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냄새를 맡은 자들 (4)
딸칵.
상자를 닫은 흰 수염의 노인, 정일룡이 옅은 미소를 베어 물었다.
“상당하구려.”
“허허, 만족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음? 무슨 말씀이시오?”
“……?”
“상당하다고 했지 만족했다 말한 적은 없소만.”
청수문주(淸水門主) 호양(浩壤)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가 활짝 미소를 지었다.
“아,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저 멀리 서역(西域)에서 들인 최고급 융단을 준비했다는 걸 깜빡했습니다.”
“그렇소?”
“아랫것들을 시켜 가져오게 할 터이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차 한 잔 더 하시겠습니까?”
“좋소.”
쓸데없이 시원시원한 늙은이 같으니.
속으로는 있는 욕, 없는 욕을 해 댔지만 호양의 미소는 갈수록 환해졌다. 강호에서 살아가려면 속내를 들키지 않는 기술이 필수였다.
잠시 후, 두 사람의 찻잔에 다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 수고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허허, 수고랄 것까지야 있겠소? 그저 아랫것들이 끌어 주는 마차에 앉아 세상 구경 좀 했을 뿐이오.”
“대장로님께서 보시는 세상은 어떠셨습니까? 제법 괜찮아 보였습니까?”
“세상이 혼탁한 거야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지. 날씨가 다소 추웠으나 이곳 남부로 오면 올수록 따스해지더이다.”
뇌물 받아먹을 생각에 가슴이 들떠서 그랬겠지.
호양이 환하게 웃었다.
“확실히 북부는 춥지요. 몸에 두르는 용도는 아니지만 집무를 보시는 데에 서역의 융단이 제법 도움이 될 것입니다.”
“허허, 문주의 호의를 내 어찌 가벼이 여기겠소. 이 차도 예사 물건이 아니구려.”
“역시 알아보시는군요. 대장로님께 드리기 위해 특별히 공수한 용정차입니다.”
“서호용정(西湖龍井)이라? 천금을 들여도 구하기 어렵다는 것을.”
“귀인께서 오시는데 천금이 아니라 만금을 들여서라도 구해야지요.”
“허허.”
“하하!”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두 사람.
한쪽은 뇌물을 받아먹기 위해 온 사람이요, 다른 한 사람은 잘 보이기 위해 고개를 조아리는 사람이다.
각자의 입장이 명백히 달랐지만 겉으로는 화기애애한 친구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나저나 어떻소? 이곳 강서는 살 만하더이까?”
호양이 바로 한숨을 내쉬었다.
“강서성이야 원체 좋은 땅이지만 땅이 좋다고 어찌 웃고 떠들 수만 있겠습니까. 시국이 시국인지라 이런저런 일로 고달픕니다.”
“시국이라 함은?”
“마교도 놈들의 축제가 코앞이 아니겠습니까. 그 축제 같지도 않은 축제의 이름까진 모르겠습니다만.”
“파순제를 말씀하시는 게로군.”
“아, 그렇습니다.”
“파순제는 마교도들에게 있어 최고의 행사지. 각지에서 온갖 귀물을 끌어모으기 위해 여기저기 들쑤신다는 소문은 들었소.”
“이를 말입니까. 그 강도 같은 놈들 때문에 무척이나 어수선한 실정입니다.”
정일룡이 잔잔히 웃었다. 새하얀 복색에 허연 수염을 잘 정리한 그의 모습은 신선을 방불케 했다.
“호 문주께서 고생이 많으시구려. 이제 지천명(知天命)을 넘기셨는데 슬슬 이쪽 일 마무리하고 올라오셔야지.”
순간 호양은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을 느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북부가 춥다 한들 외로운 산골 동네만 하겠소이까. 이런저런 사람들과 부둥켜 살다 보면 북부도 제법 괜찮은 동네외다.”
“하하! 역시 제 마음을 헤아려 주시는 분은 대장로님밖에 없습니다.
근래 들어 속만 시끄럽고 만사가 귀찮았거늘, 새로운 활력이 될 곳으로 간다면야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호양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만들어 낸 웃음이 아니라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이다.
의천맹 본단으로 들어가기 위해 바친 뇌물이 얼마던가. 문파의 기둥뿌리 몇 개는 뽑았을 것이다.
그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당연히 기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하인이 푸른 비단으로 잘 묶인 붉은빛 융단을 가져왔다.
슬그머니 융단을 본 정일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역에서 구할 수 있는 최상품임을 알아본 것이다.
“내 본단으로 돌아가면 상부에 귀띔을 해 놓으리다. 문파를 운영한 연륜은 충분하나 맹은 또 새로운 환경인 만큼, 내전에 적당한 자리 하나 봐 두겠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장로님.”
정일룡의 뒤에 시립하고 있던 무사가 상자와 융단을 챙겼다.
“그럼 난 이만 일어나 보리다.”
“바로 맹으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아니오. 예 온 것도 몇 년이나 찾아뵙지 못한 모친을 뵈려고 온 게요. 남쪽으로 이백 리만 더 내려가면 된다오.”
호양의 얼굴에 걱정이 깃들었다.
“대장로님의 무공이 입신의 경지에 들었다는 것이야 누가 모르겠습니까마는, 조심하십시오.
혹여 간악한 마교도들이 대장로님의 옷이라도 더럽힐까 싶어 저어됩니다.”
“허허, 내 나이는 먹었어도 아직 현역이오. 마교주가 찾아와도 호통쳐서 쫓을 테니 호 문주는 걱정일랑 마시오.”
무사가 든 융단을 힐끔 쳐다본 정일룡이 짙은 미소를 지었다.
“뭐, 별일이야 있겠소?”
* * *
상자들을 모두 열어 본 초로인, 오경화(吳璟畵)의 눈이 번뜩였다.
“흐음.”
상자 안에 가득 쌓인 물건들.
오경화는 의아했다.
“하나같이 희귀한 약재들이군. 천금을 들여도 쉽게 구하기 힘든 것들이기는 해. 한데…… 이 시국에 뭣 하러 이것들을 대량으로 구하려 들까.”
파순제가 가깝다고는 하지만 그 제사를 빙자한 축제에 이런 물건들이 필요한가?
‘희귀하기만 하지 영약으로 만들 만한 약재들도 아니다. 이거 냄새가 나는데.’
오경화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그런 것까지 상관할 필요는 없겠지.”
상부에서 받은 명령은 이 목표지를 타격하여 마교로 들어갈 물품을 모조리 강탈하라는 것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임무였지만 이왕지사 해치운 거 쓸데없는 고민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상자를 모두 닫은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만 정리하…… 쯧쯧, 저 짐승 놈들이 또.”
푸화악! 콰득! 콰드득!
시커먼 그림자들이 시체들을 마구 물어뜯고 있었다.
사방에는 피가 낭자했고 한때는 사람이었던 조각난 시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마음 약한 사람이 본다면 즉시 졸도할 만큼 끔찍한 광경이었다.
오경화의 얼굴에 혐오의 기색이 드리워졌다.
“적당히라는 걸 모르지. 그래서 너희가 싫은 것이다. 성은 왜 저따위 것들과 연수를 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어.”
그때, 곽사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보고드립니다.”
“…….”
“생존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물건들도 모두 회수했으니 떠나기 전 이곳을 불사르기만 하면 됩니다.”
“봐서 안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우리 애들은?”
“경상자가 셋이지만 중상자나 사망자는 없습니다.”
오경화가 얼굴을 찌푸렸다.
“경상자가 셋이나 된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이 밥버러지 같은 놈들! 뭐 얼마나 강한 놈들이었다고 경상씩이나 입은 게야?”
하여간 마음에 안 든다. 이 임무도, 동행해야 할 짐승들도, 그리고 같잖은 실력의 마인들에게 긁힌 부하들도 모두 싫었다.
그중 가장 싫은 건 역시나 이곳에 한바탕 화려하게 붙어 볼 만한 실력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마교도 다 됐군. 아무리 수송에 불과하다지만 나름 귀물이랍시고 수송대까지 보냈으면서 전력이 이게 뭔가?’
그나마 뒤이어 난입했던 다섯 정도는 쓸 만했지만 그게 전부다. 일류라 불릴 실력은 되지만 손가락 몇 번 까딱하면 모조리 황천길로 보낼 만한 것들이었다.
“일부러 보내 준 놈들 숫자가 몇이나 된다고 했더냐?”
“네다섯쯤 됩니다. 너무 멀어서 정확한 확인은 못 했습니다.”
“무능력한 놈. 됐으니 애들 불러서 이거 다 챙겨라. 슬슬 뜰 준비해.”
“예.”
“그리고 너.”
“말씀하십시오.”
짝!
곽사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뺨을 어찌나 호되게 맞았는지 눈앞이 핑핑 돌았다.
“아까 저 짐승들에게 말을 걸더군.”
“쿨럭!”
“무슨 얘기를 했는지 알고 싶지도 않다. 다만 내가 저놈들을 얼마나 혐오하는지 알고는 있겠지?”
“…….”
“네 목줄은 내가 쥐고 있느니라. 개면 개답게 고개 바짝 숙이고 있어.
주제넘게 저놈들과 접촉하지도 말고, 내 허락 없이 누군가를 증오하지도 마라. 넌 그냥 내 꼭두각시라고 생각하면 되는 게야. 알겠느냐?”
“예.”
“좋다, 가 봐.”
안 그래도 짜증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이 주제도 모르는 놈에게 화를 푸니 제법 진정이 되는 기분이었다.
“물건 옮기고, 다른 귀중품은 없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해라.”
“명을 받듭니다.”
곽사가 비틀거리며 움직였다. 단순히 뺨을 때린 게 아니라 내공까지 실어서 가격한 일격이었으니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 것이다.
오경화가 코웃음을 쳤다.
‘앞으로 잘 조련해야겠군.’
있는 대로 짜증을 부리긴 했지만 잘 다루면 나름 큰 도움이 될 놈이다. 놈의 머리는 군사도 인정하지 않았던가.
그때, 그의 뒤로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으.”
오경화가 고개를 돌렸다. 구석진 곳, 함몰된 벽에 파묻힌 시체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가 발로 대충 돌을 걷어찼다.
퍼석! 퍼억! 쿠르릉!
부서지고 날아간 돌덩이들 사이, 피범벅이 된 마인 하나가 퉁퉁 부은 눈으로 오경화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경화가 히죽 웃었다.
“어허? 참으로 질긴 놈이구먼. 네놈, 내 장력에 맞아 떨어져 나갔던 아까 그놈 아니더냐?”
“이…….”
“녹색 무복이라…… 외전 소속은 아닌 것 같고. 내전 소속 마인이더냐?”
“쿨럭! 커헉!”
밭은기침을 내뱉을 때마다 핏방울이 튀었다. 아직 죽진 않았지만, 곧 죽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우우웅.
일순간 마인의 눈빛이 또렷해졌다. 회광반조의 현상이었다.
“……마신께서 너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오경화가 피식 웃었다.
“참으로 웃긴 놈들이야. 어떻게 모실 신이 없어서 마신을 다 섬긴단 말이냐. 하여튼 마교 놈들은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니란 말이지.”
꾸욱.
그의 발이 마인의 목을 눌렀다.
“그리 마신을 좋아한다면 모두 죽어서 마신의 곁으로 가지 그러냐?”
“끄르륵.”
“죽을 용기가 없나? 내가 도와주지.”
콰득!
마인의 목이 그대로 부러졌다. 부릅뜬 눈은 회색빛으로 물들고 혀는 축 늘어져 턱밑까지 내려와 덜렁거렸다.
“너희가 믿는 마신이 실재한다면 어디 한번 저승에서 빌어 봐라. 원통함에 사무치니 날 좀 죽여 달라고 말이야.”
죽은 마인을 비웃던 오경화가 몸을 돌렸다.
잠시 후, 시커먼 그림자들이 죽은 마인의 시체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콰드득! 푸화악!
* * *
주화의 눈이 흔들렸다.
“……끔찍하군요.”
연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마동필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그들은 시커멓게 탄 건물을 보고 있었다. 부서진 벽 사이로 삐죽 나온 팔과 다리는 짐승에게 뜯어 먹히기라도 한 듯 뼈가 드러나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총관님.”
“임시 대장께선 대원들을 시켜 이곳의 잔해를 치우라 하세요.”
“알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연이가 마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주화가 팔을 걷어붙였다.
“총관님은 쉬시지요.”
“아니에요.”
이러한 참상을 목도했는데 언감생심 어찌 쉴 수 있겠는가.
하지만 연이는 진실로 걱정되었다. 연일과 함께 소연심의 심복인만큼, 그는 주화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입마에서 벗어나신 지 얼마 안 되지 않으셨습니까. 아직 무리하시면…….”
쩌저저적!
“……!”
주화가 주워 든 돌멩이에 순식간에 허연 서리가 끼었다. 월음마공의 한기(寒氣)가 집약된 결과였다.
“이미 상당 부분 무공을 되찾았어요. 더 이상 저를 환자로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시작하죠.”
수송대 마인들과 주화가 건물 잔해들을 치웠다. 호법 삼 조 오십 명의 마인들은 주변으로 흩어져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했다.
주변을 둘러보던 마동필이 후미의 마차로 다가갔다.
“공자님.”
“동필이냐.”
순간 마동필이 흠칫했다. 마차 안에서 들려오는 공자님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섬뜩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현재 인계 지점에 대기 중인 마인들이 모두…….”
“동필아.”
“예, 공자님.”
덜컥!
마차의 문이 열리고 서량이 내렸다.
그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크게 숨을 들이쉬는 그의 눈이 점점 충혈되었다.
“묵직한 칼 좀 한 자루 빌려 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