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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44화 (44/774)

44화. 대면 (2)

“……이상, 파순제(波旬祭)에 대한 모든 준비가 끝이 났사옵니다. 소소한 변경 사항들이 생길지라도 즉각 문제없이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고했네.”

무담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이천상이 술잔을 살살 흔들었다. 얼마 남지 않은 술이 찰랑거렸다.

“한잔하겠나?”

“영광이옵니다.”

팔걸이에 올려놓은 이천상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우우웅.

동시에 한옆 탁자 위에 놓인 잔이 둥실 떠오르며 서서히 무담의 앞까지 날아왔다.

무담의 표정에서 경이로움이 묻어 나왔다.

내공을 이용, 손대지 않고 물체를 의지대로 움직이는 경지인 허공섭물(虛空攝物)은 무담 역시 무리 없이 구사할 수 있는 기예였다. 하나 이렇게 진기(眞氣)의 흐름을 아예 지워 내며 구사할 수는 없었다.

단순한 내공력이 아닌 의지만으로 물체를 조종하는 것. 극에 이른 상단전의 신기(神氣)를 이용한, 호사가들이 말하는 초능(超能)에 가까운 힘이었다.

수십 년을 모셔 왔지만 아직까지도 신선한 경이를 선사해 주시는 분.

무담이 고개를 푹 숙이며 잔을 받았다. 대단하다는 말조차 이천상의 위대함을 폄하하는 것 같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괜찮은 분주로군. 들게.”

그렇게 두 사람이 잔을 비웠다.

스르륵.

어느새 무담의 손에 들린 잔이 이천상의 탁자까지 날아왔다.

“셋째는?”

느닷없는 물음이었다. 이천상은 한 번씩 이렇게 맥락과 동떨어진 질문을 하곤 했다.

무담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자미루에서의 사건 이후 아직까지는 잠잠한…….”

“셋째가 뭘 하는지 궁금한 게 아닐세.”

“……예?”

“셋째의 변화가 궁금한 것이지.”

변화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무담의 얼굴에 떠오른 의아함을 읽은 이천상이 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아직 별거 없는 모양이군.”

알아듣기 힘든 말이었다. 무담이 재차 고개를 조아렸다.

“삼공자의 신상에 특기할 만한 점은 없었사옵니다.”

“알겠네. 이만 가 보게.”

무담이 이천상에게 절을 하곤 물러났다.

홀로 남은 천상천하 유일무이 마신의 눈에 은근한 호기심이 배어들었다.

“……시랑이 녀석을 선택한 게 아니라, 녀석이 시랑을 선택한 건가?”

혹은 그저 인연이 그리 닿았을 따름인가?

* * *

콰르르릉!

무지막지한 폭음과 특실 벽 한쪽이 통째로 날아갔다.

이 느닷없는 날벼락에 홍위문과 신회도 깜짝 놀라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두 사람의 얼굴은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쿠르르릉!

부서진 특실 벽이 옆 건물을 후려쳤다. 다행히 무너지진 않았지만 심각한 손상을 입어 원래의 아름다움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으헉!”

“뭐, 뭐야?!”

“특실이다! 특실이 무너졌어!”

“사람 불러! 어서!”

깜짝 놀라 수선을 떠는 사람들.

하지만 그들은 너무 일찍 놀란 감이 있었다.

번쩍! 콰르릉! 번쩍! 퍼어어엉!

시뻘건 광채가 한 번 솟구쳤다 싶으면 어김없이 폭음과 함께 벽이 부서졌다. 부서진 벽의 잔해가 사방팔방으로 날아가며 객당 전체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놀라서 소리만 꽥꽥 질러 대는 사람들 속에서 이질적인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시벌! 특실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는 굉장한 위엄과 말 못 할 흉포함이 잔뜩 깃들어 있었다.

“이 새끼들! 내 동생 거처라고 참아 줬더니만 안 되겠어! 아주 싸그리 청소해 주마!”

쿠르릉! 쿠르르릉!

이번에는 광채가 아니었다. 팔방을 휘도는 공기가 어디론가 빨려 들어간다 싶더니, 이내 적색 돌풍이 되어 무너진 특실 한쪽으로 모여들었다.

쾅!

여전히 보이지 않는 ‘누군가’.

그 누군가가 내딛는 진각에 홍위문의 널따란 거처가 통째로 뒤흔들렸다.

“으아아압!”

거센 기합성과 함께 붉은색 도기(刀氣)의 폭풍이 객당 입구를 향해 휘몰아쳤다.

콰르르릉!

이 층짜리 큼직한 객당의 입구가 산산조각이 나서 부서져 내렸다.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지, 그 충격에 휩쓸렸다면 뼛조각 하나 남기지 못했을 엄청난 무공이었다.

게다가 그 위력의 근본이 되는 마기의 농도가 너무 짙어서, 어지간한 마인들은 접하기만 해도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멍하니 그 광경을 보던 객당주의 얼굴이 점차 창백해졌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퍼어어엉!

한 줄기 폭음이 일며 세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칼을 들고 씩씩대는 훤칠한 키의 미청년과 볼이 미세하게 떨리는 삼십 대 초반의 장년 사내, 그리고 불콰해진 얼굴로 비틀거리는 살벌한 흉터의 여인까지.

여인, 위홍련이 버럭 소리쳤다.

“이 개새끼들! 길 안 열어?!”

웅성대던 마인들이 화들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간 어디선가 헉! 소리가 나왔다.

“과, 광마대주?!”

그 말과 동시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광마대주 위홍련이 얼마나 위험한 인간인지 모르는 마인은 없었다.

위홍련이 히죽 웃었다.

물론 그녀가 웃는 이유는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봤기 때문이 아니었다.

“어떤 새끼야?”

“……?”

“어떤 개놈 새끼가 건방지게 날 직위명으로 불렀어? 앙?”

“……!”

“빨리 안 튀어나오면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새끼들 한 명도 안 남기고 죄다 혓바닥 뽑아 버릴 줄 알아! 빨리 튀어나왓!”

분노의 이유치곤 미치도록 지랄 맞은 이유였다.

하지만 위홍련은 심각했다. 아무리 경황이 없다지만 이리도 버릇없는 놈들이 신교를 좀먹고 있다는 생각에 눈앞이 다 아찔해질 지경이었다.

당연하게도 그녀는 자신이 그간 저질렀던 오만 악행과 난리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때, 서량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 삼공자다.”

평소에는 서량이라고 잘도 소개하던 그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스스로를 삼공자라 칭했다. 노리는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그런 소개는 제대로 효과를 보았다.

“허억!”

“사, 삼공자님?!”

위홍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역시 사람은 이름나고 볼 일이네.’

왠지 모르게 대중의 관심을 뺏긴 기분이다. 평소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텐데 술이 워낙 거나하게 올라서 별것이 다 빈정이 상했다.

그녀가 다시 한번 소리쳤다.

“야! 이 개 같은 놈들아! 정말 다 뒈지고 싶어서 환장했어? 당장 무릎 안 꿇어?!”

내공까지 가득 실은 쩌렁쩌렁한 외침을 들은 모든 마인들이 무릎을 꿇었다.

“신교불패! 만마앙복! 삼공자님을 뵙습니다!”

일심동체로 외치는 목소리에 경외감이 그득했다. 아무리 사공자의 사람들이라지만, 아니 사공자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존귀한 신분인지를 아는 것이다.

서량이 오만한 눈으로 그들을 굽어보았다.

“넷째는?”

객당주가 대표로 고개를 들었다.

“예, 예에?!”

“넷째는 어디에 있냐고.”

“그것은 저도…….”

번쩍! 콰르르릉!

한 줄기 광채가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땅에 기다란 도흔(刀痕)이 새겨졌다. 부서진 객당 입구까지 이어지는 엄청난 길이의 도흔이었다.

모두의 입이 쩍 벌어졌다.

한 자루 칼로 이런 무시무시한 광경을 연출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질 않았다. 그러고도 전혀 숨찬 기색 없이 사방을 쓸어 보는 서량의 모습은 소문 속의 폭군 그 자체였다.

서량이 소리쳤다.

“넷째야! 어디 있냐!”

우렁찬 목소리가 사공자의 거처를 넘어 근처의 다른 건물들까지 퍼졌다.

“네 아랫것들이 객당 관리를 너무 허술하게 하는 거 아니냐! 이러다가 네 평판 다 떨어지겠다, 이놈아!”

나약하고 섬세한 동생을 걱정하는 단순 무식하고 호탕한 형을 보는 것 같다. 실제로 마인들은 공포에 질린 와중에도 그를 그런 식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놈아! 이리 나와 봐라! 일이 얼마나 바쁘면 한나절 동안 이 형을 기다리게 하냐! 요새 좋아하는 처자라도 생겼느냐?!”

멀리서 그 말을 듣던 홍위문의 얼굴이 싹 굳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한 거 아니냐?! 그 처자가 그렇게나 좋디? 아, 그리고…….”

서량이 진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방 천지에 웬 벌레들을 그렇게 심어 놓았느냐! 객당에 보물이라도 묻어 놓은 게냐!”

스스스.

거처에 앉아 있던 홍위문의 몸에서 기어이 마기가 치솟았다.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도 참기 어려웠지만, 지금의 서량은 한발 더 나아가고 있었다.

벌레를 심어 놓았다? 이건 꽤나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마치 몰래 사람을 심어 객당의 동태를 살피고 있다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이렇게 되면 평판이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다. 아무리 마도 무림이 힘이 우선이라 하나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 이런 식으로 민심을 잃어선 안 되는 것이다.

“신회.”

“예, 공자님!”

“당장 샛길로 나가서 주변 동태부터 살펴! 이곳 상황을 아는 마인들의 목록을 작성하도록!”

“알겠습니다!”

신회가 사라지자마자 홍위문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우우우웅!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자줏빛 마기.

불처럼 화려하고 피처럼 살벌한 서량의 마기와는 근본부터가 다르다. 어딘지 모르게 요사스럽기까지 한 그 마기는 언뜻 사공(邪功)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 더욱 신비롭고 괴악한 이 마공을, 사람들은 사왕마공(蛇王魔功)이라 불렀다.

“……그래, 이런 식의 무모함도 저지를 줄 아는 놈이다, 이거지?”

홍위문이 웃으며 입술을 혀로 핥았다. 그의 혀는 유독 가늘고 끝이 좌우로 갈라진 듯했다.

“뭣도 모르고 호랑이굴로 기어들어 온 무지(無知)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 주마.”

퍼어엉!

창가가 그대로 부서짐과 동시에 홍위문의 몸이 뻥 뚫린 창가로 화살처럼 쏘아졌다.

파아아악!

엄청난 속도로 하늘을 나는 홍위문.

멀리서 그를 발견한 서량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드디어 기어 나오나.’

늙은이는 말했다. 주도권을 쥐려면 솔직하게, 우직하게 밀고 나가라고.

서량의 방식은 거기에 관객이란 요소까지 초청하는 데에 있었다. 그래서 거짓도 진실로 여기도록 판을 조율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방식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후우우웅!

석양이 드리워졌음에도 유독 진한 자줏빛 마기를 뿌리는 청년.

그 청년이 무서운 속도로 하강했다.

콰앙!

착지의 폭음이 실로 매섭다.

스르릉.

천천히 납도하는 서량.

그리고 마침내, 홍위문이 고개를 들었다.

번쩍!

각기 다른 빛을 터트리며 서로를 노려보는 마안(魔眼).

홍위문이 차갑게 말했다.

“남의 집에서 이런 난장을 치다니, 부끄럽지도 않소?”

서량이 크게 웃었다.

“신기하게도 영 부끄럽지가 않구나.”

“삼공자면 그 신분에 걸맞은 품격을…….”

“품격이나 예의 운운하기 전에, 이 우형(愚兄)이 사랑스러운 동생에게 할 말이 있다.”

“…….”

“진마대주는 지금 어디에서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다더냐?”

“……뭐라?”

“얼레? 반응을 보니까 진짠가 본데?”

여전한 미소, 그러나 서량의 눈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했다.

“광마대주가 왔다는 사실도 알고 있으면서 진마대주를 부르지 않았군. 둘 사이가 상당히 지랄 맞은 걸 다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야.”

“……!”

“게다가 형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거처에서 느긋하게 두 다리 뻗고 계셨다? 흐음…… 이거 냄새가 나는데.”

“셋째 형!”

“왜?”

“더 이상 날 모욕하면 좌시하지 않겠소.”

“그럼 거처에 있었으면서 왜 안 기어 나왔어? 어? 너 설마……?”

서량이 새끼손가락을 까딱여 보였다.

“부끄럼 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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