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마귀가 나온 줄 모르고 문을 닫았다 (5)
마동필의 얼굴에 놀라움과 감격이 깃들었다.
“공자님!”
서량은 그를 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저 먼 언덕 위를 향하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새하얀 의복. 소매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한가득이었으며, 손에는 은은한 보광(寶光)이 흐르는 장검이 들려 있었다.
“정일룡.”
드디어 만나는 의천맹의 대장로.
탐욕으로 얼룩진 눈을 빛내며 자신의 오른 다리를 날려 버렸던 죽일 놈이 저기에 있다.
파지지직! 번쩍!
의식하지 않아도 마기가 들끓었다.
머리카락이 절로 일어선다. 상대를 향한 분노에 눈 밑이 화끈거렸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놈을 난도질하고 싶었다.
철컥!
서량이 칼을 뽑아 들고는 정일룡을 향해 겨누었다. 길이만 다섯 자에 두께도 어지간한 박도의 서너 배는 됨직한 칼은 엄청난 박력을 풍겼다.
칼끝에서 뿜어지는 살의는 단 하나의 의지를 부르짖고 있었다.
‘기다려라.’
정일룡의 얼굴이 시시각각 굳어졌다.
율랑이 눈살을 찌푸렸다.
“마인인가.”
위압적인 번갯불을 피워 내는 청년.
억지로 억누른 살기 때문일까, 아니면 너무 젊은 외모 탓일까. 율랑은 그가 위험하지만 형세에 영향을 줄 정도의 상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르겠지만 너 역시 마인이라면…….”
퍼어억!
율랑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이 새끼들 뭐야? 뭐가 이렇게 단단해?”
서량이 왼손으로 오른손 팔목을 주물렀다. 까딱이는 손을 따라 큼직한 칼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리고 그 칼에는 시뻘건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순식간에 후방으로 이동한 그가 혈랑 하나의 목을 날려 버린 것이다.
마동필이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쓰러진 주화는 물론 수송대와 호법들도 놀라서 입을 벌렸다.
‘어, 어떻게?’
저 붉은 늑대들의 몸은 강철의 강도를 자랑한다. 칼질로도 긁힌 상처 하나 내기 힘든 괴물들인 것이다.
아니, 애초에 절정고수도 상대하기 벅찬 놈들 아니던가.
그런 늑대의 목을 일도(一刀)에 날려 버리다니? 중병(重兵)이라지만 이게 가능한 일인가?
하지만 그들의 놀라움이 어찌 율랑만 할 것인가.
“……이게?”
두 눈을 빤히 뜨고 있었는데도 어떻게 움직였는지 보지 못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지만 수왕대법으로 연마된 혈랑의 목을 너무도 수월하게 날렸다.
‘고수!’
끼이이잉.
혈랑들이 고개를 푹 숙이며 뒷걸음질을 쳤다.
이것도 놀라운 일이다. 명령을 내렸으면 불바다에도 뛰어드는 놈들이 겁을 먹고 물러나고 있는 것이다.
서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몸만 컸지 그냥 개구만.”
틀렸다. 혈랑은 동료가 죽었다고 겁을 먹는 생물이 아니었다. 게다가 율랑과 영적으로 소통하고 있지 않은가. 고로 서량에게 겁을 먹은 건 아니었다.
스르르륵.
어느새 서량의 발치에서 나타난 한 마리의 여우.
은은한 금빛 광채를 자랑하며 늑대들을 보는 금호의 눈이 오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평소의 귀여움은 어디로 갔는지, 몸뚱이만 한 꼬리를 살랑이며 주위를 훑는 금호에게서 굉장한 위엄이 느껴졌다. 사람조차 오금이 저릴 기세였다.
부웅.
서량이 칼을 역수로 쥐었다.
“어쨌든 그냥 놔둘 순 없겠지.”
파지지지직!
칼날을 타고 흐르는 붉은 광채.
퍼뜩 놀란 율랑이 움직였다.
“이놈!”
파아아악!
율랑이 서량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지만 이미 서량의 손을 떠난 칼은 고속으로 회전하며 혈랑들에게 날아가고 있었다.
퍼버버버벅!
큼직한 늑대 대가리 열 개가 하늘로 치솟았다. 단천삼도(斷天三刀)의 마지막 초식, 선풍열산(旋風裂散)이었다.
파앙!
동시에 율랑의 주먹이 서량의 얼굴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서량이 코웃음을 쳤다.
빠각!
“큭!”
율랑이 좌측으로 주르륵 물러났다.
‘무겁다!’
발길질 한 방에 그 커다란 몸이 일 장이나 옆으로 밀려 났다. 본능적으로 방어하지 않았다면 우측 갈비뼈가 모조리 바스러졌을 것이다.
철컥!
열 마리의 목을 날린 칼이 다시 서량에게 돌아왔다.
부르르르.
혈랑들이 몸을 떨었다.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얌전히들 있어라.”
부아아앙!
다시 회전하며 날아가는 거도.
이번에도 율랑은 그 매정한 공격을 막지 못했다.
푸화아악!
쏟아지는 핏물이 사방을 적시고, 머리를 잃은 몸통들이 우르르 쓰러진다.
두 번의 초식으로 무려 스무 마리가 넘는 혈랑들이 생을 마감했다. 방금까지 팔십이 넘는 마인들을 몰아붙인 괴물들이라곤 생각하기 어려웠다.
허무하기 짝이 없는 죽음.
파지지직!
서량의 몸에서 다시 한번 번개가 번뜩였다.
살기 때문이 아니라 과도한 내공 소모 때문에 마기가 튀는 것이다. 두 초식 만에 스무 마리가 넘는 혈랑을 죽이는 것은 아무리 그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살다 살다 별 희한한 괴물들을 다 보는군.”
서량이 율랑에게 시선을 돌렸다.
율랑이 움찔했다. 두 번의 도초와 한 번의 발길질로 충분히 자신의 강함을 증명한 상대다. 섣불리 덤벼들기가 힘들었다.
“근데 넌 뭐냐? 겁나 크네.”
“…….”
“하긴, 어차피 죽일 놈과 통성명해서 뭐 하겠어.”
시큰둥한 것도, 비웃는 것도 아니다. 마치 밤에 땔 장작이나 쪼개자는 듯 무척이나 담담한 기색이었다.
사람의 자존심을 갈가리 찢어 버리는 그 나른한 여유.
“……감히.”
사아아악!
율랑의 몸에서 짐승의 노린내가 흘렀다. 실제 짐승에게서나 느껴질 법한 원초적인 흉포함은 덤이었다.
그의 눈이 번뜩였다.
번쩍!
살아남은 한 마리, 혈랑대주가 서량의 후방을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뛰어들었다. 혈랑대주를 미끼로 삼아 빈틈을 만들고 공격을 감행할 생각인 것이다.
그때, 금호의 콧잔등에 살벌한 주름이 잡혔다.
「카아아앙!!」
“크악!”
“헉!”
“으아아악!”
일대의 모든 마인이 귀를 부여잡고 몸을 수그렸다.
낭랑하게, 그리고 폭발적으로 퍼져 나가는 금호의 포효.
콰드득!
아가리를 벌리며 뛰어들던 혈랑대주가 그대로 눈을 까뒤집고 고꾸라졌다. 어찌나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던지 바닥을 구르자마자 앞다리 두 개가 부러졌다.
스르륵.
혈랑대주 앞으로 걸어간 금호가 제자리에 앉아 콧방귀를 뀌었다. 요신(妖神)이라고까지 불리던 진짜 영물의 자존심을 지킨 것이다.
주르륵.
율랑의 입술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저도 모르게 깨물어 버린 것이다.
‘저 짐승은?’
서량의 존재감이 너무 대단해서 지금에야 인지했다. 인지하고 나니 말도 안 되는 충격이 전해져 왔다.
금호가 율랑을 바라보았다.
움찔!
율랑이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오색으로 빛나는 한 쌍의 눈은 짐승의 영역을 한참이나 뛰어넘은 신(神)의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보통 짐승이 아니다. 아니, 그저 짐승의 탈을 썼을 뿐 짐승이 아니야.’
율랑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영물?!’
떠들어 대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의 입에서나 회자되는 진짜 영물이다. 신화와 전설에서 온갖 조화를 일으키는 신수(神獸)이자 마수(魔獸)가 분명했다.
‘저런 영물이 실재했단 말인가.’
짐승과 교감을 하는 걸 넘어서 지배하고 개량하여 반쯤 영물에 가까운 존재로까지 만들어 낸 야수궁.
그런 야수궁의 어떤 짐승들과도 비교가 안 된다.
당대 궁주와 교감하는 호왕(虎王)조차 초라하게 느껴진다. 하물며 저 여우는 이제 새끼에 불과할 뿐이지 않은가.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역시 보통 여우가 아니었구만.”
생명체라면 종을 불문하고 오금이 저릴 금호의 포효에도 그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가 강해서가 아니라, 금호와 기(氣)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뭐, 이건 나중에 얘기해 보도록 하고.”
치이이익!
거도에서 허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자, 너까지 마저 치우고…….”
“누구냐.”
“뭐?”
율랑이 버럭 외쳤다.
“도대체 네놈의 정체가 뭐냐! 뭔데 저런 괴물과 함께 다니는 거지?!”
포효에 가까운 외침이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서량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통성명 안 하겠다고 했다.”
파아아악!
단번에 율랑에게 뛰어드는 서량.
과도한 내공 소모로 이전과 같은 속도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무학의 수준과 타오르는 살기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다가오는 것 자체가 위협이요, 공포다.
율랑이 다시 한번 소리쳤다.
“이노옴!”
팍!
똑같이 마주 달려가는 율랑의 주먹에서 흉악한 진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사람 몸통만 한 거도(巨刀)와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거권(巨拳)이 작렬했다.
콰앙!
강한 폭음과 함께 율랑이 비척거리며 물러났다.
주먹에 제법 깊은 도상(刀傷)이 새겨졌다. 주먹에서부터 팔꿈치, 어깨까지 타고 올라오는 충격에 전신이 삐걱거렸다.
곧바로 치고 나가려던 율랑은 순간 발목에서부터 올라오는 통증에 움찔했다. 충격이 하체까지 전달된 것이다.
‘이!’
힘으로는 패웅(覇熊)의 지파를 제외하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자부했는데 오산이었다. 이건 내공이나 실력이 아니라 순전히 힘에서 밀린 것이다.
부웅!
율랑이 고개를 들었다.
충격을 받은 자신과는 달리 상대는 전혀 힘든 기색 없이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곧장 거대한 칼을 내리치고 있었다.
율랑이 쌍장을 뿌렸다. 기합성을 내지를 틈도 없었다.
콰쾅!
그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일격이었다.
파악!
피를 토하며 물러나는 율랑의 눈에 어느새 코앞까지 따라붙은 서량의 모습이 보였다.
‘이, 이……!’
어떻게 된 종자가 숨도 안 쉬고 싸우는 것 같다.
‘흡!’
쾅!
발로 땅을 박아 몸을 지탱한 것만으로도 내상을 입었다. 그만큼 충격이 크다는 뜻이었으며, 그렇게라도 해야 상대를 막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몸을 세운 율랑이 곧바로 주먹을 휘둘렀다.
휘이이잉!
거대한 주먹으로 공기가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율랑이 가장 자신 있게 펼칠 수 있는 권법, 남랑신권(南狼神拳)이었다.
서량의 눈이 번뜩였다.
파바바박!
율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남랑신권의 권풍(拳風)이 쏘아지기도 전에 서량의 몸이 유령처럼 흩어졌다. 구천축지신보가 발현된 것이다.
콰앙!
강력한 권풍에 대지가 움푹 파였다.
‘어디?!’
퍼억!
율랑의 입이 떡 벌어졌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발길질 한 방에 허리가 반으로 접혔다. 사지에서 힘이 쭉 빠지고 단전까지 마비가 된 것 같았다.
척.
묵직한 칼날이 그의 목덜미에 닿았다.
“이제야 기억났다. 짐승을 부리는 신비한 문파, 중원의 대문파들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은 새외 최강의 세력 중 하나.”
서량이 씨익 웃었다.
“남만야수궁이라…… 하긴, 나랑은 별 상관없지.”
“쿨럭!”
“잘 가라.”
비정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율랑이 다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잠시만 기다려 보라고,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서량의 칼질은 그가 내뱉은 말처럼 비정했다.
서걱! 푸화아악!
떨어진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일격에 주화를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고 단숨에 전장을 휘어잡은 야수궁의 후계 후보였던 율랑의 허무한 최후였다.
그 자신이 자랑하는 천랑안(天狼眼)이란 술법은 써 보지도 못한 채였다.
천마신교의 후계 후보와 야수궁의 후계 후보 간의 싸움.
결과는 너무나도 쉽게 드러났다. 마치 이것이야말로 두 집단의 수준을 말해 주는 것이라는 듯 서량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당연하게도 서량은 이 싸움에 어떠한 감흥도 없었다. 마동필이 죽을 뻔했기에 끼어들어 싹 쓸어 버렸을 뿐, 애초에 그의 목적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마동필이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공…….”
순간 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서량은 이번에도 그를 보지 않았다.
그의 눈은 오로지 한 곳, 저 언덕 위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한 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마동필이 서량에게 처음으로 섬뜩함을 느꼈던 그때의 그 흉포한, 아니 그때보다 훨씬 악랄하고 뜨거워진 사신의 마안(魔眼)으로.
노려본다. 숱한 원수 중 하나를.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살기, 일렁이는 마기, 그리고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기파.
“정일룡!!”
압도적인 분노가 서린 외침이었다. 언덕 위에 선 정일룡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허연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 서량의 얼굴에 마귀의 환상이 스쳐 지나갔다.
지저옥관의 귀문을 다시 닫았지만, 열었을 때 뛰쳐나온 마귀가 여전히 그의 위엄 속에 녹아들어 있었던 것이다.
“오래 기다렸다, 이 개새끼야!”
콰아앙!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격렬한 서량의 질주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