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우연이란 이름의 필연 (1)
자시(子時)가 훌쩍 넘어 축시(丑時)가 되어 가는 밤.
만취한 마동필을 보내고 앵화까지 재운 서량이 마당에 나와 혼자 술을 홀짝였다.
멍하니 달빛을 보던 서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어째 취할 것 같으면 멀쩡해지고, 또 취할 것 같으면 멀쩡해지고 그러냐.”
원래 이 몸뚱이 원주인이 말술이었나?
잠시 눈을 감고 내부를 관조한 서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간장(肝臟)에 도는 기(氣)가 유독 활발하긴 한데…… 내가고수(內家高手)라면 다들 이 정도는…….’
환골탈태까진 아니더라도 거의 새 몸이나 다름없긴 했다. 하지만 내력으로 주기(酒氣)를 몰아내지 않는 이상 술이란 게 안 취할 수가 없다.
“젠장, 술은 취하라고 마시는 건데.”
이러면 재미가 없잖아…….
입맛을 다신 그가 나발을 불었다. 순간 속이 뜨거워지고 머리가 띵해졌지만, 눈 몇 번 끔뻑이자 도로 멀쩡해졌다.
“……빌어먹을.”
그때, 푹신한 뭔가가 그의 허벅다리를 비볐다.
“아, 너냐.”
새끼 여우가 갸르릉거리며 벌러덩 누웠다. 지가 무슨 고양이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괜히 손으로 배를 긁어 주는데 기분이 좋은 듯 열심히 코를 벌렁거린다. 꼬리는 좌우로 살랑대고 눈은 보일 듯 말 듯 슬그머니 뜬 게, 누가 봐도 손길을 만끽하는 모양새였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넌 걱정 없이 살아서 좋겠다.
“근데 넌 배 안 고프냐? 계속 잠만 자고 먹은 게 없잖아.”
여우에게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긴 네발 달린 짐승이 어찌 말을 하겠냐.
“어디 보자.”
안주랍시고 가져온 삶은 돼지고기를 코앞에서 살랑거렸더니 눈 감고 누운 채로 입만 벌린다.
슬그머니 넣어 주니 챱챱거리는 묘한 소리를 내며 잘도 씹었다.
여우가 다 먹었을 때쯤 서량은 또다시 고기를 건네주었다. 여우는 여전히 누워서 고기를 받아먹었다.
“너 그러다 체한다.”
서량이 턱을 괴며 묘한 눈으로 여우를 보았다.
“그나저나 신기하네. 넌 어쩌다 그 흉한 곳에서 자고 있었어?”
냠냠.
“정말 어미라도 있었나? 그럼 좀 미안한데.”
챱챱.
정신없이 잘도 씹어 먹는다. 서량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그놈 참 귀엽네. 그래도 젖은 뗀 것 같아서 다행…… 하긴 내 손도 씹었었지, 요망한 것.”
덩치 큰 귀물도 아니고 팔뚝보다도 작은 새끼 여우한테 피를 본 게 어이가 없었다. 순간 미안한 마음이 싹 가셨다.
“그만 먹어, 새꺄. 몸도 쥐똥만 한 게.”
「앙!」
“알았다. 너 다 해라.”
그는 투덜거리며 술을 비웠다. 아무리 마셔도 안 취하니 불을 땠는데도 여전히 찬 바닥에 앉은 것처럼 짜증이 올라왔다.
그렇게 일인일수(一人一獸)의 적적한 만찬이 끝을 향해 달려갈 때쯤.
서량의 눈에 형형한 빛이 어렸다.
‘소연심이라고 했지?’
환희원.
내전 조직 중 끗발 없는 조직이 없다지만 교내 살림을 담당하는 환희원의 중요도는 필설로 형용키 어려운 것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군사부에서도 환희원에 결재를 받아야 한단다. 교내 서열로는 총군사가 우위에 있지만 환희원주의 힘도 만만치가 않다는 뜻이었다.
그는 마동필의 말을 떠올렸다.
- 확실한 교내 조직도나 인물 관계도를 얻으시려면 아무래도 군사부로 가셔야겠지요. 하나 교주님 외, 누구도 총군사를 호출하거나 대면키는 어렵습니다. 특히 근래에 워낙 바쁘다고 하였습니다.
- 호법원도 조직도에는 능하지만 인물 관계도까진 알기 힘듭니다. 표면적인 관계도라면 충분하나, 공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보다 더 세밀한 관계도라 판단됩니다.
- 그렇다면 역시 환희원주를 만나시는 것이 가장 빠르고 확실할 겁니다.
- 하나 공자님, 총군사든 환희원주든…… 아마 쉽게 알려 주려 들진 않을 겁니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서량도 동의했다. 조직도라면 몰라도 세부적인 인물 관계도의 경우, 사견이 개입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견이 외부로 유출되면 정치적인 타격까진 아니더라도 제법 골머리를 썩이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별수 없어. 그래도 부딪쳐 봐야지.”
서량이 입맛을 다셨다.
‘언제까지 기다릴 수는 없거든.’
천마신교에서 당당하게 내 발로 걸어 나가겠다. 몇 년이 걸리든 누구 눈치 보지 않고 스스로 나아가겠다.
그 다짐에 흔들림은 없었다. 실제로 몇 년 썩을 각오도 했다.
미래를 위해서, 그리고 당장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빨리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악물고 독하게 단련했다.
하지만 어쩌라고? 강해지면 끝이야?
‘절대 아니지.’
몇 년 동안 참아 줄 순 있어도 기회가 보이면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입 벌린 채 열매 떨어지길 기다리는 여우처럼 살 순 없다. 기회도 결국 사람이 만드는 것 아닌가.
이곳에서 나가고 싶다면 먼저 천마신교에 대한 세밀한 정보들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어중간한 상태로는 상황에 휘둘리기 십상이니까.
결정적으로 확실한 위치가 필요하다.
단순한 교주의 제자가 아닌, 마음먹은 대로 교외 출입을 할 만큼의 권력이나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몰래 나가는 건 불가능하고, 은근슬쩍 한 다리 끼려고 하면 괜한 의심을 받아.’
역시…….
이리저리 따져 보고 요모조모 살펴봐도 존재감을 키울 필요가 있었다.
‘즉, 나도 권력을 잡으러 발바닥에 땀 나도록 뛰어다녀야 한다는 건가?’
찝찝하다.
권력 쟁투가 얼마나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지는 의천맹주만 봐도 알 수 있다. 그 늙은이가 맹주 자리에 앉기 위해 파탄 낸 가정만 수백, 수천이지 않나.
아무리 내 자유를 위해서라지만 그런 개새끼까지 되고 싶진 않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내 위치가 높다는 거지.’
어지간한 일이면 신분으로 해결이 되니까. 어차피 욕을 바가지로 처먹은 놈이라 좀 튀어도 상관없을 것 같고.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려면 어떤 상황이든 내가 걸쳐 있어야 해. 하지만 그건 누군가에게 부탁할 수 있는 게 아냐.’
서량의 눈이 반짝였다.
‘어디 사고 한번 쳐 볼까.’
우우우웅.
마음을 먹자 심장이 요동치고, 피의 흐름이 격렬해지며 마기를 자극했다. 전신 가득 우러나오는 마기가 가시 영역으로 구현되며 불그스름한 연기의 형태를 띠었다.
벌러덩 누워 고기를 씹어 대던 새끼 여우가 갑자기 몸을 바로 세웠다.
서량을 올려다보는 새끼 여우.
그 여우의 눈에서 오색의 광채가 흘러나왔다.
지이잉! 지이이잉!
서량이 인지하지 못하는 새에 마기가 더욱 짙어졌다.
흘러나오다 사라지는 듯했던 붉은빛 연기가 이리저리 뭉치더니, 이내 어떠한 형상을 만들었다.
사람인 듯, 짐승인 듯 알아보기 힘든 형상. 구체적이진 않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흉포해 보이는 형상이었다.
“응?”
문득 기묘한 분위기를 느낀 그가 고개를 내렸다.
새끼 여우가 빤히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느새 두 눈 가득 명멸하던 오색의 광채는 사라지고 없었다.
“다 씹었냐.”
「앙!」
“어쭈, 대답도 하고.”
「앙!」
“……진짜 내 말을 알아듣는 건 아니지?”
「앙!」
“그놈 참 일관적이어서 좋다.”
콧날을 살살 쓸어 주니 기분이 좋아진 듯 서량의 손에 얼굴을 비빈다.
“생긴 건 개랑 비슷한 주제에 하는 짓은 그냥 고양이네.”
서량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빛은 좋은데 별빛이 눈에 거슬린다. 쏟아지는 별빛들이 너무 맑아서 어디가 어느 방향인지 알아볼 수도 없을 것만 같았다.
왠지 저 별빛의 바다가 자신의 상황과 비슷한 것 같았다.
이 넓은 세상에 홀로 떨어진 늙은 미아를 비웃는 듯했다.
‘나아가야 할 길이 어디인 줄 모른다고 서성이기만 하는 건 꼴같잖은 법이지.’
꾸욱.
강하게 쥐어지는 주먹에 강한 의지가 실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답게 날뛰어 보자.”
* * *
파파팡!
한참 비질을 하던 앵화가 연무장을 힐끔거렸다. 그곳에선 서량이 웃통까지 훌렁 벗곤 사방팔방으로 주먹질을 해 대고 있었다.
퍼엉!
‘흡.’
앵화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한참이나 떨어진 거리, 내공을 싣지도 않았는데 뿜어지는 풍압이 굉장했다. 그리고 그 풍압보다 대단한 건 공기를 뒤흔드는 위압감이었다.
파라락!
짙은 땀방울이 땅을 적셨다.
내공을 담은 수련이 아님에도 땀이 줄줄 났다. 그만큼 심력 소모가 크다는 뜻이었다.
‘어제 술을 그렇게 드셨는데…….’
앵화는 내심 감탄했다.
고수들은 내력으로 주기를 뽑아낼 수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정신이 멀쩡했을 때 얘기다.
장정 십여 명이 마시기도 힘든 양을 드시고도 저리 수련을 하신다. 그 강한 의지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역시 교주님의 제자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재빨리 비질을 끝낸 앵화가 쫄래쫄래 안으로 들어갔다. 아침이지만 제법 포만감이 느껴지는 식사를 차려 드릴 요량이었다.
“후욱.”
한참 수련하던 서량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전신의 피부가 붉게 달아올랐다. 근육통에 온몸이 다 뻐근했다.
‘역시 힘들구만.’
제천기(提天技)는 권장지각(拳掌指脚) 등 모든 백타(白打)를 총망라한 그의 주력 살법이었다.
당연히 식(式)의 방대함이 여타 무공과는 차원을 달리했다.
손가락질 한 번으로 신체에 구멍을 뚫는 살법부터 휘몰아치는 연타 위주의 초식까지. 시작부터 끝까지 펼치는 데만도 반 시진은 넉넉히 잡아먹는 무공이었다.
그런 섬세한 무공들을 천근추(千斤錘)로 몸을 압박해서 펼쳐 냈다.
자칫 근육은 물론 관절까지 손상을 입을 수련법이지만 위험한 만큼 효용 역시 뛰어나다. 일격필살로 승부를 거는 살수의 근육을 만들기에 탁월하며, 적당한 운공과 영양 섭취가 뒷받침되면 근골을 뿌리째 바꿀 수 있다.
“시간을 더 늘려도 괜찮겠어.”
고죽림의 영기로 단련된 그의 신체는 무척 질기고 강인했다. 위험한 수련이지만 그릇이 좋으니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다.
서량이 연무장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부족하긴 하지만.”
연무장 곳곳에 두 치 깊이의 발자국이 찍혀 있다. 수련이 완벽했다면 이런 자국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저 멀리서 앵화가 나타났다.
“공자님, 수련이 끝나셨나요?”
“그럴 리가. 아직 한참 남았지.”
“또, 또 하세요?”
“몸 푼 거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앵화의 얼굴에 질린 기색이 떠올랐다. 땀범벅이 된 몸과 벅찬 호흡을 보면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데 아직 멀었단다.
“하면 식사는 어떻게……?”
“어? 아, 그러고 보니까 벌써 시간이 지났네.”
서량이 배를 쓰다듬었다.
“사람이 배는 채우고 일해야지. 먹자.”
“넵!”
폭풍 같은 식사가 끝난 후, 서량은 다시 수련에 돌입했다.
과거 살수 시절의 몸과 완전히 다른 몸인만큼 본래의 살법을 지금의 몸에 붙이는 작업이 쉽지가 않았다.
서량은 생각했다.
‘나는 살수였다. 하지만 그때도 남들이 생각하던 암살자와는 거리가 멀었어.’
대낮에 당당히 정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살수는 없다. 그런 미친 짓을 서량은 꽤나 많이 해 왔다.
반드시 써야 할 때를 제외하곤 은신술도 써먹지 않았고, 암기는 귀찮아서 들고 다니지도 않았다. 어차피 맨손으로도 사람 작살내는 데엔 별문제가 없는데 뭐 하러 그런 걸 들고 다니겠나.
즉, 그는 말만 살수였지 강호의 여느 무사와 다를 바가 없었다.
‘조금은 어색할지언정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적어도 무(武)에 관한 한, 결코 선을 긋거나 한계 짓지 않는다. 그의 장점이었다.
그렇게 다시 반나절이 지나.
파아앙!
뻗어 내는 주먹에 강력한 마기가 실렸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동작에 집중하니 마기가 발산된 것이다.
서량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됐어.”
완벽하진 않아도 제천기가 몸에 들어맞기 시작했다. 굴리기가 어렵지, 굴러가기만 하면 목표치까지 도달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 대문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공자님.”
“아, 동필이냐.”
대문이 열리고 마동필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한 자루 환도(還刀)가 들려 있었다.
“말씀하신 겁니다. 이전에 쓰셨던 것과 비슷한 정도의 물건입니다.”
“고마워.”
“별말씀을.”
대충 땀을 닦은 그가 허리춤에 도를 맸다.
“그럼 슬슬 움직여 볼까.”
새끼 여우가 그의 어깨 위로 냉큼 뛰어올랐다. 서량이 여우의 턱을 긁어 주었다.
마동필의 얼굴에 의아함이 담겼다.
“어디 가십니까?”
“미래 설계하러 간다.”
휘적휘적 대문으로 걸어가던 그가 문득 등을 돌렸다.
마동필이 멀뚱히 그를 바라보았다.
서량이 눈을 찡긋거렸다.
“할 거 없으면 너도 따라올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