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뒤가 찝찝한 건 못 참아 (2)
“으아…… 죽겠다, 죽겠어.”
양 볼이 홀쭉 들어간 위홍련의 얼굴은 제법 볼만했다.
내외상의 상당 부분을 치료하긴 했지만, 여전히 몸 여기저기에 붕대가 둘려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이 그리 상한 것은 아직 낫지 않은 상처 때문이 아니었다.
위홍련이 힐끔 옆을 바라보았다.
서량은 여유로운 듯 깍지를 낀 채 나른히 앉아 있었고, 마동필은 눈을 감고 특유의 무뚝뚝한 분위기를 마구 풍겨 대고 있었다.
위홍련의 얼굴에 질린 기색이 떠올랐다.
“공자님은 안 힘드세요?”
“으하아암! 뭐가.”
“취조요.”
“그게 뭐가 힘들어. 물어보는 질문에 따박따박 대답만 해 주면 되는걸.”
“그렇죠. 같은 질문을 수백 번 반복해서 쏴 대니까 문제지.”
서량이 피식 웃었다.
살수는 인내심의 상징이다. 무공이 어느 정도 완성되기 전까진 오로지 인내심 하나로 살아온 인생이었다.
당연히 이 정도 취조는 아무것도 아니다. 열흘 동안 같은 자세로 물만 마시며 목표물을 기다린 적도 있거늘, 고작 사흘 취조받은 게 대수랴.
“뭐, 공자님은 그렇다 치더라도.”
위홍련의 표정이 샐쭉해졌다.
“너는 왜 그렇게 여유롭냐? 안 힘들어?”
마동필이 눈을 떴다.
피로한 기색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서량과는 달리 사흘 동안 잠 한숨 안 잤으면서도 눈에 충혈 증상조차 없었다.
“충분히 참을 만하오.”
“와, 그게 참을 만하다고?”
“호위 대상을 지키기 위해서 사흘 밤낮을 새는 것은 일도 아니오. 하물며 안전이 보장된 취조인데 못 참을 것도 없소.”
살수와 호위무사는 정반대의 직업이다.
하지만 둘 사이의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극도의 인내와 긴장을 함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살수는 호위무사를 뚫고 들어가 목표물을 해치기 위해 애를 쓰고, 호위무사는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살수의 칼날에 대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서량은 암살계의 제왕이라 불리던 인간이었고 마동필 역시 출중한 재능을 지닌 호위무사였다. 사흘간의 취조는 두 사람에게 과장 조금 보태서 휴식에 가까웠다.
위홍련이 고개를 저었다.
“진짜 이해할 수 없다니까.”
서량이 피식 웃었다.
“이해는 우리 옆방에 있는 놈들이 안 되겠지.”
“킥킥.”
위홍련이 엄지를 치켜올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죽겠다는 기색이었는데 지금은 희색이 만연했다.
“그나저나 기가 막히셨습니다.”
“뭐가.”
“칠 위장인가 뭐시긴가 하는 놈이 보는 앞에서 그놈들, 아니 사공자와 송경을 제대로 보내 버리셨잖아요. 속이 다 시원하더라니까요.”
서량이 눈을 부라렸다.
“지금 그게 문제냐? 너 때문에 적당히 꾸며도 될 판을 쓸데없이 우람하게 만들었잖아.”
“하지만 그 덕에 제대로 한 방 먹이셨잖아요?”
“운이 좋았지.”
“단순한 운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때 보니까 공자님 말발이 아주 그냥 죽이시던데.”
마동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삼공자님 면전이오. 말조심하시오.”
“알았다, 이 재미없는 새끼야.”
상큼하게 마동필을 씹어 준 위홍련이 다시 서량에게 고개를 돌렸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말발이라고 할 게 아냐, 그건. 내가 삼공자란 신분이라서 밀어붙이는 게 가능했던 거지.”
“그래도 결과는 좋았잖습니까.”
“그건 그렇지.”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으세요?”
“글쎄다.”
마동필도 궁금했는지 서량을 바라보았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하던 서량이 이내 머리를 긁적였다.
“나도 잘 모르겠군.”
“네? 왜요?”
“왜요라니? 내가 무슨 점쟁이라도 되냐? 앞으로 일어날 일을 어떻게 알겠어?”
“뭐든 다 잘 아실 것 같은데 왜요.”
“잘 알긴 개뿔.”
서량이 탁자 위에 놓인 물을 마셨다. 목구멍부터 위장까지 얼어붙을 것처럼 차가운 물이었다.
“그냥 내가 원하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을 뿐이야. 앞날을 알았으면 네가 그렇게 튀는 행동을 하리라는 것도 알았겠지.”
“그건 그러네요.”
“다만 재미 삼아 예측을 해 보자면…….”
서량이 턱을 쓰다듬었다. 사흘 동안 깎지 않은 수염 때문에 턱이 제법 거칠어져 있었다.
“홍위문 그놈은 취조 후 자택으로 돌아가겠지.”
두 사람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무표정한 마동필과 달리 위홍련의 얼굴이 귀신처럼 일그러졌다는 것이었다.
“반역이나 그에 준할 만한 위법을 저지르지 않는 한, 형법당에서도 쉽게 제자들을 건드릴 순 없을 거야.”
“그렇겠지요.”
서량은 신분이 주는 허상의 권력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마동필과 위홍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교주의 제자들에겐 별다른 권력이 없었고, 교내 마인들 모두가 그것을 인지하고 있다. 신분만 높을 뿐 맡은 직책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제자들에게 어지간해선 죄를 묻지 않는 것은, 그저 그들이 신의 선택을 받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평범한 마인들과 달리 그들은 어느 정도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존재들이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그랬다.
“내가 봤을 때 홍위문 그놈, 원한을 잊을 놈이 아니야. 머리는 제법 굴릴 줄 아는 녀석이 그런 데선 인내심이 없지. 하물며 연달아서 나한테 당했잖아. 이번에 돌아가면 근시일 내로 작정하고 칼을 빼 들겠지.”
위홍련이 혀를 내둘렀다.
“이전에는 작정한 게 아니었단 말입니까?”
“작정했지. 다만 그때는 혼신의 힘을 다한 공세가 날아올 거야.”
“굳이 그렇게 끝장을 보려 할까요?”
“그럼 안 하겠냐? 환희원주, 가솔들에 이어서 형법당 부당주 앞에서도 개망신을 당했는데.”
“…….”
“이제는 그놈도 앞뒤 잴 상황이 아냐. 분노 이전에 주위 시선을 봐서라도 그냥 넘어가진 못할걸?”
그런 관계적인 부분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마동필은 영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위홍련은 서량의 말에 동의했다.
“시선, 그거 중요하죠.”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를 매번 신경 쓰면 인생이 피폐해진다.
하지만 권력을 꿈꾸는 이들에겐 체면처럼 중요한 게 없다. 만약 이번에 뭔가를 보여 주지 않으면 홍위문은 확실히 권력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다.
“형법당의 부당주, 그놈 이름이 금 뭐라고 했지?”
“금성주요?”
“그래, 금성주. 그놈은 신경 쓸 거 없어. 형법당에서 알아서 처리할 거니까.”
“그게 아니어도 곁가지에 불과한 놈이라 신경 쓸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맞아, 잘 봤어.”
“그럼 사공자만 경계하면 되는 건가요?”
“그렇…….”
서량이 말을 하다 말고 위홍련을 빤히 쳐다보았다.
위홍련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넌 어쩌게?”
“뭐가요?”
“너 설마 계속 우리랑 붙어 다니려는 거 아니겠지?”
“……예?”
“너는 니 할 일 끝났잖아? 송경도 잡았겠다, 넷째한테 한 방 먹여 줬겠다.”
“……!”
“돈 받아먹은 거, 그것도 묻힐 거야. 홍위문 그놈이 바보가 아니라면 수세에 몰리고 있는 이 와중에 치졸한 죄목 하나를 더 늘릴 리도 없잖아?”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우리끼리의 연수는 여기서 끝난 것 같은데?”
“…….”
“회식도 닷새라며? 오늘로 끝난 거 아냐?”
“그, 그렇긴 합니다만.”
서량이 천장의 줄을 당겼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형법당원 한 명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삼공자님.”
“여기 위 대주는 이만 보내 줘도 되지 않나?”
“예?”
“이쪽은 일방적인 피해자잖아. 취조도 끝났는데 피곤하게 하지 말고 보내 주면 되지 싶은데?”
“아, 그것은…….”
“게다가 광마대는 오늘부로 회식이 끝났어. 내일부터 또 현장에서 뛰어야 할 텐데 용의자도 아닌 사람을 여기 붙잡아 둬서 쓰겠나?”
“…….”
“위에다가 말 좀 해 줘. 이 친구는 보내자고. 추가로 조사받을 거 있으면 그때 소환하든 하면 되잖아? 게다가 나나 호법원 삼 조장은 계속 남아 있을 텐데.”
곰곰이 생각에 잠긴 형법당원이 고개를 숙였다.
“상부에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얼마 걸리지 않아 답이 나올 것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어, 수고 좀 해 줘.”
당원이 나가자 방 안에 은근한 적막이 감돌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공기가 텁텁해지는 걸 느끼고 괜스레 서량을 보던 마동필은, 서량 때문에 공기가 변한 게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여기기엔 표정이 너무나도 여유로웠으니까.
‘그럼……?’
마동필이 위홍련을 돌아보았다.
‘…….’
위홍련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딱히 화가 난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기분이 좋아 보이지도 않았다.
‘왜 저러지?’
마동필이 내심 고개를 갸웃거릴 때.
“저는 똥 싸고 뒤 안 닦으면 찝찝해서 못 사는데요.”
“뭔 말이냐?”
“시작을 같이했으면 마무리도 같이 지어야지요. 저만 쏙 빠져서야 쓰겠습니까?”
서량이 피식 웃었다.
“시작은 같았지만 각자의 목적이 달랐어. 너의 싸움은 끝났지만 내 싸움은 현재 진행형이잖아?”
“…….”
“괜한 오지랖 부리지 말고 나가랄 때 나가라. 피곤하게 여기 묶여 있을 필요 없어.”
다시 묘한 침묵이 찾아왔다.
이번만큼은 서량도 찝찝했는지 위홍련을 힐끔거렸다. 그녀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를 빤히 보고 있었다.
“왜? 따로 할 말 있어?”
“……딱히.”
“거참, 싱거운 녀석일세.”
그때, 당원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생각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상부에서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광마대주 위홍련은 출소하셔도 좋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위홍련이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바로 나가지 않고 문 앞에서 멈췄다. 잠시 서서 무언가 생각하는 듯싶던 그녀가 몸을 돌렸다.
“꽤나 얻어터지긴 했지만 삼공자님 덕분에 재미있었습니다.”
서량이 손을 흔들었다.
“나도 네 덕분에 간만에 염통 쫄깃해져 봤다. 괜찮은 경험이었어.”
“그럼 몸 보중하시길.”
“너도 몸조심해라. 어디서 또 얻어터지지 않게 수련 열심히 하고.”
위홍련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방에서 나갔다.
마동필이 헛기침을 했다.
“왠지 위 대주의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는군요.”
“너도 그렇게 느꼈냐?”
“예. 뭔가 굉장히 서운해하는 듯 보였습니다.”
“참나, 서운할 게 어디 있어.”
“…….”
“……내가 쟤 서운하게 했냐, 설마?”
“송구하옵니다만 저도 잘은…….”
서량이 투덜거렸다.
“뭐 서운하면 서운한 거지, 내가 거기까지 신경 쓸 필요 있나 싶다.”
“그건 그렇습니다.”
“됐으니까 우린 쉬자. 너도 눈 좀 붙여. 사흘 동안 한숨도 안 잤으면서.”
마동필의 표정이 어색해졌다.
“사실 잠이 오질 않습니다.”
“그래? 이상하네. 어디 아프냐?”
진짜 이상한 건 서량이었다.
세상에 어떤 마인이 형법당에서 마음 편히 눈이나 붙이겠는가. 어지간히 신경이 굵은 위홍련 정도가 아니면 졸기도 힘들 게 당연했다.
“그나저나 금호 이 녀석은 잘 지내고 있으려나? 하긴, 앵화가 오죽이나 예뻐하니까.”
“잘 지내고 있을 겁니다.”
“그러겠지.”
두 사람이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내길 얼마쯤.
덜컹!
문이 열리고 그곳으로부터 누군가가 들어왔다.
놀랍게도 방에 들어온 사람은 칠 위장이었다.
“삼공자님을 뵙습니다.”
“오랜만이오.”
“공자님을 뵙고자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시겠습니까?”
서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날 보고 싶어 하는 사람? 누군데?”
“본당의 당주입니다.”
“……!”
“그리고 사공자는 이미 그곳으로 이동 중입니다.”
마동필이 놀라서 서량을 바라보았다.
서량이 씨익 웃으며 일어났다.
“동필아, 너도 이만 거처로 돌아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