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허무하다 (1)
“그래서 어땠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요?”
“하하, 아시면서.”
“……?”
“그렇게 의뭉 떠시는 겁니까? 원주님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장점 중 하나가 가감 없이 솔직하다는 건데, 드디어 장점 하나를 버릴 작정이군요.”
소연심이 한숨을 쉬었다.
“예전에도 이런 말씀을 드린 것 같은데요. 뜬금없이 대화의 주제를 돌려 버리면 상대가 당황해요.”
“음?”
“더하여 돌린 대화의 주제가 뭔지 제대로 얘기도 안 하시잖아요.”
“오?”
“어쨌든 그간 어찌 지냈냐는 둥 하는 안부 인사가 지겨워지셨다는 건 알았어요. 그래서, 어땠냐는 게 무슨 말씀이죠?”
“아?”
“…….”
“예에. 뭐, 듣고 보니 제가 조금 뜬금없긴 했군요.”
조금이 아닐 텐데.
소연심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겉으로만 보면 참 말끔한 사람인데 가끔 사람을 힘들게 할 때가 있다.
‘하긴, 어떻게 보면 가끔이라고 하기도 어렵지.’
천마신교에서 교주는 신과 동급이다.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까다롭지는 않다. 교주는 까다로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믿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소연심은 지금 신교에서 가장 까다롭고, 어쩌면 가장 두려울 수도 있는 사람과 대면 중이었다.
“삼공자 말입니다.”
“…….”
“어떠셨습니까? 근래 제법 자주 만나지 않으셨습니까?”
소연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알고 계셨나요?”
“아하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 총군사라는 자리가 원체 취밋거리를 찾기 힘든 일이다 보니, 요새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귀를 열고 있거든요.
이런 거 듣고 저런 거 흘리면서 살아가고 있지요. 제법 쏠쏠한 재미가 있습니다.”
잘도 속없이 깔깔 웃어 댄다. 실제로 즐거워하는 건지, 그런 척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물끄러미 중년 문사를 바라보던 소연심이 차를 홀짝였다.
“차는 마음에 드십니까?”
“차종은 안 가리는 편이에요. 한데 굴송차도 드시는 줄 몰랐군요.”
“요새 맛을 좀 들였습니다. 처음엔 왜 마시는가 싶었는데, 마시다 보니 제법 괜찮더군요.”
“자기 전에 마시면 괜찮죠.”
“안타깝게도 잘 일이 별로 없군요.”
잠시 시무룩해하던 문사가 이내 히죽 웃었다.
“그래서, 삼공자는 어땠습니까?”
“집요하시네요.”
“암요. 냉혹한 폭군! 교내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도살자! 그리 불리셨던 분이 근래에는 많이 달라진 모습을 보여 주고 있잖습니까.”
“……용케 그런 불손한 언사를 뱉으시는군요.”
“뭐 어떻습니까? 없는 자리에선 황족을 욕해도 무죄라지 않습니까.”
“그건 죄인데요.”
“아닐걸요?”
“맞아요.”
“아니면 어떻고 맞으면 어떻습니까? 어쨌든 삼공자는 어떠셨어요? 대화할 맛이 제법 나나 보죠?”
“대화할 맛이 나니까 자주 뵙고 그러죠.”
“크핫! 이거 참 흥미롭습니다그려.”
“뭐가 그리 흥미로우시죠?”
“흥미로울 수밖에요. 어지간해선 마음을 열지 않기로 유명한 원주께서 삼공자와 모종의 거래도 하실 만큼 가까워지신 거 아닙니까?”
“……!”
“흐음, 한번 사석에서 뵙고 싶긴 하네.”
소연심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어떻게 아셨죠?”
그녀는 굳이 문사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이다.
아니,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문사가 피식 웃었다.
“어떻게 아는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제겐 그것도 중요하군요.”
“글쎄요. 진짜 중요한 것은 중립을 지키는 환희원이 앞으로 삼공자에게 어느 정도의 지원을 할까, 라는 거 아니겠습니까.”
“확실히 말해 두겠는데, 환희원은 후계들 간의 정쟁(政爭)에 끼어들지 않을 겁니다.”
“원주 개인은 끼어들 수 있다는 여지는 남겨 두시는군요.”
소연심의 눈이 가늘어졌다. 평정심을 유지하는 데에 능한 그녀도 제법 화가 난 것이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귀하께서 상관하실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환희원은 신교에서 재무 행정을 담당한다. 살림, 즉 자금을 휘두르는 집단이니만큼 실권이 막강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그렇다면 군사부는 어떨까.
군사부는 말 그대로 보안, 교방(敎防)을 담당한다.
한 조직의 군사력이 집중된 집단은 당연히 힘이 강할 수밖에 없다.
특히 약육강식을 미덕으로 삼는 천마신교에서 군사부가 차지하는 위상은 엄청난 것이었고, 어떤 조직보다도 강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군사부라도 환희원을 함부로 할 수 없다. 자금이 엮인 일이라면 교주를 제외한 모두가 환희원의 결재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사부의 수장과 환희원의 수장, 두 사람 간의 대화는 대체로 평온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를 공격해 봤자 남는 건 상처뿐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소연심의 반응은 상당히 이례적이라 볼 수 있었다.
중년 문사, 호요성이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또 소 원주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모양이로군요.”
“네, 상당히 불편하네요.”
“아하하, 사과드리지요. 아시잖습니까? 제 입으로 말하기는 좀 뭣하지만 제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라는 거. 덕분에 간간이 오해도 사고요.”
호요성이 깍지를 꼈다. 여유로운 미소는 여전했지만 이전보다 한층 진지한 기색이 느껴졌다.
“원주 말이 맞습니다. 딱히 제가 관여할 문제는 아니지요.
그럴 권한이 있다 해도, 소 원주가 얼마나 본교를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어요. 공사 양면으로 믿음이 있다, 이겁니다.”
“알아주시니 감사하군요.”
“그래서 궁금해졌습니다.”
“뭐가요?”
“이렇게 충성심 높고 주관이 뚜렷하신 소 원주께서 어찌하여 제게 말 한마디 없이 삼공자를 교외로 내보내셨을까?”
순간 찻잔을 쥔 소연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호요성이 고개를 저었다.
“바라건대, 협박이나 비꼬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아 주십시오.
또한 본교의 규율과 체계를 무시한 원주를 형법당에 보내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것이다.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이리 대화를 나누기도 전에 소연심은 형법당에 소환되었을 테니까.
“순수한 호기심이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지요. 정확히 보셨습니다.”
“왜 그렇게 삼공자에 대해 궁금해하시지요?”
호요성이 익살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호기심입니다. 정말로요.”
소연심이 호요성의 얼굴을 살폈다. 진심인지 파악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들여다봐도 알 수가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사람 보는 눈 하나만큼은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그녀의 눈에도 모호한 사람 중 하나가 바로 호요성이었다.
“딱히 드릴 말씀이 없군요.”
“흐음.”
“직접 뵙지 않고서는 그분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 힘들어요. 물론 사람이 다 그렇지만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입니까?”
“…….”
호요성이 히죽 웃었다. 방금까지 보여 주던 약간의 진지함마저 버린, 처음 봤을 때 그대로의 장난기가 드러나는 웃음이었다.
“더더욱 흥미롭군요. 원주께서 그리 말씀하시는 건 처음 봅니다.”
“그런가요.”
“예.”
“어차피 원하실 때 얼마든지 보실…….”
“그래서 한번 보려고요. 삼공자께서 귀교하시면 차라도 한 잔 대접해 드리려 합니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소연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보단의 한 해 예산은 말씀하신 날짜 전에 보내 드리도록 하죠.”
“역시 시원시원하셔.”
“앞으로도 군사부와의 충돌은 없었으면 하네요.”
서로가 각자의 영역에서 할 일이나 제대로 하자는 뜻이었다.
호요성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를 말입니까. 저라고 어찌 환희원과 척을 지고 싶겠습니까. 저, 이래 봬도 평화주의자입니다.”
소연심이 고개를 숙였다.
“그럼.”
다소 급한 마무리였다. 호요성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소연심이 나가자 그는 턱을 괴었다.
“흐음, 이거 진짜 궁금해지는데.”
소연심의 저런 반응은 처음 보았다. 더 자극하지 말자는 생각에 총관 얘기를 안 한 게 다행이었다.
물론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다. 소연심은 개인적인 불쾌함을 공적인 업무에 투영할 만큼 바보가 아니었으니까.
“입마에서 빠져나온 후 급속도로 성장해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 주고 있는 후계 후보라?”
호요성의 미소가 짙어졌다.
마치 악동과도 같은 그 미소 속에 어떤 괴물이 도사리고 있는지는 이천상을 제외하곤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래서 투덜거리면서도 총군사 짓을 해 먹는 거지. 한 번씩 지루하다 싶을 때면 꼭 흥미진진한 일이 생겨요.”
그가 남은 차를 모두 비웠다.
“자, 그럼 내 흥밋거리가 오기 전에 남은 일을 전부 처리해 볼까!”
목덜미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소연심과의 대화 이후, 호요성은 모처럼 신교 생활이 다시 재미나졌다.
* * *
파지지지직!
한 줄기 붉은 번개가 대지를 가로지른다 싶더니, 순식간에 언덕을 내달렸다. 경사가 워낙 가팔라서 거의 절벽 위로 날아가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파앙!
언덕 끝을 밟고 허공으로 날아오른 서량.
공중에 뜬 서량과 언덕에 서 있는 정일룡의 눈빛이 불꽃을 튀기며 부딪쳤다.
“으하하하!!”
서량이 광소를 터트렸다.
가까이서 상대를 보자 분노가 더 거세졌고, 통제하지 못할 정도의 분노는 웃음을 유발했다. 서량의 웃음은 그래서 섬뜩했다.
정일룡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디서 저런 마인이?’
후웅!
생각을 이어 갈 시간이 없었다. 서서히 하강하던 젊은 마인의 속도가 갑자기 빨라졌다.
파아앙!
정일룡의 눈이 커졌다.
허공에서 진기를 터트려 한순간 폭발적인 속도를 자아낸다. 어지간한 고수는 흉내도 못 낼 상승의 신법이었다.
서량이 거도를 휘둘렀다.
콰앙! 쩌저저적!
땅에 이 장이나 되는 도흔(刀痕)이 생겼다. 쩍 벌어진 땅 주변으로 거미줄 같은 금이 갔다.
절묘한 보법으로 서량의 칼을 피해 낸 정일룡의 얼굴에 순수한 놀라움이 어렸다.
‘이놈?’
얼마나 무시무시한 힘으로 휘둘렀으면 이런 흔적이 나오는가. 의천맹에서도 이 정도 도력(刀力)을 뽐내는 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서량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래, 한칼에 뒈지면 내가 너무 섭섭하지!”
‘섭섭?’
뭐지? 날 아는 놈인가?
퍼어엉!
말을 걸 새도 없다.
그만한 일격을 날렸음에도 숨 한번 고르지 않고 치고 들어오는데 전신에 탄력이 넘쳤고, 동시에 휘둘러지는 거도의 위용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정일룡이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쩌저저저정!
두 사람의 도검이 화려한 불꽃을 터트리며 부딪쳤다.
기세와 위력에 이미 놀랐지만, 실제로 검을 부딪치자 정일룡은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런 힘이!’
쩌저정! 퍼엉! 콰앙!
무자비한 폭음과 함께 정일룡이 뒤로 물러났다.
딱히 충격을 받은 건 아니었으나 상대를 살펴볼 여유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여유를, 서량은 결코 줄 생각이 없었다.
파바바박! 부아앙!
발로 대지를 연달아 찍어 가며 회전해 접근하더니 재차 거도를 휘두른다.
그야말로 신들린 몸놀림에 위압감 넘치는 칼질이었다.
저만큼 큰 칼을 이리 빨리 휘두르는 것도 놀랍지만, 이미 도(刀)와 혼연일체가 된 보법이 더 놀라웠다.
정일룡의 보검에 새하얀 검기가 일렁였다.
콰아앙!
서량이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났다. 반면 정일룡은 한 걸음 주춤했을 뿐이었다.
먼저 공격한 쪽이 서량이란 걸 생각하면 정일룡이 얼마나 노련하게 반응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만큼 내공이 정순하고 탄탄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정일룡이 입을 열었다.
“그런 살기를 피우는데 굳이 대화가 필요하진 않겠지. 하나 궁금하군. 자네가 누군지 말일세.”
서량이 씨익 웃었다.
손해를 보았는데도 투지가 줄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정도는 당연하다는 듯 더 불같은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내가 누군지는 그 개 같은 검으로 알아봐!”
우우우웅.
위협적인 소리와 함께 번갯불을 피워 내던 암영마기가 빠르게 체내로 응축되었다.
화려한 기파는 죽었으되 분위기는 가일층 심상치 않아졌다. 지저옥관귀문식을 개방하려는 것이다.
정일룡의 눈이 커졌다.
서량이 버럭 소리쳤다.
“내 다리 내놔, 이 시발 놈아!”
콰지지직!
암영진마공의 일 층 완전 개방.
지저옥관귀문식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