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마귀가 나온 줄 모르고 문을 닫았다 (2)
정일룡이 피식 웃었다.
“아군이면 손을 잡고 적군이면 때려 부순다? 그것참 통쾌한 말이로고.”
“…….”
“이보게, 오 단주.”
오경화의 눈은 여전히 휘둥그레 뜨여 있었다. 불신으로 얼룩진 얼굴에 더 이상 상대에 대한 호의는 엿보이지 않았다.
정일룡의 미소가 짙어졌다.
“누가 아군이고 적군인지부터 제대로 파악을 해야 손을 잡든 싸우든 할 게 아닌가.
자네처럼 뭣도 모르고 날뛰다간 지금처럼 엄한 사람 손에 목이 달아나는 걸세.”
그가 손을 아무렇게나 휘둘렀다.
툭! 투두둑.
오경화의 수급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율랑의 발치에서 멈추었다.
“그것도 애들 먹이로 줄 텐가?”
“괜찮소. 애들도 가릴 건 가린다오.”
“허허, 그렇겠지.”
퍽!
오경화의 수급이 저 멀리 떨어진 바위에 날아가 부딪혔다.
정일룡이 고개를 돌렸다.
“후우, 자네가 데려온 늑대들 식성은 정말 굉장하군.”
“먹는 것 전부가 수왕대법(獸王大法)을 통해 영양분이 되오.”
“이제 막바지라고 했나?”
“그렇소.”
“허! 무림의 칼잡이들을 상대로도 우위를 점하는 짐승들이라니, 정말 대단하네.”
두 사람이 바라보는 곳은 피바다가 되어 있었다.
오경화가 데리고 온 철위단 오십 명이 쏟아 낸 피였다. 거의 모든 시체가 짐승에게 뜯어 먹힌 것처럼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처참한 시체들 사이에 서른 마리의 늑대들이 엎드려 서로의 털을 핥아 주고 있었다.
오경화가 말했던 짐승들이란 말은 비유가 아니라 실제였다. 율랑이 데려온 야수궁의 전력은 사람이 아니라 진짜 늑대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평범한 늑대는 아니었다.
한 마리, 한 마리의 크기가 송아지만 하다. 피가 묻어서 그런 게 아니라 원래 그런 듯, 털도 피처럼 시뻘겠다.
자연적으로 성장한 늑대들이 아니었다. 한 마리, 한 마리가 뿜어내는 존재감이 여느 절정고수들 못지않게 대단했다.
정일룡이 고개를 저었다.
“듣도 보도 못한 사술이학(邪術異學)이 천지에 널렸다더니만 과연.”
“수왕대법은 사술이학 따위가 아니오. 사람이 심법을 통해 내공을 익히는 것처럼, 짐승들에게 강제적으로 내공을 익히게 하는 것과 같소.”
“제어는 잘되는가?”
“물론이오.”
율랑이 늑대 한 마리에게 손짓했다. 붉은 늑대들 중 가장 몸집이 작은 늑대였다. 그마저도 어지간한 호랑이 크기였지만.
스륵.
자리에서 일어난 늑대가 율랑에게 다가가 그의 허벅지에 머리를 비볐다.
정일룡은 감탄했다.
“손짓만으로도 알아듣는단 말인가?”
“그렇소. 상단(上丹)의 영(靈)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섬세한 명령도 가능하오.”
“……짐승을 전력으로 삼는다기에 그게 가능한지 의아했거늘, 이 정도면 나도 탐이 나는군.”
아무리 강한 짐승이라도 전력으로 삼기 힘든 이유는 단 하나, 통제가 안 되기 때문이다.
설령 통제된다 한들 사람처럼 이성을 갖고 알아듣는 건 불가능하다. 복잡한 전술이나 공방을 이해하고 적시에 전선에 뛰어드는 짐승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이 늑대들은 그게 가능하다.
절정고수만큼 강하고 피부와 이빨이 강철보다 단단한 이놈들이라면 중소 문파 하나를 몰살하는 데 반 시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마인의 피는?”
“충분히 삼키게 해 두었소.”
“효과가 있던가?”
“아직 모르오. 근처에 마인이 없으니까. 하지만 마기(魔氣)를 품은 자들이 반경 십 리 안에 있다면 충분히 알아챌 수 있을 것이오.”
정일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모로 사람보다 낫군. 부럽네.”
“…….”
“그리고 고맙다는 얘기를 하고 싶네. 철혈성이 아닌 나와 손잡아 준 것 말이야.”
율랑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수염도, 눈썹도 없는 얼굴에 드리워진 미소가 어딘지 모르게 섬뜩했다.
“대우를 해 주는 쪽과 손을 잡는 건 당연하오. 예전부터 저들은 우리를 그저 짐승으로만 보았지.”
“허허.”
“한데…….”
율랑이 힐끔 옆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부러진 나무 밑동 앞에 거친 숨을 몰아쉬는 중년 사내 한 명이 있었다. 전신이 온통 피범벅이었지만 다행히 목숨을 잃지는 않은 듯했다.
그는 바로 철위단의 부단주 곽사였다.
“저놈은 왜 남겨 둔 거요?”
“데려가 볼 생각이네.”
“아는 자요?”
“모르네. 다만 저항하던 철위단에서 유독 겉돌더군. 칼질도 어설프고. 해서 물어보니 철혈성의 뇌옥에 갇혔다가 얼마 전 부단주가 되었다 하네.”
“그게 죽이는 데 문제가 되오?”
“문제 될 건 없지만, 궁금하지 않나? 뇌옥에 갇힌 중죄인이 어찌 부단주가 되었는지 말이야.”
“…….”
“허허, 뭐 그런 이유도 있고. 이 나이가 되도록 정치판에 굴러다니다 보면 딱 봐도 감이 오는 게 있지.
내 장담컨대 저놈, 철혈성에 대해 뭔가 아는 것이 분명하네.”
율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또 다른 의문이 생긴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놈에게 건네받은 금낭은 또 무엇이오?”
“음? 아, 화신보옥 말인가?”
“그렇소.”
“자네는 알 것 없네. 그저 이렇게만 알아 두게. 나와 자네들이 대업을 이루는 데에 요긴하게 쓰일 만한 보물이라는 것.”
순간 율랑의 눈에 형형한 광채가 일었다.
“의천맹주에게 쓸 참이오?”
정일룡이 웃으면서 검지를 입 앞에 가져다 대었다.
율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없는 야산이지만 혹시라도 말이 새어 나갈 수 있는 것을 염두에 두라는 뜻이었다.
“궁주께서는?”
“다행히 차도가 있으시오. 조만간 자리를 털고 일어나실 것 같소.”
“천만다행이군.”
“당신이 가져다준 그 약이 효과가…… 음?”
율랑의 귀가 움찔거렸다.
“왜 그러나?”
“잠시.”
그가 남서쪽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한가로이 엎드려 털을 핥고 있던 늑대들이 모두 일어나 형형한 안광을 밝혔다. 엎드려 있을 때는 그나마 순한 인상이었는데, 일어나 살기를 발하니 실로 흉흉했다.
스르륵.
가장 작은 늑대, 혈랑대주(血狼隊主)가 고개를 하늘로 쳐들었다.
우우우우!!
혈랑대주가 울음을 터트리자 나머지 스물아홉 마리의 늑대들도 제각기 울어 댔다.
피에 젖은 땅 위로 송아지만 한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자 가히 지옥을 연상시켰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늑대들의 흉성을 자극하는지 울음소리가 갈수록 커졌다.
율랑이 손을 들었다.
동시에 혈랑대주를 위시한 모든 늑대가 울음을 멈추었다.
“마인들이오.”
“마인?”
“그렇소. 숫자는 정확히 모르지만 얼추 백이 조금 안 되는 것 같소.”
“호오. 자네도 마인들의 피 맛을 본 모양이구먼.”
“아니오. 혈랑대주가 알려 주었소.”
정일룡의 얼굴에 사악한 웃음이 드리워졌다.
“뭐가 되었든 참으로 신통한 능력일세. 그래, 놈들의 수준은 어떠한가? 철위대 오십과 비교하면 말일세.”
“숫자도 숫자지만…… 상당한 놈들이 끼어 있소.”
“늑대들의 전력과 비교해 보자면 어떠한가?”
율랑이 정일룡을 돌아보았다. 그 푸른 눈에 강한 자신감이 깃들어 있었다.
정일룡이 뒷짐을 졌다.
“제대로 한번 보여 주겠는가? 이번엔 나도, 자네도 참전하지 말도록 하세.”
“시간은 괜찮은 거요?”
“오늘 밤을 넘겨도 상관없네.”
율랑이 다시 몸을 돌렸다.
스스스스.
그의 몸에서 강력한 기파가 흘러나왔다.
“석양이 지기 전에 끝날 것이오.”
* * *
마동필의 눈이 흔들렸다.
‘대단하다.’
피이잉! 피이이잉!
박차고 나아가는 주화의 신법은 굉장했다.
속도가 대단한 건 아니었다. 아직 그녀는 삼분지 일밖에 회복되지 않았으니까.
진짜 대단한 것은 회복세에 있었다.
‘분명 주화입마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된 몸이라고 하였다. 한데 저 움직임은…….’
자신이 본 사람 중 가장 수준 높은 신법을 구사한 사람은 호법원주 무담이었고, 가장 기상천외한 신법을 보여 준 사람은 서량이었다.
주화의 신법은 그들과 전혀 달랐다. 물론 높은 수준이었지만 호법원주와 비교할 수는 없었고, 기교가 뛰어났지만 서량이 보여 준 것과는 차이가 명백했다.
하지만 아름다웠다.
딛고 나아가는 발끝이 만들어 내는 섬세하고 완벽한 동작이 눈부시다.
차근차근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거리를 이동하는 움직임은 신법의 모범이라 봐도 손색이 없었다.
단순히 무공의 수준이 높다고 보여 줄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지난 세월 무공을 익혀 오며, 단 한 번도 요령을 부리지 않고 충실히 기본을 연마한 흔적이 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피를 토하며 연마했을 것이다. 정통 마공을 정석으로 익힌 마동필조차 저토록 깔끔한 동작은 보여 줄 자신이 없었다.
파악!
마동필이 주화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주화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괜찮으시오?”
“괜찮아요.”
“시시각각 실력이 되살아나는 것 같소. 하지만 더 이상 무리하면 결정적인 순간에 위험할 수 있소.”
“괜찮아요.”
“마차에서 쉬란 권유는 않겠소. 말이라도 타는 게 어떻겠소?”
“정말 괜찮아요. 힘들면 제가 알아서 쉬도록 하죠.”
신법을 펼치는 와중에도 여유롭게 대화를 한다. 이 정도면 힘들긴 해도 정말 괜찮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그건 마동필의 착각이었다.
주화는 단순히 괜찮은 정도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름다워지는 신법처럼, 무서운 속도로 이전의 무공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파아악! 파아아악!
아름다운 동작에 힘까지 붙었다. 주화의 속도가 한층 빨라져, 이젠 명마(名馬)를 탄 호법 삼 조보다도 더 선두에 서게 되었다.
‘이거다.’
주화의 눈에 은은한 희열이 담겼다.
‘이렇게 하면 돼.’
무공을 되찾아 가는 속도가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그것은 그녀의 재능이 월음마공과 잘 어우러졌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간 그녀의 노력이 대단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회복세였다.
그녀가 이리 빠르게 회복할 수 있는 진정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삼공자님의 마기.’
농축된 서량의 마기는 암영진마공의 정수를 담고 있었다.
암영진마공은 불사르고 파괴하며 끝없이 전진하는 마공이다. 매 순간 변화를 추구하니 자연히 정(靜)보다는 동(動)에 치중되어 있었다.
뜀박질조차 부담이 될 정도로 피폐하다면 모를까, 움직일 수 있다면 움직이는 게 좋은 것. 자연스레 월음마공도 그에 동조해 불같은 회복세를 보였다.
스르르륵.
이마에 맺힌 땀이 허옇게 얼어붙었다가 부서져 날아갔다. 월음마기가 자연스레 일어나며 미세한 불순물까지 제거하려 드는 것이다.
‘된다.’
삼분지 일에서 절반으로.
‘돼!’
절반에서 삼분지 이로.
오십 리 길을 주파하면서 얻은 기적 같은 회복이었다. 단전의 마기도, 활용력도 칠 할 이상 회복되었다.
주화의 얼굴이 잔뜩 상기되었다.
‘이 기세라면 곧……!’
그때였다.
우우우우!!
주화와 마동필의 눈이 번뜩였다.
“모두 정지!”
말도, 사람도 워낙 빠르게 달리는 도중이었다. 서서히 속도를 줄인 일행은 거의 백오십여 장을 더 이동하고서야 멈출 수 있었다.
마동필이 주화 옆으로 다가왔다.
“느꼈소?”
“네. 마기는 아니에요.”
“그렇소, 마기는 아니지만…….”
“무척 흉포해요.”
스르륵.
두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언덕에서 엄청난 덩치의 사내가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내, 율랑이 말했다.
“물어뜯어라.”
파아아악!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좌우에서 거대한 그림자들이 들이닥쳤다.
마동필이 외쳤다.
“산개!”
차아아아앙!
제각기 병장기를 뽑아 든 삼 조의 호법들이 그림자들을 공격했다.
* * *
“……!”
서량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건?”
피바다가 된 야산 정상.
심하게 훼손된 시체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대체 어떤 짐승들이 뜯어 먹었는지 살점은 절반 이상 사라졌고, 씹다 버린 뼈만 보일 정도였다.
들끓던 마기조차 차갑게 식는 듯했다. 마기는 피 냄새에 더욱 날뛰라 말하지만, 이성이 강렬하게 그것을 억제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곧, 이성과 감정의 일치를 얻어 낼 만한 흔적을 읽었다.
“얼마 되지 않았어. 아마도 이각 전…… 응?”
사아아악!
마기와 살기가 앞을 다투며 일어났다.
스르륵.
낮은 바위를 쓸어내리니 그곳에서 신기(神氣)의 흔적이 읽힌다.
사공의 대가인 비요왕이 그의 암영기에서 구파 무공의 흔적을 읽었던 것처럼.
마공의 궁극에 달한 이천상이 그의 마공에서 불가 무학의 흔적을 잡아냈던 것처럼.
서량도 읽어 낼 수 있었다. 스러져 가는 흔적 속에서 번뜩이는 정파 무공 특유의 진기를.
미염검선이라 불리며 만인의 찬사를 받는 초고수, 정일룡의 흔적을.
파지지지직!
서서히 저물어 가는 하루, 붉게 물든 하늘 아래 피처럼 붉은 번개가 무자비한 살해 욕구를 토해 냈다.
스르륵.
전신의 털이 곤두섰다. 차갑게 식었던 마기가 이전보다 배는 과격하게 들끓었다.
누군가가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듯했다.
“죽여.”
콰아아앙!
거대한 붉은 번개가 무서운 속도로 야산을 타고 내려갔다.
파아악!
은밀한 황금빛 광채 역시 그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