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바람이 불어오다 (4)
차를 달라고? 총군사가?
다름 아닌 이곳, 천마신교의 삼공자가 사는 거처로 와서? 도대체 왜?
물끄러미 그를 보던 서량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안 되겠습니다만.”
“……?”
“지금은 제가 바빠서요. 아, 뒤에서 들으셨으니 알고 계시리라 믿겠습니다.”
그가 위홍련을 바라보았다.
위홍련은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자못 충격을 받은 기색이었다.
“야, 위 대주.”
“…….”
“미친년?”
“어떤 쌍놈 새끼가 미친년이라고…… 아?”
“얼씨구. 더 소리쳐 보지? 아주 세상을 향해 외쳐 보지 그러냐? 응?”
“아니, 저는 순간 공자님인 줄 모르고.”
“됐으니까 총군사님 뫼시고 돌아가라. 알았어?”
“네, 네?”
“손 빼. 문 닫을 거야.”
위홍련은 기겁했다.
“공자님! 공자님!”
“또 뭐!”
“총군사님이 오셨는데 문전박대를 하시겠다고요?”
서량이 코웃음을 쳤다.
“집주인이 오는 손님 다 받아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냐?”
“……!”
“안 그래도 바빠 죽겠구만, 젠장. 너 손 부러지든 말든 이제 닫는다.”
위홍련이 냉큼 손을 뺐다. 서량이 한다면 하는 인간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호요성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삼공자님.”
“하실 말씀이라도?”
“병창에 가신다고 하셨지요?”
“그렇습니다만.”
“왜 마왕병창에 가십니까? 천마병창에는……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 한 번 들어가셨다고 했지요?”
서량이 콧방귀를 뀌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구먼.
“예, 그래서 마왕병창에 가 보려 합니다.”
“이전에 가져오셨던 검은 필요가 없어진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병창에 가겠지요?”
“오? 근래 굉장한 도법을 사용한다고 들었는데 노선을 변경하신 건가요?”
“그렇다면요?”
“굉장하네요!”
“칭찬 감사합니다.”
“타고난 천재가 노력까지 하면 이루지 못할 게 없다던데!”
“천재인지는 모르겠고 노력은 작살나게 했죠.”
“근성의 사나이! 멋지십니다!”
“거듭 감사하네요.”
두 사람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대화에 세 사람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심지어 멀리 떨어져 앉은 금호조차 눈알을 핑핑 굴리고 있었다.
‘뭐지, 이 묘하게 친근한 대화는? 설마 두 분이 잘 아는 사이신가?’
모두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한데 그 좋은 실력에 마왕병창으로 만족을 하시겠습니까?”
“실력이 좋으니까 마왕병창으로도 충분하죠.”
“허! 그런 생각은 안 해 봤습니다만, 생각해 보니 그럴듯합니다.”
“이제 말 다 끝나셨습니까?”
“천마병창에 들어가게 해 드릴까요?”
순간 좌중이 얼어붙었다.
서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천마병창에 들어가게 해 준다고요? 저를?”
“예.”
“한 번 들어갔다 나왔는데도요?”
“물론입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곧바로 들통날 거짓말을 왜 하겠습니까? 전 그런 거 안 합니다.”
“현명하시군요. 저도 그래서 어지간하면 거짓말 안 합니다.”
“현자와 현자의 만남이라! 오늘 참 여러모로 대화할 맛이 나겠습니다그려.”
“맨입으로는 안 되겠지요?”
“인생은 등가 교환 아니겠습니까? 경험도 있어 보이시는데요?”
“뭐…… 그래서 대가는요?”
“실력 좋은 무사에게 천마병창은 가든 말든 상관없는 곳이겠지요?”
“뭐 그렇죠.”
“비싼 값은 못 받겠군요. 그럼 오늘 하루 공자님을 제게 주시죠.”
“……뭐요?”
“그냥 이런저런 대화 나누다가 밤에 술도 한잔하자는 뜻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설명이 없었으면 확실히 오해할 뻔했군요.”
“설명하길 천만다행이네요. 덧붙이자면 저 여자 되게 좋아합니다.”
서량이 피식 웃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옷 좀 갈아입고 나오겠습니다.”
“얼마든지요.”
뒷짐을 진 호요성은 싱글벙글 잘도 웃어 댔다.
호요성과 위홍련을 문밖에 둔 채 방으로 들어온 서량이 옷을 갈아입었다. 물론 마동필 역시 그를 따라 들어온 참이었다.
“공자님.”
마동필의 얼굴은 놀라움과 혼란으로 뒤죽박죽 물들어 있었다.
“혹시…… 총군사님과 예전부터 잘 아시던 사이였는지요?”
“그럴 리가 있냐.”
“아…… 한데 그, 뭐랄까…….”
“…….”
“굉장히 친밀한 대화였기에…… 죄송합니다. 본래 아랫사람으로서 함부로 들어서는 안 되었는데.”
“옆에 다 있는 데서 한 대환데 뭘. 신경 쓰지 마라.”
“아, 예.”
“그나저나 동필아.”
“예, 공자님.”
흑색 무복 위로 요대를 두르고 환도까지 찬 서량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잠시 환희원주한테 갔다 와라.”
“환희원주요?”
“가서 물어봐. 혹시 내가 교외에 있었을 때 총군사와 자리가 있었는지.”
“…….”
“자리가 있었으면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혹시 나에 대해서 말한 게 있는지를 물어보고 와라.”
마동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환희원주를?’
반면 서량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빌어먹을.’
총군사 호요성과는 당연히 이번이 첫 대면이었다. 삼공자 서량으로서가 아닌, 전생을 한 살왕으로서.
반면 호요성은 자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이전의 서량에 대해서는 물론이요, 전생한 이후의 자신에 대해서도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장난처럼 툭툭 던진 말이었지만 심상치 않은 내용의 연속이었다.
너무나 가볍기에 그냥 넘기게 되는,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말들.
- 오? 근래 굉장한 도법을 사용한다고 들었는데 노선을 변경하신 건가요?
그가 제대로 칼을 휘두른 것은 사공자 홍위문을 박살 냈을 때였다.
물론 이후에 소문이 퍼질 대로 퍼졌기에 총군사라고 모를 리는 없으니 제쳐 두고.
서량이 호요성에 대해 제대로 된 경각심을 가진 것은 그다음이었다.
- 인생은 등가 교환 아니겠습니까? 경험도 있어 보이시는데요?
- 비싼 값은 못 받겠군요. 그럼 오늘 하루 공자님을 제게 주시죠.
대가를 먼저 말한 것은 자신이었지만 비싼 값을 운운하고 등가 교환이니 경험이니 묘한 말들을 입에 담았다.
도법, 거래, 경험.
별거 아닌 세 단어가 합쳐지니 환희원주가 떠올랐다.
‘내가 교에 도착한 지 이틀 만에 나타났다. 즉…….’
펄럭!
새하얀 장포까지 걸친 서량의 자태는 무척이나 훌륭했다.
‘내가 교외로 나간 걸 안다고 봐야 하나? 어쩌면 환희원주가 말했을 수도 있겠어.’
사실 그런 걸 떠나서 일단 호요성을 피하고 싶었다.
이유인즉, 처음 얼굴을 마주한 순간 초감각이 머리를 마구 두들겼기 때문이다.
근래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는데도 사람과 마주하자마자 이렇게 비상종이 울린 적은 없었다.
그만큼 서량이 강해졌기에 마주한 상대들이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런 초감각이 바로 지금, 한 줌밖에 안 되는 무공을 익힌 총군사를 보자 요란하게 발동했다.
그것은 무슨 뜻일까?
“오래 기다리셨지요?”
“으하핫! 오래라니요? 주변 경관을 보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굉장한데요? 왜 홀로 외진 곳에 사시는가 싶었더니 이 고즈넉한 경치 때문이셨군요!”
“……황량합니다만?”
“그래서 좋지요. 나무가 많은 곳에는 벌레도 많이 끼거든요.”
서량이 미소를 지었다.
“가실까요?”
“좋습니다.”
그가 위홍련에게 말했다.
“너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위홍련은 이전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기엔 웃는 서량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앙!」
금호가 냉큼 서량의 어깨로 올라왔다.
“오? 키우시는 겁니까? 엄청 귀여운 여우네요?”
“키운다기보다, 그냥 같이 삽니다.”
“만져 봐도 됩니까?”
“손가락 잘립니다.”
“껄껄.”
“진짭니다.”
“……아, 예.”
* * *
서량의 거처에서 천마병창까지는 상당히 멀었다.
어지간해선 마차를 타고 이동할 만도 하지만 두 사람은 걷는 길을 택했다.
정확히는 서량이 걷는 걸 바랐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그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란히 걸으며 대화하기를 이각여.
서량은 호요성에 대해 단 하나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말입니다, 제가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모르죠, 저는.”
“이렇게 말했지요. 이놈들아! 내가 바로 천마신교의 총군사이니라! 내가 여기서 죽으면 본교에서 너희를 서역까지라도 쫓아가서 죽일 것이야! 이렇게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어쩌긴요? 그놈 자식들 코웃음을 쳐 대더군요. 하기야 도적질로 먹고사는 무식쟁이들한테 대화가 먹히겠습니까.
결국, 총군사씩이나 된 주제에 가진 거 다 털리고 거지꼴로 귀교했지요.”
처음 얻은 휴가에 산천 유람을 하다가 도적들에게 걸려 빈털터리가 됐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그렇게 끝을 맺었다.
그게 진짜인지 거짓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호요성은 듣는 이로 하여금 귀가 즐겁게 해 주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절묘한 호흡 조절, 자유자재로 분위기를 조성하는 목소리, 이때다 싶을 때 제대로 터트려 주는 화술은 마치 실력 좋은 연주자들의 합주를 듣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도적들은 어떻게 되었답니까?”
“글쎄요? 따로 보고가 올라오진 않았지만…….”
호요성이 비장한 얼굴로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다 골로 가지 않았을까요?”
“근데 산천 유람을 호위도 없이 가셨습니까?”
“자유를 만끽해 보고 싶었거든요. 하도 일만 하다 보니 본교 마인들의 얼굴만 봐도 기운이 빠져 버리더라고요.”
허구와 진실 사이를 마구 오간다.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서부터가 진실인지 알 수 없었다.
“용감하시군요.”
“크하핫! 용감은 저보다 공자님이 더하시지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저는 당당히 휴가를 얻어서 나갔지만 공자님께서는 몰래 나가셨지 않습니까. 그런 배포는 아무나 보여 줄 수 없는 거죠.”
역시 알고 있었군.
서량이 입맛을 다셨다.
“교주님께 이르기 없깁니다.”
“어엇? 바로 인정하시는 겁니까?”
“다 알고 있는 사람한테 구태여 거짓말해서 뭐 합니까?”
“캬핫! 어지간하면 거짓말 안 하신다더니 참말이었군요! 그 사내다운 솔직함, 저는 높이 삽니다!”
이거야, 원.
“그런데 말입니다.”
“음?”
“제가 굳이 이르지 않아도 교주님께선 이미 알고 계실걸요?”
“…….”
“물론 직접 뵙고 여쭙지 않았지만 전 그리 확신합니다.”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제가 아는 걸 교주님께서 모르실 리가 없잖아요?”
당연하다는 듯한 말에 서량은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이천상이 호요성만큼 눈치가 빠른지는 모르겠지만, 호요성보다 정보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저는 지금 상당히 위험한 상황에 놓인 것이로군요.”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지요. 교주님께서 어떻게 움직이실지,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제 눈에도 보이지 않거든요.”
그렇겠지.
대단하다는 말조차 폄하의 발언으로 들릴 만큼 이천상은 독보적인 절대자였다.
그런 사람의 행동 양식을 분석하는 것은 저 범상치 않은 총군사에게도 힘든 일일 것이다.
서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캬아! 그건 그렇다 치고라니? 그리 쉽게 넘길 수 있는 사안이 아닌데 말입니다. 정말 보면 볼수록…….”
“저를 찾아오신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요?”
호요성이 눈을 찡긋거렸다.
“단순한 호기심입니다.”
“호기심이라.”
“예, 제가 궁금한 건 죽어도 못 참거든요.”
서량은 왜 내게 호기심이 생겼느냐고 묻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척.
서량이 걸음을 멈추었다.
“얼레? 왜 그러십니까? 아직 천마병창까지는 오 리(五里) 정도가 더 남았는데요?”
“멈출 수밖에 없겠는데요.”
“무슨 말씀이신지?”
물끄러미 호요성을 보던 서량이 씨익 웃었다.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던 호요성의 얼굴이 일순 굳어졌다.
스르릉.
“주변에 아무도 없거든요.”
“…….”
“혼자서 산천 유람 가셨다는 거 사실인가 봅니다. 호위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아요.”
“……무섭게 왜 이러십니까?”
서량의 말투가 바뀌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분위기가 영 이상해서 말이지.”
툭.
호요성의 어깨에 칼날이 올려졌다.
서량의 눈빛이 시리도록 싸늘해졌다.
“목 날아갈 준비는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