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작전을 시작하지 (4)
“…….”
“이상, 거래 물품에 대한 설명을 마칩니다.”
깔끔하게 말을 마무리한 서량이 의자에 편히 등을 기댔다.
얼굴 가득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서량과는 달리 소연심은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듯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황당함과 당혹스러움, 일말의 후회와 진한 걱정이 배어 있었다.
“그…… 공자님.”
“말씀하십쇼.”
“다, 다시 한번 들을 수 있을까요?”
“아, 그럼요. 언제든지 다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의 요구는요.”
서량은 다시 한번 설명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소연심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니까 공자님 말씀은…….”
“예.”
“…….”
“그겁니다. 소 원주께서도 한 똑똑 하시는 걸로 아는 만큼, 다 알아들으셨을 거라 믿어요.”
언제든지 다시 설명해 줄 거라 말했으면서 선을 딱 긋는다.
물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소연심은 황당함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니까, 이번 수송대에 공자님을 끼워서 보내 달라는 말씀이신가요?”
“역시 잘 알아들으셨네요.”
“저도 공자님께서 한 똑똑 하시는 걸 알아요. 그렇죠?”
“제법 하죠.”
“그러니까 방금 말씀하셨던 요구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요구인지도 알고 계시겠죠?”
“원주께서 직접 이 일이 부탁이 아닌 거래가 맞다고 인증하셨던 것도 기억합니다.”
“…….”
“거래는 확실해야지.”
“그냥 부탁으로 끝내면 안 될까요?”
“아시겠지만 이미 배는 떠났습니다.”
“……젠장.”
그 고고한 입에서 젠장이란 말까지 나왔다. 서량의 요구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공자님. 수송대는 본원의 마인들로만 구성될 수 있어요.”
“진짜로?”
“……물론 때에 따라서 다른 조직의 마인들이 끼기도 하죠.”
“그럼 됐네.”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서요.”
“하필 이번에 그 예외가 생겼다고 생각하십쇼.”
“경우가 달라요. 공자님께선 다른 누구도 아닌 교주님의 제자시잖아요.”
“문제라도?”
소연심은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선 가슴이라도 쾅쾅 치고 싶었다.
“다른 곳도 아닌 수송대에 후계 후보가 끼었다고 하면 남들이 환희원을 어떻게 보겠냐고요! 저를 의심의 눈초리로 볼 게 분명하잖아요?!”
“전에 소 원주가 말했잖아요. 소문이 나도 무마시킬 힘이 있다고.”
“제가 언제요!”
“그런 의미의 말을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실제로 그렇잖아요?”
부인할 수 없는 말이다. 하지만 대화가 이렇게 흘러가선 안 된다.
“좋아요, 맞아요. 그 정도 능력 있어요, 저.”
“됐네, 그럼.”
“말을 끝까지 들어 주세요!”
신경이 날카로웠는지 말끝이 살짝 갈라졌다. 서량이 자라목을 했다.
“알겠습니다. 계속하십쇼.”
“아시겠지만 이건 단순한 정치적 보복이나 악소문을 조장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예요.
제가 쓸데없는 소문으로 골머리 썩는 게 귀찮아서가 아니라니까요.
자칫 잘못하면 다른 조직들도 서로 눈치 보면서 후보들에게 선을 대려 한다고요. 그럼 신교가 흔들려요!”
“설마 그렇게까지 되겠습니까?”
“다 알고 계시면서 모른 척 되묻기 있어요?”
“킁.”
“저 개인에게 문제가 생기는 거야 감수할 수 있어요. 하지만 신교가 흔들릴 수 있는 요구까지 들어드리긴 힘들어요.”
애처롭게까지 들리는 목소리였으나, 서량은 그녀를 동정하지 않았다.
“소문이 나기도 전에 무마하면 되잖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거 아시죠?”
“어차피 부탁했다가 소문이 나든 수송대로 끼었다가 소문이 나든 골머리 썩는 건 똑같지 않습니까.”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막무가내로 몰아붙이시는 건가요? 이유라도 듣고 싶네요.”
서량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그 이유에 대해선 말해줄 수 없었다.
“그냥 바깥바람 좀 쐬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십쇼.”
“본교가 얼마나 넓은지 아시잖아요. 바깥바람은 본교에서도 쐴 수 있어요.”
“산처럼 큰 어항이라고 바다만 하겠습니까.”
“물고기라고 온 바다를 다 돌진 않을 텐데요.”
“나 수영 잘하는데.”
화술 하나는 천하무적이다.
잠시 홀릴 뻔한 마음을 다잡은 소연심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이건 사안이 너무 커요.”
“그렇게 나오시깁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 차라리 저한테 십만 냥을 달라고 하셨다면 드렸을 거예요.”
“그럴 돈도 없잖습니까.”
“그만큼 공자님의 요구가 말도 안 되는 거라는 뜻이에요!”
“그럼 뭘 기대하셨습니까?”
“네?”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리고, 심지어 원주가 원하는 날짜에 맞춰 기사회생까지 시켜 준 인간이 무엇을 요구할지 걱정해 보진 않았습니까?”
“……!”
“목숨값 운운하진 않겠습니다. 별로 마음에 안 드니까. 하지만 이건 거래였습니다. 부탁이 아닌 거래가 좋다고 한 건 원주였고요.”
“…….”
“이제 와서 다른 소리 하지 마십시오.”
핏발 선 눈으로 서량을 바라보던 소연심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군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정말이지 이런 요구를 하실 거라곤 생각도 못 했네요.”
“제가 원래 톡톡 튀는 맛이 있습니다. 천성이 앙큼하죠.”
“됐고요, 일단 군사부부터 들르세요. 내일 바로 떠나야 하니 시간이 없어요.”
“군사부에는 왜요?”
“출교 허가권을 받으셔야 할 거 아니에요.”
서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그게 왜 필요하냐는 겁니다.”
“교주님께 직접 허락을 받으셔야죠. 하긴 출교를 허가받으시면 굳이 수송대와 함께하지 않아도…….”
“…….”
“…….”
“…….”
“아니죠?”
“…….”
“교주님께 허락을 받으면 수송대에 낄 필요가 없고, 군사부에서 허가권을 받으려 하면 어차피 교주님께 보고가 올라갈 테고…….
그러니까 지금 몰래 수송대에 끼워 달란 말씀은 아니시죠?”
“당연한 거 아닙니까? 제가 왜 아득바득 수송대와 함께하겠다고 소 원주 성질을 박박 긁어 댔겠습니까.”
“안 돼요!!”
소연심이 기어이 입에서 불을 뿜었다.
“교주님을 속이시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 이 요구, 못 들은 걸로 하겠어요.”
“이게 왜 교주님을 속이는 겁니까? 다른 사람 속이는 건 맞아도 교주님은 아닙니다.”
“그게 무슨 개소…… 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교주님은 애초에 제자들에게 관심이 없으시거든요. 그분은 그저 군림하실 뿐, 지배하진 않으십니다. 왜냐? 신(神)이란 그런 거니까. 원주도 알잖아요?”
“…….”
“생각해 보니 이제 이해가 가는군. 왜 자꾸 소문이 나니 마니 하나 했더니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휘하 마인 하나랑 바꿔치기하면 되잖습니까. 걸릴 일 없어요.”
“되게 편하게 말씀하시네요. 바꿔치기는 쉬운 줄 아시나요?”
“거기까지 제가 생각해야 합니까? 저는 그저 요구만 할 뿐입니다. 우리의 거래가 깔끔하게 마무리될 수 있도록 말이죠.”
“…….”
“…….”
“좋아요. 교주님을 속이는 건 아니라고 하죠. 그래도 이건 너무 무모한 짓이에요! 세상에 어떤 놈이……!”
“…….”
“죄송해요. 제가 실언을 했어요.”
“그래서 그런 거 아닙니다.”
“네?”
“바꿔치기가 쉽지 않다고 하셨지요?”
“……그런데요?”
서량이 씨익 웃었다.
“좋은 생각이 났지 뭡니까.”
* * *
스르륵. 스르륵.
한 벌, 한 벌 차례로 옷을 입는 주화의 자태는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수개월 동안 병상 신세를 졌지만 특유의 미태는 어디 가지 않았다. 피골이 상접했음에도 눈이 부신 미모였다.
옷을 다 입은 주화가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쓰지 않는 근육은 퇴화하기 마련이다. 팔다리는 물론 전신 근육, 내장근까지도 줄어들어 거동이 힘들 터.
그럼에도 주화의 자세는 꼿꼿하기만 했다. 평생 그 자세를 유지해 왔던 것처럼 누구보다도 자연스러웠다.
그녀가 가볍게 숨을 뱉었다.
“후우.”
나직이 흘러나온 숨결에 아직 가시지 않은 당황과 의아함이 맴돌았다.
‘정신을 잃은 지 보름밖에 지나지 않았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원주님께서 알려 주신 무공 구결은 무척이나 신비한 것이었다. 요상에 능하다는 그 무공을 익히자 입마로 초토화된 몸이 눈에 띄게 회복되었다.
하지만 빨라 봤자 석 달을 예상했다. 물론 석 달 만에 완치가 된다는 것도 엄청나게 놀라운 일이었다.
설마 보름도 안 되어 완쾌될 줄이야.
입마로 뒤집힌 몸이 정상이 되었으니 이제 예전의 무위를 되찾는 것도 가능하다. 제법 시간이 걸리겠지만 많은 시간을 요하는 것도 아니었다.
주화입마라는 증상이 주는 절망.
그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다가 소생한 기분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꾸욱.
빼빼 마른 손을 꽉 쥐었다. 예전과 같은 힘은 느껴지지 않는 대신, 강한 의지가 타올랐다.
‘빨리 회복을 해야겠어.’
운용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보름 만에 나았는지는 둘째다. 몇 달 동안 누워만 있었으니 쌓인 업무가 한두 개가 아닐 터였다.
‘어서 복귀해야지.’
깨어난 지 반나절도 되지 않았음에도 의지를 다잡는 것을 보면 확실히 보통이 아니었다.
그녀가 한참 미래를 생각하던 와중이었다.
“들어가도 되겠소?”
주화는 깜짝 놀랐다. 누군가가 문에 접근한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아.’
어쩔 수 없다. 어그러진 단전이 멀쩡해졌지만 아직 기감이 서진 않았다.
주화가 입을 열었다.
“누구신지요?”
“의원 비슷한 거요.”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원이면 의원이지 의원 비슷한 건 또 뭘까?
드르륵.
그녀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문이 열렸다.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자신과 동년배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다부진 골격과 훤칠한 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가 눈을 즐겁게 하는 미청년이었다.
미청년,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벌써 그리 움직일 수 있다니 강골은 강골이군.”
주화의 눈이 깊어졌다.
‘고수?!’
기감은 무뎌졌어도 안목은 그대로다. 흐르는 듯한 걸음걸이와 미동도 없는 어깨선, 맑은 두 눈은 그가 내외로 단련된 고수라는 걸 증명했다.
“근육은 제법 빠졌어도 원체 심폐 기능이 뛰어났던 터라 체력에 문제가 되진 않을 것 같소.”
“누구시죠?”
“말했잖소. 의원 비슷한 거라고.”
“당신의 직업을 묻는 게 아니라 정체를 묻는 거예요.”
“정체라…… 그거야 뭐, 원주한테 듣도록 하시고.”
“……?”
“아, 이렇게 설명하면 되겠군. 그대가 입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소 원주에게 무공 구결을 건네준 사람이오.”
순간 주화의 눈이 커졌다.
“……그 요상결의 원주인이라는 건가요?”
“그렇소.”
주화는 당황했다.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지를 불사를 정도로 강단 있는 그녀였지만 자신을 낫게 해 준 사람과 바로 맞닥뜨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천천히 일어난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은혜에 감사드려요.”
서량의 눈이 반짝였다.
“누군지도 모르는데 내 말을 믿는 거요?”
“고개 한 번 숙이는 게 대단한 일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이곳은 환희원이에요. 수상한 사람이 들어올 수 있을 만한 곳은 아니지요.”
서량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보통이 아니군.’
상황 판단이 빠르다. 강단 넘치는 성정이라고는 들었지만 어느 정도 유연함까지 갖고 있다.
“소 원주가 입이 마르도록 칭찬한 이유가 있었군.”
주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제아무리 은인이라지만 소연심을 함부로 부르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음, 좋아. 운공으로 진기를 살리고 한나절 동안 몸 좀 풀면 여행에 문제는 없겠어.”
“……그게 무슨 말씀이죠?”
그때, 문이 열리고 소연심이 들어왔다. 설마 서량이 먼저 들어가 있을 줄은 몰랐기에 그녀의 얼굴은 당황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서량이 소연심을 보며 씨익 웃었다.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상탭니다. 같이 가도 되겠는데요?”
“공자님, 정말…….”
“빨리 확인을 해야 소 원주도 편할 거 아닙니까.”
소연심이 입술을 깨물었다.
서량이 일어났다.
“며칠 떨어져 있는 것보다 옆에서 하루하루 운공을 돕는 게 더 낫습니다. 차라리 주 총관에게도 좋을 일이라니까요?”
이게 대체 무슨 대화인가?
당황한 주화가 소연심을 바라볼 때.
“주 총관.”
“……네?”
“내일 떠날 테니 몸 관리 잘하시오.”
“떠, 떠나다니 어딜?”
서량이 씨익 웃었다.
“글쎄? 자유가 살아 숨 쉬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