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바람이 불어오다 (3)
“…….”
“…….”
“밥 먹자.”
“예에.”
서량이 밥알을 깨작거렸다.
슬그머니 그의 눈치를 보던 마동필이 점잖게 식사를 시작했다. 평소 서량의 성격을 알기에 굳이 빼선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앵화가 중간에서 두 사람의 눈치를 보았다. 이 양반이 지금은 또 왜 이러나, 싶은 표정이었다.
그렇게 어색한 식사가 얼마나 이어졌을까.
“동필아.”
“예, 공자님.”
“그…….”
“예.”
“……아니다. 근데 어쩌다가 내 개인 호위로 발탁된 거냐?”
마동필이 담담한 목소리로 자초지종을 재차 설명했다.
자연히 조원들의 죽음을 언급할 수밖에 없었고, 설명이 끝났을 무렵엔 무표정한 얼굴에 은근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서량은 입맛을 다셨다. 마동필의 흐린 얼굴을 보니 괜히 물어봤나 싶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랬구만.”
“…….”
“너는 괜찮냐?”
“예? 아, 물론입니다.”
“네 몸뚱이 상태 말고. 내 개인 호위로 지내도 좋으냐는 뜻이다.”
“삼생의 영광입니다. 오히려 벌이 아니라 상이지요.”
“말이라도 그리해 줘서 고맙다만.”
서량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물론 이 황량하기 짝이 없는 집구석에 마동필이 함께 살면 좋은 일이긴 하다.
앵화도 있지만 나름의 거리가 있는 녀석 아닌가. 같이 살면 심심할 일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앞으로 그가 행할 일들에 마동필이 사사건건 방해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근래 들어 그나마 예전보다 부드러워졌다지만 그래 봤자 철검이 목검 된 격이다. 맞으면 아픈 건 똑같다.
“상부에서 내려온 명령이라고 했지?”
“아, 예.”
“상부라고 한다면 정확히 어디일까? 호법원에는 인사권이 없고 환희원은 재무 담당이니까 아마도 군사부나 마신궁이겠지?”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시부랄.
“나를…… 참 많이 생각해 주시는구나. 너 같은 인재도 붙여 주고 말이야.”
“감당키 힘든 말씀입니다, 공자님.”
환희원이라면 어떻게든 비빌 수 있다. 호법원이었다면 안 받겠다고 버티면 그만이다.
하지만 마신궁과 군사부는 다르다. 군사부는 천마신교에서 가장 권력이 강한 조직이며, 설령 후계자들이라도 밉보였다간 끝장이 나는 조직 아니던가.
물론 마신궁이야 말할 것도 없다.
즉, 마동필을 받지 않겠다고 어깃장을 부렸다간 무자비한 역풍에 골로 갈 수도 있다는 소리.
“푸휴휴!”
입술이 푸르르 떨릴 정도로 과격한 한숨이었다.
“에잇, 젠장! 이왕 이렇게 된 거!”
서량이 소매를 힘차게 걷어붙였다.
“밥부터 먹자!”
“아, 예!”
“앵화는 뭐 하냐? 국수 다 불겠다.”
“네엡!”
세 사람의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되었다.
서량이 워낙 복스럽게 먹자 마동필과 앵화의 젓가락질도 빨라졌다. 말은 안 했지만 둘 다 원체 배가 고팠던 것이다.
폭풍 같은 식사가 끝나고, 서량이 마동필을 불렀다.
“동필아.”
“예, 공자님.”
“너 전에 저 칼 구해 왔잖아?”
서량이 가리킨 곳엔 수수한 사 척 길이의 환도가 놓여 있었다.
“예에.”
“거기가 어디냐?”
“마왕병창(魔王兵廠)입니다.”
“마왕…….”
여전히 유치하고도 살벌한 작명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던 서량은 문득 떠오른 기억에 후다닥 서랍을 열어 소연심이 건네준 문서들을 꺼냈다.
“어디 보자, 이것도 아니고…… 이거는 됐고…… 아! 이거다!”
서량이 재빨리 문서를 읽어 내렸다.
‘역시 그랬군.’
병창(兵廠)이란 곧 병기 창고를 말함이다. 소연심이 준 인물 관계도, 조직도에는 병창을 관리하는 조직원들에 관한 내용도 적혀 있었다.
‘조직원 쪽은 빈약하지만.’
병창에 대한 분류는 잘해 놓았다.
‘심마병창(心魔兵廠). 외전에 있는 대형 병창으로 일반 마인들이 드나들 수 있는 병기 창고. 본교 마인의 대다수가 이곳에서 병장기를 구한다.’
‘마왕병창. 내전에 있는 병창으로 보검보도(寶劍寶刀) 등 장인의 손을 탄 병장기들이 전시된 병기 창고.
전투 부대 대장급 이상만이 출입 가능하며 간간이 신병(神兵)이라 할 만한 병기가 발견되기도 한다.’
서량의 눈이 마지막 병창을 훑었다.
“천마병창(天魔兵廠).”
신교 최고의 병창으로 출입이 엄격하게 금지된 곳이었다.
그곳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교주와 차기 후계자뿐이었다. 원로원의 구대마존조차도 교주의 허가 없이는 천마병창에 들어갈 수 없었다.
서량도 천마병창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었다. 고죽림에서 마동필에게 들었는데, 별 감흥이 없었기에 한 귀로 듣고 흘렸던 기억이 났다.
“동필아, 여기 천마병창에 들어가려면 교주님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거지?”
마동필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그 눈빛은 알면서 왜 묻느냔 뜻을 담고 있었다.
서량의 눈이 빛났다.
“흐음. 교주님의 허락 없이 슬쩍 들어갈 수는 없다는 말이렷다?”
“예에. 한데…… 어찌 그러십니까?”
“응?”
“혹시 천마병창에 들어가고 싶으신 겁니까?”
“그러니까 너한테 물어봤지. 당연한 걸 묻…… 엥? 너 혹시 그 방법을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혹시나 해서 물었는데, 놀랍게도 마동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설마 호법원에 그런 권한이 있는 건가? 하기야 천마병창도 호법원이 지켜야 하는 곳의 일부겠지? 응? 그러니까 막 그런 권한도…….”
“없습니다, 공자님.”
“어?”
“호법원의 어떤 호법도, 설령 호법원주라 해도 교주님의 허가 없이는 천마병창에 들 수 없습니다.”
“뭐야? 그럼 넌 어떻게 그 방법을 알고 있는데?”
“저보다는 공자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엥? 그건 또 뭔 소리래?”
마동필이 입맛을 다셨다. 하기야 공자님의 기억이 뒤죽박죽이란 건 옛날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교주님의 제자분들께선 단 한 번, 천마병창에 들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
“…….”
“그냥 가면 되는 거였어?”
“그렇습니다. 물론, 공자님께서 이전에 천마병창에서 병장기를 가져오지 않으셨다면 말입니다.”
서량이 입을 떡 벌렸다.
“허어, 그렇단 말이지?”
“…….”
“근데 한 번? 딱 한 번이야? 그걸로 끝?”
“예,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뭐야, 그럼. 내가 만약 기억 못 하는 과거에 들렀다 나왔으면 말짱 꽝이라는 소리잖아?”
“그……렇긴 합니다. 교주님께서 허가해 주신다면 또 모르겠지만요.”
에라이, 썅!
‘텄네, 텄어.’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이 몸으로 전생하기 전, 진짜 서량의 평판은 거의 인간 쓰레기급이었다.
당연히 탐욕도 많았을 것이고, 들어 보면 탐욕만큼이나 자신감도 넘쳤던 놈이었다. 그런 놈이 지금까지 천마병창을 안 들어갔을 리가 없잖은가.
서량이 입맛을 다셨다.
“쩝, 별수 없지.”
자신에게 맞는 신병이기가 있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무공을 얻는 것과 같다. 하지만 서량은 병장기에 별 미련이 없었다.
정확히는, 좋은 무기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크게 아쉬워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맨손으로도 사람 때려잡는 데에 무리가 없고, 하물며 평범한 칼로도 강철을 베는데 굳이 신병에 연연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럼 마왕병창은 마음대로 출입해도 되는 거지?”
“물론입니다. 아예 거기서 사셔도 문제가 안 될 겁니다.”
“뭐냐? 나더러 거기서 살라고?”
“아, 아닙니다! 그저 그만큼 자유로이 드나드셔도 괜찮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서량이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빠졌다.
물론 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좋아, 그럼 어디 한번 병창에나 들러 볼까. 안 그래도 이번 싸움으로 뭔가 걸리는 게…….”
그때였다.
쾅! 쾅! 쾅!
대문을 두들기는 소리에도 성격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굳이 기파를 느끼지 않아도,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서량은 상대가 누군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공자니임! 거 계세요?!”
서량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저거는 또 왜 온 거야?”
그때, 앵화가 아! 하는 탄성을 질렀다.
“그러고 보니 공자님, 십 수일 전에 광마대주가 한 번 찾아왔었습니다.”
“뭐 하러.”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혼잣말한 걸 들어 보면 공자님과 술을 마시려고 온 것 같았습니다.”
“저게 시국이 어느 시국인데 술을 또 처마시자고 여기까지 찾아왔어?!”
마동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지금 시국이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쾅! 쾅!
“공자님! 안 계세요?! 아니, 그나저나 사람이 이렇게 두들기면 문이라도 좀…….”
덜컹!
활짝 열린 대문에서 위홍련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량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왜 왔냐?”
“어? 공자님! 수련 끝나고 돌아오신 겁니까?”
“수련이고 나발이고 왜 왔냐고, 인마.”
“술 마시러 왔습니다.”
반신반의했는데 설마 진짜일 줄이야.
가만히 위홍련을 보던 서량이 천천히 문을 닫았다.
“멀리 안 나간다.”
“엥? 자, 잠깐만요! 갑자기 왜요?!”
“내 마음이야, 이년아.”
“그래도 여기까지 찾아온 사람 성의가 있죠! 어? 킁킁, 이거 뭐야? 식사 중이셨어요?”
“냄새 잘 맡아서 좋겠다. 가.”
“저도 같이 먹어요! 아침도 걸렀단 말이에요!”
“아, 좀 가라고!”
“싫어요! 반주만 해요, 우리!”
“술 맡겨 놨어?! 왜 여기서 지랄이야!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는 대원들이랑 마셔!”
“걔들이랑 마시면 재미없어요!”
한옆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마동필은 고개를 돌리고야 말았다.
저게 신교의 후계 후보와 전투 부대 대장의 대화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서량이 머리를 박박 긁었다.
“아오! 진짜 뭐가 이렇게 어수선하냐. 야!”
“왜요!”
“이 새끼가? 왜요오오? 모가지에 힘 안 빼, 인마?”
“저는 원래 목청이 커요! 그리고 저 삼 조장 놈한테는 관대하면서 왜 저한테는 그렇게 퉁명스러운 건데요?!”
“됐고, 나 갈 데 있으니까 마시려면 나중에 와.”
“어디 가시는데요?”
“이게 이제는 보고도 받으려고 그러네? 어라? 미간에 주름 안 펴? 확 이마빡에 구멍을 내서 안구를 홀수로 만들어 줘 버릴라.”
“누가 보고를 받고 싶대요? 그냥 물어본 건데 과민 반응하시기는.”
“솔직하게 말해 봐. 맞고 싶어서 온 거지? 그게 목적이었으면 얼추 성공했지 싶다. 조금만 더 건드리면 주먹 날아갈 것 같은데 말이야.”
위홍련이 인상을 찡그렸다.
“애들 훈련시키고 짬 내서 온 건데 너무 박하시네, 정말.”
“내 알 바 아니다. 그리고 훈련을 시켰으면 지켜봐 줄 것이지 술이나 퍼마시러 와? 네가 그러고도 한 부대의 대주냐? 대장이야?”
“알아서들 잘한다고요.”
“그럼 알아서들 잘할 테니까 대주도 때려치워. 잘한다는데 뭐 하러 대주를 하고 있어?”
“월봉이 쏠쏠하거든요.”
서량이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두들겨 패지 않으면 안 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야, 나 진짜 갈 데가 있어서 그래. 나중에 다시 와. 그때 한잔하게.”
“그니까 어디 가시는데요!”
“병창 간다, 병창! 마왕병창 간다! 됐냐?!”
그때였다.
“오호, 병창엘 가신다고요?”
모두의 시선이 위홍련의 뒤편으로 향했다.
언제 도착했을까? 그곳에는 한 명의 중년 문사가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가시려거든 천마병창을 가시지 왜 마왕병창을 가십니까?”
서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중년 문사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하, 이렇게 뵙는 게 햇수로 칠팔 년…….”
“뉘쇼?”
“…….”
“뉘신지 모르겠지만 잘못 찾아오신 것 같소. 하긴 여기가 워낙 외진 곳이라. 야, 너 돌아갈 때 저분 뫼시고 돌아가.”
위홍련이 침을 꼴깍 삼켰다.
“공자님.”
“손 빼, 문 닫을라니까. 부러져도 책임 안 진다.”
“……총군사님이잖아요.”
“뭐?”
“총군사님이라고요!”
“……어?”
화들짝 놀란 서량이 문밖에 선 중년 문사를 바라보았다.
중년 문사, 호요성이 머리를 긁적였다.
“곧 갈 테니까 차 한 잔만 주시면 안 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