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우연이란 이름의 필연 (2)
“오셨습니까.”
홍위문의 인사는 꽤나 깍듯했다.
위치가 위치인지라 허리까지 숙이진 않았지만, 교주의 제자가 이 정도 예를 표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상대는 그 인사를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환희원주가 사공자님을 뵈어요.”
“어서 올라오십시오. 최대한 비싼 것으로 차렸는데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소연심이 미소를 지었다.
“화연루(花淵樓)는 본원의 관리하에 있어요. 이곳 음식이 얼마나 괜찮은지는 제가 가장 잘 알고 있답니다.”
“아, 그렇군요.”
홍위문이 머리를 긁적였다. 나름의 민망함을 표현한 그 행동에 소연심이 풋 웃었다.
두 사람은 화기애애하게 정자에 올랐다.
화연루는 신교 내성의 다섯 주루 중 하나로 수뇌부들이 애용하는 주루이기도 했다. 홍위문은 그런 화연루에서도 가장 경치가 좋다는 천위정(天位亭)에 자리를 잡았다.
적당히 어두워진 하늘, 향 좋은 음식과 선선한 바람이 운치를 더했다.
소연심이 웃으며 물었다.
“그나저나 공사다망하신 사공자께서 어찌 저를 초대해 주셨나요?”
시작부터 꽤 직설적이다. 하지만 그 미소와 목소리가 워낙 부드러워서 상대방에게 전혀 위화감을 주지 않았다.
홍위문이 고개를 저었다.
“딱히 이유랄 것이 있겠습니까. 본교를 위해 무진 애를 써 주시는 분에게 저녁 한 끼 대접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호호, 별말씀을.”
빈말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소연심은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듯 입을 가리며 웃었다.
홍위문이 미소를 지었다.
“어렵게 공수한 금존청(金尊淸)입니다. 한 잔 받으시지요.”
“고마워요.”
두 사람이 서로에게 잔을 채워 주었다.
홍위문이 지나가듯 물었다.
“어떻게, 결재 서류는 잘 올리셨습니까?”
소연심은 여유롭게 대답했다.
“네. 이미 어느 정도 만들어 놓아서 고치는 데에 어려움은 없었어요.”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이랄 게 있나요. 저야 검토나 하고 상부에 확인이나 받는 거지 정작 일은 아랫사람들이 다 하는 걸요.”
“아랫것들이 잘할 수 있도록 좋은 환경을 조성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요. 원주께서 얼마나 애를 쓰시는지 모르는 사람 없을 것입니다.”
“이리 금칠을 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그저 느낀 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두 사람이 웃으며 잔을 기울였다.
결재 서류에 관한 질문은 소연심 입장에선 꽤 묵직하다고 볼 수 있었다. 기분 나쁜 일까진 아니었으되, 새삼 들춰서 좋은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표정에 전혀 흔들림이 없다.
‘역시 쉽지 않군.’
하기야 신교라는 전쟁터에서 수십 년 동안 버티며 환희원주 자리까지 꿰찬 여걸이다. 이런 말로 흔들릴 사람은 아닐 것이다.
“술은 어떠십니까?”
“제 입맛에는 다소 튀는군요.”
“아, 그러십니까.”
“향이 무거운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그래도 뒷맛은 나쁘지 않네요.”
홍위문의 눈이 깊어졌다.
개인적인 소감에 지나지 않았지만 술과 음식을 준비한 사람에게 쉽게 할 말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교주의 제자 아닌가.
‘마음이 상한 건가? 고작 그 정도로?’
그녀를 자세히 살핀 홍위문은 생각을 수정했다.
마음이 상했다거나 상대의 의중을 살피기 위함이 아니었다. 소연심은 정말로 솔직한 감상을 말했을 뿐이었다.
‘상당하군.’
신분의 격차가 확실한 신교에서 이런 식으로 대응하기도 쉽지 않다. 그만큼 스스로의 가치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며, 자존감도 강하다는 뜻이리라.
‘돌려서 말하는 것에 취미가 없다. 솔직하게 공략해야 할 상대야. 본교에서 쉽게 보기 힘든 유형이다.’
동시에 너무나도 마인다운 사람이기도 했다. 돌려 말할 필요가 없을 만큼의 권력을 굳이 숨기려 들지 않으니까.
“한 잔 더 받으시겠습니까?”
“아, 저는 좀 천천히 마시죠.”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홍위문이 웃으며 그녀에게 병을 건넸다.
“하면 제게 한 잔 주시지요.”
소연심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상대의 반응에 흥미를 느낀 것이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녀가 공손하게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얼추 잔이 다 채워질 때쯤, 홍위문이 말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쪼르륵.
소연심은 전혀 당황하지 않은 채 병을 내렸다. 대답 역시 없었다.
홍위문도 잔을 내려놓았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술이 출렁였지만 한 방울의 술도 흘리지 않았다.
“제게 손을 빌려주십시오.”
물끄러미 홍위문을 바라보던 소연심이 그대로 잔을 들어 쭉 비웠다.
“잘 마셨어요.”
천천히 일어나는 소연심.
그런 그녀를 올려다보는 홍위문의 눈에 웃음이 맺혔다.
“불편하십니까?”
“불편함 이전에, 어느 한 후보에게 힘을 실어 주는 걸 반대하는 입장이라서요.”
“어찌 그리 생각하시는지요?”
소연심의 눈이 깊어졌다.
“다른 조직은 몰라도 본원은 그럴 수 없어요. 본원이 움직이면 본교가 흔들리거든요.”
오만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지만 홍위문은 그녀의 말을 수긍했다.
살림이란 말을 쉽게 언급하는 이들 중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물며 천마신교 정도의 초거대 세력의 살림을 담당한다면 말할 것도 없다. 작게는 식자재부터 크게는 자금까지 아우르는 게 환희원이었다.
전투 조직이라면 몰라도 환희원이 힘을 싣기 시작하면 후계 싸움의 판도가 바뀐다. 소연심의 말마따나 자칫 신교까지도 흔들릴 수 있는 것이다.
“그쯤은 사공자님께서도 당연히 알고 계시리라 생각했는데 의외군요.”
그녀가 품에서 작은 전낭을 꺼내 들었다.
“잘 먹었어요. 제가 먹은 건 제가 내도록 하지요.”
홍위문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초대했으니 저녁값은 제가 내겠습니다.”
“괜찮아요.”
“그리고 소 원주께선 뭔가 오해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오해라니요?”
“저는 손을 빌려달라고 하였지, 제 편이 되어 달라 말한 적은 없습니다.”
소연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여전히 아름다운 미소, 그러나 그 속에 뼈를 시리게 하는 냉기가 배어 있었다.
“단어의 차이 외에 별다른 점을 느끼지 못하겠네요.”
“전혀 다르지요. 원주 말마따나 환희원의 특성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요.”
“설령 다르다 해도 상관없어요. 본원은 합당한 일이 아니고선 후보들에 대한 일체의 지원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교법으로 명시된 건 아닐 텐데요.”
“교법을 떠난 저의 충성 방식이에요.”
“그 충성의 방식을 달리 생각해 보는 걸 권유드리는 바입니다.”
“잘 먹었어요.”
소연심이 등을 돌렸다.
가만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홍위문이 입을 열었다.
“청구사엽초(靑龜四葉草)가 필요하시다고요?”
순간 소연심이 걸음을 멈추었다.
여전히 등을 돌린 그녀. 어떤 표정을 짓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홍위문이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귀한 약초지요. 본교로 들어오는 약초 대부분의 재배지인 운남에서도 구할 수 없습니다. 저 먼 동쪽 바다 인근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약초라고 했던가요?”
“…….”
“필요하시다면 내놓겠습니다. 딱히 제가 쓸 일이 없어서요.”
홍위문은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여기서 말이 길어져 봤자 상대를 자극할 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스르륵.
소연심이 몸을 돌렸다.
아름다운 얼굴은 여전했지만 내내 그녀의 입가를 떠나지 않던 미소는 사라지고 없었다.
홍위문이 웃으며 술병을 들었다.
“한 잔 더 받으시겠습니까?”
가만히 그를 노려보던 소연심이 자리에 앉아 잔을 들었다.
홍위문은 결코 오만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여일하게 공손한 태도로 잔을 채워 주었다.
소연심은 단번에 잔을 비웠다.
홍위문은 다시 그녀의 잔을 채웠다.
그렇게 연거푸 세 번이나 잔을 비우고 나서야 소연심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알았죠?”
“어떻게 알았는지가 중요합니까?”
“중요해요. 적어도 내게는요.”
홍위문이 고개를 저었다.
“그걸 듣고 싶으시다면 그에 걸맞은 거래 물품을 가져오셔야 합니다. 저는 주판에 맞지 않는 장사는 하지 않거든요.”
소연심이 차갑게 웃었다.
“그 주판에 강매라는 주판알도 끼어 있는 모양이군요.”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런 것이니 이해해 주시길.”
홍위문이 미소를 지었다.
“원활한 거래가 되기 위해선 상대가 원하는 것을 내놓아야지요. 적어도 원주에게 청구사엽초는 거래에 합당한 물품이라 생각합니다. 어떻습니까?”
소연심은 대답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일단 들어 보도록 하죠. 사공자님께서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홍위문의 미소가 짙어졌다.
어떤 일이든 처음 굴리기가 어렵지, 일단 굴러가면 그때부턴 쉽다.
지금껏 꺾지 않았던 소신이 꺾였으니, 혹시라도 앞으로 거래할 일이 다시 생긴다면 그땐 지금보다 편해지리라.
“별건 아닙니다. 친분이 있다면 부탁 정도로 해결될 수도 있는 일이지요.”
“…….”
“본론부터 말하란 뜻이로군요. 알겠습니다. 말씀드리지요.”
시원하게 잔을 비운 홍위문이 가볍게 말을 던졌다.
“환희원에서는 시녀도 관리하지요?”
“…….”
“시녀 한 명에게 밀명을 내려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시녀를 말함이죠? 밀명은 또 무엇이고요.”
“앵화라는 시녀를 아십니까?”
소연심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홍위문이 미소를 지었다.
“삼공자의 거처에서 일하는 시녀입니다.”
“……!”
“그 아이에게 석 달간 삼공자의 동태를 적은 서신을 보내 달라 요청해 주십시오. 되도록 매일이요.”
순간 소연심의 눈이 흔들렸다.
“삼공자를 건드릴 생각인가요?”
“무리한 질문은 하지 않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무리한 부탁을 할 분으로도 보지 않았어요.”
“그것이 무리한 부탁입니까?”
“충분히 무리한 부탁이지요. 만약 그 아이가 삼공자의 일상을 보고하고 있다는 걸 들키면, 그 일을 사주한 제게 무슨 일이 생길지 알고 계신가요?”
“걸리지 않게 잘 처리하십시오.”
“위험해요.”
불가능이 아닌 위험. 적어도 한다면 할 수 있다는 뜻이리라.
“딱히 위험할 일도 아닙니다. 그저 평소 하던 대로 생활하면 되지요. 다만 하루 업무를 마칠 때 간단한 서신이나 보내란 말입니다.”
“말은 간단해도 그게 얼마나…….”
“혹시나 문제가 되어도 해결은 쉽습니다.”
“쉽다고요?”
홍위문이 자신의 잔을 채우며 말했다.
“연초의 연기만큼이나 공허한 것이 진실이란 것이지요.”
“…….”
“곰방대가 사라지면 누가 연초를 피웠는지 알 수 없습니다.”
“……!”
소연심의 얼굴은 이제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굳어져 있었다.
“살인멸구를 하란 말인가요?”
“저는 그저 최악의 경우를 말한 것뿐입니다. 실제로 손을 쓸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아시잖습니까?”
“…….”
“그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청구사엽초를 건네 드리지요. 혹시 몰라 말씀드리지만 진품입니다.”
잠시의 침묵.
그 침묵을 걷어 낸 건 소연심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힘든 부탁이에요.”
“원주.”
“소신의 문제가 아닌 불확실성의 문제예요. 앵화라는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도 모르는데 일을 맡길 수는 없어요.”
“그렇다면 시녀를 바꾸어도 괜찮겠군요. 원주가 믿고 맡길 만한 사람으로 말입니다.”
“…….”
“마음만 먹으면 어떤 일이라도 가능하시다는 거, 모르지 않습니다.”
홍위문은 굳히기에 들어갔다.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포기하시겠습니까?”
소연심이 입매가 파르르 떨려 왔다.
홍위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거의 넘어왔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가 소연심의 잔을 채워 주었다.
“자, 그럼 거래가 성사된 것으로 알고…….”
그때였다.
“거참, 때가 시커멓게 낀 잔을 언제까지 홀짝대실 겁니까?”
순간 깜짝 놀란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특실로 오는 문 너머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퍼졌다.
“원래 일차는 가볍게, 이차는 진득하게 마시라 했지요. 일차는 슬슬 마무리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누구냐!”
대기 중이던 무사가 문을 활짝 열었다.
“……!”
소연심과 홍위문의 눈이 흔들렸다.
열린 문 너머, 어깨에 새끼 여우를 매단 서량이 술병을 들고 서 있었다.
“싸구려 백주이긴 해도 잔은 깨끗한데 말입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넘어오시겠습니까, 아니면 그 자리 더 즐기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