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냄새를 맡은 자들 (3)
정일룡(鄭溢龍).
서른이라는 늦은 나이에 강호에 출두한 그는 사천에서 이 년 만에 두각을 드러내고 곧바로 의천맹에 초빙된 고수였다.
의천맹에선 그를 극진히 대접했고, 이후 승승장구한 그는 무려 마흔 중반의 나이에 맹의 장로가 되었다.
의천맹 역사를 봐도 오십 전에 장로가 된 사람은 몇 없었다. 그것은 실력과는 다른 문제로, 그의 정치적 수완이 무척 뛰어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렇게 차근차근 실력을 키워 간 그는 이내 환갑의 나이 때 모든 장로의 위에서 군림하는 대장로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지나치게 날뛴 감이 있었다. 맹주를 꼭두각시로 세워 두고 본인이 실세가 되려 한 그의 욕망을 의천맹주는 진즉에 간파하고 있었다.
결국 의천맹주의 치졸하고 사악하며 노련하기까지 한 공작에 정일룡은 맹주의 말만 듣는 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간 저질렀던 온갖 비리의 증좌들을 맹주가 하나씩 빼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맹주가 그를 대장로가 될 때까지 놔둔 이유이기도 했다. 정일룡에게만 목줄을 채우면 모든 장로를 자신의 휘하에 둘 수 있으니까.
‘그 빌어먹을 놈이 여기에 있다고?’
서량은 떠올렸다. 생(生)의 마지막, 자신의 오른 다리를 무자비한 칼질로 날려 버렸던 놈의 얼굴을.
그 눈치 빠른 노괴는 결코 손해 보는 짓을 하지 않았다. 일신의 안위가 걸린 일이라면 제 손자 손녀까지도 팔아먹을 인면수심의 쓰레기였다.
이레 밤낮을 꼬박 쫓겨 다니고, 오만 상처를 입었을 때도 제 앞에 나타나지 않은 이유였다.
비요왕과의 접전으로 치명상을 입자 비로소 나타나 칼을 휘둘렀다.
‘그런 놈에게 내 다리가 썰렸단 말이지.’
서신을 쏘아보는 서량의 눈에서 칼날이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우우웅.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살기 앞에 숲이 침묵했다.
‘정일룡……!’
풍채 당당한 체격에 잡티 하나 용납하지 않는 순백의 복색. 미염공(美髥公)이란 수식어가 부족하지 않을 만큼 잘 다듬어진 수염.
마주한 적이 많진 않았지만 얼굴에 주름이 몇 개인지도 똑똑히 기억했다. 맑은 눈에 어울리지 않는 탐욕과 일그러진 표정까지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스스스스.
차가운 살기는 뜨거운 광기가 되어 몸을 불살랐다. 분노로 머리가 하얗게 세는 것 같았다.
“……!”
사지를 갈가리 찢어서 개 먹이로 주고 싶다.
“……님! ……자님!”
도주고 뭐가 당장 그놈부터 잡아 족치고 싶었다. 그간 자신이 배운 모든 살법, 고문술을 쏟아붓고 싶었다.
제발 죽여 달란 말이 나올 만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다.
찌이이익.
서량의 눈이 점점 날카롭게 변해 갔다. 마치 마귀의 찢어진 눈을 보는 것 같았다.
그때, 낮고 둔중한 목소리가 울렸다.
“공자님!”
서량이 퍼뜩 놀라 마동필을 보았다.
마동필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마는 식은땀으로 흥건했고 어깨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너 왜……?”
순간 서량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무식하게 뻗어 나가는 자신의 살기를 마동필이 혼신을 다해 막고 있었던 것이다.
스르륵.
서량이 애써 살기를 수습하자 마동필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다. 내가 실수했어.”
“후욱. 아닙니다.”
“괜찮으냐?”
“물론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동필은 내심 깜짝 놀랐다.
‘엄청나시구나.’
개미가 어찌 창공을 노니는 매의 발톱을 볼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마동필은 서량의 실력을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다.
‘내가 잘못 알고 있었어. 이런 무시무시한…….’
불타는 살기를 기파로 둘러싸는 것만으로 내상을 입을 뻔했다. 저 농밀한 살기가 폭발했다면 정말 내상을 입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또 하나 놀란 점.
‘의천맹을 증오하신다. 그것도 엄청나게.’
지난 일 년 동안 모르고 있었던 감정이다. 마도 무림의 총본산인 신교의 마인이니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공자님의 증오는 정도를 넘어선 것 같았다.
“그 외에 다른 사람은? 다른 정보는 또 없었어?”
“없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대장로씩이나 되는 신분이라면 보통 일은 아니겠지요. 그쪽에서도 나름 철저하게 정보 통제를 하는 모양입니다.”
“그렇겠지.”
예전부터 그랬다. 어느 정도 힘을 모았다고 생각한 의천맹주는 세력을 더 불리는 것보다 더 빠르고 정확한 정보력을 갖추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다.
강북에서는 의천맹, 강남에서는 천마신교.
둘 사이의 정보력은 각자의 영역에서 독보적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방대함에선 의천맹이, 정교함에선 천마신교가 뛰어나다고 볼 수 있었다.
‘의천맹주 그 늙은이는 내 마지막 의뢰로 천마와 총군사, 대호법을 노렸다.’
그 말인즉슨, 천마신교만 와해시킨다면 천하를 손아귀에 쥘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그만한 힘을 구축했다고 생각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실패했지.’
살왕을 향한 의천맹주의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이 천마신교의 주요 인사 셋을 암살할 수 있을 거라 믿었는지도 모른다.
실상 그중 하나만 없애도 천마신교는 흔들린다. 그리고 전력의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는 천마신교의 빈틈을, 의천맹은 결코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은 실패했다.
살왕이라 불리던 서량, 그의 느닷없는 탈출로 인해서.
‘그러고 일 년이 지난 지금, 정일룡이 강서로 들어왔다. 당연히 혼자서만 오진 않았을 터.’
왜일까? 그놈이 강서 인근으로 온 이유는?
“공자님.”
“응?”
무뚝뚝한 마동필의 얼굴에 은근한 걱정의 빛이 어렸다.
“괜찮으십니까?”
“……그래.”
서량이 그에게 서신을 도로 건넸다.
“수송대가 언제 출발하지?”
“명일 아침에 출발한다고 합니다.”
생각보다 오래 쉬고 출발한다. 아마도 함께 가는 환자를 배려하는 모양이었다.
“알겠다. 너도 좀 쉬어라.”
“아, 예.”
서량이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
물끄러미 그의 등을 보던 마동필이 재차 그를 불렀다.
“공자님.”
“왜? 할 말 더 있냐?”
“아닙니다. 그저…….”
마동필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그의 웃음도 제법 자연스러워 보였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서량도 미소를 지었다.
“나도 반갑다.”
반가운데, 그 반가움에 젖어 웃고 떠들 수 있는 상황은 아니네.
마차 안으로 돌아온 서량은 아무런 말 없이 창가 옆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정일룡.’
두근!
심장박동이 거세졌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의 농도가 훨씬 짙어진 것 같았다.
‘온다고? 네놈이?’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손등 위에 불거진 핏줄이 터질 듯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젠장.’
갑자기 맥이 탁 풀려 버렸다.
그는 힘없이 이마를 짚었다.
‘병신같이……. 그놈이 이 근처에 있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왜 자꾸 그놈에게 신경을 쓰는 거냐?’
내 목적이 뭐였어? 도주잖아? 자유잖아?
과거의 인생을 버리면서 살왕이란 이름도 함께 버렸다. 괘씸하고 화가 나도 지금에 와서 굳이 그놈을 잡아 죽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강호에서 벗어난 삶. 여전히 구질구질한 진흙탕이지만 무림(武林)이란 개념이 없는 동네로 떠나 편하게 살고자 하지 않았던가?
그 화려한 꿈을 위해 신교에서 나가려는 것이다.
신교에서만 나간다면 거칠 것이 없다. 중원 곳곳에 마련해 두었던 안가들을 찾아가서 무공을 되찾고, 밑천 두둑이 챙겨 새외로 뜨는 거다.
그렇게만 되면…… 수십 년 동안 바라 마지않던 진정한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 내 목적을 잊지 말자. 내 꿈을 버리지 말자.’
계획대로 실천하며 살아가도 삐끗하면 작살나는 게 인생이란 것이다. 한순간의 감정에 휘둘리면 행복한 삶은 그만큼 멀어져 가는 법이었다.
바보처럼, 뭣도 모르는 아이처럼 굴지 말자.
정일룡? 막말로 의천맹주가 앞에 있어도 모른 척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어야 한다.
제 죽음에 큰 영향을 끼친 놈이라 한들 그냥 묻어 버리고 내 갈 길만 가면 된다.
그래, 그러자.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내 꿈을 위해서 살아가자. 괜히 지금 날뛰어 봤자 나중에 또 후회한다니까?
‘제길.’
두근두근!
시간이 지날수록 심장이 강하게 뛰었다. 머리로는 이게 아닌 걸 알지만 몸이 먼저 반응해 버린다.
‘죽이고 싶다.’
질끈 감은 눈에서 불그스름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이 눈을 뜨면 놈이 있는 곳으로 혼자서 뛰쳐나갈 것만 같았다.
‘갈가리 찢어 죽이고 싶어.’
누군가가 귓가에 대고 진하게 유혹하는 것 같았다.
웃고 싶으면 웃어. 울고 싶으면 울어.
그리고 죽이고 싶으면 죽여라.
그저 네 마음 가는 대로 살면 되는 거야.
“흡!”
우우우웅!
치솟는 마기. 뱃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암영마기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 세상 밖으로 토해지려는 듯했다.
주화의 눈이 흔들렸다.
“공자님?!”
말도 없이 들어와서 생각에 잠기더니, 갑자기 심상치 않은 마기를 피워 낸다. 어떻게든 억눌러서 마차 밖으로 새어 나가진 않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이다.
그때, 푸르르 소리를 내며 자던 금호가 눈을 번쩍 떴다.
사박사박.
재빨리 일어난 금호가 서량의 무릎 위로 올라갔다.
우웅.
동시에 폭발할 것 같은 서량의 마기가 잠잠해졌다.
“헉!”
서량이 눈을 떴다. 어느새 동공을 가득 메웠던 붉은 광채는 사라지고 없었다.
주르륵.
이마에서 흐르는 식은땀이 잠시간 심력 소모가 엄청났다는 걸 방증했다.
“공자님, 괜찮으신가요?”
서량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정신도 없었다.
금호를 내려다보던 그의 눈이 흔들렸다.
‘너냐.’
금호가 혀로 서량의 코를 핥았다.
스르륵.
잠시 후, 분노로 타오르던 마기가 완전히 잠잠해졌다.
“후우.”
그가 금호를 안아 들고 쓰다듬었다. 기분 좋은지 고로롱 소리를 내던 금호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공자님…….”
“주 총관.”
“네? 아, 네!”
“몸은 좀 어떠시오? 운공은 해 보았소?”
“괘, 괜찮습니다. 일말의 탁기까지 모조리 배출되었어요. 모두 공자님 덕분입니다.”
“맥문을.”
주화가 조심스럽게 손목을 걷었다.
서량이 그녀의 맥문을 쥐었다.
“음, 확실히 괜찮아졌군. 앞으로 이삼일만 더 도우면 월음마공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소.”
“감사합니다.”
“말이 나온 김에 다시 치료 시작합시다.”
조심스레 금호를 내려놓은 서량의 눈은 조금 충혈되어 있었다.
* * *
연이가 힐끔 뒤를 바라보았다.
지난 아흐레 동안 끊임없이 움직인 수송대는 벌써 강서 인근까지 도달해 있었다.
시일이 급박했다면 여유를 부리며 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중간에 주화의 상태가 굉장히 호전되어서, 굳이 여유롭게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열흘의 기간 중 하루를 줄일 수 있었다.
연이가 마동필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아직 귀환이 남아 있소. 서로 인사는 그때 하도록 합시다.”
무뚝뚝하지만 담백함이 묻어 나오는 말이다. 연이가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져갈 물품이 많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그렇소?”
“예?”
“……아니오.”
마동필의 얼굴에 은근한 걱정이 깃들었다.
가져갈 물품이 많지 않다는 것은 그만큼 귀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보물에는 언제나 파리가 꼬이기 마련이다.
어떤 간 큰 놈이 신교의 물품을 노리겠느냐마는, 마지막까지 방심은 금물이었다.
“그나저나 척후조로 보낸 놈들은 어찌 이리 늑장을 부리는지.”
연이가 혀를 찼다. 호법 삼 조는 오직 수송대를 호위하는 이들이다. 척후조는 당연히 수송대에서 뽑은 인원들이었다.
사실 말이 척후조지 미리 가서 길을 열어 놓으라고 보낸 거나 다름없었다.
“아무래도 지형이 지형인 만큼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오.”
“그래도 이틀이나 먼저 보내지 않았습니까. 원래 이리 늑장을 부리는 아이들이 아닌데…….”
괜히 호법원의 호위들이 보고 있다 생각하니 민망했던 모양이다. 연이가 헛기침을 하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음, 저기 오는…….”
순간 연이의 눈이 커졌다.
파아앙!
말을 박찬 마동필이 순식간에 돌아오는 척후조에게 다가갔다.
“쿨럭!”
“괜찮으시오? 이보시오!”
“사, 삼 조장님?”
“어떻게 된 거요? 인원이 왜 반이나 줄었소? 그리고 이 피는……?”
“큰일 났습니다! 인계 지점에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싸움?! 도대체 어떤 놈들이!”
“모르겠습니다! 저희도 여파에 휩쓸려 후퇴 중입니다! 적들 중 대단한 고수가 한 명……!”
끼이익.
가장 후방에 있던 마차의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