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최악이지 최강은 아니잖아 (1)
수련 시간을 제외하곤 거처에 틀어박혀 서류들을 검토한 서량은 사흘이 지나서야 모든 내용을 암기할 수 있었다.
“공자님. 식사하시겠습니까?”
“좋지.”
잠시 후, 앵화가 오늘의 만찬을 깔았다.
점검 삼아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젓가락질을 해 대던 서량은 문득 요리들을 바라보았다.
“담백한 음식들이 많아졌네.”
“네, 식재들도 향이 약한 것들 위주예요.”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사소한 것도 잘 기억해 주는 사람이구만.”
“네?”
“아니다. 얼른 먹자.”
“아…… 네.”
아직도 겸상하는 게 어색한지 앵화는 우물쭈물했다.
「앙!」
“…….”
「앙!」
“…….”
몇 번을 부르짖어도 서량이 반응하지 않자 새끼 여우가 바닥에 앉아 씨근덕거렸다. 코를 씰룩이며 까딱까딱 앞발을 휘두르는 게 제법 화가 난 것 같았다.
은근슬쩍 눈치를 보던 앵화가 삶은 고기 몇 점을 집곤 스르륵 쪼그려 앉았다.
“여우님, 여우님. 이거 드실래요?”
새끼 여우가 힐끔 앵화를 보더니 콧방귀 비슷한 소리를 냈다. 앵화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몇 번이고 서류를 점검한 서량이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됐어. 확실히 외웠다.’
상단전에 깃든 탁기를 모조리 증발시키면서 이지가 맑아졌다. 벽창호가 갑자기 천재가 될 정도는 아니더라도 판단력과 기억력이 크게 상승한 것이다.
그런 두뇌를 갖고도 사흘의 시간이 필요했을 만큼 서류의 양이 방대하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음?’
몇 번 밥술을 뜨던 그가 옆으로 고개를 내렸다.
고개를 홱 돌린 채 씩씩거리는 새끼 여우와 울상이 된 채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고기를 내미는 한 소녀.
“너희들 뭐 하냐?”
“앗, 공자님.”
서량이 새끼 여우를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새끼 여우는 반항하지 않고 얌전히 딸려 올라왔다.
“배 안 고프냐? 이것 좀 먹어라.”
간이 안 된 삶은 고기를 내미니 새끼 여우가 본능적으로 덥석 물었다.
움찔!
새끼 여우가 슬그머니 서량을 올려다보았다.
서량은 씨익 웃었다.
새끼 여우는 분하다는 듯한 눈으로 그를 보면서도 입을 멈추지 않았다. 학학 소리를 내며 열심히 씹어 대는 걸 보니 배가 많이 고팠던 모양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 서량이 여우의 콧등을 쓰다듬었다. 포만감에 나른해진 여우가 벌러덩 누우며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그나저나 계속 이놈 저놈 할 순 없고. 이름이라도 지어 줘야지 싶은데 말이야.”
서량이 앵화에게 물었다.
“얘 이름 뭐라고 지어 주면 좋을까?”
“네?!”
“……뭘 그렇게 놀라?”
“제, 제가 감히 의견을 내도…… 괜찮으신지요?”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당황한 앵화가 더듬더듬 말했다.
“그, 그래도 이렇게 귀여우신…… 아니, 귀여운…….”
“됐다. 그냥 내가 지을게.”
앵화가 고개를 푹 숙였다.
서량이 새끼 여우의 귀를 만졌다. 거의 얼굴만 한 크기의 큼직한 귀를 만지작대고 있노라면 기분이 묘하게 나른해진다.
“거이호(巨耳狐) 어떠냐.”
킁!
새끼 여우가 콧방귀를 뀌었다. 시기적절했던 건지 마음에 안 들었다는 의사 표현인지 판단키 어려웠다.
“싫어? 그럼 대미호(大尾狐)는? 꼬리 크잖아.”
앵화가 억장이 무너진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도 공자님이시라 차마 말은 못 한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서량이 떨떠름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좀 그런가? 그렇다면…… 음…….”
문득 그는 새끼 여우의 눈과 코를 바라보았다.
엄청 귀엽긴 한데 참 정석적으로 생기긴 했다. 귀와 꼬리가 지나치게 크긴 하지만 말이야.
“황금빛 여우니까 그냥 너 금호(金狐) 해라.”
앵화는 거의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아니 왜 여우 이름에 여우라는 글자를 넣는 거야? 여우여도 너무 여우 아닌가, 이거?!
금빛 여우라서 이름도 금호라니, 공자님의 작명 감각에 앵화는 등골이 다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새끼 여우의 반응이었다.
「앙!」
우렁차게 포효하더니 펄쩍 일어나 서량의 손에 마구 몸을 비빈다. 누가 봐도 기쁨의 몸짓임을 알 수 있었다.
앵화의 동공이 썩은 생선 눈알처럼 풀려 버렸다.
설마 진짜로 알아듣는 거 아니지? 기뻐서 그러는 거 절대 아니지?
서량이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좋냐, 인석아.”
「앙!」
앵화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서량이 금호를 어깨에 올리곤 창가로 걸어갔다. 창가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여전히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사사사사삭.
불어오는 바람에 낙엽이 날렸다.
여유롭던 서량의 얼굴에도 진지함이 어렸다.
‘서류에 기재된 내용 중 절반만 사실이더라도 흥미진진하군.’
조직의 편제에 대해서는 굳이 골 아플 일이 없다. 어디에 어느 조직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통으로 외우면 되니까.
하지만 인물 관계도는 얘기가 다르다.
‘갑(甲)의 수하인 줄 알았더니 무(戊)의 명을 받고 있고, 병(丙)과 친구인 줄 알았지만 정작 뒤에서 을(乙)과 칼을 갈고 있다…… 참 복잡하게들 산다.’
아마 어느 조직이든 비슷할 것이다. 다만 천마신교라는 단체가 워낙 커서 외우기도, 이해하기도 힘든 구석이 많았다.
‘얽히고설킨 이 그물 속에 기어들어 가야 한단 말이지.’
어선 없이 망망대해로 나아가기 위해 오히려 그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몇 번을 고뇌했지만 다른 해결책이 없었다. 그물을 찢다간 어부한테 맞아 죽을 판이니 적당히 개판 좀 치다가 날 놔주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야 했다.
서량이 작게 심호흡을 했다.
‘어차피 최종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 그 하나의 결과를 위해서 뛰어드는 것뿐이야.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우웅.
창틀을 잡은 손에 반투명한 마기가 올라왔다. 이제야 진짜 본판으로 들어간다는 생각에 그도 나름 긴장한 것이다.
스르륵.
팔을 타고 창틀에 내려앉은 새끼 여우, 금호가 서량을 올려다보았다.
츠츠츠.
맑은 짐승의 눈동자, 그 순수한 동공 너머로 보일 듯 말 듯한 오색의 광채가 일렁였다.
휘잉.
창을 통해 방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한층 거세어졌다.
파라락.
서량의 의복이 펄럭이고 금호의 털이 아름답게 휘날렸다.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진해지는 서량의 마기. 동시에 금호의 안광도 차츰 진해졌다.
드드드드.
“응?”
철푸덕 주저앉은 앵화가 탁자를 올려보았다.
탁자가 은은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 위에 놓인 접시들도 조금씩 떨리며 기묘한 소리를 냈다.
‘이게 뭐지?’
설마 지진이라도 난 걸까?
그때, 서량의 몸에 이는 마기가 사라졌다. 마기가 사라짐과 동시에 떨리던 탁자도 멈추고 바람도 잔잔해졌다.
서량이 금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 어쩌겠어? 고민은 충분히 했으니 움직여야지. 안 그래?”
「앙!」
금호가 냉큼 그의 어깨로 올라왔다.
순식간에 마음을 정리한 서량이 한옆에 세워 둔 도를 허리춤에 차고 문을 나섰다.
“어디 보자, 이것저것 준비하려면 시간이 얼추…… 앵화야. 나 오늘 안 들어올 수도 있으니까 저녁은 먼저 먹어라.”
“앗! 알겠습니다.”
“그리고…….”
서량이 힐끔 앵화를 바라보았다.
공손하게 시립한 앵화. 내공은 꾸준히 연성했지만 제대로 무공을 배우지는 못했다.
“아니다, 이건 나중에 얘기하자.”
“네에.”
“간다. 밥 굶지 말고 꼭 먹어.”
“다녀오세요, 공자님!”
* * *
마동필은 천성적으로 담백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휴가를 받았다고 온종일 침상에 늘어진다거나, 이 기회에 음식 탐방이나 해 보자거나, 심심해서 괜히 동료들 거처에 기웃거리며 귀찮게 할 성격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휴가를 무시하고 본업으로 뛰어들지도 않았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모를까, 괜한 오지랖으로 업무의 효율을 해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무(武)였다.
사아아아악!
허공을 가르는 장검에 강력한 힘이 실렸다.
반나절 동안 검을 휘둘렀음에도 검첨의 예기가 죽질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욱 섬세하고 진한 검기(劍氣)를 뿌리고 있었다.
‘좋다.’
내공을 아낌없이 써 가며 반나절이나 수련했다. 아무리 절정고수라도 지쳤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쌩쌩하기만 했다. 고죽림에서 단련된 체력은 바닥날 줄을 몰랐고 내공이 차오르는 시간은 이전보다 훨씬 빨라졌다.
결정적으로 마기의 질이 상승했다. 적은 양의 마기를 실어도 검에 밴 예기와 파괴력이 이전보다 배는 더 강력해졌다.
‘이제야 이해가 돼.’
내공에 별 차이가 없는 상승의 고수들이 어떻게 지치지도 않고 전투를 벌일 수 있었는가.
내공의 질이 다르고 운용하는 섬세함이 다르기 때문이다. 무공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도를 떠나 기(氣)를 다루는 방식이 남다른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야.’
신명 나게 검을 휘두르며 마동필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입교 이후, 자신에게 가장 큰 놀라움을 안겨 주었던 한 사람.
‘공자님의 무공은 뭔가가 달랐어.’
종류를 말하는 것도, 수준을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무공을 바라보는 서량의 안목 자체에 있었다.
‘경험이 무척이나 많아 보이셨다. 하지만 파격적이야.’
경험이 축적되면 창의성을 잃는다. 굳이 파격적일 필요가 없을 만큼 능숙해지기 때문이다.
서량은 그렇지 않았다. 노강호라 불릴 만큼 충만한 경험을 가진 듯하다가도 때때로 감탄이 나올 만큼 파격적인 무리(武理)를 선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것이 공자님께서 빨리 강해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인지도 모른다.’
사고의 전환이 빠르고 틀에 박혀 있질 않다. 자연스레 무리를 조합할 경우의 수가 많아지며, 그에 익숙해지면 생각이 깊어지고 판단력과 순발력이 증가할 것이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퍼어어엉!
신중하게 검을 휘두르자 멀찍이 떨어진 바위에 동그란 구멍이 뚫렸다.
마동필의 눈이 반짝였다.
‘깊어졌다!’
그때, 저 멀리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굉장해!”
퍼뜩 놀란 마동필이 고개를 돌렸다.
언제 거기 있었을까. 이 조장 기양이 놀란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훌륭한 검기였네. 자네가 강해진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어.”
“아, 이 조장님.”
마동필이 서둘러 납검했다.
감탄 가득한 표정으로 바위를 보던 기양이 헛기침을 했다.
“미안하네. 원체 신명 나게 휘두르고 있어서 내 실수를 했어.”
“아닙니다. 안 그래도 끝내려 한 참입니다.”
“허허.”
뚜벅뚜벅 바위로 걸어가 검흔(劍痕)을 보던 기양이 혀를 내둘렀다.
“호마검(護魔劍)의 일점홍(一點紅)이로군. 원 내 기본공으로 석 자 깊이의 바위를 뚫다니. 그것도 이 먼 거리에서.”
“아직 미흡합니다.”
“확실히 다듬어지진 않았어. 구멍 안쪽 표면이 다소 거칠군. 하지만 평생 그마저도 도달하지 못한 무인들이 수두룩하다는 건 알고 있나?”
“…….”
“고백하자면, 나라도 이 거리에서 이만큼 깊은 흔적을 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네.”
마동필이 고개를 푹 숙였다.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위험하긴 했지만 삼공자님을 호위하면서 많이 성장한 것 같으이.”
“부족한 제게 큰 깨달음을 주신 분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기양이 아차 싶어 말했다.
“그나저나 자네에게 전해 줄 말이 있었는데 수련을 보느라 잊고 있었군.”
“예?”
“삼공자님께서 호법원에 들르셨네.”
마동필의 눈이 커졌다.
“공자님께서 어쩐 일로……?”
“자네에게 전해 달란 말이 있었어. 너무 늦었는지 모르겠네만.”
“전언(傳言)이요?”
“에, 그러니까…….”
기양이 떠듬떠듬 말했다.
“처음 녹촉과 조우했을 때를 기억하느냔 말을 전해 달라 하시더군.”
마동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그는 그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그 말이 전부란 말인가?
“그리고 당신께선 금일 광마대(狂魔隊) 회식 자리에 간다고 하셨네.”
“……!”
“자네도 흥미가 동하면 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게 무슨 의미인지 나는 도통…….”
“죄송합니다, 조장님!”
기양의 말을 끊은 마동필이 재빨리 움직였다.
씻지도 않고 호법원을 나서는 그의 얼굴에 다급함이 어렸다.
‘공자님!’
설마 아니지요? 그때처럼 과격하게 사고 치시려는 거 아니시지요?
머리 한구석에 둥실 떠오른 서량의 입이 천천히 움직였다.
왜 아니겠어?
파아앙!
마동필의 달음박질이 어느새 쾌속한 신법(身法)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