 장소였더냐?”
청년, 서량이 고개를 들었다.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아주 괴상한 표정이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상쾌했습니다.”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올려다보던 서량이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마인들이 자신을 신기한 물건 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었다.
서량의 얼굴이 점점 찌그러진 놋그릇처럼 변해 갔다. 시장통에서 깨벗고 막춤을 춰도 이보단 덜 주목받겠다.
교주 저 양반, 진짜 사람 불편하게 만드는데 뭐 있다니까.
‘……썩을!’
그렇게, 서량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