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대면 (4)
“뭐라고?!”
송경(松敬)이 벌떡 일어났다.
“사공자님 거처에서 뭔 일이 일어나?!”
“그것이…….”
진마대원의 짧고 간결한 설명에 송경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럼 흑조위들이 난입하여 사태가 종결되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빌어먹을! 젠장!”
안도를 해도 모자랄 상황이지만 송경은 오히려 분통이 터졌다.
‘차라리 거기서 죽어 버렸으면…… 최소한 몇 달 요양이 필요할 만큼만 다쳤어도 좋았을 것을!’
송경은 사실 삼공자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가 관심이 있는 쪽은 사공자 쪽이었다.
그가 파멸해야 더 이상 꼭두각시 노릇을 하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다음 작전 예정 날짜가 언제냐?”
“정확히 보름 후입니다.”
“……알겠다. 개인 사정으로 중간중간 빠질 때가 많을 테니, 부대주에게 알아서 훈련하라고 전해라.”
“명을 받듭니다!”
진마대원이 사라지자 송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또 소환하겠군.”
탁자 옆에 놓인 술을 사발째로 들이켠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천하의 송경이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었을꼬.’
그는 출세 지향적인 사람이었지만 그만큼 현실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최고가 되고 싶은 욕망은 있으나 자신의 자리에 만족할 줄도 안다는 뜻이었다. 그는 그저 보신 잘하고 소소한 흥밋거리나 즐기면서 늙어 가고 싶을 따름이었다.
‘……언제까지 날 갖고 놀 생각이시오, 사공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필이면 ‘그 일’을 사공자에게 걸리는 바람에 말 잘 듣는 개가 되어 버린 걸 생각하면 자다가도 울화가 치밀어 벌떡 일어났다.
“익!”
차오르는 분노에 송경이 그릇을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째애앵!
깨진 사발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때였다.
“으윽!”
송경이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신을 차렸군.”
놀랍게도 그가 보는 곳엔 십여 명의 마인들이 꿈틀거리며 바닥을 기고 있었다. 어찌나 지독하게 당했는지 전신에 성한 곳이 없었다.
“확실히 독하긴 독한 놈들이야.”
송경이 한옆에 둔 복면을 뒤집어썼다. 내전 전투 부대의 대장씩이나 되어서 이따위 복면을 써야 한다는 것도 열불이 터졌다.
그리고 이런 손발이 오그라드는 거짓 연기까지 해야 한다는 사실도 싫었다.
“정신들 차렸으면 이만 돌아가라. 그리고 명심해라. 난 또다시 너희들을 찾아갈 것이다. 너희가 삼공자님께 했던 짓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목을 뽑아 버리고 싶지만, 죽이지만 말라는 그분의 말씀 때문에 참겠다.”
꿈틀!
마인들의 몸에서 순간 지독한 살기가 뿜어졌다. 만신창이인 몸으로 바닥을 구르고 있었지만, 일순 피어오르는 그 살기만큼은 송경조차 움찔할 만큼 대단했다.
‘독한 새끼들.’
저런 꼴이 되기 싫어서라도 사공자에게서 그 증거물을 뺏어야만 한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한 명의 사내가 걸어왔다. 신속한 신법을 구사하면서도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이 놀라웠다.
송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여긴 또 어쩐 일이오?”
“공자님의 명을 전하러 왔소.”
“……명령이라. 그래, 어떤 명을 내리셨소?”
사내, 신회가 슬쩍 마인들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당신이 그리도 증오하는 여자를 잡아 오시오.”
“……!”
“그 여자를 잡아 형법당으로 끌고 가시오. 당신의 안전과 그 여자의 파멸을 약속하겠소. 거기에 보수는 이전에 받았던 것의 두 배를 더 지불하겠소.”
송경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돈을 받고 휘하에서 움직인다. 그야말로 강호의 살수들이나 할 법한 짓거리였다.
하지만 그 돈의 단위가 커지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전에 받았던 것의 두 배인 데다가 눈엣가시인 미친년까지 잡을 기회라면 더더욱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뭉클뭉클.
사공자에 대한 분노는 잠시 뒤로 미루고 씨익 웃는 송경의 몸에서 독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언제까지 잡아 오면 되겠소?”
신회가 몸을 돌렸다.
“내일 동이 트기 전까지.”
* * *
거처로 들어온 서량은 연무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제법 떨어진 거리에서 호법을 서던 마동필이 힐끔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걸까.’
운공은 아니다. 이젠 공자님의 얼굴만 봐도 그 정도는 구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공자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앞으로 어떤 일을 벌이실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심경이 복잡하신 것일까.’
지금은 사이가 틀어졌다고는 하나, 사공자와 사심 없이 웃으며 대화를 나누시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별수 없는 지금의 상황에 마음이 복잡하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의 생각은 완전히 틀렸다.
서량은 내심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다.
‘이게 되려나.’
홍위문 그놈이 뒈지든 말든 알 게 뭐야.
애초에 그의 목적은 홍위문이 아니라 신교에서의 탈출이다. 그 하나의 목적을 위해 지금 이런 복잡하고 짜증 나는 일을 벌이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놈이 먼저 자신을 건드렸으니 그냥 둘 수 없다는 이유도 컸지만.
‘흑조위…… 그 가면 떠버리들만 없었으면 시원하게 잡고 주목도를 확 올려 버리는 건데.’
소연심이 준 정보를 토대로 신교의 역사와 교법을 살펴본 결과, 후보들끼리 생사결을 벌이는 건 법에 위배되지 않았다.
매듭을 짓지 않아도 좋지만, 이왕이면 그 자리에서 이 사태를 끝내 버리려고 했다. 당연히 진짜로 죽일 생각은 없었다. 서량도 최소한의 선은 알고 있었다.
회생불능까진 아니더라도 최소 일 년간은 정양해야 할 중상을 입혀, 감히 자신을 다시 건드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말하자면 흑조위가 난입했다고 얌전히 물러날 이유도 없었던 것.
그럼에도 그가 물러난 것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번 한 번의 주목으로 내가 자유의 몸이 될 거란 보장이 없어. 괜히 형법당과 척져 봐야 좋을 일 없지.’
군사부도, 환희원도 그렇지만 형법당 역시 경우에 따라 신교에서 가장 무서운 조직이 될 수 있는 집단이다. 조금 옥신각신하는 정도라면 모를까 결코 척을 져선 안 된다.
‘시벌…… 복잡하게 대가리 굴리는 거 딱 질색인데.’
앞뒤 안 가리고 죄다 박살 낸 후 유유히 신교를 나갈 실력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다른 건 다 괜찮아도 교주가 자신을 가만히 놔둘 것 같지가 않았다. 인생의 자유를 얻으려다가 모가지만 자유를 얻은 채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끔찍한 결말은 사양이었다.
‘어쨌든 패는 돌아갔어. 이왕 판 벌어진 거 이 사태를 이용해서 한 걸음 나아가야지.’
와중에 다행이라면 그의 무공이 시시각각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딱히 수련에 임하지 않아도 하루가 다르게 강해진다. 내공이 증가했고 마공의 경지가 상승했으며, 손에 착착 감기던 칼은 이제 혼(魂)과 일체가 되어 가고 있었다.
‘적어도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진 않겠구만.’
지나친 겸손이었다. 지금 그의 경지라면 대문파 장문인까진 무리더라도 대장로급 정도는 충분히 잡을 실력이었다.
성장 속도만 보자면 앞으로 서너 달 후엔 장문인급까지도 여유롭게 상대가 가능한 수준까지 오를 것이다.
‘준비는 됐다. 낚싯줄을 던졌으니 이제 물고기가 물기만 하면 돼.’
스륵.
서량이 눈을 뜨자 마동필이 고개를 숙였다.
“명상이 끝나셨습니까.”
“명상은 무슨, 그냥 잡생각이지.”
역시 내 생각이 맞았구나.
내심 한숨을 쉬었지만 마동필은 내색지 않았다.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입니다, 공자님.”
“그래야지.”
서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이제 슬슬 움직이자.”
“예?”
“왜? 너는 좀 쉬게? 그래, 그동안 나 따라서 너무 빨빨거리긴 했다. 거처로 돌아가서 좀 쉬어.”
“아, 아니 그게 아니오라…….”
“그럼 뭐? 배고파? 밥 한 숟갈 하고 갈래?”
마동필은 눈알이 핑핑 도는 것을 느꼈다.
“공자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당연히 저도 따를 것입니다. 다만 움직이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응? 아아, 물고기 낚으러.”
서량도 한번 집중하면 자기만의 세계에서 빠져나올 줄 모르는 인간이었다. 당연히 마동필은 그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물고기라 하심은……?”
“당연히 진마대주지. 송경이라고 했나, 그놈?”
“아, 예!”
“위 대주더러 설렁설렁 술 한잔하고 있으라고 주루에 보냈잖아. 당연히 송경이 움직일 거야. 진마대주 위치만 파악되면 알아서 일이 진행…….”
“…….”
“……그러고 보니 너 왜 여기에 있냐? 진마대주 위치 파악하라고 보냈잖아, 내가.”
“제가 아니라 위 대주가 갔습니다만.”
“잉?”
“위 대주가 직접 진마대주의 위치를 파악하겠다며 나섰습니다. 아마 지금쯤 파악이 끝났을 것이옵니다.”
서량의 얼굴이 멍해졌다.
“야, 그게 뭔 소리야? 난 분명 위 대주한테 말했어, 주루에서 술 좀 홀짝이고 있으라고. 그게 무슨 뜻이겠어? 그냥 앉아만 있어도 진마대주가 찾아올 거라는 뜻 아냐?”
“그, 그렇긴 합니다만.”
“너한테 진마대주 동태 파악하라는 것도 시기적절하게 도우러 가기 위함…….”
순간 서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위홍련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 괜찮은 주루에서 술 한잔 걸치고 있어.
- 술이요?
- 어. 아마 근시일 내로 진마대주 쪽에서 움직임이 있을 거야. 이르면 오늘 밤에도 움직일 수 있겠군.
- ……오호, 그렇군요.
- 어차피 술도 다 깼을 거 아냐? 가서 한잔 걸치고 있어.
- 일의 선후가 바뀌어도 괜찮을까요, 공자님?
- 뭔 소리냐?
- 아, 아니에요. 어쨌든 진마대주 그놈과 만나면 저야 좋죠.
- 으이그, 이 싸움닭아.
- 흐흐, 그럼 저 먼저 갑니다.
- 알았다. 사고 치지 말고!
세상 즐겁게 히죽 웃으며 발랄하게 뛰어가던 위홍련의 뒷모습.
‘잠깐, 일의 선후?’
술을 마시고 있으면 알아서 진마대주가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위홍련 입장에서 일의 선후를 바꾼다면?
“……설마?”
진마대주부터 먼저 잡고 축배를 들겠다는 뜻이야?!
“이 썩을 년이!!”
파아앙!
서량이 엄청난 속도로 대문을 나섰다. 마동필이 헐레벌떡 그의 뒤를 따랐다.
흐아아암!
연무장 한옆에 엎드려 크게 하품을 하던 금호가 일순 눈을 또랑또랑 뜨더니 앞발을 굴렀다.
금호의 몸에서 희미하게 오색의 광채가 새어 나오는가 싶더니…….
번쩍!
이내 금호의 몸이 사라졌다.
어디로, 어떻게 사라지는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흐으, 흐으.
흥분에 호흡 조절을 못 했던 송경이 이내 눈을 감았다.
‘흥분하지 말자.’
눈엣가시를 넘어 살점을 하나하나 뜯어다 개 먹이로 줘도 분이 안 풀릴 것 같은 계집을 습격하는 날이다.
벌써부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심장 박동이 평소보다 세 배는 더 빠른 것 같았다. 너무 열이 올라서 말도 제대로 안 나올 지경이었다.
‘여긴가?’
그가 골목에서 주루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고급’ 주루였을 것이 분명했을 가게를 보았다.
‘……완전 개박살이 났구만.’
야밤이라 보수도 멈추었다. 벽 하나는 뻥 뚫렸고 여기저기 잔금이 간 주루 일 층은 크기만 컸지 폐가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난장을 쳤다고? 그런데도 또 찾아와 술을 마셔?’
역시나 미쳤어. 그년에겐 최소한의 상식과 도리도 없는 게 분명했다.
‘뭐, 상관없으려나.’
송경이 싸늘하게 웃었다.
어차피 만만치 않은 년이니 또 부서질 것이 분명하다. 그럴 바에는 새로운 주루보다 이미 부서져 있는 곳이 낫지.
‘슬슬 가 볼까.’
그가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댔다. 때가 되면 곧바로 칼을 뽑을 생각이었다.
송경이 슬금슬금 자미루로 걸어가려는 그때였다.
“어이.”
차아아앙!
반사적으로 검을 뽑은 송경이 엄청난 속도로 참격을 날렸다.
쩌어어엉!!
그의 검이 널찍한 검신에 부딪쳐 일어난 소음이 귀를 뒤흔들었다.
송경의 눈이 커졌다.
‘이 검은?’
소검의 길이에 검폭만 십 촌에 이르는 기형검.
그 검 너머, 얼굴에 사선으로 가로지른 흉터를 새긴 한 여인이 흉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잡았다, 요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