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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87화 (87/774)

87화. 성장하다 (2)

정자에 앉아 나른하게 술잔을 기울이는 이천상의 위용은 여전했다.

어깨에 대충 둘러친 용포, 앞섶 일부가 드러나도록 헐렁하게 입은 상의, 그리고 무심하기 짝이 없는 표정까지도.

결정적으로 이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존재감이 아직도 익숙하지가 않다.

‘역시.’

정자 아래에서 그를 올려다보는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군. 이 인간이 얼마나 무지막지한 괴물인지.’

무공을 지금의 수준까지 끌어올리자 더더욱 피부로 와닿는다.

의식해서 기파를 발산하지 않아도 고수라면 누구나 은연중 날 선 기도를 내뿜기 마련이다.

고수와 마주하게 되면 주눅이 드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서량은 달랐다.

그는 애초에 기도를 숨기는 데에 능한 암살자 출신이었고, 굳이 누군가에게 힘을 뽐내고자 하는 욕구도 없었다.

그가 평생 바라 왔던 꿈이 그의 성향을 대변하고, 나아가 그의 기도에서 묻어 나오는 것이다.

하면 이천상은?

‘이 양반은 그런 것조차 넘어섰어. 아예 다른 차원에서 노니는 강자야.’

마음만 먹는다면 존재감을 공기만큼 줄일 수 있을 것이고, 반대로 하늘이 통째로 무너지는 듯한 압박감을 뿜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이천상의 평온한 존재감은 그의 성격을 대변해 준다.

무심하기 짝이 없는 투명함, 천재지변에도 흔들리지 않을 강인함, 모든 걸 이루었기에 어떤 것에도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나른함과 고독함.

그 모든 것들이 합쳐져 유일무이한 절대자를 완성(完成)하고 있었다.

“왔는가.”

“……예.”

“올라오라.”

서량이 정자의 계단을 올랐다.

자작을 하던 이천상이 문득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서량을 바라보았다.

번쩍!

아무도 모르게 번뜩이는 눈빛.

하지만 그도 잠시, 그의 눈빛이 금세 잠잠해졌다.

이천상의 칠 보(七步) 앞까지 도달한 서량이 고개를 숙였다.

“교주님을 뵙습니다.”

“앉도록.”

묵직하게 깔리는 목소리에 공기가 울리는 듯하다.

서량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

숨 막히는 침묵.

표정 없는 얼굴을 고수했지만 정작 서량의 속은 말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턱에 굵은 힘줄이 돋아났다. 그 와중에도 이천상의 귀에 들리지 않도록 이는 갈지 않았다.

‘왜 불렀지? 왜 불렀어? 왜 불렀을까?’

여기까지 오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그래, 한번 부를 때도 됐지. 어? 근데 굳이 이 아침에 부른 이유가 뭐지? 이 양반은 잠도 안 자나? 아! 나이깨나 먹었으니 새벽잠이 없어질 만도 하지.’

이런 가벼운 생각에서부터.

‘부를 때가 되긴 했는데 하필이면 지금이냐.

어? 잠깐? 아무리 총군사한테 권한이 있다 해도 천마병창이 열렸다는 걸 교주가 모를 리 없잖아? 설마 그걸로 책잡으려고?’

이런 걱정 어린 추측을 지나.

‘시발…… 나간 거 진짜 걸린 거 아냐?!’

……라는 극도로 심각한 걱정까지.

사람에게 시시각각 불안감을 일으킨다는 측면에서 이천상은 참 피곤한 인간이었다.

말수도 없는 사람이라 대화도 길지 않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당최 알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피곤함의 결정체 같은 사람인 것이다, 이 양반은.

그렇게 서량이 속으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때.

스륵.

빈 잔이 서량의 탁자 앞으로 다가왔다.

“한 잔 받거라.”

아, 예.

아침나절부터 술이나 홀짝거리다니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아무리 술이 좋아도 이럴 수 있나 싶었다.

서량이 공손하게 잔을 들었다.

이천상이 그의 잔에 술을 따라 주며 말했다.

“열심히 수련했나 보군.”

“예? 아, 그렇습니다.”

“넷째를 제법 험하게 다뤘다고?”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끄으응.’

확실히 이 양반은 상상을 초월하는 뭔가가 있다. 느닷없이 홍위문에 대한 얘기를 꺼내다니,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오만 걱정을 했지만 그 개자식에 대해서는 떠올리지 못했는데.

“예에, 뭐……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잔하지.

두 사람이 동시에 술을 비웠다.

참 고급지고 맛난 술이다. 이전에도 몇 번 받아 본 술이었다.

……그때는 좋기만 했던 향이 오늘은 죽음의 향기처럼 느껴지는구먼.

“한 잔 더 받겠느냐?”

오잉?

서량이 눈을 끔뻑였다. 이천상이 지금까지 보여 주던 반응이 아니라서 당황스러웠다.

“조, 좋죠.”

쪼르르.

다시 한번 채워지는 잔.

이천상이 재차 입을 열었다.

“넷째의 사왕마공은 적사가의 무공을 토대로 새로이 변형시킨 마공이다.”

“…….”

“나름의 고집이 있는 놈이었지. 능력도 좋았어. 그 어린 나이에 새로운 무공을 만들겠다는 생각, 아무나 못 하지.”

혓바늘이 돋을 것 같군.

“처음엔 수준 이하였다. 그러나 점점 발전하더군. 딱 삼 년이 흐르자 제법 걸출한 마공이 나왔어.”

이 양반, 오늘 제법 말이 많은데?

하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그렇게 귀하게 여기던 넷째를 작살내 놨으니 너도 한번 박살이 나 봐야 한다는 뜻일까?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예?”

“힘을 갖추지 못한 계략은 재지(才智)라 불릴 순 있어도 완성되었다는 평가를 받긴 힘들다. 재능은 출중했지만 놈은 그 재능을 썩히고 있었어.”

자신의 잔까지 채운 이천상이 그대로 잔을 비웠다.

“자신의 재능을 모르는 자는 우매하지. 나는 우매한 자를 경멸한다.”

“…….”

“하지만 본인의 재능이 무엇인지 알고 있음에도 안주하는 놈들은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아.”

“…….”

“그래서 난 넷째에게 실망했다. 녀석은 그리 살아선 안 되었어.”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이천상은 빈말로라도 좋은 스승이라 불릴 자격이 없었다. 본인의 능력은 출중하지만 제자들을 가르치는 방식이 최악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신(神)이다. 누군가의 스승이 될 필요도 없고, 스승이 될 위치도 아니다.

‘그래서 더 대단한 거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며,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는다.

그저 홀로 고고할 뿐이다.

“그런 넷째가 너의 손에 당했다.”

“…….”

“예상 밖의 일이었지.”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넷째의 야망은 알고 있었다. 녀석이 대권을 차지할 수 없으리란 것도 알았다. 하지만 설마하니 이리 빨리 후계 싸움에서 탈락할 줄은 몰랐다.”

이천상의 눈이 번뜩였다.

그 눈을 본 서량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경멸하는 자는 우매한 자다. 반면 내가 경애하는 자는 어떤 자인 줄 아느냐?”

“……모르겠는데요.”

“내 예상을 벗어난 자다.”

가만히 이천상을 보던 서량이 잔을 비웠다.

그러자 이천상이 그의 잔을 다시 채워 주었다. 한 잔 더 받겠느냐는 말도 없었다.

“너는 내 예상을 벗어났다. 그것도 한참이나.”

“……!”

“고로, 난 널 경애한다.”

등줄기를 타고 오르던 소름이 사지로 쫙 번져 나갔다.

누군가를 경애한다는 감정은 쉽게 품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한데 이런 대단한 사람이 자신을 경애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천상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절대자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꾸욱.

꽉 쥔 주먹에 땀이 차는 게 느껴졌다. 억눌러 보려 했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격동을 참기 힘들었다.

‘천하제일마(天下第一魔)가 날 경애한다고?’

의천맹의 비밀 병기로 키워져 맹주의 개로 살아온 인생이다. 비루하다는 말로도 모자란 인생을 살아온 자신이, 천마신교 교주에게 이런 평가를 받았다.

‘……젠장.’

격동이 자아내는 뿌듯함.

그 뿌듯함 뒤로 찾아온 감정은 스스로에 대한 혐오였다.

‘버려라. 고작 말 몇 마디에 이런 감정을 품어선 안 돼. 그러다가는…….’

평생 꿈꾸던 자유에서 멀어질까 두려웠다. 진실로 자유를 꿈꾸었다면 교주의 찬사에 뿌듯함을 느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난 결국 그럴듯하지만 허울뿐인 꿈 하나를 정해 놓고 자신을 속인 채 맹목적인 달음박질을 했을 뿐인가?

스르륵.

깊게 가라앉은 눈. 일렁이던 기도가 금세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서량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웃기지도 않는 자학이냐? 이 정도 거인(巨人)이 날 인정해 주고 있다잖아? 당연히 뿌듯해야 정상이야.’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감정이다.

감정이란 것은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스러지는 것. 어떠한 감정을 느꼈다고 자학할 필요도, 초조해할 필요도 없다.

왜냐? 결국 그러한 감정까지도 전부 나란 사람의 일부이므로.

“후우.”

고개를 숙였던 그가 다시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이천상의 눈이 빛났다. 서량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챈 것이다.

“보아라. 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예상을 벗어났다.”

“…….”

“매 순간 변화하고 성장하지. 그래서 네가 대단한 것이다.”

가만히 이천상을 보던 서량이 피식 웃었다.

천하의 이천상 앞에서 보여 줄 만한 웃음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렇게 웃어 버렸다.

왜일까? 이렇게 웃어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교주님이 그리 말씀하시니 진짜 안 어울리십니다.”

“…….”

“그냥 별종일 뿐이에요, 저는.”

묵묵히 그를 바라보던 이천상이 다시 술병을 들었다.

서량이 잔을 비우자, 그가 다시 술을 따라 주었다.

“어젯밤, 총군사가 찾아왔다.”

“…….”

“천마병창을 열었다고 하더군.”

“…….”

“챙겨 간 병장기들은 손에 맞더냐?”

“예. 착착 감기던데요?”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칠야는 흉포하고 유성은 날카롭지. 안목이 제법이다.”

“마음에 차지 않았으면 들고 가지도 않았을 겁니다.”

“모든 병장기가 그러하지. 선대의 유물이라고 손에 맞지도 않는 것을 챙겨 갔다면 오히려 실망했을 것이다.”

의외의 구석에서 공통점을 찾는군.

재차 잔을 비운 이천상이 고개를 돌려 연못을 바라보았다.

그다지 화려하지 않은 연못이었지만 그가 바라보니 수수하던 연못마저 눈부시게 아름다워 보였다.

“네가 마음에 들었다던 그 칼들, 아직 마음 편히 휘둘러 본 적이 없겠지.”

“그……렇지요?”

스르륵.

이천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량 역시 엉거주춤 따라 일어났다.

“내려와라.”

잠시 후, 두 사람이 공터에 섰다.

이천상이 어딘가를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피이이이잉!

일순 금현(琴絃)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네 자루의 칼이 서량이 선 땅 앞에 꽂혔다.

‘……!!’

그야말로 신기(神技)에 달한 허공섭물. 이 엄청난 한 수에 서량은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내력의 파동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던져 준 것도 아닌데?’

설마 오롯이 의지만으로 입구에 놓았던 병장기들을 가져온 거야? 정말로?

‘이 인간은 도대체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천상의 무(武).

고작 한 수였지만 정신이 아득해지는 격차를 느꼈다. 무공의 고하를 논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 만큼 압도적인 경지였다.

이천상이 말했다.

“예상을 벗어난 제자에게 내리는 상이다.”

“……예?”

“마음에 드는 걸 뽑아 봐라.”

“……!”

이천상이 손을 내밀었다.

무언가를 건네주려는 듯, 혹은 내놓으라는 듯 모호한 손짓.

“한 수 가르침을 내려 주마.”

파악!

네 자루의 칼 중 하나를 쥔 서량이 번개처럼 칼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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