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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55화 (55/774)

55화. 뒤가 찝찝한 건 못 참아 (5)

“…….”

홍위문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서량이 병을 흔들었다.

“다 마시고 이거 하나 남았다. 따라 줄라니까 후딱 와. 맛이 기가 막혀.”

“…….”

“안 와? 진짜 안 잡아먹는다니까?”

홍위문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멀찍이 지나가는 마인들이 힐끔힐끔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냉큼 다가와 고개부터 조아렸겠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며칠 전쯤 교내에 쫙 퍼진 소문 탓이었다.

삼공자 서량과 사공자 홍위문이 힘겨루기에 들어갔다는.

꾸욱.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쥔 홍위문이 특유의 여유로운 걸음으로 서량에게 다가갔다.

서량이 빙긋 웃었다.

“옳지.”

주륵.

꽉 쥔 주먹에서 실처럼 가느다란 핏물이 흘렀다. 너무 세게 쥔 탓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든 것이다.

‘민감하게 굴 것 없다.’

보는 사람이 많은데 저따위 언사를 뱉는다.

평소의 그였다면 콧방귀도 뀌지 않았을 텐데 자꾸만 울컥 반응하게 된다. 그만큼 심적 여유가 없어졌다는 뜻이었다.

홍위문은 살짝 심호흡을 했다.

‘어차피 놈도 섣부른 짓은 하지 못해.’

형법당주의 중재에 냉큼 동의한 놈이다. 진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당장 모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멀리 떨어졌으나 아직은 형법당의 영역이다. 놈도 그걸 모르지 않아.’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뭔가 수작을 부린다면?

‘앞으로의 신교 생활이 제법 힘들어질 거다.’

저쪽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쪽은 형법당주의 협박에 굴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체면을 살려 주기 위해 약간의 시간은 가질 필요가 있었다.

체면이란 게 얼마나 중요한지 홍위문은 잘 알고 있었다. 그걸 생각하면 오히려 서량이 날뛰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척.

홍위문이 서량의 앞에 다다르자 그가 턱으로 땅을 가리켰다.

“니 잔 거기 있다. 밟지 마라.”

펄럭!

장포를 크게 펄럭인 홍위문이 땅에 앉았다.

훅 하고 끼쳐 드는 바람에 먼지가 잔에 고스란히 내려앉았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그놈 참.”

한참 나이 많은 윗사람이 철없는 아랫사람을 보는 것 같다. 표정은 유지했지만 짜증이 안 날 수가 없다.

“한 잔 받아.”

홍위문이 말없이 잔을 내밀었다.

쪼르르.

따라지는 술에서 고급스러운 향이 일었다.

향 하나는 확실히 좋은 술이다. 기분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내심 감탄이 나왔다.

“괜찮지?”

“괜찮군.”

“한잔하지.”

서량이 잔을 내밀었다.

물끄러미 그 잔을 보던 홍위문이 그대로 자신의 잔을 비워 버렸다.

“속 좁기는.”

피식 웃은 서량이 자신의 잔도 비웠다.

꾸욱.

길고 널찍한 소매 속, 홍위문의 주먹이 다시 한번 쥐어졌다.

왜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예전부터 싫어했던 놈이긴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언제부터였지? 이놈의 목소리만 들어도 짜증이 치밀게 된 것이.’

잠시 머리를 굴려 보던 그는 어렵지 않게 그때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때부터군. 환희원주와 만났을 때.’

그전까지는 거슬렸지만 언제든지 밟아 줄 수 있는, 그러나 예상 밖의 모습을 보여 주던 신기한 놈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독하고 강하지만 그다지 똑똑하지는 않은 놈.

그러나 손님인 환희원주를 빼앗겼을 때, 그는 진심으로 서량에게 분노를 느꼈다.

차라리 무공으로 패배했다면 분했을지언정 이를 악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손도 못 써 보고 환희원주를 빼앗겼을 때는 잠시나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서량이 대단한 화술로 환희원주를 사로잡은 것도 아니었는데.

‘이유야 어찌 되었든 예나 지금이나 내게 잡아먹힐 놈에 불과해.’

홍위문이 술병을 들어 서량의 잔을 채웠다.

“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

“사람이 갑자기 변하니까 몸 둘 바를 모르겠잖아. 화해주라도 되는 거냐?”

“화해주라 말해도 믿겠소?”

“믿을 만한 대화가 이어진다면 믿지.”

홍위문은 자신의 잔을 채우곤 그대로 비웠다. 확실히 서량의 말대로 형법당주가 빚은 술은 무척 맛이 좋았다.

“날 부른 이유가 뭐요?”

“별 이유 없다. 그저 우리끼리 이런 식으로는 한 번도 대화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홍위문이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끼리 대화한 적은 많소. 어릴 적에는 그랬지.”

“그랬나? 뭐, 그럼 철들고 나서부터라고 하지.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그렇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하지만 홍위문은 이번 서량의 말이 이상하게 귀에 거슬렸다.

‘뭐지? 왜지?’

귀를 팠는데도 그 안에 작은 벌레가 꿈틀거리고 있는 듯한 느낌. 그게 아닌 걸 아는데도 자꾸만 신경 쓰이는 더러운 기분.

뭘까? 나는 왜 이놈의 그 말에 신경을 쓰는 걸까?

“어쩔 생각이냐?”

“뭘 말이오.”

“앞으로도 그 난장 치면서 살 생각이냐?”

꽤나 직접적인 질문.

예전이었다면 당황했겠지만, 서량의 이런 모습을 몇 번이나마 겪어 본 지금의 홍위문은 그러지 않았다.

“그게 궁금했소?”

“무슨 말이냐며 의뭉 떨 줄 알았는데 솔직하게 나와 주는군. 그래, 그게 궁금했다.”

“그게 형이랑 무슨 상관이오?”

“상관있지. 또 그 난장을 치면 첫 대상이 내가 될 게 분명한데 신경을 안 쓸 수가 있나.”

“…….”

“아예 접을 생각은 없는 것 같네.”

“물론이오.”

“왜 그렇게 빡빡하게 살려고 하냐?”

결코 이죽거리는 게 아니다. 서량의 목소리는 그의 얼굴만큼이나 진지했다.

홍위문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은 아니겠지?”

“되묻지 말고 대답이나 해 봐. 왜 그리 빡빡하게 살려고 하지?”

“당연한 것 아니오? 우리 일곱 사형제는 훗날 반드시 싸워야 하오. 아니, 교주님의 제자로 들어온 순간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치명적인 적이 생긴 것과 다름이 없소.”

“…….”

“우리의 싸움은 바로 그때부터 시작된 거요. 그걸 알면서도 그런 말을 꺼내다니 새삼스럽지도 않소?”

“싸움이야 그렇다 쳐도 죽일 필요까진 없을 텐데.”

“나와 계속 장난을 치고 싶은 거요?”

“아니, 그저 너의 진심 어린 대답을 듣고 싶을 뿐이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쪼르르르.

서량이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홍위문이 시원하게 잔을 비웠다.

“이 나라의 황족들을 보면 알 거요. 황제가 되지 못한 황자들의 운명은 비참하기 그지없소.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을 정도지.”

“거야 그렇지.”

“우리라고 다를 거라 생각한다면 형은 정말 멍청한 사람이오. 우리는 황족과 같소. 비참해지기 싫다면 형제들을 죽여서라도 황제가 되어야 하지. 오히려 뭣도 모르는 지금 당장 죽여 주는 것이 자비로울 수 있소.”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그게 네 생각이냐?”

“당연하지 않소? 하면 형은 얼마나 평화로운 생각에 젖어 살고 있었소?”

“평화로운 삶을 바라기는 하는데 환경이 영 평화롭지가 않네.”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는 대권을 거머쥔 이후부터 시작이오.”

“틀렸다.”

“……?”

“잠깐이지만 너의 진심 어린 생각을 들려주어 고맙군. 그래, 그럴 수 있지. 하지만 평화로운 삶이 대권을 거머쥔 후부터 시작된다는 생각만큼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홍위문이 차갑게 웃었다.

“공맹(孔孟)의 도리라도 가르치고 싶은 건가?”

“공맹은 무슨. 어차피 씨알도 안 먹힐 놈한테 성현들의 강의를 왜 주절거리겠어?”

“…….”

“너, 적사가 출신이잖냐.”

“그런데?”

“한 번도 뭔가에 만족하면서 살아 본 적 없지?”

“…….”

“대권을 거머쥔다고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 같냐? 웃기는 소리. 교주님의 무공이 워낙에 대단해서 그리 보이는 것일 뿐, 그 자리에 앉았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근래에 들었던 소리 중 가장 황당하고 쓰레기 같은 말이로군.”

“그러니까 공맹의 도리는 집어치우고 경험을 토대로 말해 주는 거 아니겠냐. 공자 왈, 맹자 왈 했으면 네가 지금 거기 앉아나 있었겠어?”

“…….”

“겁나냐.”

순간 홍위문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날 모욕할 셈으로 부른 거요?”

“겁이 나냐고 묻는 것이 왜 모욕이지?”

“술맛 떨어지는군.”

“대권을 차지하고 싶은 거냐? 아니면 죽기 싫어서 먼저 죽이려 드는 거냐?”

“왜 자꾸 그따위 같잖은 질문들을 하는 거요?”

“대답이나 해 봐. 둘 중 어느 것이냐?”

“당연히 전자요.”

“최고가 되고 싶다?”

“물론.”

“그렇군.”

그 말을 끝으로 서량은 입을 닫았다. 그저 자신의 잔을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그런 서량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홍위문이 입을 열었다.

“형은 어떻소?”

“나? 뭘?”

“최고가 되고 싶지 않소?”

“장난하냐? 웃기지도 않은 질문을 하고 앉았어.”

홍위문이 코웃음을 쳤다.

“형도 그리 생각…….”

“당연히 흥미 없다, 그따위 거.”

홍위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흥미가 없다고?”

“생각을 해 봐라. 대권을 잡고 신교의 정점에 서면 그때는? 여기 관리하랴, 저기 관리하랴, 사고 터지면 발바닥에 땀 나도록 뛰어야 하는 데다 그 피곤하다는 회의도 줄줄이 잡힐 거 아니야?”

“……?!”

“그런 피곤한 자리에 왜 앉고 싶냐? 난 오히려 네가 더 이해가 안 간다.”

“대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지.”

“권력, 그거 먹을 순 있는 거냐?”

“…….”

“나도 날 책임지지 못하는데 권력으로 누굴 다뤄 보려고? 권력이란 건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허상에 불과해.”

“모두가 믿고 있는 허상이지.”

“그러니까 권력자나 그를 맹신해 따르는 머저리들이나 비참한 말로를 겪는 거다. 실재하지도 않는 허상 따위에 홀려 즐겁지 못한 삶을 영위해야 하니까.”

병을 흔들던 서량이 자신의 잔을 채우곤 홍위문의 잔까지 채웠다.

“다 비웠군.”

“…….”

“술도 다 마셨겠다, 네 생각도 들었겠다, 이제는 하나만 확인하면 되겠다.”

정작 잔을 채웠음에도 서량은 잔을 들지 않았다.

“형법당주 앞에서 했던 말, 진심이었다. 나는 굳이 남들과 멱살 잡으면서 진흙탕을 뒹굴고 싶지 않아. 날 건드린 놈을 용서할 생각은 없지만, 그조차도 그때 기분에 따라 대충 넘겨 버릴 수도 있지. 난 변덕이 좀 심하거든.”

“…….”

“어쩔 거냐? 다시 한번 뒤에서 날 공략해 볼 셈이냐?”

“그렇다고 하면 어쩔 거요?”

“변덕에 맡겨 보련다. 적어도 소설 속 아리따운 얘기처럼 흘러가진 않겠지.”

“그렇군.”

“그래서 대답은?”

홍위문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스리슬쩍 올라가는 입가. 평소 신회에게 보여 주던 여유 넘치는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어떤 대답을 해도 믿어 주지 않을 거 아니오?”

“…….”

“속이는 게 의미가 없다면 이리 대답하지. 언젠가는 반드시 죽여 버릴 거요.”

“그래?”

“대답이 되었소?”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긴 서량.

그가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홍위문도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잔 비우고 서로 갈 길 갑…….”

퍼어어어어엉!!

반경 수십 장을 떨쳐 울릴 무지막지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폭음을 만들어 낸 당사자가 충격파 때문에 부서진 나무 앞에서 목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가긴 어딜 가.”

“큭!”

오 장 거리나 물러난 홍위문의 양손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이전까지의 여유롭고 진중하던 표정과는 상반되는, 그야말로 죽음의 미소였다.

“진짜 깊게 생각을 해 봤는데, 역시 뒤가 찝찝한 건 못 참겠다.”

우두둑! 우두두둑!

손가락을 전부 푼 그가 암영진마공을 개방했다.

“뿌리 뽑고, 시원하게 내 갈 길 갈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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