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우연이란 이름의 필연 (3)
홍위문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저놈이 어떻게?!’
장난스럽게 웃으며 술병을 흔드는 서량의 모습은 쾌활했다. 소연심에게 고정된 눈동자는 마인답지 않게 무척이나 맑았다.
소연심이 저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삼공자님……?!”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거처에 없으셔서 찾느라 발품 좀 팔았습니다. 어디에 계시나 싶었더니 경치 좋은 곳에 계셨구랴.”
마치 제집이라도 된 양 거침없이 들어오는 그의 태도에 문을 열고 있던 무사들은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물러났다.
“뭣들 하는 것이냐.”
무사들이 홍위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져 있었다.
“귀하신 분을 모신 자리다. 누구도 들이지 말라 하였거늘 어찌 막질 않는가.”
당황한 무사들이 저도 모르게 칼자루를 쥐었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서량이 손가락을 튕겼다.
“아, 그랬어? 진즉에 말을 하지.”
그가 두어 발 뒤로 물러났다. 문 안쪽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나간 것이다.
크게 숨을 들이쉰 그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일차 끝났으면 나랑 이차 합시다아!”
그러더니 히죽 웃는다.
“됐냐?”
홍위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화려한 등장과 상식에서 벗어난 언행에 산전수전 다 겪은 소연심조차 입만 벙끗거리기 바빴다. 적어도 신교 내에서 수뇌부를 앞에 두고 저런 언행을 보인 사람은 없었다.
멍하니 그를 보던 소연심이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일어나 예를 취했다.
“신교불패, 만마앙복. 환희원주가 삼공자님을 뵙습니다.”
동시에 무사들 역시 무릎을 꿇었다.
명령은 홍위문에게 받았지만 상대 역시 같은 교주의 제자. 하물며 공식 서열은 같을지언정 연배와 입교 시기에서 차이가 났다.
당연히 예를 갖출 수밖에.
서량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까지 격식 안 차리셔도 됩니다. 별로 안 좋아해서.”
소연심의 눈이 반짝였다.
격식을 안 좋아한다? 이전의 삼공자를 기억하는 소연심에게 그 말은 참으로 어색한 것이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 자리 계속 즐기실 겁니까? 아니면 나랑 한잔?”
“그것은…….”
소연심이 대답하려는 찰나, 홍위문이 끼어들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셋째 형.”
셋째 형이라…….
참으로 정감 있는 호칭 아닌가. 실제로 들어 보니 없던 정도 불쑥 생겨날 정도였다.
그래, 뒤에서 수작질만 부리지 않았다면 말이지.
“소 원주는 나와 자리 중이오. 중간에 난입해서 자리를 어지럽히다니, 너무 경우가 없는 거 아니오?”
서량이 홍위문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마주하는 시선. 두 사람의 각기 다른 눈빛이 불꽃을 튀기며 부딪쳤다.
하지만 그도 잠시.
피식 웃으며 소연심에게 고개를 돌린 서량이 여유롭게 말했다.
“불편한 자리 별로 안 좋아해서 말입니다. 속히 답을 주셨으면 좋겠는데.”
꽤 노골적인 무시였다.
분노가 치민 홍위문의 볼이 떨려 왔다.
“이보시오, 셋째 형!”
그때, 소연심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죄송합니다, 삼공자님.”
“잉?”
“어찌 되었든 전 초대를 받았고 그에 응한 몸입니다. 이 자리가 끝나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말하잖습니까. 그 자리 끝내고 나랑 한잔하지 않겠냐고.”
“얘기가 마무리되지 않았으니…….”
“아, 혹시 청구사엽초 때문에 그러는 겁니까?”
순간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청구사엽초가 필요한 경우는 대개 두 가지. 지나친 양기의 고갈로 급격하게 음기의 농도를 낮춰야 할 때, 혹은 구음(九陰)의 절맥에 걸렸을 때.”
“……!”
“하지만 그 두 경우는 청구사엽초가 아니더라도 대체할 약초가 많습니다. 소 원주 정도 되는 분께서 그걸 모를 리 없을 테니, 청구초를 대체할 만한 약초가 없는 상황이라는 건데…….”
「앙!」
새끼 여우의 턱을 긁어 주며, 서량이 말했다.
“혹시 아는 분께서 음공(陰功)을 익히다 주화입마에라도 걸리신 겁니까?”
소연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어떻게 그걸……?”
“청구사엽초를 말려서 볶은 후 가루를 내서 쓰면 뒤집힌 혈맥을 바로잡는 데에 능합니다. 더불어 치솟는 음기의 문제를 제어하고 잠시나마 원정(原精)을 보호하여 피폐한 몸 상태에서도 무리하게나마 치료를 가능케 하지요.”
“…….”
“맞습니까?”
소연심이 입을 뻐끔거렸다. 그녀가 청구사엽초를 필요로 하는 이유를 너무나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환자의 상태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장 숨이 넘어갈 정도가 아니라면 꼭 청구사엽초가 필요치는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지요. 음기를 제어하는 걸 넘어 양기까지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으니까.”
“……!”
“환자를 걱정하는 마음에 다급해지신 건 이해합니다만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소연심의 안색이 시시각각 바뀌었다.
그때 홍위문이 앞으로 나섰다.
“못 본 사이 꽤나 저질스러운 취미가 생기셨소.”
“음?”
“남의 얘기를 엿듣다니, 그게 신교의 삼공자에게 어울리는 행동이라 보시오?”
“아? 좀 그랬나?”
“알았다면 당장 여기서…….”
“그럼 이건 어떠냐?”
“뭐요?”
서량이 냉소를 지었다.
“차기 대권을 거머쥐기 위해 음으로 양으로 형제들을 죽이려 들었던 개자식의 행동 말이야.”
“……!”
“어떻게 생각해? 실력 없는 머저리의 품위 없는 치졸함이라고 생각하는데 난?”
홍위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이오.”
“무슨 의민지 모를 만큼 멍청한 대가리면 왜 들고 다녀? 거래랍시고 청구사엽초를 들고 내 시녀를 공략하려 들었던 게 조금 전 아니었어?”
“이보시오, 셋째 형!”
“야, 그나저나 나까지는 그럴 수 있다 쳐도 말이다.”
서량이 어깨를 으쓱였다. 새끼 여우가 떨어지지 않기 위해 그의 머리로 기어 올라갔다.
“그 어린 막내한테도 손을 쓰고 싶더냐?”
“……!!”
소연심이 경악한 얼굴로 홍위문을 돌아보았다.
홍위문의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아무리 셋째 형이라도 더 이상의 모욕은 참기 힘들겠소.”
“참기 힘들어도 참아 봐, 인마. 죽다가 살아난 사람도 있는데 고작 이죽거리는 거 하나 못 참아야 쓰겠어?”
“셋째 형!”
“하긴, 어차피 증거도 없는 거 입 아프게 주절거려 봐야 의미도 없고. 어찌 되었든 간에…….”
그가 소연심을 보며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조금 전의 이죽거림처럼 의미도 없어진 거래, 끝까지 붙잡고 계시렵니까?”
홍위문에게 고정된 소연심의 눈매가 점점 매서워졌다.
“삼공자님.”
“말씀하십시오.”
“하면 지금 당장 입마에 걸린 사람의 상태를 좋게 만들 만한 방도가 있을까요? 혈혼각에서는 추이를 지켜봐야 한다고 했는데.”
서량이 씨익 웃었다.
“제가 입마에 걸렸다가 소생한 거, 잊으셨습니까?”
“……!”
“모두 죽거나 폐인이 될 거라고 말했던 제가 어떻게 되살아났을까요? 어떤 머저리가 탕약과 침으로 훼방까지 놓고 있는 와중에도 말입니다.”
소연심이 탁자에 놓인 금낭을 홍위문 쪽으로 내밀며 냉랭하게 말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먹은 건 제가 내도록 하죠.”
“……소 원주.”
“그럼 이만.”
소연심이 휙 소리가 나도록 몸을 돌렸다.
같은 장사라면 굳이 미운 사람과 할 필요가 없다. 과격하진 않았지만 충분히 상처를 준 홍위문에게, 소연심은 빈말로도 호의를 갖기 힘들었다.
주르륵.
홍위문의 주먹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경직된 얼굴에 분노와 굴욕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힐끔 그를 바라보던 서량도 고개를 돌렸다.
오히려 뭐라 한마디 했다면 덜 화가 났을 것이다. 두 사람의 철저한 무시에 홍위문의 살기가 무럭무럭 자라났다.
“싸구려 백주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이에요. 잔만 깨끗하다면요.”
“뽀드득 소리가 나도록 잘 닦았지요. 시원하게 들이켭시다.”
“영광입니다. 어머, 그 여우는?”
“키우는 녀석입니다.”
“엄청 귀엽네요.”
“……요물이니까 함부로 건드리지 마십시오. 손가락 물립니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사라지는 둘의 뒷모습을 씹어 먹을 듯 노려보던 홍위문의 입에서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서량.”
* * *
천위정에 비할 순 없지만 환희원 내 원주 개인 별채 앞마당도 상당히 아름다웠다.
평상에 앉은 소연심이 힐끔 옆을 바라보았다.
“저분은?”
마동필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 이상의 인사는 없었다.
서량이 그녀에게 잔을 주며 말했다.
“호법원의 마동필이란 친굽니다. 고죽림에서 절 몇 번이나 살려 준 은인이지요.”
소연심의 눈이 흥미로 반짝이고, 마동필의 얼굴에는 당황이 깃들었다.
“받잡기 어려운 말씀이십니다, 공자님.”
“보셨듯이 융통성은 없습니다.”
더더욱 당황한 마동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줄 모르는 탓이었다.
그 모습을 본 서량이 낄낄거렸다. 어깨 위에 올라탄 새끼 여우가 떨어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쳐 댔다.
소연심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화기애애하구나.’
생사의 경험 때문일까? 아니면 이것이 본래 성격이었던 걸까?
그녀가 기억하는 삼공자와 지금의 삼공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꾸민 모습이라고 생각되진 않았다. 저런 분위기는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신교에서 보기 드문 인간적인 모습에 화가 났던 마음도 조금씩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자, 한 잔 받아 보시겠습니까?”
“영광입니다.”
쪼르르 따라지는 백주 향이 몹시 독했다.
“제가 따라 드릴게요, 공자님.”
“저 또한 영광입니다.”
잔을 채운 두 사람이 잔을 부딪쳤다.
“크, 역시 좀 독하구만. 괜찮으십니까?”
“누구와 마시느냐에 따라 달아지기도 하고 써지기도 하는 게 술이지요.”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적당히 쓰고 적당히 다네요.”
삼공자라는 부담감을 안고 있지만, 최소한 지금 당장은 좋은 인상이란 뜻이었다. 시작이 나쁘지 않았다.
소연심이 재차 입을 열려고 할 때, 서량이 말했다.
“원주의 마음이 좋지 못함을 알고 있습니다. 굳이 말을 돌릴 필요는 없겠지요. 원하시는 대답부터 들려드리는 게 도리에 맞을 것 같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먼저 해 주니 부담을 덜게 된다. 소연심은 한층 여유를 가졌다.
“입마에 걸린 환자분의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스물다섯이에요.”
“무재(武才)가 출중하였습니까.”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소연심은 되묻지 않고 순순히 답했다.
“기재라 불릴 만해요. 워낙 똑똑해서 하나를 가르치면 두셋을 깨닫는 아이지요.”
“그렇다면 치료도 제법 빠르겠군요.”
서량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필묵을 가져다주십시오.”
이번만큼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어찌……?”
“구결을 적기 위함입니다. 물론 외우셔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
“무공 자체의 핵심 구결은 빼고 오로지 치유의 구결만 드리는 것이니 부담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아, 아니…….”
“그렇다고 난해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아마 구결을 이해하고 시도하는 데에 사흘은 족히 걸릴 겁니다.”
“공자님.”
“당장 큰 변화는 없을 것입니다. 상태를 모르니 확언할 순 없지만, 끈기 있게 시도한다면 얼추 반년 안에는 움직일 만해지겠지요.”
반년이란 말에 소연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반년 안에 움직일 만해진다는 말씀은……?”
“말했듯 자질에 따라 다르고 노력에 따라 다릅니다. 원주 말씀대로 어느 정도 재능이 있고 그리 심각하지 않다는 판단하에, 거동에 불편함이 없을 시기를 반년으로 예상해 봅니다.”
입마에 들어 걷지도 못하는 사람이 반년 안에 거동할 수 있단다. 혈혼각의 의원들도 난색을 표했던 걸 생각하면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멍하니 서량을 보던 소연심의 눈이 번뜩였다.
“공자님께서 그리 말씀하셨으니 믿고 안 믿고를 제쳐 두고, 저 역시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시지요.”
“제게 무엇을 원하시는지요?”
서량이 웃으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