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대면 (1)
“워, 화려하다.”
안내받은 특실을 둘러보던 서량의 첫마디는 그러했다.
“금으로 도배를 해 놨군. 돈지랄인가?”
위홍련의 평가는 박하다 못해 무례했고.
“…….”
마동필은 말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크기만 컸지 황량하기 짝이 없던 서량의 거처와는 달리 홍위문의 거처는 무척이나 화려했다.
위홍련은 서량을 힐끔 바라보았다.
서량은 뭐가 그렇게 신기한지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얼굴에 억울함이나 질투 따위의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공자님.”
“어? 왜?”
“공자님의 집도 이런 식으로 꾸며 보시는 게 어떠십니까?”
서량이 토할 것 같다는 듯 혓바닥을 쑤욱 내밀었다.
“미쳤어? 돈이 썩어 나도 난 이런 곳에서 못 살아. 감탄도 한때지, 불편해서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냐?”
위홍련이 히죽 웃었다.
“역시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당연한 거 아냐?”
당연하지 않다.
적어도 위홍련이 보아 왔던 위정자들은 하나같이 사치를 즐겼다. 아니, 사치가 사치인 줄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 면에서도 확실히 삼공자는 남다른 면이 있다. 소박했고 편안한 걸 즐기는 성품인 듯했다.
위홍련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사공자는 왜 안 오는 거죠?”
특실로 안내받은 지 반 각도 채 지나지 않았다. 성급함이 그야말로 하늘을 찌르는 그녀였다.
마동필이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때가 되면 오실 거요.”
“그거야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고. 그래도 윗사람이 왔는데 빨리빨리 움직여야 할 거 아냐?”
“언사를 조심하길 권고드리오. 듣는 귀가 많소.”
“적어도 내 기감에 걸리는 놈은 없어.”
앞으로도 조심하란 말을 당장의 사태로 해석하는 단순함에 마동필은 눈은 물론 입까지 닫아 버렸다.
그때, 서량이 말했다.
“안 올 거야, 금방은.”
“네?”
“금방 안 올 거라고.”
마동필이 눈을 번쩍 떴다. 위홍련도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어떤 늙은이가 하던 짓을 하도 많이 봐 와서 아는데, 이렇게 느닷없이 찾아온 손님을 헐레벌떡 맞이하는 경우는 좀처럼 없더라고.”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쉽게 말하자면 기 싸움이지. 어차피 초대받은 손님도 아니고, 연락도 없이 왔으니 이쪽은 준비할 시간을 갖겠다. 그러니까 답답해도 알아서 참아라, 뭐 그런 식이랄까.”
물론 그 늙은이의 정체는 의천맹주였다. 공적으론 대화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사적으론 상대방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걸 즐기기 위해 의천맹주는 항상 자리에 늦게 참석했다.
위홍련의 눈살이 있는 대로 찌푸려졌다. 사선으로 가로지른 흉터 덕에 인상을 쓰니 흉악범이 따로 없었다.
“감히 삼공자님이 계시는데 그런다고요?”
“말이 삼공자지 같은 교주님 제자 아냐? 하다못해 구대마존급이라면 몰라도 그놈이 굳이 이쪽 사정을 헤아려 줄 필요는 없지 않겠어?”
너무 담담하게 말하니까 더 아무렇지도 않게 들린다. 위홍련이 주춤거렸다.
마동필이 말했다.
“공자님,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뭘 어떻게 해?”
“사람을 불러서 속히 오라고 전언을 건네는 것이…….”
“뭣 하러?”
“예?”
서량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워낙 부드럽고 푹신해서 침상에 누운 것 같았다.
“야, 막말로 우리가 언제 이런 곳에서 편하게 지내 보겠냐? 하루 정도는 이리 화려한 데에서 숙식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아.”
숙식이란 말까지 나온다. 정말 더럽게 늦게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배고프면 사람 불러서 음식이나 시키지 그래?”
마동필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괜찮…….”
딸랑!
천장에서 내려온 줄을 당긴 사람은 다름 아닌 위홍련이었다. 마동필이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위홍련이 뻔뻔하게 말했다.
“생각해 보니 공자님 말씀이 옳네요. 제가 언제 이런 곳에서 밥 한 끼 먹어 보겠어요? 이참에 밥도 먹고 잠도 자고 해 봐야겠습니다.”
“맞는 말이야.”
잠시 후, 하인이 들어왔다. 비단옷까진 아니었지만 일개 하인의 옷차림치고는 너무나 고급스러웠다.
“부르셨는지요.”
위홍련이 냅다 음식 이름을 줄줄 읊었다.
하나같이 향이 강한 음식들을 이 창 하나 달린 방에다 시킨다. 마동필이 말했다.
“공자님께선 향이 강한 음식을 좋아하지 않으시오. 그러지 말고 시키려면…….”
그때 서량이 손을 들었다.
“먹고 싶은 것 시켜. 난 상관없다.”
위홍련이 그것 보라는 듯 마동필을 보며 코웃음을 쳐 댔다. 마동필은 별수 없다는 듯 다시 자리에 앉았다.
서량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늙은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꿈에서라도 만나기 싫을 만큼 지독한 늙은이지만 의외로 이런 상황에서는 배울 것들이 있었다.
의천맹주가 되고 나서는 손님을 받는 일이 주였지만, 의천맹주가 되기 전에는 그 늙은이도 여기저기 잘 돌아다녔다.
권력을 얻기 위해 발품 좀 팔아 본 그 늙은이로 인해 헤아릴 수도 없는 사람들이 패가망신했지.
만약 내가 의천맹주였다면? 늙은이가 박살 내 버린 숱한 적들이 지금의 홍위문이라면?
그리고 늙은이의 방법을 내 식대로 바꿔 본다면 어떻게 될까?
“위 대주.”
위홍련이 움찔했다. 지금껏 이년아, 저년아 해 대며 막 불렀던 삼공자가 드디어 자신을 정식으로 불러 준 것이다.
서량이 씨익 웃었다.
“음식 몇 개 갖고 되겠어?”
“예?”
“술도 몇 동이 시원하게 시켜 버려!”
위홍련이 합죽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꽤 신기한 묘기였다.
“공자님께서 원하신다면.”
* * *
“음식에 술까지 시켰다고?”
“그렇습니다.”
“음.”
짧게 답한 홍위문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붉은색 연기가 피어나는 연초를 뻑뻑 피워 댔다.
도리어 신회의 얼굴이 한껏 굳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서량?”
“……그렇습니다.”
“글쎄다.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치고 들어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심지어 광마대주까지 데리고 말이지.”
말은 그리하면서도 상당히 여유로운 기색이었다. 가장을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기별도 없이 ‘업무’ 시간에 쳐들어온 손님일 뿐이야. 내가 굳이 내 시간 빼 가면서 허겁지겁 만나 줘야 할 이유는 없지 않겠나?”
“물론 그렇습니다.”
“원하는 대로 해 줘. 술을 마시고 싶다면 술을 주고, 음식을 먹고 싶다면 음식을 줘.”
홍위문의 눈에 은은한 자색의 광채가 피어오르다 사라졌다.
“지금의 그놈이 지닌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봐야겠어.”
* * *
“끄어어억! 췐다.”
위홍련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마동필이 혀를 찼다.
“한 시진 만에 분주(汾酒)를 열한 병이나 해치웠으니 취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오.”
아니, 그전에 그만한 양을 마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끝없는 대륙만큼이나 주당도 많다지만 분주를, 그것도 장정 팔뚝보다도 길고 굵은 술병을 열한 개나 해치우다니.
“후욱! 그나저나 공자님은 참 대단하십니다.”
공공의 적이 생겨서 그런 걸까. 이곳으로 방향을 정했을 때부터 위홍련은 서량에게 상당히 우호적으로 굴었다. 거기다 취하기까지 했으니 더 친근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서량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잔을 비웠다.
“뭐가?”
“아니, 어떻게 저랑 똑같이 드시고도 그렇게 멀쩡하실 수가 있으세요?”
“그러게? 나도 신기하네?”
신기하다 못해 궁금해서 돌아 버릴 것 같다. 자신이 생각해도 이 주량은 정상이 아니니까.
막연하게 고죽림의 영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것도 확실하진 않았다.
물끄러미 서량을 바라보던 위홍련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공자님, 제 얼굴에 이 상처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세요?”
“아까 말했잖아. 지나가던 음적(淫敵) 때려잡을 때 생긴 거라고.”
“이 상처가 말이죠, 저 서북방 천산(天山)의 고양이 영물과 조우했는데 그때 앞발질 한 방 빡! 맞고 생긴…….”
“동필아! 얘 좀 챙겨라. 슬슬 맛 가려나 보다.”
마동필이 슬쩍 위홍련 옆으로 다가왔다.
“위 대주. 이만 자십시다.”
“아, 저리 가! 나 안 취했어!”
“누가 봐도 더럽게 취했소.”
“어허, 이놈이?”
이제는 숫제 상전 행세다. 마동필은 가슴에 참을 인(忍) 자를 연신 새겼다.
“공자님께서 보고 계시잖소.”
“누가 그걸 몰라? 내가 지금 공자님이랑 얘기하고 있잖아!”
“정신 좀 차리시오.”
“멀쩡하다니까!”
전형적인 취객의 행태다. 서량이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술을 따랐다.
“그래, 더 마셔라. 아주 그냥 정신 날아갈 때까지 마셔 봐라.”
“어? 그건 위험한데요?”
“뭐가?”
“보통 사내놈…… 아, 이건 공자님더러 하는 말이 아닙니다.”
“알았어, 인마. 그래서 뭐?”
“보통 사내놈들이 여자 술 멕이려고 하는 건 취한 여자 어떻게 해 보려고…….”
“야! 너 술 마시지 마!”
“흐흐.”
“얘는 도대체 정체가 뭐야? 하나만 해라, 하나만! 젠장 갑갑하게끔.”
사람마다 술버릇은 제각각이지만 평소와 다른 모습이라는 것만큼은 동일하다. 주량이 남다를 뿐, 취했을 때의 모습은 위홍련도 평범한 사람들과 별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덩실덩실 흥이 넘치고 시끌벅적한 술자리가 얼마나 지속되었을까.
“동필아.”
“예, 공자님.”
“우리 여기 온 지 얼마나 지났냐?”
마동필이 창가를 바라보았다.
“해가 슬슬 지려는 것으로 보아 한나절은 지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예, 공자님.”
“그럼 이제 슬슬 시작해 봐도 되겠다.”
“예?”
서량이 차분하게 일어났다.
마동필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왠지 공자님께서 풍기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무얼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말씀하신다면 제가…….”
“아냐, 내가 해야지.”
“예?”
“미친 늙은이의 치사한 공격을 내 식대로 개조해 보려고. 잘되면 좋고, 끝이 안 좋으면 별수 없고.”
“저는 도통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차앙!!
듣는 이의 귀를 시원하게 만들어 주는 발도(拔刀)였다.
그 소리가 어찌나 깔끔했는지 마동필은 저도 모르게 감탄을 금치 못했다. 취해서 골골대던 위홍련조차 눈을 번쩍 뜰 정도였다.
길고 매끄러운 도신(刀身)을 내려다보는 서량의 눈이 조금씩 차가워졌다.
그는 의천맹주의 말을 떠올렸다.
- 주도권을 잡는다는 거, 사실 별게 아니거든. 대개 체면을 생각하는 사람들일수록 처음엔 우세한가 싶다가도 결국 스스로가 만든 한계에 무너지게 마련이야. 반면 솔직하게, 그리고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사람은 비웃음을 받을지언정 한계 없이 나아갈 수 있지. 주도권 싸움을 할 때는 무조건 솔직한 게 제일이다.
의천맹 대공자에게 내린 가르침. 서량 역시 은신하던 중에 전부 들었던 말이었다.
그는 바로 그 방법을 자기 식대로 써 볼 생각이었다.
“어차피 난 폭군으로 악명이 자자하지 않냐?”
“예?”
“그럼 성질머리 더러운 폭군답게 난장 한번 쳐 봐야지 않겠어?”
순간 마동필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위홍련의 얼굴에 흥분이 감돌았다.
우우우우웅!
순식간에 칼날로 집약되는 무시무시한 마기.
서량이 흉악하게 웃었다.
“칼 참 오랜만에 뽑아 보는구만.”
그가 그대로 칼을 휘둘렀다.
번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