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작전을 시작하지 (1)
“그래서 넷째의 상태는?”
“무척이나 위중하옵니다. 단전이 깨지고 체내 독정이 폭발하여 지독한 중독 증상을 겪고 있습니다.
그나마 체력으로 버티고 있기는 합니다만…… 운이 좋아도 반신불수를 겨우 면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가.”
“예.”
“용케 목숨은 건졌군.”
“그렇습니다.”
이천상이 잔을 빙빙 돌렸다. 얼마 남지 않은 술이 잔을 따라 부드럽게 돌았다.
“회생 가능성은?”
“거의 무(無)에 가깝다고 혈혼각의 의원들은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나마도 오륙 년 동안은 꼼짝없이 병실에 누워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혹여 중독과 내상을 치료한다 해도 단전이 심하게 상했기에…… 본래의 상태로는 복구가 어렵다고 합니다.”
무담이 고개를 숙였다.
“당장의 회복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장의 회복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 정도면 마인으로서의 생명이 끝났다고 봐야 한다.
잔을 내려다보던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나가 보게.”
“예, 교주님.”
무담이 나가고 이천상이 잔을 전부 비웠다.
탁자에 잔을 놓은 그가 태사의에 등을 묻었다.
‘회생 불능이라?’
이전에도 제자 하나가 중태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때도 혈혼각의 의원들은 지금 넷째에게 내린 진단과 비슷한 말을 했었다.
회생 가능성은 무(無)에 가깝고, 운이 좋아 회생한들 광인이 되거나 불구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제자는 넷째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셋째였다.
‘재미있군.’
이천상의 얼굴에 얼핏 흥미가 감돌았다.
‘단번에 끝장을 내 버릴 줄 알았거늘 오히려 숨을 붙여 뒀단 말이지.’
과거, 입마에 걸리기 전의 성격이 그러했고 이후 변한 성격을 봐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겉으로는 제법 가벼워 보이지만 셋째의 영혼은 죽음(死)이란 단어가 지배하고 있었다. 죽이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앞뒤 안 가리고 죽이고 보는 놈이란 뜻이다.
그것은 형법당에서 보내온 사건 경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만약 흑조위의 삼 위장과 형법당주가 나서지 않았다면 넷째는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그 잠깐 사이, 왜 셋째는 마음을 돌렸을까?
‘고통을 주고 싶었나.’
이해한다. 셋째를 그 지경으로 만든 게 넷째였으니, 똑같이 복수해 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똑같이 만들어 주고 싶었다는 생각이라면…….’
순간 이천상은 고개를 저었다.
실망? 아니다. 셋째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실망을 안겨 줄 만한 마인이 아니었다.
‘환희원주와의 독대, 광마대주와의 싸움, 그리고 이번 형법당에서의 난투까지.’
그야말로 화려하기 짝이 없는 행보다. 요 며칠 사이, 어지간한 사람은 꿈도 꾸지 못할 사건을 몇 번이나 터트렸다.
일부러 만들라 해도 쉽게 못 만들 난장판. 중요한 건 그런 난리를 치면서 본인이 원하는 목표는 확실하게 이뤘다는 것이다.
“재미있군.”
쪼르르르.
저 멀리 술병에서 솟아오른 술이 포물선을 그리며 그의 잔을 채웠다.
이천상이 다시 잔을 들었다.
“이렇게 후계 싸움의 한 축이 무너지는가.”
홍위문.
현 적사가주의 아들로 지닌바 재능이 누구 못지않았던 아이.
언제부터였나? 총명함은 잔머리가 되었고 밝은 성격은 가면이 되었다.
넷째는 적사가의 진혈(眞血)을 이어받은 자들과 똑같이 독사처럼 음험하고 사이하게 변해 버렸다.
그래도 괜찮다. 자신의 재능을 꽃피우기만 한다면 성격이야 어떻든 무슨 상관이랴.
문제는 홍위문이 자신의 재능을 가꾸지 않았다는 것이다.
최소한은 하지만 최대한은 하지 않았다. 나이에 비해 강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래서 진 게다.’
셋째는 달랐다. 한때는 녀석도 넷째와 비슷했으나 다시 깨어난 이후 녀석은 최소한이 아닌 최대한을 추구했다.
그 작지만 큰 차이가 싸움의 승패를 결정지었던 것.
“시랑…… 셋째가 터트린 이번 한 번의 사건이 전쟁의 시작이 되려는가.”
* * *
“네?!”
“어? 네가 데리고 있던 거 아니었어?”
“저, 저는 공자님과 함께 간 줄 알고…….”
서량의 표정이 멍해졌다.
“뭐야? 그럼 이 녀석이 어디로 간…….”
그때, 저 멀리 수풀에서 앙! 하는 소리가 울렸다.
서량이 가슴을 쓸어내리고 창백했던 앵화의 얼굴은 울상이 되었다.
“휴, 저기 있었구먼.”
파다다닥.
서량을 발견한 금호가 빠르게 달음박질을 하더니 냉큼 뛰어올라 품에 안겼다.
“어허, 이놈 봐라? 무게가 제법 늘었는데?”
빈말이 아니었다. 귀여운 건 여전했지만 몸과 다리가 좀 길어졌고, 꼬리 역시 이전보다 풍성해진 것 같았다.
서량이 금호의 콧대를 살살 만졌다.
기분이 좋은 듯 금호가 갸르릉 하는 기묘한 소리를 냈다. 여전히 고양이 같은 모습이었다.
“이놈아, 걱정했더니 용케 여기저기서 잘 얻어먹고 다닌 모양이구나.”
「앙!」
“어라? 배가 좀 홀쭉하네? 안 되겠다, 일단 밥부터 먹자.”
그 많은 음식을 해치운 게 불과 조금 전인데 용케 밥 먹자는 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그걸 모르는 앵화는 냉큼 고개를 숙였다.
“식사를 차려 오겠습니다!”
“어, 조금만 차려 와도 돼. 뭣 좀 먹고 들어오는 길이라.”
“네!”
앵화가 움직이자 서량이 금호를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
“어이쿠, 편하다!”
침상 위로 벌러덩 쓰러지니 세상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대자로 뻗어 버린 서량을 주시하던 금호가 꼬리를 살랑이며 그의 얼굴 옆에 몸을 말고 엎드렸다. 털도 빗겨 주지 않았는데 모질이 한결같이 좋았다.
서량이 금호의 턱을 긁으며 말했다.
“이놈아. 다 클 때까지는 함부로 어디 나다니지 마라. 이게 사람 무서운 줄 모르고.”
골골골.
“그나저나 너 정말 여우 맞아? 고양이 아니지?”
골골골.
“신기한 녀석.”
기분이 좋은 듯 금호가 연신 손에 머리를 비벼 댔다.
익숙한 침상에서 마음 편히 여우의 턱을 긁어 주며 누워 있다 보니 몸이 나른해지고 하품이 나왔다.
“으하암……! 졸려…….”
눈꺼풀은 천근만근이요, 전신이 물먹은 솜처럼 늘어졌다.
서량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우웅.
금호의 두 눈에 오색의 광채가 일렁임과 동시에 서량의 몸에 은은한 적색 아지랑이가 일었다.
슬쩍 봐선 모를 만큼 너무나도 은은한 색이다. 불꽃처럼 화려하고 번개처럼 위압적인 암영마기 특유의 분위기가 아니었다.
만약 이 자리에 누군가가 있었다면.
인간의 한계를 뚫고 초절정의 영역에 들어선 신안(神眼)의 고수가 있다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서량의 미간에서 흘러나온 실처럼 가느다란 무형의 기가 금호의 몸뚱이와 이어져 있다는 걸.
위이이잉.
무형지기가 꼬아 놓은 실이 순식간에 굵고 풍성하게 변했다.
푸스스스.
서량의 몸에 잔존하던 탁기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위이이잉.
탁기가 뽑혀 나오자 무애공이 은연중에 극성으로 펼쳐졌다. 순식간에 방 안 공기가 청정해졌다.
금호가 다시 한번 갸르릉 하는 묘한 소리를 냈다.
후우웅.
금호의 털이 은은한 광채를 발했다. 그 빛을 타고 전신에서 넘실거리는 기운이 무척이나 상서로웠다.
잠시 후.
무형지기가 끊어지면서 금호의 서기(瑞氣)도, 서량의 적기(赤氣)도 사라졌다.
덜컹!
“공자님! 식사를…… 어머?”
“끄으응.”
서량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어, 왔어?”
“죄송해요. 주무시는 줄 모르고…….”
“아냐, 괜찮아. 나도 참, 언제 잠든 지도 모르게 쓰러져 버렸네.”
크게 하품을 한 서량이 탁자를 끌고 왔다.
“먹자.”
실로 오랜만에 이인일수(二人一獸)의 행복한 식사가 시작되었다.
금호는 정말 열심히 먹었다. 원래도 체구에 비해 많이 먹는 편이기는 했지만, 못 본 새에 식탐이 늘었는지 이전보다 거의 두 배는 먹는 듯했다.
서량이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여우도 맹수니까 육식만 해도 되겠지……?”
먹어도 너무 많이 먹으니까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이러다 나중에는 살이 쪄서 굴러다니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폭풍 같은 식사가 끝나자, 서량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앵화의 얼굴에 측은함이 담겼다.
‘힘드셨을 거야.’
그녀라고 어찌 귀가 없겠는가. 이 며칠 동안 공자님께서 제법 고초를 겪으셨다는 사실을 환희원 동기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차마 내색은 할 수 없었지만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당분간은 자리 좀 피해 드려야겠다.’
그렇게 사흘이란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서량은 완전히 잠의 노예가 되었다.
온종일 자고 일어나서 앵화가 차려 주는 밥을 먹고, 다시 잠을 잔다. 일어나면 다시 밥을 먹고, 다 먹으면 곧장 잠에 빠져들었다.
걱정하던 앵화조차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늘어지는 생활.
나흘째 접어들자 서량은 더 이상 잠의 유혹에 들지 않았다.
“끄으으응! 워, 등 아파라.”
어찌나 잠을 퍼 잤는지 몸이 오그라들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근육은 잔뜩 이완된 게, 아주 축축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어휴, 그동안 긴장이 과했나? 아주 세상모르고 푹 자 버렸…… 어?”
서량이 눈을 끔뻑였다.
“이게 뭐야?”
그가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바라보는 건 손이되, 그의 의식은 신체 곳곳을 훑고 있었다.
“몸이 왜 이렇게 쌩쌩하지?”
분명 몇 번의 전투와 불규칙한 생활로 혈도에 탁기가 낀 상태였다.
의식해서 집중해도 긴가민가할 만큼 적은 양이었지만, 무시하고 지나쳤다간 차후 수련에 문제가 되기 충분했다.
그 탁기가 모두 증발한 것도 모자라 몸 상태가 최상으로 좋아져 있었다.
‘이 정도면 며칠은 운기를 안 해도 될 정도 아닌가?’
신기하네?
서량이 감탄 어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사람은 잠이 보약…….”
……이지만 이 정도일 리는 없잖아!
사흘 동안 먹고 자고를 반복한다고 몸이 좋아지는 거면 세상에 병자가 왜 있겠는가. 하물며 기력 소모가 심했던 것도 아니었다.
우우우웅.
가볍게 암영진마공을 운용하니 마기가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 민활하게 꿈틀거렸다.
‘귀문식을 개방해서 그런가?’
지저옥관귀문식은 암영진마공의 진정한 개방이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완전하게 개방된 암영진마공은 그다음, 그리고 또 그다음의 개문(開門) 단계를 만들어 냈다.
총 다섯 층의 개문식을 가진 암영진마공.
한 층, 한 층을 뚫을 때마다 마공의 깊이가 놀랍도록 증가한다.
언제라도 열 수 있었지만 일부러 봉인해 두었던 귀문식과는 달리 나머지 네 개의 층을 개방할 열쇠는 아직 주어지지 않은 채였다.
마공에 대한 이해도가 깊어지고 성취가 증가하면 자연스레 열리게 될 각 층의 대문들.
‘하지만 개문을 했다고 이런 불가사의한 일까지 일어날 리는…….’
그때, 금호가 크게 하품을 했다.
서량은 잠시 생각을 멈추고 금호의 턱을 긁어 주었다. 기분이 좋은지 금호가 몸을 쭉 늘이며 골골거렸다.
“몸을 한번 점검할 필요가 있겠군.”
이유 모를 성장은 이유 없는 퇴보보다도 위험하다. 수십 년간 온갖 고초를 겪은 끝에 깨달은 무리(武理)였다.
“일단 몸이라도 풀어 볼까.”
서량이 연무장으로 걸어갔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뒹굴뒹굴하던 금호도 그의 뒤를 쫄래쫄래 따랐다.
‘준비는 따로 필요 없겠지.’
파아아앙!
연무장에 올라서자마자 서량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확실히 주먹에서 느껴지는 힘의 깊이가 달랐다. 속도는 반 박자 빨라졌고 파괴력도 증가한 채였다.
서량의 몸이 회전했다.
퍼퍼퍼퍼펑!
북 터지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속도를 중시한 권법이 아니었는데도 바람처럼 자유롭고 번개처럼 빠르다.
폭음과 폭음 사이의 간격이 이전보다 훨씬 좁혀졌다.
“후욱.”
너무 빠르고 격렬해서 제어하는 데 더 힘을 쓰게 된다. 익숙해지려면 시간깨나 걸릴 듯했다.
한바탕 연무로 땀을 흘린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거참 이상하네. 그런 반편이들하고 드잡이질 좀 했다고 뭔가를 얻은 건 아닐 테고.”
위홍련이든 홍위문이든 연배에 비해 놀라운 무공을 연성했다지만 서량에겐 까마득한 하수들일 뿐이었다.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하수들과 붙어서 깨달음을 얻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서량이 연신 고민을 거듭하던 와중이었다.
‘응?’
대문 쪽에서 낯익은 기파가 전해져 왔다.
강하고도 유연한 기파. 기도가 뭉근한 걸 보니 실전을 겪어 본 지 오래된 게 분명했지만, 지닌 무력 자체가 원체 뛰어났다.
적어도 전투 부대 대장 이상. 아니, 한 조직의 수장으로서도 모자람이 없는 무공.
잠시 후.
“오랜만에 뵙네요.”
서량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여긴 어쩐 일로?”
소연심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술이나 한 잔 주시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