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뒤가 찝찝한 건 못 참아 (3)
“야! 술 가져와!”
며칠 만에 거처로 귀환한 위홍련의 한마디는 간결했다.
차광이 슬쩍 눈치를 보며 대원들에게 손짓했다. 열 받은 것 같으니 빨리 움직이라는 손짓이었다.
대원들이 후다닥 움직였다. 생사대적을 만났을 때나 나오던 긴박한 발재간들이었다.
차광이 슬그머니 위홍련 옆으로 다가왔다.
“다치셨습니까?”
“…….”
“하하, 대주님께서 이렇게 되었을 정도면 상대는 정말 피떡이 되었…….”
퍽!
“크윽!”
차광이 비틀거렸다. 뒤통수를 어찌나 호되게 맞았는지 앉은 자리에서 엎어질 뻔했다.
위홍련이 흉흉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어디 좋은 일이라도 났냐? 왜 실실 쪼개고 지랄이야? 앙?”
“죄, 죄송합니다!”
“술 어디 있어? 당장 가져오라고 했잖아!”
“대원들이 가져오고 있습니다.”
“그럼 넌?”
“……예?”
“넌 뭐하고 애들만 시키고 있냐고? 할 거 없으면 안주나 만들어 와! 양념 진한 놈으로다가!”
“예!”
차광이 헐레벌떡 방을 나섰다. 괜히 기분을 풀어 드리겠답시고 나섰다가 된통 욕이나 먹은 꼴이 된 그는 억울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위홍련이 콧김을 팍팍 뿜어 댔다.
“젠장, 기분 더럽네.”
쌍심지를 켜고 의자에 기우뚱 앉은 그녀.
딱딱딱딱!
탁자를 두들기는 검지의 속도가 쾌검술을 연상케 했다. 어찌나 빠르고 독하게 두들기는지 가만 놔두면 탁자에 구멍이라도 뚫을 기세였다.
위홍련은 서량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의 멀뚱멀뚱한 표정과 당연하다는 듯 내뱉던 말을 곱씹었다.
- 우리끼리의 연수는 여기서 끝난 것 같은데?
- 시작은 같았지만 각자의 목적이 달랐어. 너의 싸움은 끝났지만 내 싸움은 현재 진행형이잖아?
- 괜한 오지랖 부리지 말고 나가랄 때 나가라.
“흥!”
어찌나 세게 콧방귀를 뀌었는지 콧물까지 찍 흘러나왔다.
거칠게 코를 닦은 위홍련이 입술을 질겅질겅 씹어 댔다.
“뭐? 목적이 달라? 오지랖 부리지 말라고?”
참으로 그 인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먼저 연수를 제안한 것은 자신이었고, 상상했던 것과는 좀 다르긴 했지만 그녀의 목적은 충분히 이루어졌으니까.
그래도 그렇게 칼로 무 자르듯 매정하게 말할 건 없잖아? 안 그래?
쾅!
주먹으로 후려 맞은 탁자가 움푹 파였다. 마지막 이성의 끈은 붙잡고 있었기에 비싸게 주고 산 탁자를 박살 내는 만행까진 저지르지 않았다.
“빌어먹을! 야, 이것들아! 빨랑 술 안 가져오고 뭐 하는 거야!”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리고 대원들이 술상을 차려 왔다.
아직 안주가 안 왔는데도 위홍련은 허겁지겁 술을 마셨다. 뭐가 그렇게 급한지 잔에 따르지도 않고 나발을 불어 댔다.
슬그머니 눈치를 보던 대원들이 슥 빠졌다. 이럴 때 대주한테 잘못 걸리면 개작살이 난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참 술을 마셔 대던 위홍련이 코웃음을 쳤다.
“하긴 신경 쓸 필요 없지. 알아서 잘할 거여. 아니, 알아서 잘하든 못하든 이제 상관도 없잖아?”
그래, 그거면 된다.
고즈넉하게 술잔을 기울이던 위홍련.
한 잔, 두 잔 들어갈 때마다 그녀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져갔다.
“……빌어먹을!”
* * *
“여깁니다.”
“고마웠소.”
“아닙니다. 그럼 전 이만.”
칠 위장이 몸을 돌렸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서량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되었소?”
“무슨 말씀이신지요?”
“조사는 어떻게 되었느냐 물었소. 넷째야 뭐 그렇다 치고, 그쪽 부당주 중 하나도 연루되어 있지 않았소?”
“……수사의 기밀 사항은 외부로의 유출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해해 주시길.”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힘내시오.”
칠 위장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가 특유의 조용하고 바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나쁘지 않은 사람이야.’
역시 마교라고 다 악귀 같은 것들만 사는 건 아니다. 앵화처럼, 마동필처럼, 그리고 칠 위장처럼 자신만의 바른 가치를 지니고 사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문을 바라보았다.
‘형법당주, 댁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하구먼.’
신교 최상위 신분인 삼공자와 사공자를 동시에 불렀다. 제아무리 형법당주라도 부담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무리하게 둘을 불렀다는 건, 부담을 안고서라도 해결해야 할 뭔가의 목적이 있다는 것.
드르륵.
서량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흠.’
바로 방이 나타나는 게 아니라 방까지 이어지는 기다란 회랑을 지나야 하는 모양이다.
‘독특한 구조로군.’
하기야 안에 사람이 있었다면 인기척이 느껴졌을 것이다.
암영진마공의 진정한 개방, 그 중 첫 번째 지옥문인 지저옥관귀문식을 열고 나자 기감이 한층 활성화되었다.
이전까지는 굳이 개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유인즉, 지저옥관귀문식을 개방하는 순간부터 마기가 눈에 띄게 기질을 드러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까지 남의 시선을 받아야 하나, 라는 생각 때문에 봉인해 두고 있었지만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어차피 주목도를 올리려면 뭐든 특별해 보여야 하는 법이다. 누가 봐도 강한 인상을 줄 수 있도록 분위기부터 무공까지 가일층 화려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런 면에서는 송경이 고맙기도 했다. 그놈 덕분에 자신의 존재감이 아직 모자란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쳇, 꿈을 이루기 위해선 마음에 안 드는 일도 할 줄 알아야지. 좋게 생각하자고.’
어차피 삼공자란 직책만으로도 주목의 대상이다. 굳이 찔끔찔끔 선 그어 가며 주춤거릴 필요는 없겠지.
서량이 회랑 안으로 들어갔다.
저벅저벅.
회랑 안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일 장 거리마다 벽에 화등이 걸려 있었지만, 어중간하게 밝아서 오히려 음산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염병, 이것들은 다 좋은데 항상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해.’
이런 거 진짜 마음에 안 든다.
왠지 이 어두침침한 회랑이 자유를 위해 걸어 나가야 할 인생의 가시밭길처럼 느껴졌다. 습하고 음산하고 은근히 겁도 나는 그런 길 말이다.
‘자유…… 시벌, 생각해 보면 참 어렵게 돌아간다.’
남들에게 들킨 적은 없지만, 하루에 꼭 서너 번은 자신도 모르게 다리가 움찔거릴 때가 있었다.
이런 복잡한 짓거리로 시간 잡아먹지 말고 확 나가면 안 되나 싶었기 때문이다. 막말로 지금 실력이면 몰래 신법을 펼쳐 나갈 수 있을 것도 같…….
‘말도 안 되는 소리.’
내전을 통과하기도 전에 잡힐 게 분명하다.
설령 잡히지 않고 무사히 탈출해도 문제다. 신교에선 필시 사라진 삼공자를 찾기 위해 무시무시한 마인들을 파견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엔 지금의 서량으로도 감당키 힘든 실력자들도 속해 있을 것이다.
순간의 자유를 위해 미래를 포기할 순 없다.
그가 원하는 것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완전한 자유였다. 의천맹과 철혈성, 그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들의 천라지망에 갇혔던 경험이 그를 더욱 신중하게 만들었다.
서량의 눈이 조금 충혈되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훗날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렇게 믿고 가는 수밖에.’
길지도 짧지도 않은 회랑을 걸으면서 이런 다짐까지 할 줄은 몰랐다. 새삼 솟구치는 강한 의지에 서량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늘 일 잘 마무리하고 홍위문 그 개자식을 두들겨 패 준 후에 경과를 지켜보자. 급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이놈아.’
스스로를 잘 다독인 그의 눈에 마침내 고풍스러운 문이 보였다.
‘흠, 다 왔…… 엥?’
서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문 안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둘. 필시 형법당주와 홍위문일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기척이 무척이나 모호했다.
‘뭐야, 이 기도는?’
뭔가 흐릿하면서도 분명하고 뻣뻣하면서도 흐물흐물하다. 어느 하나의 표현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도였다.
‘……되게 기분 나쁘네.’
됐어, 일단 부딪치고 보자.
드르륵.
서량이 시원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동시에.
“오셨습니까.”
원형 탁자 앞에 앉아 있던 두 사람 중 하나가 일어났다.
순간 서량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여기 자리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오시지요, 삼공자님.”
형법당원들이 수뇌부에게 최소한의 예만 갖추는 것은, 그들의 업무 특성상 최소한의 평등을 지키지 못할까 우려되어서다.
그것은 칠 위장만 봐도 알 수 있다. 예의는 확실하되 선이 명확하여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화술을 사용한다.
하지만 지금 일어난 사람은 달랐다. 마치 오래전부터 친하게 알고 지냈던 사이처럼 격의 없이 굴었다.
“좋은 술을 마련했는데 어떻게, 마음에 드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체격은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이제 오십 대 초반쯤 되었을까. 하지만 희끗희끗한 머리와는 달리 얼굴에는 주름 하나 쉽게 찾아보기 힘들었다. 입은 옷 역시 평범하여 대단히 고급스럽지도, 딱히 저급하지도 않았다.
외모도 마찬가지다. 못생기지도, 잘생기지도 않았다. 저잣거리에 나가면 흔하게 볼 수 있을 법한 인상이었다.
당대 형법당의 수장, 형법당주의 외양은 그처럼 평범함과 모호함으로 가득했다. 독특하다거나 진중한 기도를 찾아볼 수 없기에 오히려 범상치 않게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음? 하하!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어찌 그리 빤히 쳐다보시는지요?”
“당신이 형법당주인가?”
초로인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습니다. 제가 형법당주 고구(孤邱)입니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서량이 옆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는 홍위문이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잔은 받았지만 아직 술을 마시진 않은 듯했다.
“하하, 삼공자님께서 기분이 좋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
“어찌 되었건 예까지 먼 걸음 하셨으니 일단 앉으시지요. 사흘 동안 취조를 받으시느라 피곤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웃고, 또 웃는다.
서량이 고개를 저었다.
“난 거기 앉지 않겠다.”
고구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왜 그러시는지요?”
“나 같은 미친놈이나 저 머저리를 불렀다는 건 당신에게 나름의 목적이 있다는 뜻이겠지?”
홍위문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형법당주가 보는 앞에서 머저리란 소리를 들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고구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찌 그리 황망한 말씀을 하십니까? 받잡기 어렵습니다, 삼공자님.”
“그 목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난 속내를 숨긴 사람과는 대화할 생각이 없어. 내가 농락하면 모를까, 당하는 취미는 없거든.”
“예?”
서량의 눈에 마기가 스쳤다.
우우웅.
암영진마공이 들끓고 천라육통식이 자연스레 펼쳐졌다. 무애공의 정화진결이 저절로 일어나 주위를 청정케 해 주니, 초신관이 이전보다 더욱 예민하게 발동되었다.
“거참 신기한 가면일세그려.”
“…….”
“흑조위들은 가면을 썼음에도 모호함이라곤 찾아보기 힘들었지. 그저 심판자, 집행관 같은 느낌이었어. 하지만 당신은 달라.”
고구의 미소가 짙어졌다.
“저의 어디가 다르단 말씀이신지요?”
“본얼굴이지만 가면을 썼어. 흑조위들의 가면보다 열 배는 두껍고 백 배는 모호한 가면을.”
“그리 느껴지십니까?”
“당연한 거 아냐? 당신이 스스로를 숨기고 있잖아?”
이해하기 쉽지 않은 대화의 연속에 홍위문조차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고구의 반응은 달랐다.
“……과연 대단하십니다.”
그때였다.
우두둑. 우두두두둑.
홍위문의 눈이 흔들렸다.
뚜둑! 콰드드득!
무표정한 서량의 얼굴에선 싸늘한 한기가 묻어 나왔다.
치이이이익!
고구의 얼굴이 변하고 있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이목구비가 변한다. 뼈가 뒤틀리고 근육이 제멋대로 출렁거렸다. 마구 변하는 얼굴에서 어느 순간 뿌연 회색빛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축골기공(縮骨奇功)…….’
사람의 근골을 강력한 내공을 이용, 인위적으로 뒤바꾸는 무공을 말함이다.
‘떠들어 대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지어낸 허구의 무공인 줄 알았는데.’
세상에 기학(奇學)이 많다지만 인체의 구조를 바꾸는 무공이 실존한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다. 뼈와 근육이 바뀌면 오장육부의 위치도 바뀌기 마련이고, 나아가 신경까지 손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런 무공이 실제로 있었다면 왜 살수들이 인피면구를 구하려고 난리들이겠는가.
우두두둑! 콰득!
“지금껏 내 변신(變身)을 단번에 알아차린 사람은 귀하께서 세 번째시오.”
몸이 바뀌며 말투까지 바뀌었다.
지금껏 서량에게 보여 준 고구의 모습은 말 그대로 꾸며진 모습이었던 것. 지금의 이 말투가 고구의 실제 성격을 보여 주고 있었다.
“어찌 고죽림에서 팔 개월 동안이나 생존할 수 있었을까 싶었더니, 그 비할 데 없는 안목이 큰 역할을 한 것 같소.”
후우웅.
이윽고 고구의 실제 모습이 드러났다. 삼십 대 중후반쯤 되어 보이는 강인한 인상의 장년 사내였다.
“어떻소? 만족하시오?”
서량이 턱으로 탁자를 가리켰다.
“배고프니까 안주 좀 꺼내 오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