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지옥문이 열리다 (3)
홍위문이 웃으며 술병을 들었다.
“한 잔 받으시지요.”
“감사합니다.”
공손히 잔을 든 사람은 마흔이 훌쩍 넘은 중년 사내였다.
“자주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나름 공사가 다망하여 이제야 찾아뵙습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사내가 손사래를 쳤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리 찾아 주신 것만도 영광입니다.”
“하하! 물론 아까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속 보인다고 욕하셔도 별수는 없습니다만.”
“아닙니다. 교내 분란을 억제해야 할 마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제가 어찌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다만 저 역시 쓸데없는 분란을 지양하는 이로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이지요.”
“교를 위하는 공자님의 애정을 모르는 마인이 없을 것입니다.”
서로를 향한 금칠이 돌고 돈다. 그저 요식 행위에 불과하다는 걸 누구보다도 서로가 잘 알고 있음에도 결코 없어선 안 될 대화였다.
이런 대화는 칼집과 같다. 진짜 칼을 꺼내기 전까진 서로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않는 억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만약 둘 중 누구 하나라도 상대에게 볼일이 없다고 생각되면 그 즉시 칼이 뽑힐 것이다.
관계를 끊어 내는 냉혹하고 비정한 칼날이.
“객당 쪽 공사는 환희원에서 해 드리겠지요?”
“물론 그렇겠지요.”
“공자님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저희 애들을 중간중간 풀어 드리겠습니다.”
순간 홍위문의 눈이 반짝였다.
형법당의 고위 관리가 당원들을 풀어 준다고 말한다. 그것도 객당 공사 중에.
모르는 사람에겐 뜬금없는 말이지만 아는 사람이 들으면 깜짝 놀랄 말이었다.
형법당의 당원들을 풀어 공사를 돕는다는 것은, 사공자의 거처에 작은 뇌옥과 같은 비밀 공간들을 만들어 주겠다는 뜻이었다.
형법당원들은 하나하나가 실력 좋은 장인들이며 능숙한 인부이기도 했다. 당내에 미로처럼 얽힌 길과 감옥에 대한 정보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질 수 있었던 이유였다.
홍위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내게 뭔가 원하는 게 있군.’
정치에 대가 없는 선물 따윈 없다. 하나를 내주었다면 반드시 하나를 받아 와야 하고, 하나를 준다고 하는 사람에겐 상대에게 나의 무엇이 필요한가부터를 생각해야 한다.
그 보이지 않는 규칙을 깨는 자는 오래 못 가는 법. 홍위문이 수년에 걸쳐 체득한 정치는 그러했다.
그래서 그는 이 제안을 거부했다.
“괜찮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다만 그 대신으로 다른 것을 받아도 되겠습니까?”
“대신이라…… 그게 무엇입니까?”
그때, 중년 사내의 귀가 쫑긋거렸다. 당원에게서 전음(傳音)이 온 모양이었다.
홍위문이 미소를 지었다.
“예.”
“…….”
“지금 듣고 계신 상황을 묻어 주십시오.”
“……이 분란을 그냥 무시하란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사내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 사태를 본 마인들이 많습니다.”
“그렇겠지요.”
“…….”
“그래서 원래 제게 주시려 했던 선물과 충분히 대체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
“어떻습니까? 제 보따리에는 아직 많은 것이 남아 있습니다만.”
잠시 고민하던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묻어 드리지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집니다. 그저 묻어 두기에는 광마와 진마의 이름값이 상당히 큽니다. 윗선에서 개입하면…….”
“그땐 제가 나설 것입니다. 귀하께 피해가 갈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
“제가 목표로 하는 사람이 이 사태에 개입되는 순간, 그때는 형법당이 움직여도 괜찮습니다. 그리되면 뒷말이 나올 일이 없어지겠지요?”
사내가 웃으며 병을 들었다.
“이번엔 제가 따라 드리지요.”
“감사히 받지요.”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이는 두 사람.
홍위문의 눈에 보이지 않는 살의가 치솟았다.
‘칼을 휘두르는 싸움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보여 주마.’
* * *
쩌저저정!
쏟아지는 칼날이 마치 폭우를 보는 듯했다.
칼날의 숫자보다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더 무섭다. 한 자루 장검으로 그 위협적인 공격들을 모조리 쳐 내는 마동필의 무위가 눈부셔 보이는 이유였다.
하지만 마동필의 상태는 썩 좋지 못했다.
“후욱! 후욱!”
호흡은 거칠어졌고 몸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상처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결코 심하지 않다. 하지만 그 상처들이 모이고 모이니 중상 못지않은 과다 출혈을 유발했다. 점혈로 지혈하지 않았다면 진작 쓰러졌을 터였다.
“야! 이만 물러나!”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몸이나 추스르시오.”
“다 죽어 가는 새끼가 뭔 개소리야! 나와, 인마!”
잠깐이지만 마동필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눈앞의 적들을 막기 전에 위홍련부터 기절시키는 게 낫지 않을까.
“시끄럽소.”
“이놈이 정말?”
“당신 때문에 검이 더 무겁…… 흡!”
쩌어엉!
마동필이 한 걸음 더 물러났다. 그리고 그에게 칼을 휘둘렀던 진마대원은 십여 걸음이나 물러나며 대열을 흐트러트렸다.
굉장한 힘이었다. 무공 자체가 중검(重劍)과 강검(强劍) 위주라 몸이 이 지경이 되어도 파괴력이 남달랐다.
하지만 정작 그걸 본 위홍련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다.
“이 새끼야! 지금 뭐 하는 거야?!”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했잖소.”
“내가 지금 안 시끄럽게 하게 생겼어? 할 거면 제대로 하지 왜 살초를 쓰지 않는 거냐고!”
그렇다. 위홍련이 마동필 뒤에서 괜히 꽥꽥대고 있는 게 아니었다.
무려 오십 명에 가까운 진마대원들의 파상공세를 받아 내면서도 마동필은 절대 살초를 쓰지 않았다. 만약 작정하고 검을 내쳤으면 전투가 훨씬 쉬워졌을 것이다.
마동필이 특유의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상황이 이러해서 부딪치게 되었을 뿐, 결국 같은 마인 아니겠소.”
“야!”
“그리고 난 호법원의 삼 조장이오. 내 검은 본교의 적을 향해 겨누어질 뿐, 마인들을 향해 겨누어지지 않소.”
“…….”
“적어도 죽을 짓을 하지 않았다면.”
“그러다 우리가 죽어, 인마!”
“안 죽게 할 거요.”
“이건 단순 분란이 아니라 생사가 걸린 전투야! 세상에 어떤 병신 같은 놈이 적의 사정을 봐 가면서 싸우냐고!”
“적이 아니라 교도요.”
위홍련이 입술을 깨물었다. 영혼까지 땅땅 틀어박힌 이 고지식함은 어떤 의미로 대단하기까지 했다.
그때, 살기 넘치는 코웃음이 들려왔다.
“지랄들을 하고 있네.”
진마대원들 사이에서 송경이 걸어 나왔다.
잠깐의 휴식으로 기운을 차린 그의 몸에서 다시 강력한 마기가 피어올랐다. 아마도 대원에게 내상약을 받아 복용한 듯했다.
“뭣들 하는 거야? 어서 저 멍청한 놈 머리끄덩이 잡아 눌러!”
송경이 검지를 까딱였다.
“위홍련. 애송이 뒤에 숨지 말고 이만 나오지?”
“숨긴 누가 숨어, 새꺄!”
“그러니까 당장 튀어나오라고! 광마대주가 언제부터 남 뒤에 숨어서 손가락만 빨고 있었어!”
안 그래도 마동필 때문에 답답해 죽으려던 그녀였다. 거기에 송경의 도발까지 들어오자 눈이 회까닥 뒤집혔다.
우우우웅!!
마동필의 눈이 흔들렸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짙은 청색 마기가 등 뒤에서 확 번져 나왔다.
문제는 마기에 섞여 나오는 광기다. 일전 자미루에서 풍겨 대던 것 이상의 광기였다.
“위 대주!”
“개새끼야아!!”
퍼어엉!
마동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막으려고 했는데 막을 수가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을 뛰어넘어 송경을 향해 달리는데, 도무지 극심한 내외상을 입은 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송경이 으르렁거렸다.
“잘 왔다!”
퍼어어엉!
두 사람이 동시에 내지른 장력이 충돌하며 막강한 충격파를 일으켰다. 진마대원 십여 명이 좌우로 홱 하고 물러났다.
위홍련의 눈에 핏발이 섰다.
팔이 부러질 듯 아파 왔지만 그 통증이 오히려 광기를 불사르는 땔감이 되었다. 흰자위는 붉게 물들었고 동공은 도깨비불처럼 새파랗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전신에서 극에 이른 광기가 뭉클거리며 피어올랐다.
광기가 마공을 자극하고, 자극된 마공이 다시 오욕칠정(五慾七情)의 중단전을 뒤흔든다. 흔들린 중단전이 끌어모은 마기가 생명의 원천인 원정(原精)에 도달했다.
송경의 손이 움찔거렸다.
퍼어억!
그의 얼굴이 옆으로 홱 돌아갔다.
목에 푸른 핏줄이 쫙쫙 일어났다. 혼신의 힘을 다해 끌어 올린 마기와 질긴 근육이 아니었다면 이번 일격으로 머리통이 날아갔을 것이다.
‘이게 뭐야?!’
죽음은 피했지만 정신이 없긴 매한가지다. 눈앞이 번쩍번쩍하고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다 죽어 가던 몸에서 어찌 이런 힘이?!’
쐐애액!
송경이 본능적으로 손을 휘둘렀다. 희미한 백색 광영(光影)을 그리는 수공(手功), 육 장으로 펼치는 설산귀검이었다.
창졸간에 펼쳐 내는 무공이지만 제 위력이 살아 있다. 과연 진마대주라 불릴 만한 무위였다.
하지만.
콰직!
“크악!”
송경이 재차 뒤로 물러났다.
그의 손목은 기이한 각도로 탈골되어 있었다. 손등과 손바닥 여기저기가 거칠게 찢어져 너덜거렸다.
너무 의외의 고통이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부러졌던 왼팔이 손목까지 박살 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어지럼증이 사라졌다는 것 정도일까.
송경이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위홍련이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을 한 채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의 오른팔 역시 팔뚝이 어긋나 부러져 있었지만 전혀 고통스러운 기색이 아니었다.
위이이잉!
송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위홍련의 몸에서 눈이 멀 것 같은 강렬한 푸른빛 마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생생한 상태에서도 보여 주지 않던 엄청난 농도의 마기였다. 자신의 경지로는 감히 구사할 수 없는 마기가 그녀의 몸을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이다.
‘저거 설마……?’
송경의 얼굴에 질린 기색이 떠올랐다.
‘원정을 건드려? 미친!’
원정지기란 생명의 원천이다. 지금 위홍련은 사람이 평생에 걸쳐 소모해야 할 원정지기를 끄집어내며 돌진하고 있었다.
단순히 목숨을 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미친 짓이다. 이 승부에서 살아나도 후유증 때문에 폐인으로 살아야 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까지 날 죽이고 싶었느냐!’
송경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위홍련 때문에 원정을 끌어 올리고 싶진 않았다. 애초에 원정이란 게 쓰고 싶다고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으드득!
송경이 소리쳤다.
“내가 진마대주다!”
콰아앙!
무지막지한 폭음과 함께 두 사람이 뒤로 훨훨 날아 쓰러졌다.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충격파에 연신 마동필을 몰아붙이던 진마대원들도 깜짝 놀라 이곳을 돌아보았다.
“쿠웨에엑!”
사지가 죄다 부러진 송경이 한 사발의 피를 토했다.
“쿨럭!”
위홍련 역시 피 섞인 기침을 뱉었다.
하지만 괜찮다. 양팔이 부러졌지만 적어도 다리는 멀쩡했으니까.
우우우웅!!
다시 한번 치솟는 청현마기. 몸은 극도로 피폐해졌는데 뿜어지는 마기는 더 거세졌다.
“와아악!”
괴성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지르며 위홍련이 돌진했다. 피를 뿌리며 덤벼드는 그녀의 모습은 가히 지옥의 나찰을 연상케 했다.
송경의 얼굴에 미약한 공포가 드리워졌다. 저 지독한 것이 설마 또 죽자고 덤빌 줄 몰랐던 것이다.
“막아라!”
깜짝 놀란 진마대원들이 재빨리 송경의 앞을 막아섰다. 아무리 풍기는 마기가 강해도 체력이 바닥인 위홍련보다 훨씬 빨랐다.
그렇게 위홍련과 진마대원들이 부딪치기 직전.
퍼어억!
“……?”
시원한 타격음과 함께 위홍련이 멀리 날아갔다.
느닷없는 사태에 진마대원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보이는 족족 다 죽일 것 같은 기세로 돌진하던 위홍련이 왜 저 멀리 나뒹굴고 있지?
그때였다.
“위홍련.”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그곳엔 한 명의 미청년이 터질 듯이 시뻘게진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위홍련을 노려보고 있었다.
단 한 방에 정신을 차린 위홍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청년, 서량이 포효했다.
“이 쳐 죽일!”
피이이잉!
엄청난 속도로 돌진한 서량이 위홍련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위홍련의 눈이 질끈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