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폭군도 영웅이 될 수 있다 (2)
서걱!
홍위문의 머리카락이 뭉텅 잘려 나갔다.
찌이익!
서량의 소맷자락이 길게 찢어졌다.
‘상당하군.’
사왕마공을 완전히 개방한 홍위문의 무공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언뜻 봐서는 거의 마공에 먹혀 버린 것처럼 보였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자색으로 완전히 물들어 버린, 무공보단 짐승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었으나 홍위문의 정신은 무척이나 명료했다. 다 명료한 정신만큼이나 지독한 분노와 살기가 그를 잠식했을 뿐이었다.
그가 손을 휘둘렀다.
콰드드득!
한 건물의 지붕 한쪽이 그대로 뜯겨 날아갔다.
실로 대단한 위력이었다. 조법(爪法) 일격에 이 정도 파괴력을 낼 수 있을 정도면 위홍련이나 송경보다 한 수 위의 고수라 불리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상대가 위홍련이나 송경이라면 십 합 내에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홍위문이 그들보다 한 수 위라고는 하나 그보다 더 높은 곳에서 거닐고 있는 서량에겐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문제는 홍위문이 그 둘보다 고차원적인 마공을 익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마공이 환경을 제법 까다롭게 만들고 있다.
‘귀찮은 자식.’
파아악!
단숨에 홍위문의 품을 비집고 들어온 서량이 그의 멱살을 잡았다.
두 눈을 빤히 뜨고 있었음에도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모르겠다. 홍위문의 양손이 반사적으로 서량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여기선 안 된다, 인마.’
콰드득!
서량의 두 발이 땅을 세 치나 파고들었다.
쾅!
홍위문의 멱살을 잡고 또다시 이동하는 서량.
우두둑! 우두두둑!
서량의 팔뚝에 핏줄이 확 불거졌다. 멱살이 잡힌 홍위문이 미친 듯이 발광해서였다.
‘이 새끼가!’
서걱!
홍위문의 볼에 기다란 도상이 새겨졌다. 짐승에 가까운 본능으로 관통하려는 칼을 피한 것이다.
콰아앙!
복수라도 하듯 흉부를 가격하는 홍위문의 주먹에 서량의 몸이 흔들렸다.
찌르르한 아픔에 울화가 치밀었다. 내가 왜 이 음흉한 놈 하나를 잡자고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시벌! 어차피 개 같은 마인들인데 휩쓸리든 말든!’
생각은 생각일 뿐이다.
마인도 사람인 걸 깨달아 버린 이상 무고한 이들까지 휘말리게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선공을 날린 건 자신 아니던가.
그때, 홍위문의 오른손이 서량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퍼어억!
‘끄응.’
상당하다. 암영진마공의 진기 장벽이 없었다면 꽤 심각한 내상을 입었을 정도로 파괴력이 강했다.
하지만 홍위문이 노린 것은 따로 있었다.
푹!
서량의 눈이 흔들렸다. 홍위문의 검지가 그의 옆구리를 뚫어 버린 것이다.
파라라라락!
두 사람의 신형이 거칠게 흔들리더니 그대로 땅에 꽂혔다.
퍽! 콰드득!
좌우로 튕겨 나가는 둘.
홍위문이 먼저 벌떡 일어났다. 흘러넘치는 마기 덕분에 고통도, 충격도 느껴지지 않았다.
서량은 달랐다.
후우욱!
그의 옆구리에서 자색의 기류가 흘러나왔다. 검지로 뚫린 복부에 홍위문이 직접 사독을 쑤셔 넣은 것이다.
“고통스럽나?”
전투 중에 처음으로 입을 여는 홍위문. 그만큼 여유를 찾았다는 뜻이리라.
“체내로 직접 주입한 독이다. 마기로 태우려면 내장도 익어 버릴 것이다.”
후우웅.
진득한 자색의 마기가 그의 양손으로 잔뜩 집약되었다.
위력보다는 독기를 살렸다. 차근차근, 고통스럽게 상대를 몰아붙이겠다는 의도였다.
“날 건드린 건 실수였어.”
파아아앙!
홍위문이 쌍장을 휘둘렀다. 굳이 접근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퍼엉!
서량의 몸이 움찔거렸다. 사영독장(蛇影毒掌)에 그대로 격중당한 것이다.
홍위문은 한 번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퍼퍼퍼펑!
서량의 몸이 연신 들썩거릴수록 쓰러진 그의 주변으로 자색의 독무(毒霧)가 피어올랐다.
사영독장으로 뿜어낸 사독이 서량의 체내에 차곡차곡 쌓여 발생하는 운무였다.
작정이라도 한 듯, 홍위문은 치사량의 독장을 수십 번이나 날렸다.
퍼퍼펑! 퍼어엉!
어느새 서량의 모습이 육안으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반경 이 장에 달하는 자색의 독무가 서량을 완전히 지워 버린 것이다.
치이잉!
사영독장을 거둔 홍위문.
다시 뾰족하고 새카만 손톱을 피워 낸 그가 씨익 웃었다. 얼마 만에 지어 보는 진심 어린 웃음인지 모르겠다.
“당장 죽이진 않겠다. 다리 병신으로 살아 봐.”
“쿠웨엑!”
마침 운무 안에서 피를 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악!
홍위문이 달려나갔다.
상대가 약하다고 방심하지 않는다. 여유는 찾았으되 득의양양해져 기회를 놓치지도 않는다.
독으로 상대를 무력화시키고 잡아먹는 것. 그의 행동은 독사와 다를 것이 없었다.
후욱!
운무로 들어온 홍위문은 서량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흐린 시야 속, 앞으로 쓰러진 서량이 핏물을 토해 내는 광경이 보였다.
‘잘 가라, 이 지긋지긋한 놈.’
홍위문이 서량의 정강이를 향해 흑골사영수를 내질렀다.
그때였다.
콰득!
‘응?’
뭐지? 서량 이놈이 어디로 사라졌지?
‘이놈이 또?!’
아직도 기력이 남았단 말인가?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던 홍위문은 문득 팔뚝에서 올라오는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자신의 오른팔을 내려다보던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관절이 역으로 꺾였다.
‘왜 부러졌지?’
휘이이이잉!!
순간 일대를 뒤덮었던 독무가 땅에서부터 올라오는 회오리바람을 따라 돌고 돌았다.
대단한 풍속(風速)이었다. 불어 닥치는 돌풍이 순식간에 독무를 압축시켜 하늘 높이 날려 보냈다.
시야가 말끔해지고 텁텁했던 공기 역시 맑고 시원해졌다.
그리고 그 시원한 공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화르르륵!
불타오르는 마기가 공기를 빨아들여 더 강한 화력을 뿜어냈다.
콰지지직! 콰직!
불길 주변으로 시뻘건 번개가 휘몰아쳤다. 누구라도 위압감을 느낄 만한 화려한 마기를 피워 내는 이는, 바로 서량이었다.
“퉤!”
핏물 섞인 침과 함께 마지막 독기를 뱉어 낸 그가 하늘을 향해 도를 겨누었다.
우우우웅!
도첨(刀尖)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적색 구체.
서량이 기합성을 터트렸다.
“합!”
퍼어어어엉!
하늘 높이 쏘아진 적색의 구체가 독기에 닿더니, 기름 묻은 종이에 떨어진 불똥처럼 순식간에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화아아악!
자색의 독무가 완전히 증발했다. 홍위문이 애를 써서 쌓아 놓은 독무가 그리도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 것이다.
“새끼, 뒤에서 슬금슬금 거슬리게 하더니만 쓰는 무공도 성격을 쏙 빼닮았네.”
홍위문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뭐가? 아, 이거?”
서량이 자신의 옆구리를 매만졌다.
“뭐 대단한 상처도 아닌데.”
대단한 상처가 맞다.
복부가 위험한 이유는 내장 기관이 몰려 있기 때문이다. 인체의 복압은 무척 강하기 때문에 구멍이 나면 그곳으로 내장이 삐져나오려고 한다.
거기에 맹독성 사독을 치사량으로 쏟아부었다. 그것도 수십 번이나.
대라신선이라도 쉽게 손을 못 댈 치명상 중의 치명상 아니던가.
“사지가 부러지고 배때기에 구멍 몇 개 뚫린 상태에서도 웃으면서 목표물을 제거할 만큼 직업 정신이 투철했던 나다, 이거야.”
“뭐, 뭐라고?!”
“요 정도는 긁힌 상처밖에 안 돼, 인마!”
퍼어어엉!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온 서량이 칼을 휘둘렀다.
보법도, 칼질도 너무 빨랐다. 홍위문이 재빨리 교룡보법을 밟았다.
빠각!
“컥!”
홍위문의 입에서 핏물이 터졌다. 서량이 그의 얼굴을 걷어찬 것이다.
팔이 부러졌을 때처럼, 이번에도 어떻게 맞았는지 보이질 않았다.
“보법은 그렇게 쓰는 게 아니지.”
홍위문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파앙!
짧은 거리에서 사선으로 올려치는 왼손. 창졸간에 펼쳤음에도 흑골사영수의 투로가 완벽하게 살아 있었다.
서량이 무자비하게 칼을 휘둘렀다.
서걱!
“크악!”
중지와 약지가 한 마디씩 잘려나가고 검지와 소지의 손톱이 반이나 날아갔다. 비명이 나올 수밖에 없는 고통이었다.
빠른 대응도 놀랍지만 섬세한 칼질은 놀라운 것을 넘어 눈부시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넉 자 길이의 칼을 휘두른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었다.
서량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넌 끝났어.”
퍼억!
홍위문의 몸이 뒤로 훨훨 날아갔다.
딱 적당한 거리다. 독기도 어지간히 빠졌으니 칼질 좀 하더라도 독혈(毒血)로 인한 이차 피해는 없을 것이다.
비틀거리는 홍위문을 향해 서량이 칼을 겨누었다.
파지지직!
칼날에서 번뜩이는 붉은 번개. 그리고 그 주변을 배회하는 무형의 바람.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그리고 오랜만에 그는 자신의 비기(秘技)를 개방했다.
“풍인(風刃).”
휘이이이잉!!
다시 한번 불어오는 돌풍.
날씨와는 상관없는 내력의 바람, 무시무시한 도풍(刀風)이 사방에서 불어닥치며 홍위문의 몸을 할퀴었다.
사사사사삭! 푸화악!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법. 홍위문의 몸 곳곳에 자상이 생겨났다. 사왕마공 덕분에 갈가리 찢겨 죽진 않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상처들이었다.
하지만 서량의 공격은 이제 시작이었다.
“삭풍(朔風).”
찌이이이익!
홍위문의 등 근육이 길게 찢어졌다.
“끄으윽!”
근육이 생으로 찢어지는 아픔은 필설로 형용키 어렵다. 칼이 아니라 도끼에 찍힌 것처럼 거친 상처였다.
찌이익! 찌이이익!
허벅지, 가슴에 이어 어깨에도 깊은 자상이 새겨졌다. 사왕마공의 진기방벽으로도 막을 수가 없었다.
“구절풍(九折風).”
파바바바바박!
홍위문의 몸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일초구식(一招九式), 일식구격(一式九擊)의 구절풍은 그 자체로 연환참격. 다음 공격이 어느 부위로 들어갈지는 시전자도 알 수 없다.
홍위문의 몸이 피범벅이 되었다. 격렬한 마기가 즉각적으로 지혈을 해 주었지만 짧은 순간 흘린 피가 상당했고 내상 역시 무시 못 할 수준이었다.
서량의 칼이 춤을 추었다.
“풍사(風死), 광풍(狂風).”
휘이이이잉! 퍼버버버벅!
“으아아아!!”
이제껏 터트린 비명 중 가장 크고 처절한 비명이었다. 자존심이나 인내심으로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요, 공포였다.
그를 노려보는 서량의 눈이 마귀의 그것처럼 슬슬 찢어졌다.
철컥!
어느덧 칼을 양손으로 쥔 그가 연환식의 마지막 초식을 휘둘렀다.
“천풍육식(天風戮式).”
후웅!
바람에도 무게가 있다면, 하늘 높은 곳에서 쏟아져 내려온 이 바람은 집채만 한 강철구와 같았을 것이다.
그 크고 무거운 바람이 노리는 곳에 비틀거리는 홍위문이 있었다.
퍼퍼퍼퍼퍽!
맑고 시원한 바람에 보이지 않는 칼날이 실렸다.
그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 홍위문의 몸은?
푸화아악!
대량의 피를 쏟아 낸 홍위문의 신형이 휘청거렸다.
털썩!
결국 무릎을 꿇는 홍위문.
울컥 피를 토해 낸 그의 눈은 멍하니 풀려 있었다.
‘뭐지?’
도대체 이 무공은 뭘까?
형형한 도기(刀氣)도, 압도적인 마기도 없는 순수한 칼바람에 불과한데 왜 사왕마공이 막질 못했지? 아니, 애초에 이게 무공이기는 한가?
스륵.
시야가 어두워진다. 붉게만 보이던 땅에 낯선 두 발이 보였다.
‘서량…….’
순간 목 뒤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서량이 그의 어깨에 칼을 올려 둔 것이다.
“유언이라도?”
유언.
사람이 죽기 직전 남기는 말이다. 이런저런 욕설 섞인 협박보다 훨씬 깔끔하면서도 소름 돋는 말에 홍위문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죽어? 내가?’
이렇게 죽을 거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설령 대권을 차지하지 못한다 한들 자신의 최후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화려하게, 비장하게 마무리될 줄 알았다.
대결 같지도 않은 일대일 생사결에서 패배해 무릎까지 꿇다니? 이 웃기지도 않는 허무한 결말에 어이가 없었다.
“역시 없지? 하긴 무슨 할 말이 있겠냐.”
우우우우웅!
칼날 표면을 흐르는 강력한 마(魔)의 박동.
서량이 눈빛이 냉랭해졌다.
“죽는다는 게 원래 그래. 네가 피우던 연초의 연기처럼 허무하게 흩어지는 게 사람 목숨이란 거지.”
“……!”
“잘 가라.”
서량이 칼을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