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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77화 (77/774)

77화. 허무하다 (2)

화아아악!

언덕 위에서 번져 나오는 엄청난 마기와 검기에 마인들은 얼이 빠졌다.

멍하니 그곳을 보던 마동필이 빠르게 외쳤다.

“삼 조는 주변을 수습하라! 공자님께서 전투 중이시다!”

“……예?”

아직 저 의문의 고수가 누군지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아차 싶었지만 지금은 설명할 때가 아니었다.

“빨리 움직여! 어서!”

“명을 받듭니다!”

조원들에게 명을 내린 마동필이 서둘러 주화에게 다가왔다.

“괜찮소?”

“끄응, 괜찮아요.”

애써 괜찮다고 하지만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다.

내장 출혈은 물론이요, 통제되지 않은 마기의 파편이 줄기줄기 새어 나왔다. 얼굴 한쪽이 엉망이 된 건 덤이었다.

하지만 주화는 의연했다. 삼공자님께서 느닷없이 등장하시고는 괴물들을 모조리 박살 내 주셨는데 다쳤다고 쓰러져만 있을 수는 없었다.

마동필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주화의 얼굴이 흐려졌다. 두 다리만 남은 연이의 시체를 발견한 것이다.

입술을 깨문 그녀가 외쳤다.

“수송대원들은 주변을 살피세요! 수송하려던 물건들이 분명 주변에 있을 겁니다!”

매정하다면 매정한 명령이다. 동료들의 시체가 한가득이거늘 그걸 수습하기도 전에 수송품을 찾으란다.

하지만 마인들은 그녀를 이해했다. 아니, 굳이 그녀를 이해할 필요도 없었다.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다. 그들은 신교의 마인이었다.

파바바박!

호법원은 주변을 정리하고 수송대 마인들은 주변을 뒤졌다.

“후욱!”

주화가 살짝 허리를 숙였다. 안색이 갈수록 창백해지고 있었다.

마동필이 품에서 단약 하나를 꺼내 들었다.

“속명단(續命丹)이오. 어서 드시오.”

“그것은…….”

“고집부릴 때가 아니오. 나는 돌아가서 다시 받으면 되니까.”

주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굳이 이런저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 그녀는 상황의 심각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마동필은 재빨리 속명단을 복용하고 운기에 들어간 주화의 호법을 서며 언덕 위를 바라보았다.

번쩍! 번쩍!

붉은 마광(魔光)이 약해졌다. 서량이 상대를 멀리 끌고 간 것이다.

‘빌어먹을.’

분명 공자님이 상대의 이름을 외치는 걸 들었다. 하지만 공자님의 압도적인 기파에 홀려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쨌거나 굉장한 강자임이 분명했다. 기파의 파편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였으니까.

바꿔 말하면, 삼공자님은 괴물들을 모조리 죽일 만큼 내공 소모를 하고 또 다른 강자와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정작 자신은 아무것도 못 하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저곳으로 가 공자님을 돕고 싶었지만, 공자님께서 그걸 원치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분하구나.’

호법으로서의 역량은 분명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무인으로서의 역량도 충분히 대단하다고 평가받을 만하다.

하지만 그럼 뭐 하나? 중요한 순간에 누구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지키기는커녕 또다시 공자님께 도움을 받았다.

주르륵.

꽉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말 못 할 자괴감에 순간 갈무리했던 마기까지 개방될 뻔했다.

그가 주화를 내려다보았다.

‘어서 끝내시오.’

이곳 상황이 최소한의 안정을 찾게 되면 곧바로 공자님께 달려갈 것이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다.

* * *

화아아악!

내공의 양이 증가하거나 기파가 몇 배나 더 강해지거나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정일룡은 느꼈다. 상대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무엇보다 마기가 이전과 전혀 달랐다. 농도의 문제가 아니라 질 자체의 문제였다.

이전에도 흉악했지만 지금 저 젊은 마인이 발산하는 마기는 패악스러움으로 가득했다.

마(魔)의 근본에 훨씬 가까워진 듯한, 마주하면 정신이 파괴될 것만 같은 지독한 마기.

정일룡이 소리쳤다.

“마교가 또 가당치 않은 마귀를 만들었구나!”

“닥쳐!”

우우우웅! 우우우웅!!

뻗어 나가는 음파가 고막을 찢을 것처럼 강렬했다. 음공(音功)을 방불케 하는 마성(魔聲)이었다.

쾅!

정일룡의 눈이 흔들렸다. 아무런 예비 동작 없이 제자리에서 쏘아져 오는데 순간적으로 어깨가 움찔했다.

‘빠르다!’

후웅.

서량의 좌수가 바람을 갈랐다. 하단에서 상단으로 올려 치는 장타, 제천기의 강벽수였다.

찌이이익!

피한다고 피했지만 너무 빠르고 강한 일격이었다. 정일룡의 소맷자락이 죄 찢어졌다.

파아앙!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대로 몸을 휘돌려 발길질을 해 오는데 그 유연함이 실로 눈부시다.

아차 하다가는 제대로 망신을 당할 판이었다. 정일룡이 두 발에 내력을 집중했다.

파아아앙!

그의 몸이 쭉 뒤로 밀려났다. 한숨 돌리고 나서 다시 붙으려는 것이다.

그때였다.

‘……!’

상대의 몸이 잔영이 되어 흩어졌다.

‘이형환위(移形換位)?!’

아니다. 그렇다고 보기에는 흩어지는 잔영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그 경지를 떠올리게 할 만큼 대단한 몸놀림인 것은 틀림없었다. 정일룡이 기감을 첨예하게 세웠다.

‘위!’

쩌엉!

고개를 들 시간조차 아까워 검을 들어 막았다.

‘흡!’

관절이 삐걱거렸다. 늙고 쇠한 육신을 지탱했던 농밀한 진기가 순간적으로 흐트러질 뻔했다.

‘이놈이?’

정일룡의 이마에 혈관이 불거졌다.

무공에서 정치로 노선을 변경한 지 삼십 년이 넘었다.

실전을 겪은 지는 일 년 전 잠깐 뛰어 본 걸 제외하면 이십 년이 넘었다. 하물며 그때는 천라지망이라 실전이랄 것도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는 의천맹의 대장로였다. 예상외로 강하다곤 하나 한낱 후기지수 놈에게 이리 당하고 있다는 건 말이 되질 않았다.

콰앙!

강한 진각과 함께 백색 보검이 풍차처럼 돌아갔다.

쩌저저정!

무수한 도검의 부딪침.

정일룡의 검지가 위로 향했다.

퍼엉!

서량의 몸이 마구 회전하며 후방으로 물러났다. 물러난 그의 장포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걸 피했단 말이지.”

정일룡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더 이상 상대를 ‘한낱’ 젊은 고수로 얕보지 않는 것이다.

사아아악.

곧바로 덤벼들려던 서량이 주춤했다. 어느새 정일룡의 몸 주변에 새하얀 안개가 둘러쳐진 것이다.

그 안개는 바로 정일룡의 검, 백학검(白鶴劍)에서 번져 나오고 있었다.

‘검무(劍霧)?’

극에 이른 검기를 파편으로 만들어 몸 주변에 방어막을 두르는 수법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방어의 용도로만 끝나는 게 아니었다. 단순한 내력이 아닌 검기의 파편이기에 그 자체로 강력한 공격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정일룡이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만.”

후우웅.

서서히 검을 휘젓자 그에 따라 검무가 출렁였다.

실로 아름다운 광경. 하지만 그 속에 배어든 살기는 독사의 송곳니처럼 음험했다.

“이만 죽…….”

파앙!

서량이 그대로 돌진했다.

정일룡은 분통이 터졌다. 이유도 모르고 공격을 당한 것도 열 받는 일이지만 저놈은 정말 예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어른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냅다 덤벼들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놈!”

후우우우웅!

백색의 검무가 서량을 향해 쏘아졌다.

꿈틀거리며 나아가는데 그 속도가 굉장했다. 헤아릴 수 없는 벌레 떼가 화살보다도 빠른 속도로 나아가는 것 같았다.

꾸욱!

거도를 쥔 서량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파지지지직!

검붉게 타오르는 암뢰(暗雷)가 거대한 칼날 전부를 뒤덮었다. 그는 그 기세 그대로 칼을 휘둘렀다.

콰아앙!

서량이 울컥 피를 토해 냈다.

삼십 근의 중도(重刀)와 다섯 근도 채 안 되는 장검이 부딪쳤는데도 정작 서량이 피해를 보았다.

깨달음은 정일룡을 넘어서지만 육신에 쌓은 공력이 아직 그보다 낮은 탓이었다.

하지만 서량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콰앙!

정일룡의 눈에 경악이 떠올랐다.

물러난 상대를 집어삼켜 갈아 버려야 할 검무가 산산이 흩어진 것이다. 제천기의 폭산경(爆山勁)이 만들어 낸 폭발이었다.

훅!

자욱한 먼지를 뚫고 서량이 모습을 드러냈다.

귀신처럼 빛나는 두 눈, 양손으로 쥔 거도에서 지옥의 칼바람이 몰아쳤다.

“이!”

정일룡이 재차 검을 휘둘렀다. 그의 진신절기, 백상검법(白喪劍法)이었다.

파바바바박!

서량의 상체와 어깨가 피범벅이 되었다. 먼저 도법을 꺼내 들기도 전에 당한 것이다. 그만큼 정일룡의 검이 빠르다는 뜻이었다.

휘이이이잉!

그래도 물러나지 않는다. 사방에서 몰려오는 바람이 그의 거도에 담겼다.

정일룡의 얼굴에 다급함이 어렸다.

서량이 피에 젖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뒈져, 새꺄.”

콰르르릉!!

일수유에 펼쳐진 육연지옥풍이 백상검법의 검기를 모조리 걷어 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화르르륵!

지옥의 칼바람에 이어 천지를 뒤덮은 팔열지옥의 불기둥.

뜨겁게 달아오른 거도가 화룡(火龍)이 되어 정일룡을 휩쓸었다. 구유인화도법(九幽靭禍刀法) 이 장, 종극무간도의 발현이었다.

순간 정일룡의 눈이 커졌다.

‘이 도법은?!’

분명 어디선가 보았던 도법.

실제로 고열의 불꽃을 형성하는 무공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도법이 대단해도 그만한 열기를 발산할 만큼의 내력이 없다면 애초에 시도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붉은 도기와 하얀 검기가 정면으로 부딪쳤다.

콰르릉! 퍼어어어엉!

커다란 불기둥과 함께 시커먼 연기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이변이 생긴 것은 그때였다.

쩌저저저적!

순식간에 대지에 서리가 끼었다.

고열의 불꽃이 사라진 자리를 시리디시린 얼음꽃이 대신한 것이다. 몰려드는 차가운 공기를 진기가 부추기니, 찰나지간 사위의 온도가 뚝 떨어졌다.

육연지옥풍, 종극무간도에 이은 인화도법의 삼 장(三章).

팔한지옥(八寒地獄)의 냉기를 담은 피의 연꽃, 혈규대홍련(血叫大紅蓮)이었다.

‘이익!’

정일룡의 얼굴이 벌게졌다. 혼신의 힘을 다해 내력을 끌어 올려 한기를 차단하려는 것이다.

투두두둑.

의복 곳곳이 바스러졌다. 미처 차단하지 못한 한기가 침투하여 의복을 상하게 한 것이다.

휘이이이잉!!

순간 전면에서 살을 엘 듯한 한풍이 불어 닥쳤다.

무형의 도기를 담고 몰아치는 팔한지옥의 끝, 대홍련지옥의 사풍(死風).

정일룡의 얼굴에 다급함이 어렸다. 한기로 인한 내상은 막았지만 연달아서 저런 공격까지 날릴 줄은…….

‘……!’

찰나에 찰나를 쪼갠 순간.

그의 머리 한구석이 번쩍이는 빛을 토하며 하나의 광경을 만들어 냈다.

반경 십여 장을 휩쓸어 버린 무지막지한 도풍(刀風)의 흔적.

재가 되어 버린 나무들과 시꺼멓게 눌어붙은 수많은 무인의 병장기들.

나아가 만년설 속에 박제된 것처럼 꽁꽁 얼어 버린 무수한 시체들의 행렬까지.

그 생지옥을 헤치고 나아가 기어이 한 사내의 다리를 잘라 버린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다 죽어 가던 놈의 칼에서 바로 지금과 같은 동풍(凍風)의 도기가 휘몰아친 것도.

‘이건 살왕, 그놈이 썼던 도법인데?!’

맹주 휘하에서 온갖 고수들을 암살했던 의천맹 최악의 비밀 병기.

순간 저 젊은 마인 놈이 쏘아붙이던 말도 떠올랐다.

- 내 다리 내놔, 이 시발 놈아!

정일룡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콰르르릉!

혈규대홍련이 휩쓸고 지나간 땅은 잔뜩 얼어서 거칠게 박살 나 있었다.

“후욱! 후욱!”

서량이 숨을 몰아쉬었다. 전성기 시절의 삼 할밖에 되지 않는 위력이었지만 어지간한 고수는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휩쓸어 버릴 공격이었다.

푸스스스.

새하얀 냉기가 언덕을 감돌았다.

파삭!

그 냉기 속에서 얼음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일룡이었다.

“네놈, 정체가 뭐냐?”

천천히 드러나는 정일룡의 모습.

얼어붙어 부스러진 상의가 조각조각 땅에 떨어졌다.

노인답지 않은 탄탄한 상체 위로 여기저기 붉은 도상이 새겨져 있었다. 상처가 얼어붙어서 피는 흐르지 않았다.

“도대체 누구기에 그놈의 도법을 구사하는 게냐?”

서량이 씨익 웃었다.

“이제 슬슬 기억이 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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