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뒤가 찝찝한 건 못 참아 (4)
홍위문은 당황했다.
‘축골공? 본모습? 몰랐다?’
짧은 순간 오만 생각들이 머리를 꽉 채웠다.
‘저것이 형법당주의 진짜 모습이라고?’
이전, 초로인의 외형일 땐 극히 평범해 보였지만 유들유들한 성격이 돋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보다 훨씬 젊어지고 인상도 강인했지만, 말투는 무뚝뚝했고 눈빛은 무심했다.
게다가.
“……마공을 익히지 않았소?”
고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초로인의 모습 때는 아예 내력 자체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혹 내공을 익히지 않은 몸이거나, 아니면 기도를 감추는 데에 능한 무공을 익힌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애초에 고구는 마공을 익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게 가능한가?’
신교, 그것도 외전이 아닌 내전의 고위 간부인데 마공을 익히지 않았다고? 말이 되는가?
그때 서량이 입을 열었다.
“신기한 무공이구만.”
고구의 눈에 이채가 번득였다.
“내 무공을 알아보시겠소?”
“당연히 모르지. 하지만 뭘 조합했는지는 알겠소.”
“…….”
“바탕은 마공이 확실하군. 거기에다 정파의 신공을 섞었어. 그것도 수 세대 동안의 보완을 거쳐 완성된 정통 무공을.”
고구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미약하게 출렁이는 기도가 그의 놀라움을 대변했다.
“놀랍구려.”
서량의 말이 사실임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홍위문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형법당주가 정통 마공을 익히지 않았다는 것보다, 자신이 알아보지 못한 것을 서량은 단번에 알아본 게 더 놀라웠다.
적어도 안목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거늘.
서량의 얼굴에 흥미가 돌았다.
“보통 어려운 시도가 아니었을 텐데 대단하오.”
“고생이 심하긴 했소.”
“변화의 여지가 명백한 무공도 아니군.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완성된 무공을 재조립하는 건 대종사(大宗師)급의 실력이 아니라면 불가능하지. 본교의 숨겨진 강자가 여기에 있었구려.”
서량도 암영진마공을 직접 창안했기에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았다. 운이 좋아 쉽게 만들었지만 그게 아니면 시도조차 하기 어려운 게 무공의 창조였다.
“과찬이시오.”
“과찬은 무슨. 솔직한 평가올시다.”
“그래서 과찬이라는 것이오. 운이 좋았을 뿐이니까.”
“뭘 아는 사람이구만.”
이해가 갈 만한, 하지만 쉽게 이해하기 힘든 대화를 둘이서 주거니 받거니 한다. 안 그래도 좋지 않던 홍위문의 기분은 아예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고구가 자리에 앉았다.
“판을 깔았으면 작두질이라도 시작해야 하는 법. 사적인 대화는 이쯤하고 공적인 얘기로 넘어갔으면 싶소.”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그럽시다.”
확실히 이놈은 달라.
무공도 무공이지만 성격, 성향 자체가 신교의 평범한 마인들과는 달랐다.
형법당주라는 위치가 아무리 대단해도 교주의 제자들에게 이리 대하는 건 명백한 무례였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대해도 왠지 별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편하고 익숙하다. 애초에 이런 관계가 정상이라 느껴질 정도였다.
‘독특한 녀석이야.’
대번에 잔을 비운 서량이 재차 잔을 채웠다.
고구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굳이 돌려 말하지 않겠소. 두 분을 이 자리에 모신 것은, 얼마 전에 있었던 두 분 사이의 분란 때문이오.”
홍위문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 얘기를 면전에서 꺼냈기 때문은 아니었다.
“취조도 끝났고 정리도 끝난 걸로 아오. 그 외에 달리 또 할 말이 있었단 말이오?”
“그렇소.”
“그게 뭐요?”
“앞으로 분란을 일으키지 말라는 다짐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오.”
홍위문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그렇소.”
“나는 딱히 분란을 원한 적은 없소.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한들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오?”
“…….”
“당신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강요할 권한이 없소.”
맞는 말이다. 교주의 제자들은 직책이 없는 만큼 공적인 일을 행사할 권한이 없지만, 반대로 교주를 제외한 타인에게 명령을 받을 이유도 없었다.
설령 원로원의 구대마존이라도 교주의 제자에게 명령할 순 없다. 부탁 정도라면 모를까.
고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공자의 말씀이 옳소. 나는 귀하들에게 무언가를 강요할 권한이 없소.”
“다 알면서 왜 그런…….”
“사공자에게도 누군가를 부릴 권한 따윈 없었소. 하지만 진마대주의 약점을 잡아 그를 수족처럼 부렸지.”
“……!”
“겉으로 보이는 직책, 신분, 관계로만 흘러가는 세상이 아니라는 건 사공자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리라 믿소.”
홍위문의 눈에 핏발이 섰다.
서량을 제외하고, 타인에게 이리 격한 모습을 보여 준 적 없던 그였다. 그만큼 수세에 몰렸다는 뜻이기도 했다.
“지금 날 협박하는 거요?”
“그렇소.”
너무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니 할 말을 잃게 된다.
“형법당은 호법원과 함께 일선에서 교법을 수호하오. 하지만 호법원과는 성격이 다르오.”
“…….”
“호법원은 교를 지키기 위해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조직이나, 수동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조직이기도 하오. 말하자면 수신에 치중한 조직이란 말이오.”
“…….”
“본당은 다르오. 형법당은 능동적으로 교를 지키는 조직이오. 위법 행위를 한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며, 특별한 경우 판결까지도 도맡소. 호법원과 마찬가지로 교를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아도 무심했던 고구의 눈빛이 점차 투명해졌다. 마치 유리알을 보는 것 같았다.
“형법당의 수장인 내게는 두 분께 무언가를 강요할 자격도, 권한도 없소. 하지만 능동적으로 교를 지키려는 나 개인은, 두 분께서 겪지 못한 새로운 경험을 선사해 드릴 수 있소.”
“…….”
“나 역시 그런 불미스러운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 드리는 말씀이오. 이해하셨으리라 믿소.”
대놓고 뭔가 꾸미진 못하지만 몰래 괴롭히는 것 정도야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홍위문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평생 살아오며 누군가에게 이런 식의 협박을 받아 본 적 없던 그였다.
고구가 힐끔 서량을 바라보았다.
와구와구.
서량은 시비가 어느샌가 내어 온 안주를 양 볼이 빵빵해지도록 쑤셔 넣고 있었다. 표정을 보니 상당히 행복해하는 것 같았다.
“삼공자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쩝쩝, 응? 뭐가 말이오?”
“……방금 내가 한 말을 듣지 못하셨다면 다시 해 드릴 용의가 있소.”
“아, 다시는 분란을 일으키지 말라는 말?”
“그렇소.”
서량이 시원하게 술을 비웠다. 그 한 잔의 술로 입 안의 음식물을 몽땅 위장에 쓸어 넣은 그가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뭐, 그럽시다.”
“…….”
“그게 뭐 어려운 거라고.”
“혹시 해서 말씀드리는데, 나는 지금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오.”
“…….”
“형법당과 척 지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소? 나도 마찬가지요. 결정적으로 나 역시 누구랑 멱살 잡고 진흙탕 구르고 싶은 생각 없수다. 평화롭게 사는 게 최고지, 암.”
홍위문이 고구 때문에 할 말을 잃었다면, 고구는 서량 때문에 할 말을 잃었다.
“그나저나 이거 술 맛있네. 처음 마셔 본 술인데, 이거 이름이 뭐요?”
“내가 직접 빚은 술이오.”
“실력 좋으시군. 혹시 팔 생각 있소?”
“…….”
“없음 말고.”
물끄러미 서량을 바라보던 고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삼공자께서 원하신다면 자택으로 몇 병 보내 드리겠소.”
“고맙게 받겠소. 나도 보내 드릴 선물 몇 개 추려 보겠소. 있으려나 모르겠지만.”
“괜찮소.”
“에헤이,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지. 걱정하지 마시오, 마음에 쏙 드는 놈으로다가 보내 드릴 테니까.”
제법 의미심장한 말이었지만 고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삼공자는 이리 말하는데 사공자는 어떻소?”
“…….”
“그럴 생각이 없다 해도 좋소.”
충혈된 눈으로 두 사람을 둘러보던 홍위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 치욕을 잊지 않을 것이오.”
“동의한 것으로 알겠소.”
드르륵! 쾅!
홍위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갔다.
서량이 혀를 찼다.
“저놈도 어지간히 시달렸나 보구만.”
제대로 갚아 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다른 이도 아니고 형법당주에게 제지를 당했다. 당연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을 터였다.
사람은 한계에 몰렸을 때 본 모습이 나오는 법. 홍위문은 분명 똑똑한 사람이지만 그 이상으로 불같은 성미를 가진 사람인 것이다.
‘그도 아니라면…….’
저 모습 또한 꾸민 것이거나.
고구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할 말은 이것으로 끝났소. 달리 할 말이 있으시오?”
“없소. 술 잘 마셨소.”
“가시는 길 편안하게 마차를 불러 드리리다. 그 김에 술도 몇 병 실어 드리겠소. 사흘 동안 고생하셨소.”
“호의는 사양치 않지. 고맙게 타고 가겠소.”
자리에서 일어난 서량.
그가 잠시 고구를 주시했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은 것이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
“축골공이 얼마나 절묘한지는 알겠소만 굳이 신체까지 변형해서 우리를 맞이할 이유가 있었소?”
“…….”
“딱히 누군가를 시험해 보려 드는 취미가 있거나 장난기 넘치는 등의 성격은 아니지 싶은데.”
“꼭 알려 드려야 하오?”
“듣고 싶으니까 나도 질문한 거 아니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좋소만.”
고구가 고개를 저었다.
“말하지 않겠소.”
“알겠소. 쉬시오.”
서량은 한 줌 미련도 없다는 듯 그대로 나가 버렸다.
문이 닫히자, 고구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심하고 투명하기만 했던 그의 눈빛이 점점 어둡게 물들어 갔다.
“……이상하군.”
실로 오랜만이었다. 이렇게나 읽기 어려운 사람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이렇게나 당황했던 적은.
그리고…….
‘익숙해.’
오랜만이었다. 과거, 풍운의 꿈을 안고 세상 밖으로 뛰쳐나왔던 때의 자신과 비슷한 냄새를 풍기는 사람을 보는 것도.
“적어도 나쁜 인상은 아니군.”
* * *
마차를 거부하고 자택까지 걸어가는 홍위문의 얼굴은 어느새 무표정하게 변해 있었다. 고구의 방에서 보여 준 격렬했던 표정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이상하군.’
분명 아까의 그는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었다. 실제로 화가 많이 났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보여 준 모습은 어느 정도 계산된 연기였다. 끝까지 인내하고 생각 많은 모습을 서량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 모습을 보여 주면 놈은 분명 뭔가 대비를 할 테니까.
‘왜 저렇게 사람이 달라졌지?’
고죽림에서 돌아온 후 세 번을 부딪쳤고, 그중 두 번은 대면까지 했다.
그래도 믿을 수 없었다. 서량의 저 변화를.
환경 따라 성격도 변한다지만 서량의 변화는 너무 심했다. 죽었다 살아나면 사람이 바뀐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놈은 여룡이산공을 익히지 않았어. 다른 마공을 익혔다. 혹, 그로 인해 성격의 변화가 온 건가?’
그 또한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정(靜)보다 동(動)을 추구하는 마공을 익히다 보면 누구나 호전적으로 변할 수 있다.
그러나 서량은 ‘변화’라는 단어를 쓰기 민망할 정도로 바뀌었다. 이 정도면 다른 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무엇보다 사람의 성격을 저만치 바꾸는 마공은 저급한 마공이다. 하지만 그가 발산해 낸 마기는 무척이나 고차원적인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어.’
홍위문이 고개를 저었다.
어쨌거나 서량은 변했고, 상황은 악화되고 있다. 어떻게든 지금의 난관을 헤쳐 나가야만 한다.
남들은 형법당주의 중재 요청을 모를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계속 당하기만 한 그의 입지가 무척 좁아질 것이 분명했다.
‘가만히 있을 순 없어. 방법도 많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결코 섣불리 움직여선 안 돼.’
우우우웅.
홍위문의 눈에 살기가 깃들었다.
‘천천히, 확실한 한 방을 날려야겠군.’
형법당주의 협박이 있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런 협박 따위에 굴복할 정도였다면 이천상의 제자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조금만 기다려라. 조만간 거한 답례가 날아갈 테니.’
그때였다.
“그놈, 눈가에 살기가 축축한 것이 누구 하나 담가 버릴 기세로다.”
퍼뜩 놀란 홍위문이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커다란 나무에 마차를 세워 두고 나른하게 앉아 술을 마시는 서량이 있었다.
“이리 오너라, 동생. 이 우형(愚兄)이 술 한 잔 따라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