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바람이 불어오다 (5)
굳어진 호요성의 얼굴.
하지만 공포도, 걱정의 기색도 드러나지 않았다. 어깨 위에 칼날이 놓여 있음에도 전혀 겁을 먹지 않는 배포가 놀라웠다.
“이런 전개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예상 가능한 전개는 재미가 없는 법이지.”
“재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놀랍기는 합니다.”
“무슨 생각을 하든 내 알 바는 아니로군.”
호요성이 한숨을 쉬었다.
“이유나 들어 보죠. 갑자기 왜 이러시는 겁니까?”
“내가 해야 할 말 아냐?”
“예?”
“방법도 모르고 이유도 모르겠어. 하지만 넌 결코 호기심 때문에, 혹은 호의를 갖고 날 찾아온 게 아니야.”
서량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왜 날 찾아왔지?”
초감각이 알려 주는 모호한 비상.
처음 그를 대면했을 때 머리 한구석에 경종을 울리던 초감각이 지금에 와서는 비수로 찌르는 것처럼 머리를 자극했다.
나중에는 대화에 제대로 집중조차 하지 못했다. 상대에 대한 경각심이 커져서 오로지 호요성의 눈과 반응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기 때문이다.
더는 안 된다. 어떻게 느낀 건지, 왜 그렇게 느낀 건지는 모르지만 상대에게 위험을 느꼈는데도 함께 걸을 순 없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함을 느꼈다, 고로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협박이라도 하겠다, 이겁니까?”
“아니.”
“그럼요?”
“칼을 뽑은 건 단순한 협박이 아니야.”
“…….”
“여차하면 목을 날릴 생각이다.”
호요성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교내에서 총군사의 목을 날리겠다고요? 아무리 삼공자라도 무사치 못할 겁니다.”
“괜찮아. 나도 산적인 척하면 되지.”
“아하? 제가 총군사인지 몰랐다고 잡아뗄 작정이신가요?”
“그래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렇게라도 해야지.”
서량의 얼굴은 진지했다. 그리고 그 진지함을 호요성 역시 단숨에 알아챘다.
조소를 띠고 있던 호요성의 얼굴이 조금씩 무표정으로 변했다.
“칼집에 칼 심으십시오. 이 사태, 자칫하면 반역으로 처리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죽든 나중에 죽든, 이렇게 죽든 저렇게 죽든 어차피 사람은 죽어.”
“셋을 세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치이이잉!
도에 은은한 마기가 실렸다.
마기는 적었지만 확고한 의지는 넘치도록 담겼다. 이번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않으면 서량은 진심으로 호요성의 목을 날릴 것이다.
그것을 알았기에 호요성의 목덜미에도 서서히 식은땀이 맺혔다.
“왜 날 찾아왔어?”
“…….”
“미리 말해 두지만 또 단순한 호기심 운운하면 죽는다.”
굳은 얼굴로 서량을 응시하던 호요성.
이내 그가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질문을 들었으면 답을 내놓아야지. 되묻는 버릇은 좋지 않아. 그리고 난 분명 마지막이라고 얘기했다.”
“말할 테니 알려 주십시오.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게 다른 의도가 있다는 거.”
서량이 인상을 찡그렸다.
“몰라, 그냥 감이야.”
“감이요? 감으로 때려 맞혔다고요?”
“나는 육감이 제법 뛰어난 편이거든.
그리고 세상이 논리로만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아 버리기도 했고.
그래서 이성과 감정이 충돌을 일으킬 땐 대개 후자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지. 그럼 적어도 후회는 안 하거든.”
“……그것참.”
실소가 절로 나올 이유다.
피식피식 웃던 호요성은 문득 누군가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 제 능력을 본 적도 없으시잖습니까? 그런데 총군사를 시키겠다고요? 왜요?
- 이유 따위가 중요한가?
- 중요합니다. 적어도 저에게는요.
- 육감이라고 해 두지.
- 그냥 감으로 괜찮을 것 같아 총군사를 시킨다고요? 그게 뭡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잖아요?
- 앞으로 본교의 일을 할 때 하나만 염두에 두게.
- 이미 시킬 생각이시군요.
- 세상은 논리대로만 돌아가지 않네. 자네처럼 똑똑한 사람들이 대개 하는 실수지.
- …….
- 직관을 키우도록.
- 직관…….
- 논리는 순간의 답을 도출하지만 직관은 미래의 답안지를 제시하지. 진정한 지혜는 바로 거기서 나오는 걸세.
그 말을 듣고 호요성은 ‘그’에게 절을 올렸다. 황자(皇子)와 대면했을 때도 올리지 않았던 절이지만 그에게는 올릴 수밖에 없었다.
명령만을 내린 황자와는 달리 그는 자신에게 가르침을 내려 주었기 때문이다.
호요성이 입맛을 쩍 다셨다.
“호기심은 상상을 부르고, 상상은 수많은 답안지를 떠올리게 하지요.”
“…….”
“그 헤아릴 수 없는 답안지 중 진짜 정답이 뭔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날 시험해 보려고 했나?”
“내가 모르는 정답을 알고 싶을 땐 남에게 시험지를 던져 줘야죠. 상대는 풀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무슨 시험을 해 보려고 했나?”
“딱히 대단한 건 없습니다. 그냥 천마병창에 모셔다드리려고만 했지요.”
“응?”
“제겐 삼공자를 천마병창에 들어가게 해 드릴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들여보내고 관찰하려고 했지요.”
서량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단순한 관찰은 아니었겠지.”
“흥미진진한 모습을 보여 주면 제겐 그런 방법이 없다고 잡아떼려고 했지요.”
말하자면 천마병창에 제 손으로 들여보내 놓고 나중에 가서 무단 침입한 사람으로 처리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어떻게 하면 그게 가능한지는 모른다. 다만 호요성에게 그럴 머리와 힘이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실제로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서량은 무조건 형법당행이다.
그때는 교주의 제자고 뭐고 무조건 형을 살아야만 할 것이다. 아니, 자칫하면 평생 뇌옥에서 썩어야 할 수도 있다.
비역(秘域)을 무단으로 침입한 죄는 중죄 중의 중죄니까.
가만히 호요성을 보던 서량이 칼을 거두었다.
“솔직히 말하는데, 당신 진짜 성격 나쁜 사람입니다.”
호요성이 히죽 웃었다. 상대의 바뀐 말투에서 자신을 향한 경계심이 많이 희석되었음을 느낀 것이다.
“자주 듣는 소립니다. 가끔 또라이니 뭐니 하는 말도 들어요.”
“어떤 간 큰 놈들이 그럽디까?”
“본교 마인들이 제법 호탕해서요. 대놓고는 못 해도 뒤에서 수군대긴 하지요. 삼공자님은 칼까지 뽑으셨잖습니까.”
“다 담아 두고 있었군.”
“이왕이면 기억력이 좋다고 말해 주십시오. 안 잊히는 걸 어쩝니까?”
서량이 콧방귀를 뀌었다.
“어쨌든 제법 흥미진진한 만남이었소. 그럼 이만 갈 길 가십시다.”
“엥? 가시게요?”
“그럼요?”
“천마병창 안 가십니까? 저와의 술자리는요?”
서량은 기가 막혔다.
“호기심에 사람 하날 뇌옥에 보낼 작정까지 한 사람하고 알콩달콩 술이나 마시자는 겁니까? 미리 말씀드렸지만 전 천마병창 안 가도 됩니다.”
“약속했잖아요.”
“뭔 약속을 해요.”
“천마병창에 출입시켜 주는 대가로 저랑 술 한잔하기로 하셨잖습니까.”
“그러니까 필요 없대도.”
호요성의 표정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아무리 그래도 약속은 지키는 분인 줄 알았는데.”
“저도 총군사가 이렇게 간악한 사람인 줄 몰랐습니다.”
“저 오늘을 위해 며칠 밤을 새워서 업무도 다 끝내 놨단 말입니다.”
“제가 그걸 굳이 알아줘야 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예.”
“뭔데요.”
“환희원주한테 호위무사를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
“이미 제 의도를 짐작하셨는데도 보내셨다는 건, 환희원주에게 뭔가를 알아보려는 게 아니라 그녀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함이 아닙니까? 앞으로 입조심하라고.”
서량의 눈이 흔들렸다.
호요성이 미소를 지었다.
“그로 인해 전 환희원주에게 못 믿을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책임지시겠습니까?”
대단하다.
서량은 상대의 눈썰미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마동필을 누구에게 보냈는지 알아챈 것도 놀랍지만, 그 의도까지 단박에 파악해 낸 비상함이 실로 대단했다.
“그럼 절 건드리지 말았어야죠.”
“이렇게 될 줄 알았겠습니까.”
그 비상함과는 별개로 뻔뻔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다.
서량이 한숨을 내쉬었다.
“좋습니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술이나 진탕 마셔 봅시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그 전에 천마병창부터 들를 겁니다.”
“아, 당연합니다. 반 시진이면 충분하겠지요? 애들한테 미리 술상 차려 놓으라고…….”
“뭔 소립니까?”
“예?”
서량이 뭐 이런 순진한 인간이 다 있나 하는 눈빛으로 호요성을 바라보았다.
호요성의 얼굴이 대번에 찝찝함으로 물들었다.
“왜 절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한 시진으로는 부족하신가요?”
“천마병창에 들여보내 준다면서요.”
“그랬지요?”
“분명 ‘한 번’ 들여보내 준다고 했지 ‘한 자루’만 가져오란 말은 안 했잖습니까?”
“……!”
“이것저것 둘러보고 몇 자루 챙기려면 반 시진이 아니라 반나절은 걸릴 겁니다.”
호요성이 입을 쩍 벌렸다.
서량이 귀찮음이 철철 묻어나는 얼굴로 말했다.
“얼른 갑시다. 그리고 애들한테 술상 봐 놓으라고 할 거면 오리고기 푹 삶은 것 서너 마리 내오라 하십시오. 요새 그게 그렇게 맛나더만.”
“아니, 공자…….”
“참고로 전 담백한 걸 좋아합니다. 간 세게 하거나 향 강하게 하면 안 먹어요.”
제 할 말 마치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서량.
그 홀가분한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호요성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거야 원, 얼마 만에 맞아 보는 뒤통수냐?”
* * *
술이나 진탕 마시자고 했지만 정작 서량은 두어 병만 비우곤 일어나 버렸다. 병창에서 가지고 온 병장기를 몸에 익히기 위함이었다.
사람 하나도 들어갈 만한 큼직한 보따리에 이것저것 챙겨서 돌아가는 서량.
취기 어린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보던 호요성의 얼굴이 점점 진지해졌다.
“사람은 만나 보기 전에는 모르는 법이라…… 소 원주 말이 맞았군.”
몇 마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다. 어느 누가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서량에게는 특별한 뭔가가 있었다.
“도통 종잡을 수가 없단 말이야.”
일반 양민 사이에선 열다섯만 넘어도 혼사 얘기가 나오고, 이십 대 중반이면 나름 일가를 이루어 삶의 기반을 갖춘다.
하지만 무림은 다르다. 재능이 출중하다는 전제하에, 이십 대 중반은 이제 갓 두각을 드러낼 신진(新進)에 불과할 나이였다.
대개 마흔이 넘어야 절정기라 보는 것이 무림의 상식이다.
고로 서량은 풋내기다. 그렇게 보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러나 오늘 본 서량은 결코 풋내기가 아니었다.
“일견 가벼워 보이지만 그건 절대 가벼운 게 아니야. 한 번씩 툭툭 내뱉는 말에 세상을 보는 나름의 주관이 엿보인다.”
호요성의 눈이 번뜩였다.
“마치 산전수전 다 겪은 노강호가 청년의 몸을 빌려 다시 태어난 것 같군.”
둘이서 사적으로 만난 것은 거의 칠팔 년 만이다.
하지만 그간 서량이 어찌 살았는지 호요성은 다 알고 있었다. 교주 제자들의 성격과 무공을 파악하는 것은 총군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자신이 알고 있던 것처럼 그렇게 잔혹하고 야망 넘치게 살아왔다면 결코 저런 모습을 보여 줄 수 없다. 애초에 서량의 성격 자체가 저러지 않았다.
‘뭔가가 있어.’
깊게 고심하던 호요성이 이내 한숨을 쉬었다.
“뭐, 판마정에도 들어갔다 나왔으니 딱히 의심의 여지는 없지만.”
적어도 신교에 해가 될 사람은 아니다. 그러니 교주님도 삼공자를 가만히 놔둔 것이겠지.
‘하지만…….’
호요성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하늘 곳곳에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이 찍혀 반짝이고 있었다.
“흥미진진하구먼. 과거를 버리고 탈바꿈한 삼공자가 불러온 바람은 과연 어떤 바람일까?”
겨울의 삭풍일까, 봄 내음 물씬 나는 춘풍일까.
아니면 피비린내 지독한 혈풍(血風)일까.
“이보게.”
“예, 군사님.”
“마신궁에 기별을 넣도록 하게.”
호요성의 눈이 빛났다.
“교주님께 내일 아침 찾아뵙는다고 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