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허무하다 (3)
처음 천하진을 보았을 때가 떠올랐다.
의천맹의 장로가 되어 승승장구하던 도중, 전대 맹주를 실각시키고 새로운 맹주가 된 그 인간은 천하진을 기가 막힌 보검(寶劍)이라 일컬으며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맹주에 대한 정일룡의 시선은 곱지 못했다. 장로 회의가 의미가 없을 정도로 대중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었으니까.
자신이 최종적으로 노리는 권좌에 느닷없이 엉덩이를 들이민 짐승이 좋을 리가 없었다.
당연히 천하진에 대한 인상도 최악이었다. 맹주가 현재의 자리에 오르는 데에 엄청난 도움이 된 놈이니까.
만약 놈이 뒤에서 온갖 정적(政敵)들을 제거하지 않았다면 그 인간은 절대 맹주가 될 수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정일룡은 천하진을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별다른 지원도 받지 않았던 놈이 어느새 천하십대고수의 일인으로 불리게 되었으니까.
실제 실력이 그러한가는 의미가 없었다. 정일룡은 자신이 지독히도 싫어하는 맹주의 칼이, 자신보다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 자체가 싫었다.
그래서 천라지망에 지원했다.
맹주를 죽이지 못할 바엔 놈의 수족이라도 없애 버리고 싶었다.
천하진의 갑작스러운 도주가 맹주의 혹시 모를 암계(暗計)는 아닐까 싶은 마음도 있었다.
‘놈은 확실히 죽었어!’
헤아리기 어려운 수의 병장기들에 꽂혀 걸레짝이 다 된 놈이다. 그런 놈의 다리를 자른 것이 자신이었고, 마지막으로 목을 뽑아 버린 건 비요왕이었다.
그렇게 살왕은 죽었다. 누구보다도 비참하게, 누구보다도 참혹하게.
한데 이놈은 누구기에 살왕의 무공을 구사하는가? 살왕이 아무도 모르게 후계자라도 기른 걸까?
하지만 이놈은 마인이 아닌가.
파사사삭!
정일룡의 몸을 뒤덮었던 얼음이 모조리 부서져 나갔다. 그가 딛고 선 땅 반경 일 장의 얼음들도 모두 산산조각이 났다.
우우우웅.
그의 몸에서 강력한 기파가 흘러넘쳤다. 평생을 익히고 연마해 온 백련기(白蓮氣)의 완전한 개방이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네놈의 정체…….”
쩌어어어엉!
정일룡의 몸이 주춤거렸다. 어느새 접근한 서량의 칼을 막은 것이다.
코앞에서 번뜩이는 서량의 안광은 시뻘겋게 타오르고 있었다. 어떠한 표현을 가져다 써도 흉악함의 정도를 표현하기 어려운 눈빛이었다.
“내가 말했지, 내 정체는 네놈의 검으로 알아보라고.”
“너!”
“네게 보여 줄 것은 이제 칼질밖에 없어!”
콰앙!
폭음과 함께 정일룡이 물러났다.
지금까지처럼 일부러 물러난 게 아니었다. 순수하게 힘의 여파를 감당치 못해서 물러난 것이다.
그리고 그 틈에, 서량은 또 한 차례의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화아아악!
검붉은 암뢰가 다시 그의 몸으로 쑥 들어왔다.
정일룡의 눈이 흔들렸다.
쩌저적!
서량이 디딘 땅에 거미줄 같은 금이 갔다.
한껏 몸을 웅크린 서량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박동이 일어났다. 지저 깊은 곳에 지어진 지옥문들 중 두 번째 문이 비로소 열리려는 것이었다.
파아악!
정일룡이 움직였다.
그것은 본능이었다. 이전에도 불길한 전조를 느꼈지만 지금은 또 다르다. 차원이 다른 무언가가 나오려는 것 같았다.
우우우우웅!!
탄력적으로 뻗어 내는 백학검에서 휘황찬란한 백색 광채가 피어올랐다.
만약 무림인 중 누군가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두 눈을 의심했을 것이다.
백학검에서 피어오르는 광채는 단순한 검기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검기가 응축되어 더 강한 빛을 내는 수준도 아니었다.
기(氣)의 형식과 집결 정도가 차원을 달리하는 순수한 빛 그 자체. 세상 누구도 받아 낼 수 없을 것 같은, 진기로 이루어진 파괴의 정점.
“죽어라, 이놈!!”
바로 그때, 서량의 고개가 들렸다.
퍼어어어억!
순간 정일룡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뽑아낸 극한의 무공이 대지에 동그란 구멍을 만들어 놓았다. 만약 거기에 강철이 있었다 해도 아무런 저항 없이 뚫렸을 것이다.
문제는 정일룡이 정작 구멍을 뚫어 놓으려 한 대상은 땅이나 강철 따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파바바박!
혹시 몰라 몸 주변에 검무를 발산시켜 놓은 정일룡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량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
서량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목 앞에 서 있었다.
‘이리 가까이 있었다고?’
한데 왜 기파가 느껴지지 않았지? 아니, 최소한의 인기척 정도는 느꼈어야 정상인데?
‘설마 정말 살왕의 후계……?’
역대 최고의 암살자라 불린 만큼 살왕의 은신술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 은신술 때문에 맹주의 눈에서 벗어난 이들은 하루하루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은신술을 썼지? 너무 비효율적이지 않나?
어찌 되었든 눈에 보이니 공격은 해야 한다. 백학검을 곧추세운 정일룡이 다시 한번 서량에게 달려들었다.
‘……?’
정일룡의 눈에 의아함이 담겼다.
‘뭐야? 왜 내 움직임이……?’
느리다.
느려도 너무 느렸다. 마치 물에 빠진 것처럼 팔다리가 무겁고 숨쉬기가 곤란했다.
‘이건 또 무슨 조화냐?!’
감각은 멀쩡한데 몸만 느려졌다. 아니, 세상이 느려진 것 같았다.
의아한 와중에도 머리 한구석이 번쩍거렸다. 귀가 먹먹하고 가슴이 답답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위기감이 뱃속을 간질이고 있었다.
그때, 정일룡은 서량의 눈을 보았다.
살벌하게 타오르던 이전의 마안과는 달리 지금 그의 눈은 무척이나 맑고 고요했다.
마치 구도자를 보는 것 같았다. 하늘의 이치를 꿰뚫어 본 이름 모를 선지자를 보는 듯했다.
뭐지? 마공이 깨졌나? 아니면 살기를 버리기라도 한 건가? 그 잠깐 사이에 뭔가 깨달음이라도 얻은 게야?
두둑!
그때, 전방을 향해 뻗은 정일룡의 왼손 손톱들에 금이 갔다.
정일룡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제야 왜 놈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왜 세상이 느려졌는지, 왜 놈의 눈빛이 그리도 맑게 보였는지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깨닫는 순간.
절대마(絶對魔)의 기운이 정일룡을 휩쓸었다.
화아아아악!!
백련기가 파도를 맞은 돛단배처럼 마구 흔들렸다.
백상검법의 투로에 따라 움직이던 백학검은 멈추었고, 얼어붙었던 상체의 상처들이 연달아 퍽 소리를 내며 터졌다.
‘이럴 수가!’
정일룡은 서량의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던 게 아니었다.
한순간 서량이 뿜어내는 기파가 너무 거대해서 오히려 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세상이 느려진 것 같다는 착각을 받은 것도 기파에 억눌려 움직임이 통제된 결과였다.
그리고 서량의 맑은 눈은?
‘이런 말도 안 되는!’
뭔가를 깨달아서도, 살기를 버려서도 아니었다. 혈도는 물론 세맥까지 숨어든 모든 마기를 끌어내어 암영진마공을 또 한 차례 개방했기 때문이었다.
서량의 살기는 이전과 여일했다. 그 변화가 너무 극적이었기에 눈빛이 맑게 보였던 것뿐이다.
종극무간도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찬 공기가 들어오면 급격한 추위를 느끼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렇게 서량은 한층 더 깊은 지옥문을 열었다.
암영진마공의 이차 개방, 마관상천지문식(魔觀上天知門式)이었다.
스르륵.
천천히 다리를 든 서량이 강하게 땅을 밟았다.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땅이 마구 갈라졌다.
콰드드득! 쩌저저적!
땅의 갈라짐은 멈추지 않고 빠르고 격렬하게 정일룡을 향했다.
정일룡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괴력이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 도대체 얼마나 강한 힘으로 진각을 밟으면 여기까지 땅이 갈라지려 하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하아압!”
아랫배에서부터 끌어 올린 기합과 함께 기파를 떨쳐 낸 정일룡이 좌측으로 움직였다.
콰드드드득!
쭉 이어진 균열은 건너편 거목의 뿌리를 뒤집고 나서야 멈추었다.
푸스스스.
동시에 갈라진 대지의 틈에서 희뿌연 연기가 확 올라왔다.
그것이 어떤 연기인지 알 수 없었으나 정일룡은 저 연기를 피한 자신의 판단을 칭찬했다.
하지만 그는 너무 빨리 안심한 감이 있었다.
퍼어어엉!
“크아아악!”
고통에 못 이긴 비명과 함께 정일룡이 후방으로 훨훨 날아갔다.
코와 입에서 피가 확 터졌다. 어떻게든 막은 백학검에는 금이 쩍쩍 가 있었다.
화르륵!
순간 정일룡은 다시 한번 등골을 서늘케 하는 위기감을 느꼈다.
‘놈!’
마귀 놈이 벌써 자신을 따라잡았다. 지독한 마기를 머금은 살의의 태도(太刀)가 엄청난 무게감을 실은 채 내리쳐졌다.
정일룡의 몸이 완전한 백색으로 물들었다.
콰아아앙!
일도붕산(一刀崩山).
칼질 한 번에 산을 무너트린다. 실로 그런 표현이 어울릴 만한 일격이었다.
“헉헉!”
천만다행으로 그 일격을 피한 정일룡이 숨을 몰아쉬었다.
조금 전에 입은 내상도 지독한데, 이번 일격을 피하고자 감행한 엄청난 내공 소모에 재차 극심한 내상을 입었다.
‘또 온다!’
놀라고 있을 틈이 없다. 정일룡은 이를 악물고 백학검을 세워 들었다.
파악!
서량이 질주했다.
긴장해서 수비 태세로 검을 전환한 정일룡은 일순 의아함을 느꼈다.
‘놈의 상태가……?’
낯빛은 창백하고 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다. 코에서는 얇은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놈! 무공이 완전하지 않구나!’
정답이었다.
서량은 암영진마공을 완성했지만 대성하지는 못했다. 최고의 장인이 직접 검을 휘두른다고 검사라 불리지 못하는 까닭과 같다.
스스로 창안한 무공이니 누구보다 그 무공에 대해 빠삭하지만, 그걸 체화시키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나마 십대고수라 불릴 정도로 깨달음이 높았기에 짧은 기간 여기까지 익히는 게 가능했을 뿐.
특히나 마공의 일 층 개방인 지저옥관귀문식과 달리 이 층 개방인 마관상천지문식은 마력(魔力) 자체를 증폭시켜 마(魔)의 본질을 끊임없이
체화시키는 공부였다.
당연히 몸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었다.
쩌저저저정!
정일룡이 또다시 피를 토했고, 서량도 더 많은 코피를 흘렸다.
이번에도 손해를 보았지만 정일룡은 안심했다.
‘이제 끝이다, 이놈!’
놈이 자신을 몰아붙이는 게 가능했던 이유는 저 괴상한 무공이었다. 둘 다 체력과 내공이 똑같이 소모되었다면, 깨달음이 높은 자신의 승리가 명확했다.
“좋은 시절은 갔느니라! 이 빌어먹을 마귀 놈, 사지를 잘라 주마!”
“이 새끼 봐라? 다리 하나도 모자라서 또 사지를 잘라?”
“뭣이?”
“하지만 뭐…… 마음에 드는데? 딱 그렇게 만들어 주면 되겠구만.”
순간 정일룡의 옆구리로 서량의 주먹이 파고들었다.
퍼억!
“컥!”
비척거리며 물러난 정일룡의 앞에 서량이 숨을 헐떡이며 거도를 들어 보였다.
“내가 왜 이 무식하게 큰 칼을 들고 왔는지 아냐?”
우우우웅!
다시 한번 거도에 서리는 암영마기의 마기가 극도로 불안정했다. 억지로 연 마관상천지문식이 닫히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탐욕으로 정신 나간 늙은이 하나를 박살 내는 데에는 충분하고도 넘쳤다.
“비슷한 경지라면 네 백상검법이 중도(重刀)에 유독 약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지.”
“그걸 어찌……?”
“하물며 깨달음에서도 우위에 섰다면, 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야.”
“……!”
파아아악!
서량의 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정일룡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이제야 놈의 보법도 기억이 났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도법과 달리, 저 신들린 보법은 의천맹 수뇌부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구천축지?!”
“오냐!”
쾅!
폭산경으로 정일룡을 물러나게 한 서량이 하얗게 웃으며 칼을 들었다.
“토막을 쳐 주마!”
퍼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