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폭군도 영웅이 될 수 있다 (3)
“멈추십시오!”
우뚝.
눈을 질끈 감았던 홍위문이 슬며시 눈을 떴다.
주르륵.
좌측 목에 새겨진 도상. 싸늘한 예기를 뚫고 피가 흘러나왔다. 목이 날아가지 않은 것이다.
“더 이상의 분란은 불가합니다! 삼공자께선 속히 칼을 내려놓으십시오!”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등 뒤에서 풍기는 기도는 예상 이상이었다. 한참 멀리서부터 느껴진다 싶었는데 순식간에 여기까지 도달했다.
‘제법이군.’
그가 돌아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뉘신지?”
“형법당 흑조위 삼 위장입니다!”
“아하? 또 너희냐?”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삼공자께선 당장 칼을 내려놓으시고 뒤로 물러나십시오! 더 이상의 분란은 불가합니다!”
“싫은데?”
“뭐, 뭐라고 하셨습니까?”
“후계 후보들끼리의 문제다. 형법당이 끼어들 사안 아니야. 대충 일 마무리 지을 테니 알아서 처리하고 돌아가라.”
“그럴 수 없습니다!”
“음?”
“아무리 삼공자라 하시더라도 더 이상 형법당의 권한을 무시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오호라?”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당장 칼을 내려놓으시고…….”
그때, 서량이 살짝 고개를 돌렸다.
삼 위장의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후보들끼리의 다툼에 끼어들 권한이 형법당에 있었나?”
“……!”
“말해 봐.”
“하지만 이곳은 형법당의 영향력이 미치는 구역…….”
“당의 영향력이 미치는 구역이라고 내가 굳이 신경 써 줘야 할 이유는 또 뭐지? 그리고 애초에 형법당의 관할 구역은 내외전 모두를 포함하고 있지 않았던가?”
“…….”
“존중이야 해 줄 수 있지만 주제넘은 월권까지 눈감아 주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난 너희가 왜 자꾸 재미없게 나오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
“삼공자님!”
“아니면 뭐야? 교내 마인들이라면 신분을 막론하고 너희 앞에서 벌벌 떨어야 속이 후련하냐?”
“말씀이 심하십니다!”
순간 서량의 칼이 번쩍였다.
콰르르릉!
삼 위장이 입을 떡 벌렸다. 가면으로 가려져 있지만 그의 얼굴은 경악으로 얼룩져 있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던 홍위문도 넋이 나가기는 매한가지였다.
어느새 삼 위장의 발 앞에 삼 장 길이의 거대한 도흔(刀痕)이 새겨져 있었다.
“……꿀꺽.”
일도(一刀)에 땅이 갈라져 버렸다. 얼마나 깊은지 파악도 안 되는 도흔 주변은 시커멓게 눌어붙어 있었다. 극양의 마기에 땅이 타 버린 것이다.
멍하니 도흔을 내려다보던 삼 위장이 고개를 들어 서량을 바라보았다.
‘흡!’
번쩍!
두 눈에서 벼락이 치는 것 같다. 투명하고 무감한 가운데 어디서 솟아났는지 모를 흉포함으로 가득 찬 눈빛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무시무시했다.
천마신교 삼공자 서량이 아닌 살수지왕 천하진으로서.
실로 오랜만에 사신의 정체성을 끄집어낸 그의 눈에 더 이상 마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나도 일 복잡하게 돌아가는 거 싫어. 그러니 어지간한 건 참아 줄 수 있다.”
나직이 한 마디, 한 마디 읊조리는데, 흐르는 숨결을 타고 뿌연 안개가 뿜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내가 점찍은 먹잇감 앞에선 빈말이라도 참아 달라 말하지 마라.”
파지지지직!
칼날에서 타고 흐르던 붉은 번개가 손을 타고 올라오더니, 이내 전신으로 치달았다.
“진짜 일 어렵게 만들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역천의 기운을 장포처럼 뒤집어쓴 사신이다. 생명체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죽음의 공포를 자극하던 그가 이제는 비인계(非人界)의 정점이라는 지옥의 기운까지 풍겨 대고 있었다.
누군들 그 앞에서 입이나 제대로 열어 보겠는가. 삼 위장은 감히 서량을 쳐다보지 못했다.
후우웅.
위압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던 적뢰(赤雷)가 일순 사그라들었다.
서량이 홍위문을 보며 빙긋 웃었다.
“방해꾼이 끼어들어 마무리가 깔끔하지 못했구만. 사과하마.”
“……!”
“어디 보자, 유언은 없다고 했지?”
홍위문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서량이 다시 칼을 들어 올렸다.
그때였다.
움찔!
“……흐음.”
서량의 얼굴에 짜증이 묻어 나왔다. 애써 다독여 놓았던 살심이 재차 고개를 쳐들려고 한다.
“몹쓸 참견꾼들이 어찌 이리 많을꼬.”
우우웅!
그의 손등에 핏줄이 불끈불끈 돋아났다.
이번에는 내리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리치지 못했다. 거대한 기운이 쇠사슬처럼 그의 칼날을 막아선 탓이었다.
무형의 기운으로 사람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능력. 또 하나의 허공섭물(虛空攝物)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서량의 동공이 붉어졌다.
파지지지직!
이젠 완연한 번개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전까지 보여 주던 화려한 불꽃과 음습한 안개의 문양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막지 마라. 진짜 사고 난다.”
콰드득!
칼날이 훅 내려왔다.
허공을 격하고 내력의 사슬을 휘두르던 무명의 고수는 깜짝 놀랐다.
허공섭물 자체가 극에 이른 깨달음을 요구하는 기예다. 동등한 경지를 구축하지 않고선 힘으로 저항하기 힘들다.
한데 삼공자는 천부적인 괴력과 막강한 마기로 그 깨달음을 깨부수고 있었다.
우우우웅!!
더 강력해진 내력의 사슬.
이젠 팔뿐만이 아니라 몸조차 쉽게 움직일 수가 없다. 무명의 고수도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파르르르!
서량의 몸이 살짝 부풀었다. 전신의 근육을 한계까지 사용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실재하는 칼과 보이지 않는 내력의 싸움.
“……좋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제지당했다. 그렇지 않아도 활활 타오르던 살심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스르륵.
서량이 손에서 힘을 뺐다.
번갯불을 튀기며 타오르던 마기까지 수습했다. 그러니 자연스레 내력의 사슬도 흔적을 감추었다.
하지만 서량은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제대로 해볼 마음이 생겼을 뿐이었다.
지이이이잉!
실핏줄처럼 얇고 사슬처럼 기다란 번개 줄기 서너 개가 그의 몸 주변을 일렁였다.
위험천만한 기파. 터지기 직전의 폭탄을 보는 것 같다.
그것을 깨달은 무명의 고수가 재빨리 내력을 끌어 올릴 때.
콰앙!
허공에서 폭음이 울렸다.
‘흡!’
무명의 고수가 흠칫했다. 놀란 나머지 허공섭물의 기예도 펼쳐 내지 못했다.
허공에 암경(暗勁)을 폭발시켜 내력의 흐름을 방해하는 수법.
말하자면 방해기파(妨害氣波)다. 허공섭물만큼은 아니지만 그 대응 방법으론 눈이 부실 만큼 대단했다.
쐐애애액!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은 서량의 칼이 재차 홍위문을 향해 쇄도했다.
‘어딜!’
무명의 고수 또한 재차 내력을 끌어 올렸다.
순간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파아아악!
내력의 사슬이 그를 옭아매려는 순간, 서량의 몸이 사라졌다.
‘……!’
일순간 시야에서 사라져 버릴 정도로 빠른 움직임.
하지만 육안으로 놓쳤다고 당황할 실력이 아니다. 눈보다도 더 빠르고 정확한 것이 고수의 기감 아니던가.
그 기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지금 서량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어느 곳을 향해 달리고 있는지를.
‘설마?’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파지지직!
시뻘건 번갯불을 피워 내며 무지막지한 속도로 나아가는 서량.
그 길의 끝에는 자신이 있었다.
번쩍! 콰앙!
엄청난 칼바람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창고의 벽면이 휩쓸려 나갔다.
무명의 고수, 고구가 외쳤다.
“삼공자!”
훅!
서량의 신형이 고구의 전면에 섰다.
‘빠르다!’
마기의 깊이는 가히 초절정고수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실력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 고구는 서량의 무공을 그렇게 판단했다.
하지만 이 신법만큼은 다르다. 적어도 경신술에 한해서는 자신에게 뒤지지 않는 것 같았다.
서량이 칼을 휘둘렀다.
휘이이이잉!
한 번의 연환식으로 홍위문을 전투 불능, 행동 불능 상태로 만들어 버린 사신의 무공.
기본공인 단천삼도(斷天三刀)를 십이 성까지 대성해야만 입문할 수 있다는 구유인화도법(九幽靭禍刀法)이었다.
고구가 주먹을 휘둘렀다. 아무리 삼공자라지만 자칫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위협적인 도법 앞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파파파파팡!
수도 없이 울려 대는 폭음에 공기가 비명을 질렀다.
인화도법의 일장(一章), 육연지옥풍(六連地獄風)의 여섯 초식이 일수유에 펼쳐졌다.
서걱!
소매 끝자락이 잘려 날아갔다.
고작 두 치에 불과했지만 타인의 무공에 의복이 상한 것이 얼마 만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고구의 두 손이 어지럽게 움직였다. 상대를 공격하는 것이 아닌 제압하기 위한 무공이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실수였다.
구유인화도법은 다섯 장(章)으로 나뉜 도법이며, 동시에 하나의 무공이기도 했다.
초식과 초식 사이의 연결이 극도로 매끄러워 상대에게 물러날 여지를 주지 않으며, 당연히 뒤로 갈수록 그 위력이 증가한다.
후우우웅!
지옥의 칼바람이 사라진 자리를 강력한 열기가 차지했다. 서량의 칼이 화로에 넣었다 뺀 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고구의 눈이 흔들렸다.
구유인화도법 이 장(二章), 팔열지옥의 불길을 담은 종극무간도(終極無間道)가 모습을 드러냈다.
화르르르륵!
세상이 검붉게 물드는 듯했다. 사방에서 솟구치는 거대한 불기둥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착각이 일었다.
콰아앙!
멀리 날아가는 고구의 몸에서 희뿌연 연기가 일었다.
‘뜨겁다!’
내력의 방패를 극한까지 끌어 올렸기에 자상이 생기진 않았으나, 내공이 조금만 부족했어도 상처를 태우는 무자비한 칼날에 뼛조각 하나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손해는 보지 않았기에 다행이다.
혹, 다음 공격도 들어오는가?
고구가 고개를 들었을 때.
‘……!’
퍼어어엉!
폭음과 함께 사라진 서량이 홍위문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안 돼!’
자신이 허공섭물로 막을 수 없다는 걸 확신하고 나서야 죽이려 든다. 눈이 뒤집힌 서량의 목표에 대한 집착에 고구는 등골이 서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삼공자! 멈추……!”
퍼어어억!
고구의 얼굴이 굳어졌다. 당황한 삼 위장 역시 눈을 크게 떴다.
주르르륵.
찢어질 듯 부릅뜬 눈. 충격받은 얼굴로 서량을 올려다보는 홍위문의 코와 입에서 붉은 핏물이 흘러나왔다.
잠시 후.
“우웨에엑!”
한 사발의 피를 쏟아 낸 홍위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지금까지 쏟은 피도 많은데 거기서 또 대량의 선혈을 쏟아 낸 것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뭉클뭉클.
비릿한 냄새와 함께 전신에서 자색의 독기가 흘러나왔다.
숨을 몰아쉬며, 하지만 냉정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던 서량이 입을 뗐다.
“생각을 해 봤는데 말이야.”
푹!
복부를 꿰뚫은 칼이 빠져나왔다. 단전의 바로 위, 홍위문이 지금껏 모아 둔 사독의 핵(核)이 자리한 곳이었다.
“커헉!”
“차후 후련해질 걸 생각하면 널 죽이는 부담 정도야 충분히 감수할 만한데…….”
서량이 씨익 웃었다. 사람의 얼굴로 악귀보다 더 악귀 같은 표정이었다.
“그보다 더 통쾌하고 좋은 방법이 생각났지 뭐냐?”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입마에는 입마로, 절망에는 절망으로.
“너도 가졌던 모든 걸 잃어 봐야지?”
푸스스스스!
홍위문의 머리카락이 푸석푸석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완벽하게 연마되었던 그의 신체가 점차 왜소해졌다.
육체의 단련이 아니라 기공으로 근육을 유지한 그다. 사독의 핵과 단전을 깨트리자 근골에 즉각적으로 악영향이 갔다.
수년 전부터 공상으로만 무력을 키운 홍위문의 한계였다.
“당장 죽지는 않겠지만 중독 증세로 몇 년은 앓아누워야 할 거다. 물론, 몇 년 후에 몸을 고쳐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겠지.”
홍위문이 부들부들 떨며 서량을 올려다보았다.
“……여.”
“음? 뭐라고 했지?”
“차, 차라리 죽이라고!”
서량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죽음을 바란다는 그의 목소리에서 진심을 읽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 온 모든 것이 무너지는 현실을 지켜봐야 하는 심정이 얼마나 끔찍한가. 홍위문이 죽이라고 악을 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간간이 탕약을 보내 주마. 우형이 해 줄 수 있는 게 그것뿐이라 좀 미안한데?”
냉정하지만 냉혹하지 않았고 패악을 떨지언정 사악하진 않았던 서량의 변모.
퍼억!
대차게 걷어차인 홍위문이 힘없이 뒤로 넘어졌다. 정신을 잃은 그의 복부에서 미약한 핏물이 줄줄 새어 나오고 있었다.
파라라라락!
때마침 사방에서 형법당원들이 몰려들었다.
주변을 둘러본 서량이 웃으며 양손을 들었다.
“출소한 지 얼마 안 되긴 했다만 뭐…… 요번에도 마음대로들 하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