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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89화 (89/774)

89화. 성장하다 (4)

“허억! 허억!”

반나절이 지나서야 이천상과의 대무(對武)는 끝이 났다.

물론 대무라고 할 것까지도 없었다. 이천상은 그저 서량의 무공을 받아 주기만 했을 뿐, 제대로 된 공격 한 번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천상의 풍기는 존재감을 이겨 내며 매 순간 최선의 일격을 반나절 동안 가했다. 아무리 서량이라도 지칠 수밖에 없었다.

땅에 대자로 뻗어 버린 서량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교주 앞이라고 예의를 차릴 생각도 하지 못한다. 폐장의 근육마저 마비가 올 정도로 지쳐 버렸다.

‘천라지망을 버틸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하자면 고작 반나절 만에, 이레 동안 얻은 피로 이상의 것을 축적했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거친 숨만 몰아쉬는 서량을 내려다보는 이천상은 멀쩡하기만 했다.

온갖 칼바람과 먼지 때문에 의복이 다소 더럽혀졌지만, 전신이 너덜거리는 서량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천상이 슬쩍 자신의 소맷자락을 내려다보았다.

“기가 막힌 놈이군.”

전신에서 뿜어지는 내력으로 인해 의복에도 먼지 한 톨 묻지 않아야 정상이다.

한데 서량과 반나절 동안의 대무로 인해 여기저기 먼지가 묻은 건 물론, 소맷자락 끄트머리가 살짝 베이기까지 했다.

기어이 성공시킨 일도(一刀)의 흔적이었다.

‘얼마 만인가.’

근접을 불허하는 마신의 무공.

일 년 전, 폐관에 들기 전에도 그는 천마의 호칭을 얻어 낸 절대강자였다. 그때도 그의 의복 자락 한 번 건드린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한데 오늘 제자의 칼에 소매가 베였다. 그것도 이제 이십 대 중반밖에 되지 않은 청년의 무공이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대단했다.

‘이렇게까지 컸단 말이지.’

물론 가르침을 염두에 두었기에 나온 결과였다.

이천상이 조금만 진지한 마음을 먹었어도 소매가 베이기는커녕 다섯 합 이내에 서량의 목숨이 날아갔을 것이다.

‘아니, 그건 또 아니로군.’

이천상의 눈이 빛났다.

‘영혼에 새겨진 것은 죽음 그 자체.

하지만 아직까진 공격 본능보다 생존 본능이 우선한다. 내가 진지하게 마음을 먹으면 순식간에 십 리 밖으로 도망치겠지.’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남을 놈이다. 그리고 자신이 생겼을 때야 비로소 칼을 빼 들 놈이었다.

말하자면 야생의 맹수나 다름이 없다. 거칠고 흉악해 보이는 맹수들도 자신이 다칠 것 같으면 꼬리를 말고 물러나니까.

‘……재미있어.’

무심하게만 보이는 이천상의 표정.

실제로 그의 마음은 투명한 바위처럼 서늘하고 단단하기만 했다.

하지만 오늘 제자에게 가르침을 내리며 근 몇 년 동안 가장 큰 흥을 느꼈다.

그것이 못내 재미있었고, 또한 경각심을 느꼈다.

누군가에게 재미를 느낀다는 것은 아직까지 그가 마(魔)에 사로잡혀 있다는 뜻이니까.

“끄으응.”

서량이 천천히 상체를 세웠다.

몸이 아프진 않았다. 다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내공도 전부 소모해서 육체의 힘만으로 몸을 일으켜야 했다.

이천상이 물었다.

“얻은 것이 있느냐?”

“조, 조금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얻었는지는 굳이 물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는 그저 받아 주었을 뿐, 네가 얻어 간 것 역시 너의 노력이지 나의 가르침은 아니었다.”

“쿨럭! 저는 이제 움직일 힘도 없는데요.”

“더 이상의 대무는 없다. 정자로 올라오너라.”

이천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자로 걸어갔다. 서량을 부축해 줄 생각 따위는 전혀 없다는 태도였다.

서량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냉정한 인간, 존중을 모르는 인간.’

아? 인간이 아닐 수도 있겠군.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거야?’

지금 그의 실력은 전성기의 절반에 그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반나절 동안 이천상에게 쏟아부은 공격들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실력을 떠나, 이리 집중해서 누군가를 공격해 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의복에 먼지가 묻은 게 전부란다.

‘괴물이야, 괴물. 시파, 의천맹주 이 개 같은 노친네. 저런 괴물을 암살하라고 날 보냈다고?’

암살은커녕 잡아먹히지나 말아라. 저 괴물이 강호에 나타나는 순간 넌 골로 가는 거야.

‘어쨌든.’

기어이 두 발을 딛고 일어난 서량의 얼굴에 환희가 깃들었다.

‘그래도 큰 수확을 얻었어.’

이천상만큼 대단한 존재감을 가진 초고수를 상대로 칼을 휘두른다는 것 자체가 배움이다.

반나절 동안 그리 칼을 휘둘렀으니 수확이 없을 리가 없다. 생각지도 못했던 도법의 빈틈들을 하나하나 인지하며 고쳐 나갈 수 있었다.

서량 정도 되는 고수에게는 실전이 곧 배움이다.

실전은 아니었지만 실전 이상으로 집중한 이 공방에서 그의 도법은 한층 매끄럽고 공격적으로 탈바꿈했다.

‘만날 숨만 턱턱 막히게 하더니 이런 복도 주는군.’

웃으며 한 걸음 옮기던 서량이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끄으응.”

빌어먹을, 이제야 고통이 찾아오다니.

엉거주춤 괴상한 걸음으로 힘겹게 정자를 올라가니, 이천상은 또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서량이 투덜거렸다.

“혼자 드시면 맛나답니까.”

저도 모르게 나온 말에 스스로 깜짝 놀랐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힐끔거리는 서량을 향한 이천상의 답변은 무척이나 놀라웠다.

“맛없다.”

“……아, 예.”

“한잔하겠느냐?”

이 상태에서 마시면 분명 취한다.

한 번 시험해 볼까 싶었지만 관뒀다. 이 찝찝한 자리를 한시라도 빨리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괜찮습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서량은 속으로 자신의 주둥이를 철썩철썩 때렸다.

이 병신아! 어디 교주가 한잔하겠냐고 하는데 넙죽 받지 않고 괜찮대?! 죽으려고 환장한 거야?

이번에도 서량은 이천상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이천상은 깔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앉도록.”

“옙.”

서량이 후다닥 맞은편에 앉았다. 가슴이 두근거려서 고통을 느낄 새도 없었다.

잔을 채워 다시 한번 비워 낸 이천상이 옆에서 종이 하나를 들어 서량에게 건넸다.

“이게…… 뭡니까?”

“네 마공의 빈틈이다.”

“……!”

“네 마공은 십대마공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다. 하나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무공이라 보완할 부분이 제법 보이더군.”

“그…….”

“구결은 모르겠지만 도움은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네게 가르쳐 주는 진정한 ‘한 수’다.”

“…….”

“더 할 말 없다면 가 보도록.”

서량이 술상 좌측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정돈되지 않은 지필묵이 너부러져 있었다. 정자로 올라오기 전에 곧바로 적어 낸 모양이었다.

가만히 종이를 바라보던 서량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인사였다.

이천상이 서량을 힐끔 쳐다보다 다시 술을 따르며 말했다.

“스승을 놀라게 한 제자에게 주는 당연한 상이다. 괘념치 말라.”

저 사람이 저런 말도 할 줄 아는구나.

서량이 웃으며 말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기대하지.”

“그럼.”

그렇게 서량은 비틀거리며 정자를 떠났다.

홀로 따르고 마시고, 또 따르고 마시길 반복하길 한참.

이천상이 정자에서 내려와 연못을 내려다보았다.

“왜 시랑이 녀석에게 흥미를 느꼈는지 알겠군.”

나라에 전쟁을 일으킨다는 시랑의 전설.

그 전설이 진실이라면, 전쟁의 주역이 될 자는 죽음과 가장 가까운 자여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저 녀석은 누구보다도 죽음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천상이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 어두웠다. 정오가 조금 지났을 뿐인데 먹구름이 가득한 걸 보니 한바탕 비라도 쏟아질 모양이었다.

그의 예상은 정확했다.

일각 후, 소나기가 쏟아졌다.

쏴아아아!!

쏟아지는 빗물이 이천상의 몸을 적셨다. 내력의 방출로 물 한 방울 맞지 않을 수 있었지만 이천상은 그러지 않았다.

젖어 드는 몸, 씻겨 나가는 먼지.

번쩍!

휘몰아치는 번개 사이로 이천상의 마안이 흉흉한 빛을 발했다.

“슬슬 쥐고 휘두를 때가 된 건가.”

* * *

“억? 공자님!”

“야야, 잡지 마! 부축하지 마! 으윽!”

불퉁해져서 서량을 보던 위홍련도 깜짝 놀라 그의 곁에 다가왔다.

끙끙대던 서량이 위홍련을 힐끔거렸다.

“뭐냐? 넌 또 왜 왔어?”

“……걱정하는 사람한테 잘도 그런 말을 하십니다.”

“궁금하니까.”

“술 마시러 왔어요. 됐어요?”

“말하는 싸가지하고는. 그렇게 마시고 싶으면 혼자 마셔.”

“공자님이랑 마셔야 재미있단 말이에요.”

“지랄.”

투덜거리던 서량이 연무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앵화야!”

“네, 공자님!”

“나 밥 좀 주라! 양 많이!”

“네, 네! 금방 차려 오겠습니다!”

앵화가 후다닥 뛰어갔다. 그 어느 때보다 급박한 달음박질이었다.

어지간한 고수의 신법 뺨친다고 생각하며 위홍련이 물었다.

“아니, 몸도 건실한 양반이 어쩌다 썩은 나물이 다 돼서 돌아오셨대요?”

마동필이 인상을 찌푸렸다.

“말 가려 하시오.”

“사실이잖아.”

서량이 손을 휘휘 저었다.

“정신 사나우니까 싸울 거면 나가서 싸워, 이것들아. 으, 등이야.”

“등이요? 등 아프세요? 밟아 드릴까요?”

“아픈데 밟긴 왜 밟아, 이 미친 것아. 이참에 아주 보내 버릴라고?”

“안마죠, 안마.”

“어휴, 어쩌다 이런 마귀랑 연을 맺어 가지고.”

“마귀라뇨! 어? 아닌가? 마귀라면 칭찬인가?”

“됐으니까 칼 좀 빼 봐. 무겁다.”

두 사람이 서량의 몸에서 용린도, 유성쌍도, 칠야도를 차례로 벗겨 한옆에 두었다.

서량이 털썩 누웠다. 맨땅이라도 누우니 살 것 같았다.

마동필과 위홍련이 눈알을 굴렸다. 이렇게까지 지친 서량을 처음 보는지라 쉽게 입이 열리지 않았다.

물론 그 침묵은 잠시뿐이었다.

우리의 광마대주 위홍련은 천성적으로 남의 눈치 같은 걸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미친 성격과 반비례할 정도로 눈치가 없다는 소리까지 나오겠는가.

“공자님, 많이 힘드시죠?”

“보면 모르냐. 이대로 눈 감으면 사흘 뚝딱이야.”

“그러시구나.”

“…….”

“…….”

“뭐야? 할 말이라도 있어?”

“딱히 할 말이 있는 건 아니고요.”

“할 말 없으면 돌아…….”

“제 건요?”

“뭐? 갑자기 생뚱맞게 뭔 소리야?”

잠시 망설이던 위홍련이 손가락으로 마동필의 검을 가리켰다.

“쟤한테는 보검을 주셨잖아요.”

“그랬지. 그게 뭐?”

“…….”

“…….”

“…….”

“너, 이 새끼 설마? 너한테는 왜 저런 검 안 주냐고 묻는 거야, 지금?”

“맞는데요.”

“세상에 이런 몰상식한 년을 봤나? 야! 너랑 동필이랑 같아? 내가 왜 너한테 신병이기를 줘야 하는 건데? 네가 나한테 해 준 게 뭐라고!”

“아, 또 말 섭섭하게 하시네. 그래도 사람 인연이 그런 게 아닌데 왜 차별하고 그러세요.”

“차, 차별…….”

서량의 눈이 감겼다. 목 뒤를 딱 잡는 것이 혈압 때문에 거품이라도 물 기세였다.

“너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돌아가. 빨리 가!”

“안 가요.”

“왜 안 가?!”

“밥 드신다면서요. 반주는 무리인 거 같으니까 밥이라도 같이 먹어요.”

“너희 대원들 신경 안 쓰이냐? 대원들 좀 챙겨!”

“오히려 저 없다고 좋아할 것 같은데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서량은 순간 주춤거렸다.

뭐라고 받아치고 싶었지만 이내 관뒀다.

“그래, 밥만 먹고 가라. 알겠냐?”

“정 없으시긴.”

“입 닥쳐, 이 민폐 덩어리야.”

잠시 후, 네 사람과 여우 한 마리가 푸짐한 만찬을 즐겼다.

한참 먹으니 그제야 살겠다는 듯 서량이 몸을 일으켰다.

“나 오늘 방에서 안 나올라니까 그런 줄 알아.”

마동필이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일? 있지.”

서량의 눈이 깊어졌다.

“머리 굴릴 일이 생겼거든.”

그의 손에는 어느새 이천상이 적어 준 종이가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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